此卽無漏界 不思議善常
차즉무루계 부사의선상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안락해탈신 대모니명법
이것이 곧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경계이며 부사의(不思議)한 선(善)이며, 상(常)이고,
안락(安樂)한 해탈신(解脫身)이고, 대모니(大牟尼)이니, 이를 법신(法身)이라 한다.
차즉무루계(此卽無漏界)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
차즉무루계(此卽無漏界)의 차(此)는
29송의 사이조중고(捨二粗重故) 변증득전의(便證得轉依)를 받는 말이다.
사이조중고(捨二粗重故), 즉 번뇌장와 소지장을 여의였으므로
전의(轉依)를 증득해 미세한 번뇌마저 완전히 소멸하였으므로
이것을 곧 더 이상 번뇌가 없는 경계(境界)라고 하여 무루계(無漏界)라고 했다.
무루계(無漏界)의 상(相)은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하고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하며 대모니(大牟尼)인데
이름하여 법신(名法)이라 한다고 했다.
<대모니명법(大牟尼名法)이란 모니(牟尼)는 적묵(寂默)의 뜻으로 언설동작(言說動作)과 심연분별(心緣分別)을 여읜 것을 말하고 법(法)이란 법신(法身) 또는 법성신(法性身)을 말한 것으로 이를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 또는 대모니신(大牟尼身)이라 한다>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은
선(善)의 부사의성과 상(常)의 부사의성을 의미한다.
중생을 제도하는 선(善)은 세속(世俗)에서 보는 선(善)과 다르게,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선(善),
즉 선(善)이되 선(善)이라 해도 맞지 않고,
선이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으며,
선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으니 부사의한 선(善)이고,
그 선(善)을 행함에 온갖 필요한 방편이 따라오니 불가사의하다.
이것은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선(善)이기에 부사의(不思議)한 선(善)이라 했다.
그리고 상(常)이란
항상(恒常)한다는 뜻이니 영원불멸한 것을 의미하지만
상(常)이 상(常)아닌 무상(無常)과 구별(區別)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무상(無常) 속에 상(常)이 있는 법이고,
상(常) 속에서 무상(無常)이 일어나는 법이니,
상(常)이 무상(無常)이요, 무상(無常)이 곧 상(常)이 될 수도 있으니,
상(常)이 무상(無常)과 다르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지 않다고 할 수도 없는 법이니,
그 상(常)의 모습이 부사의(不思議)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상(常)과 무상(無常)의 관계를 반야심경에서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했다.
이러한 사실이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현실로 나타날 때 ‘참 불가사의하다.’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고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경계이다.
스님은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 대모니(大牟尼)까지를 부사의(不思議)가 받는다고 해석한다.
즉 부사의한 안락 해탈신, 부사의한 대모니로 본다.
안락해탈신은
살기위해 구하는 마음,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
불만 등 일체 번뇌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탈하게 되면 부사의한 안락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앞 글에서 무루계(無漏界)에 들었으니 이미 해탈하였다.
해탈하였으니 일체 세속적인 일을 떠났는데
어떻게 해서 최소한의 의식주(衣食住)를 조달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는데,
해탈한 몸은 의식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이 법계에 이미 갖추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러한 근심걱정으로부터 해탈하였고,
마음이나 몸에 병(病)도 없고, 죽고 삶에 전혀 두려움이 없으니
일체의 걸림과 나고 죽는 구속에서 해탈한 몸이다.
그러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중생을 이렇게 편안한 길로 인도하는 좋은 일을 하는 불사(佛事)에서
즐거움도 느끼게 되니 안락(安樂)이다.
이러한 모든 불사가 자연스럽게 그리고 즐겁게 이루어지는 것 역시 깨달은 사람이나 알 수 있는 부사의(不思議)한 일이라고 해석한다.
대모니(大牟尼)는 큰 성자(聖者)라는 뜻으로 대각(大覺)을 이루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명호이다.
유식 30송에 담긴 뜻이 오로지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니 대모니(大牟尼)라고 부르는 것이나,
부처님 탄생 후 2천 6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적할 대모니(大牟尼 성자) 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이것 또한 부사의(不思議)한 대모니(大牟尼)이다.
명법(名法)은 법신(法身)이라 한다는 뜻인데
법신이라고 할 때는 때로는 그 근본인 법성(法性)의 의미로 쓰이는데,
그 대표적인 예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고 적적(寂寂)한 고요함과 대광명(大光明) 및 인지(印指) 등은 법신(法身)의 상(相)을 표현 한 표상(表相)이다.
이 법신(法身)의 성(性)과 상(相)은 오직 깨달은 성인(聖人)의 체험으로서만 알 수 있는 법이니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도 하고 구경각(究竟覺)이라고도 한다.
즉, 이와 같이 깨달은 사람은 불가사의한 성(性)과 상(相)을 가진 성자(聖者)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