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탄신 136주년 기념행상(동영상)

2011.03.27 09:58:46

26일(토) 오후2시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는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탄신 136주년 기념행사 및 자유토론』을 가졌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었다. 모든 국민에게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국가 건설이 이승만의 필생의 목표였다. 그는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봉건 전제국가의 병폐를 비판하면서 미국, 프랑스 등을 새로운 나라 건설의 모델로 삼았다.



촬영 장재균



















서구의 문명부강의 근원이 인권, 자유, 평등을 중시한 기독교정신에 있다고 보았음, 그는 <독립정신>에 나타난 행동강령대로 구한만 개혁운동을 했고 독립운동을 했으며,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배재학당 종업식에서 ‘한국의독립’이라는 영어연설을 했고 독립협회 활동으로 나섰다가 투옥되어 6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했다.

이승만의 선견지명과 끈질긴 투쟁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건국되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소련은 처음부터 한반도에 소련 위성국가를 세우려는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소련에서 훈련된 공산주의자들을 내세우고 체계적으로 지원했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기본정책으로 처음에는 한민당과 손을 잡았고 46년부터는 여운형과 김규식과 손을 잡았다. 신탁통치가 불가능하다고 깨달으면서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고 전략적 가치가 없는 한국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철수하려 했다.

좌우합착 하에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면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공산세력은 1국1당 주의로 단합되어 있고 비밀조직, 염격한 규율, 선진선동, 무력투쟁, 국제적 지원, 강력한 통제와 국유화로 막강한 힘을 보유, 다수의 세력으로 분열, 공산세력의 도발에 대비할 수단도 능력도 없었다.

남북협상에 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했다면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북한의 공산 단독정권 수립은 1946년 2월부터 정부조직, 화폐발행, 정규군 편성 등 시작되었고 1947년 초에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스탈림은 1946년 2월9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타협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김일성이 김구와 김규식을 평양으로 초청한 것은 남한의 선거를 무산시키는 등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는 동시에 북한정권에 들러리로 세우려는 소련의 계략에 의한 것이다.

김구가 평양에 있을 동안 스탈린은 북한 헌법을 승인했다. 이상주의자인 김구보다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이승만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지난 60년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대통령제 헌법은 이승만의 작품이다. 헌법초안은 내각제였지만 건국초기의 혼란을 극본하기 위헤서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이승만의 주장으로 대통령제가 되었다. 당시 수많은 정당이 난립했고 국민은 민주주의 훈련이 안 되어 있었다. 내각제 정부였다면 제주4.3사건, 여순사건 은 물론 전쟁을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재균 기자 wo5rbs@han mail.net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大佛總 ), 전재 및 재배포 허용>

PC버전으로 보기

서울시 서초구 강남대로 25길 37 (양재동) 양촌빌딩 2층 전화 : 02) 2265-0570 / 팩스 : 02) 2265-0571 / E-mail : sblee2k@hanmail.net Copyright NaBuCo.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