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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 녹취록-1 펌

  • No : 69846
  • 작성자 : 뉴스관리자 펌
  • 작성일 : 2013-06-03 19:47:19
  • 조회수 : 3284
  • 추천수 : 1

윤한봉 구술녹취문(1차) 윤한봉

윤한봉 구술녹취문(1차)

■ 개요
구술자: 윤한봉
면담자: 박현정
면담주제: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면담일자: 2006년 1월23일 오후 2시-5시(3시간)
면담장소: 두암동 자택
면담차수: 1차

■ 상세목록
1.
1-1 군대시절
1-2 전남대 축산학과 입학
1-3 10월 유신과 운동으로 투신
1-4 농대 학생회 선거
1-5 시험부정행위방지 캠페인
2.
2-1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
2-2 유신저항행위
2-3 민청학련 사건
2-4 자금조달 방법-장학금과 화투
2-5 재판과 까마귀
2-6 인혁당과 민청학련
2-7 징역살이
3.
3-1 월남전 종결과 탄압국면
3-2 월부책장사
3-3 포장마차
3-4 탄압국면 2
3-5 공권력의 도덕성

1-1. 군대시절

구술자: 지금 대학 운동참여과정부터 이야기를 하라는 거여? 후일담 전사식으로 해서?
면담자: 네 근데 선생님 원래 구술사기 때문에 선생님이 살아오신 거 출생부터 쭉 들어야되 는데요. 이제 9시간동안 선생님 이야기를 듣기에는 너무 많은 인생을 살아오셨고, 그리고 어렸을 때 이야기는 윤광장 선생님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운동을 시작하신 것부터 해주시면 좋은데, 대학교 들어간 것부터 해 주시면 되는데 그전에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구술자: 아니야 뭐.
면담자: 선생님 축산학과신가요?
구술자: 응 축산학과.
면담자: 선생님 몇 학번이세요?
구술자: 71년에 들어갔지.
면담자: 71년 입학이세요?
구술자: 맞어.71년.
면담자: 이때 선생님 재수하거나 이런건.
구술자: 아니 사연이 있지. 내가 어디보자 66년이나 일고를 졸업한게. 67년이나? 내가 헷갈 리는데.
면담자: 선생님 67년이 맞으실 것 같은데요.
구술자: 왜 그러냐면은 그래가지고 학교를 다닐 때 그 나이 또래에는 고민들이 있잖아. 그 래가지고 개인적인 그런걸로 해서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했지. 순전히 땡땡이 치고 이제.
면담자: 학교 생활이라고 하면 일고?
구술자: 혼자 심난한 거지. 그래서 대학진학을 안하겠다고 선언을 했어. 부모님들에게. 그리고 절에서 재수한다 핑계대고 절에 들어가서 한 일년 간 쉬었지. 혼자서 인자. 산에나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물가에 앉아서 낮잠이나, 아니 잠이나 자게하고. 어떻게 보면 한가로운 생활을 보냈지. 그러고는 도저히 나 스스로를 가늠 정리를 못해가지고 , 군에 지원입대를 했어요. 군에 지원입대를 했는데 군 생활을 고통스럽게 좀 했지. 예를들면 지원 입대를 해서 들어가는데 그때 돈 팔십 원 갖고 들어가 가지고 처음부터 웃음거리가 되고, 처음에 들어가니까 군에서 내무반 책임을 맡은 기관병이 돈이나 현찰을 가지고 있으면 도난사고 나고 복잡하다고 맡기라고 그래요. 그래가지고 ‘십만 원 이상 가져온 사람 손들어’ 그리고는 갖고 오라고 그래. 기록해주고 맡기고. 내가 지원 입대해 놔서 제일 나중에 들어가 갖고 문 바로 앞에가 앉았는데, ‘오만원!’ 다 들었지. ‘사만원!’, 나보고 하는거야.(웃음) ‘삼만원!, 이만원!’ 하다가 ‘야 개새끼야 넌 얼마 갖고 들어왔어?’ 팔십 원 갖고 왔다니까 주저앉아 블더라고. 와~ 골치아픈 새끼 하나 들어 왔다고 그래가지고 이제 내무반 청소하는 대표가 빗자루라니, 쓰레받기 사니 하면서 얼마씩 걷어가면서 내 돈 팔십원 날아가 버렸지. 그런 식으로 군대 생활했는데 음, 병참학교로 떨어져가지고 병참학교에 교육을 받고, 최전방으로 갔어요. 보병 12사단이라고. 펀치볼에서 동해안까지지. 지금도 최전방 거가 있는데. 육이오 때 사단 길을 뺏겨븐 사단들은 지금까지도 전방에서 후방으로 못 나와요. 그 죄 값 때문에. 어떻게 해가지고 다시 전쟁이 나거나 어떻게 해가지고 명예회복을 하기 전에는 전방에서 못나와. 사단 기를 뺏겨븐, 다시 말해서 전쟁 중에 해채 돼버린 부대들이지. 사령부가 무너져가지고. 어쨌든 12사단 52연대라고 해가지고 지금 인제군 서하면 청도리 그쪽에가 있는데, 사단연대 참모본부가, 연대 본부가 이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들어가 있제. 저녁에 보초서면 대남방송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가까운 거리데로 떨어졌지. 그 부대를 이제 보충대에서 각 부대에서 사람별로 나눠서 보낼 때 우리보고 노래를 가르치더라고. 인제가면 언제오리 원통해서 못살겠네, 그게 인제 인제군 원통리에가 12사단 본부가 있다고. 그 부대로 간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놈들이라고 해갖고 유명한 노랜데, 인제가면 언제오리 못통해서 못 살겠네 그 부대로 떨어져 거기서 또 한참 들어가 52연대 참모 군수과로 갔지 내가 병참학교 나와 놔서. 그리고 거기서 군 생활 했는데, 내가 성격이 타협을 잘 못하니까 고집대로 살고, 술 막걸리 먹으란 걸 안 먹는다, 못 먹는다 맞을래, 마실래. 맞겠다. 그래가지고 인제 빠따를 한 여덟 대 더 때리고는 술 안먹는다고 빠따 맞은 새끼 첨 봤다고 때리다가 그만두더라고. 그런것부터 시작해서 사사껀껀 나는 고통스러웠지. 군수과라 취급하는 물품이 주식부식부터 시작해서 피복장복까지 다 하니까, 이제 요구를 하지. 여기저기서. 유혹을 하고. 내가 인사과 애들하고 싸워가지고 계급을 진급을 그때 당시에는 무학자라고해가지고 총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주로 DMZ 흔히 말하는 경계초소에 들어가서 근무하는데, 진급순위가 대학졸업자들이 먼저되고, 순서가 무학자가 제일 나중에 되요. 전방 최전방에서 고생하는, 잠복근무 스고. 그 사람들하고 진급이 같이 됐어요,
면담자: 무학자들하고요?
구술자: 응, 왜그냐면 인사과 애들이 이제 작업복이라든지 이제 속옷, 이런 것들을 주면은 진급을 빨리해줘. 인제 자꾸 날더라 주라 하는 거야. 나쁜 놈 새끼들이야. 나는 니들한테 구걸해서 내가 직업군인이냐 진급을 하게. 나는 일등병이어도 제대 제때할 테니까. 그러다가 싸우고, 맨날 그러다가 미움 타 갖고, 내 졸병들은 병장 달고 있을 때 내가 일등병 달고 있었는데, 하여튼 그런 생활을 많이 했어요. 그래가지고 고생 좀 했고, 그 다음에. 정기휴가를 한 번도 못 왔는데, 이제 뭐랄까 뭔일을 맡기면 충실히 하다보니까 내 업무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업무를 자꾸 맡기는 거야. 다른 쪽에서 못 하면은. 그러다보니까 요 일 끝나면 저 일주고, 저 일 끝나면, 요일 주고 하다 보니까 휴가철을 놓치고 그랬는데, 그래갖고 특별휴가형식으로 한번 나왔는데 휴가 나오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습격한다고 내려온 사건이 터졌어. 그때 내가 군대생활 8개월짼데, 그래가지고 그때부터 복무기간이 6개월이 늘어나 버린거죠. 내가 35개월 2일을 하고 나왔는데, 그때. 그 다음에 인자 훈련이 강화됐어요. 배낭매고 뛰어 다니는 것부터 행정병들도 다 똑같이. 그렇게 해가지고 고생도 많이 한데다가 내 휴가 나왔다가 들어가면 병장이 다섯 명이 제대를 하게 되고 내 졸병이 다섯 명이 들어오기로 돼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김신조 때문에 제대를 못 해븐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들들들 볶지 하라하루가 불만이니까. 밑에서 안 들어오고. 그래가지고 졸병생활 더 많이 오래하고 등등. 하루하루가 고달팠어. 군대생활. 그다음인자 두들겨 맞는 거, 구타가 무지하게 심했다고 그때. 인제 우리 과에서 좀 엉덩이에 매 맞는 것을 잘 못 이겨내는 사람이 있었는데, 위에 상급병 이었는데 여름에도 동내의를 입고 살았다고. 하의 동내의를. 엉덩이 덜 아프라고. 한 여름에 더운데 겨울 동내의를 입고 있었어. 난 인자 그것이 분노해갖고 내 제대할 때까지 절대로 사람 손 안대겠다. 저 무식한 놈의 새끼들이, 무능한 놈들이 스스로 통솔을 못하니까, 통솔할 능력이 없으니까 폭력으로 저런 식으로 한다고 나는 손 하나 까딱 않고도 내 졸병들을 제대로 통솔하는 것을 제대 후에라도 편지를 통해서라도 확인하라고 약을 쓰면서, 그러다보니까 이제 매를 안 들다보니까 되게 힘들지. 통솔하기가. 왜 그러냐면 나는 지원 입대해 놔서 나이가 어리고 다른 사람들은 나이도 많은데다가,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매를 안 드니까 막말로 올라탈라고 그러지. 그걸 어떻게 이제 하여간 그런 식으로 해서 통솔해나가는데 결국은 내가 이기기는 이겼는데 힘들었지. 그러니까 이제 안 되, 그러면 인자 때려죽이고 싶은걸 참다보니까 맨날 담배만 피우고, 그런 식으로 군대생활하면서 인제 내가 아! 내가 대학을 가야 되겠다 생각했어. 그 교묘한 논리를 펴가면서 부하들 괴롭히고, 몽둥이 들고 한 놈들이 다 참모본부라 다 배운 놈들인데 좋은 대학 나온 놈들, 재학 중에 온 놈들이여. 대학 다닌 놈 새끼들, 저런 새끼들이 배왔다고, 그러고 인자 그놈들이 은근히 내가 고등학교 나왔다는 것 때문에 깔보고, 그래서 저런 새낃르에게 눌려 살지 않기 위해서 내가 대학을 가야 되겠다. 더런 놈 새끼들. 인간쓰레기들 대학 다녔다고 큰소리친다고. 그래가지고 그래, 제대하면 대학을 가야지. 그래가지고 무사히 제대하고 나와서 대학입시를 준비하게 됐지. 인자 군대생활하면서 기왕 여기까지 온 것 여러 가지 것 체험을 더 해보고 가자 해가지고 이제 여름 한여름 되면 인제 숲이 우거지니까 공비침투가 더 쉽다고 그래가지고 특별 경계령이 내려지는데 이 인력부족도 있지만 전방에서 고생하는 잠복근무병들을 격려한다고 그래가지고 참모본부에서도 파견을 해요. 전방에 잠복근무로. 근게 인자 쫄병이 다 가는데 각 과에서. 고생하니까. 내가 제대얼마 앞두고 일부러 전방에를 몰래 교체해가지고 위에 과장한테 이야기도 안하고 전방에 들어갔어. 잠복근무도 2주 서 보고 그랬는데, 완전히 인제 그것은 지붕은 저번에 총기사건 나왔을 때 보니까 무슨 막사가 어쩌고 그러는데 순전히 행복한 거지. 그때만 해도 저녁에 잠복 나가면 나무 그루터기나 총개머리판으로 구뎅이를 대충 파갖고 엉댕이 아프니까 구뎅이 속에다가 넣고 앉아서 인자 잠복근무를 서는 거지. 글믄 이제 고지대라 산이라 저녁이 되믄 비가와요. 낮이 되면 맑았다가도. 글다보면 엉덩이를 물에다 넣고 물구뎅이다가 넣고 있는 거지. 근데 비가 오면 귓속으로 물이 들어가니까 잠을 못잘 것 같은데서 잠이 오니까 그대로 비가와도 귓속으로 물이 들어와도 잔다고, 막 쓰러져서. 코를 골고 정신없읻르 처음에 나는 긴장돼갖고 안잤었는데 삼일 째 되는 날부터 자버렸는데 그 물구덩이 속에서 한쪽 넣고 그냥 자는 거야. 철모 배고. 그런 생활을 하고 낮에는 인제 빨래해 놓고 말려놓고 자고. 저녁에 또 나가고. 그런 체험도 해 보고. 그때만 해도 반공의식이 투철해서 잠을 못 자게 했는데 잠을 자다 자꾸 사고가 터지는 거야. 꿈속에서 이제 공비가 넘어온 걸로 봐가지고 크리머같은 걸로 지뢰를 눌러 버리는 거지. 인자 그래갖고 온 사단이 난리가 나고. 나중에 알아보믄 봤드는데 없어, 그럼 이게 꿈꾼 거지. 자다가. 그래서 인자 자지 못하게 저녁내 떠들라 그래. 맘대로, 유행가를 부르든 뭣을하든 떠들라고. 죽어라고 인제 어렸을 때 배운 욕은 다 동원에서 북쪽에다 하고, 알고 있는 동요부터 시작해서 다 부르고, 인자 글더라고. 어쨌든 그렇게 하다가 제대를 했어.

1-2 전남대 축산학과 입학

구술자: 그런데 그때 보니까 또 재수 없이 그때 예비고사 대학 입학 예비고사라는 게 생겼어.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그때는 없었는데. 과목이 무지하게 많애진 거여 다해야 될 건데. 책을 사다 보니까 이만큼 되더라고. 근디 인자 내가 그전부터 농촌에 들어가서 살고 싶었는데 사실 광장히 낭만이고 목가적으로 생각한 거지. 초지를 가꿔가지고 가축들 영화에서 본대로지. 양이나 치고, 과수원이나 운영하고 하는 식으로 해가지고 신석정씨 시 같은 거 좋아하고 그럴 때니까 근게 인자 농대 간다고 그래갖고 예비고사 보고 뭐 힘든데 가 고생하는 거 그냥 전남농대 축산과 들어갔어. 인제 자취생활 하다가 2학년 때부터 전대 뒤에 지금은 아파트가 서버렸던데 바로 문리대 뒤에 하숙, 하숙촌이었는데 거기서 하숙생활을 했죠. 이제 난 대표적인 모범생이 됐지 이제. 군에 있으면서, 부모님 속 썩인 거 학교 다니면서 고등학교 때, 공부안하고 맨 땡땡이나 치고, 그런 거 반성도 많이 했고. 내 인생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을 했고. 지난날 그렇게 부실하게 살았던 것부터 반성하고 알차게 정말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그래가지고 고무신 끌고 다니고, 그냥 예를 들면 전대뒤에서 하숙할 때 한 달에 시내 한번이나 나올까 정도로. 나오지도 않고. 공부 열심히 했지. 그러니까 인자 농대에서 축산과에서 아예 교수들이 나에 대한 기대가 커 가지고 유학 갔다 와서 강단에 다시 서라고 교수되라고. 그 이를테면 2학년 때부터는 아예 방학 때 연구실하나를 줘가지고 나보고 공부하게 하고. 방학 때도 집에 잠깐 들렀다 올라와서 인자 거기서 공부하고 그럴 정도였어. 모범생이었지. 학생들에게 나이도 들었겠다, 덜렁대니라도 나잇값 할라고 그러잖애요. 그러듯이 조심하다보니까 애들이 형님 형님하고 따르고, 나는 또 인자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뒤늦게 정신차려갖고, 만학도가 돼서 대학에 들어온 것인디 영 부끄럽고 그래서 일고 후배들한테도 말을 안 놓고, 형선이 덕기, 이런 식으로 야! 소리 안 하는게 습관이 돼가지고, 그거 군대에서 길러졌는데 내 밑에 졸병들한테 손을 안 댈려고 하다보니까 말을 고쳐야겠더라고. 야, 그러면 이새끼야 저새끼야가 될 수 잇는데, 이를테면 김일병, 그러면 개새끼야, 이렇게 문법적으로 안 된다고. 그래서 김일병 이것 좀 하지, 김일병 이리좀 와. 이런 식으로 끝에를 애매하게 하다고니까 몸에 배버려서 후배들한테도 말을 안놔. 지금도 그러는데 야, 자를 안 하는데 그래갖고 혼자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다가, 아버님은 인제 옛날로 돌아오니까 좋아하고, 광장이 형님은 유학 보내겠다고 하고. 그러고 있는데 내가 1학년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김대중씨가 그때 박정희한테 도전했지. 그러고 이제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박정권에 의해서 대학의 교련교육이 시작이 된다고. 그래서 그때 이제 교련반대시위, 학원 병영화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죠. 대학에서 그런데 자꾸 이제 그 후배들이 시위 같은 거 앞장서서하는 친구들이 나를 꼬드기는 거야. 끌어들이려고. 내가 들어갔을 때가 전남대 운동사에서 한 획이 그어지는데, 왜냐면은 그 전까지만 해도 전남대학교에 운동의 맥이 형성이 안됐어요. 맥이. 그런데 71년부터 이제 전남대 운동의 맥이 형성이 되요. 그게 뭐냐면 광주일고가 이제 내가 11횐데 서중 우에가 이제 고등학교가 생긴거죠. 그래서 인제 서중보다 역사가 짧지. 광주 그 일고가 가면 학교 교정에게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이 있어. 인제 광주일고생들, 서중생들은 긍지로 알지. 광주 학생운동의 본거지다. 그런 곳인데 거기에 그 역사적인 영향력이라는 게 참 거 참 누군가 한번 그것도 학자, 학문적 접근을 해야 하는 부분인데. 그 영향력이라는 게 수량화 할 수 없는데 엄청난 거예요. 그게. 엄청난 건데. 항일독립운동과정에서도 학교에 독서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요. 일제하에서도. 독서그룹이 있어가지고. 그것은 인제운동을 주도하고 그랬는데. 전남대, 아니 광주일고에가 특활이라고 특별활동이라고 해가지고 일주일에 한번씩 웅변 좋아하는 친구들 이리 모이고 그런거 있잖아요. 서예 좋아하는 반 서예반 있고 그러듯이. 거기에 인자 향토반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인자 향토사랑이 어떻고, 농촌체험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거기에 몸담았던 학생들 중에 일부가 광랑이라는 일종의 서클같은 것을 만들었어요. 그 광랑이 향토반에 다 들어갔다고 보믄 돼요. 인자 그 광랑이 빛 광자 광주사내, 사내 랑 자해가지고. 광랑이라는 서클이 있는데, 이 광랑이라는 서클이 6흰가에 선배들에 의해서 6회 때부터 광주 학생운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 6회, 6회들이 만들었어요. 근데 이제 그 광주사내들의 모임에서 자기들끼리 이제 학습을 하는데 독서회 같은 거니까. 당시로는 아주 불순한 공부들을 했다고. 그래가지고 여러분들이 들어서 알랑가는 몰라도 쿠바인의 입장에서 미국에 대해서 맹비판을 한 리슨 양키라는, 양키야 들어라 뭐 그런 책이 419이후에 출판이 됐었다고요. 금서로 돼 있다가. 그런데 516 쿠테타가 나면서 다시 금서가 됐지. 그게 일반인들과 접촉이 안 되는 책인데. 그런 책을 놓고 미제국주의의 진면목이 무너가를 공부한다던가, 이런 식으로 해갖고 어떻게 보면 쪼금 붉으스름했지. 그러니까 자기들이 자칭 사회주의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할 정돈데. 거기에 선배들 중에서 9회선배가 이제 반공법사건 같은 걸로 좀 들어가고. 10회가 통역당 막둥이로 어린 통역탕으로 해가지고 고생도 하고.
면담자: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구술자: 근게 9회 조용호, 김민혁, 아니 조용호씨가 이상한 책들 붉으스름한 책들 가방에 담고 기차타고 내려오다가 비슷한 가방하고 바꿔들고 나와 브렀어. 그래갖고 인제 그 다른 사람이 집에 가서 본 게 이상한 책들이, 가서 경찰에 신고를 해가지고 혼난 사건이고. 10회가 박경호 선배가 인자 통역당 막둥이 들어갔는데. 거기에 인제 일고 14회, 그러니까 내 3년 후배들이 이제 들어가 있는 사람이 정상용, 국회의원. 518항쟁지도 대변인 아니 외무부, 외무부장 맡았었지. 이양현 거기도 518당시 그 기획의원으로 도청항쟁지도부 있었고, 김이택 그것도 이제 나중에 긴급조치로 빵잽이하고, 민청련 의장도 하고 그랬지. 지금은 공직에가 있는데. 박영규, 영신이 김영신, 박영신, 그렇게 되고 이제 16회가 최철희, 19회가 정용화, 정용화도 518관련해서 그렇고. 그런데 근데 이 14회 애들이 대학에 들어와 가지고 전남대, 만든게 정상용, 이양현이 주축이 돼갖고 이 광랑 애들이 만든게 전남대 민족사회연구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민사련이라고 그래가지고 이 민족사회연구회에 또 일고 후배들이 이제 김정길, 이제 뭐 김정길이야 민청사건부터 남민전 등등으로 징역 좀 많이 살았지. 박형선, 거기도 민청학련사건. 문덕희 이런 친구들이 이 민족 사회연구회 들어가서 다 일고 출신들이에요.
면담자: 선생님 잠깐만요, 향토반이 일고에 있는 동아리죠?
구술자: 일고에 있는 일종의 동아리지. 특별활동 아니 동아리가 아니라 일종의 특활한 동아리지. 독서 발표 같은 거 하고 방학 때 농활을 했던 것이 향토반이야. 거기 최초의 향토반을 만든 사람이 지금 곡성군수 고현석씨에요. 6회들. 이사람 이외도 두사람, 세사람이 만든 건데, 이 광랑이 인제 향토반에 들어가서 나중에는 좌지우지하게 된 거지.
면담자: 광랑은 일고생들의 모임인거죠? 향토반 출신의 전남대생이 아니라.
구술자: 일고의 광랑이라는 독서서클이, 일종의 불온한, 요즘 말로 하면 서클이 있었는데 이 서클맴버들이 대부분 다 향토반에 들어가 있었지. 그래가지고 향토반에 영향을 줬지. 향토반 출신들이 또 많이 운동에 참여하게 됐는데, 이 광랑이 벌써 9회 조용호 선배가 감방에 가고 10회 박경호 선배가 감방에 갈 정도로 문제가 있는 서클이었지. 요 출신들이 14회가 대거 전남대에 와가지고 정상용, 이양현이가 전남대에 민족사 연구회를 만들어요. 여기에 일고출신과 일고출신 아닌 사람들도 일단 요즘 말로 하면 사회과학 서클이야. 이념서클 같은거.
면담자: 민사련이요.
구술자: 그렇지. 민족사회연구회가 이 친구들이 중심이 돼서 전남대에 운동의 맥을 형성해. 그러고 이 사람들이 71년 학원 병영화 반대, 교련반대시위 여기에 주축이 되지. 주도, 여기서 주도를 해요.
면담자: 이거는 합법적인 서클은 아닌 거죠? 등록돼 있거나 그런 서클은 아닌거죠?
구술자: 그때 당시는 등록이고 뭐고 없지.
면담자: 지하서클이라고 보면 되나요? 그런 개념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요?
구술자: 아니 그때만 해도 긴급조치가 발효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때 당시 서클 갖고 탄압하거나 그럴 때는 아니야. 초기 그러니까 교련이 인제 도입도리 때니까 그때만 해도 나았지. 그래갖고 71년부터 학원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된다고. 왜 그러냐면은 전국적으로 교련반대시위에 주도적 역할을 한 친구들 강제입영 시켜버리죠. 강제입영대상자들이 여기에 인제 정상용, 이양현, 김진, 그다음에 또 갑자기 이름들이 생각 안 나네. 원수들. 그 여러 명이 인제 전남대에서도 강제입영이 되죠. 근데 이제 이게 알아 둬야하는데 이 교련반대시위 할 때 서울에 위수령이 내려요.계엄령하고 다르죠. 위수령이니까. 계엄이 내리면 이제 군법회의가 만들어지고 사법부, 행정, 다양한 분야에서 군이 이제 권력을 장악하는데 이제 위수령은 일정한 특정한 치안질서유지를 위한 특정한 임무만 띠고 군인이 투입 되는 건데, 위수령이 내려지는 건데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전남대학교 교정에 그 전에는 교정으로 안 들어왔어요. 학생시위가 아무리 심해도. 학내 진입이 없었다고 그 전까지만 해도. 80년 이후에는 일반화 돼 브렀지만. 진입자체가 상주화 하다시피 해블고. 처음으로 대낮에 이제.
구술자: 그래서 학내 경찰이 직접 들어오고 그랬는데, 그때만 해도 하여튼 어쨌든 그 저 교련반대 시위를 하는데 자꾸 이거 민사련 후배들이 나를 꼬드기는 거예요. 인자 내가 일정한 학생들에게 영향력이 있는걸 알고 자꾸 꼬드겨. 이제 슬금슬금. 그래서 인자 나는 알면서 속이 다 보이지 나를 살살 흘리는 거 알면서도 이제 모범생활 공부나 해야지 고등학교 때 허황방탕하게 살았응게. 아고 다 잊어블고 총장 이름도 모르고, 누가 누군지 하나도 총장 이름이 누군지도 모르고 하여간에 학교 뒤에서 농대까지 걸어서 수업 받고 점심때도 밥 먹으로 왔다가고, 일요일에도 학교 나와서 공부해버리고 도서관에서 방학 때도 연구실에 가서 공부해버리고 그런 식이었어. 그런데 경찰이 학내 대낮에 진입할 땐데 왕창 모여 있어 본관 앞에. 지금은 박물관 아니 사회 교육원인가 그게 됐지.
면담자: 옛날 구 본관이요?
구술자: 구 본관, 그 앞에 인자 학생들이 몽창 모여 있을 땐데, 긍게 나는 꼬드겨도 주모자급으로 안들어간 것 뿐이지 명분은 시위니까 소극적 참여는 해서 따라는 다녔지. 시위대를. 앞장만 안 스고. 그런데 그날 경찰이 바깥에 후문, 정문 다 싸고, 곧 진입할거라 그래가지고 교수들, 교직원들이 막 나와 가지고 해산하라고 설득할 때여. 근데 한 학생이 일어나가지고 비장한 각오를 표하면서 이 자리에 원자탄이 떨어져도 우리는 자리를 떠선 안 된다. 어마막지한 소리를 하더라고. 그래야지 하고 앞줄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있었는데, 밀고 들어오는 거여. 노래 부르고 어쩌고 앉았어 인자 원자탄이 떨어져도 가지말자고 박수 받고 그랬으니까 그럴 줄 알았지. 근데 파바박 뒤가 무너지는 소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가 나니까 돌아보니까 내가 제일 뒤에 앉아있는거야. 다 도망가 블고. 한참 이러고(손 올리고) 막 해쌌고 그 때만해도 정형화된 외치는 그것이 없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일어나가지고 (건물)안으로 들어가 브렀어.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있다가 도망간 사람들 쫓아다니고 도망 다니고 그러다가 끝났어. 최루가스가 난리가 났지. 날더러 인자 모두들 안에 본관에 들어온 사람들보고 나가래. 교수들이 꼴보기 싫다고. 우리들이 해산하라고 할 때 했으면은 이런 꼴 안당할건데, 새끼들아, 최루탄에도 도망간 새끼들이 웬 말이 웬 말이 많냐고. 그래갖고 막 조롱을 하는 거야. 꼴 보기 싫다고 다 가라고, 그러면서 교직원들한테 쫓아내라고, 그래갖고 인자 나오는데.(자존심이)망가질 대로 망가져 나오는데 거기 경찰 놈 새끼들이 서 가지고 있으면서 막말로 나 같으믄 뭘 떼어 블겄다 새끼들아 막 어쩌고. 처음부터 해산을 하던지 그렇게 도망을 가블라믄. 그러면서 야유를 하는 거예요. 그 야비를 받으면서 나와 가지고 집에 오는데 얼마나 속이 뒤집어질 거여. 집에 와 가지고 이발소 가서 머리를 싹 밀어블고는 다짐을 하기를 한목숨 걸고 할라믄 하고, 말라믄 말지 어정쩡하니 뒷따라 대니다가 이런 수모를 당한다고 다시는 이런 일 없다. 할라믄 하고 말라믄 말고. 다시 한번 내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머리를 밀어 브렀는데, 그래가지고 이제 어쩌고 시위 어쩌고 강제 입영한 애들 당하고, 한풀 꺾였지. 유기정학 무기정학도 꽤 많이 당했고. 그래가지고 인자 민족사 연구회가 그 된서리를 맞고 이름을 바꾼것이 이제 교양 독서회에요. 요것도 민청학력 사건 때부터 깨지지. 근데 이제 그렇게 됐는데, 아예 담 싸브러. 머리 깎고 인자 그라고 있으니까

1-3. 10월 유신과 운동으로의 투신
구술자: 그래가지고 2학년 맞이해. 근디 인자 2학년 10월 달이지. 학교 뒤 하숙방에서 머리 동여매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때 하숙생이 여덟 명인가 됐었는데, 밖에서 웅성웅성하면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나를 자꾸 불러 나오라고. 밤인데. 그래서 이 사람들이 쓸데없이 공부는 안하고. 자꾸 불러. 안 나갔더니. 그래서 인자 궁시렁궁시렁하면서 나가보니까 유신 쿠테타가 난 거예요. 그래갖고 휴교령부터 시작해서 의회 또 폐쇄해 버리고, 헌법폐지하고 난리가 났지 이제. 와, 그때 내가 뒤집어졌지. 방에 들어와 가지고 보던 책에 볼펜으로 찍어블고 사전 찍어블고 벽에다 박치기하고 어떻게 화가 나는지 뭐야 나는 너무 무시당한거지 이제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국민들 알기를 이 새끼들이 벌레로 알고 있구나 하니까. 어린애 취급하고, 바보취급하고 분노 때문에 아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오늘부터 나는 싸운다. 이렇게 돼가지고 잘못 들어서 브렀지. 그때부터. 와 그날 어떻게 화가 나는지 이렇게까지 무시할 수 있고, 우롱할 수 있어야 생각하니까 너무 분통이 터져가지고 긍게 인자 그 다음날 학교를 나갔봤더니 교수님들이 뭐라 뭐라 애기하고 계시다가 모여서, 내가 딱 들어갔더니 암말도 않고 그러면서 창밖을 보면서 무등산이 서서히 단풍이 들어가네 딴소리하고. 미쳐 블겄드라고 그냥. 이리가도 사람ㄷ르이 말을 피해블고, 저리가도 피해블고. 그래서 이제 며칠간 광주 얼쩡얼쩡 다니다가, 사람들이 이야기를 안 해. 고향에 내려가서 내려가 있는데 거기서 이제 충격적인 일을 겪었는데, 내 초등학교 동창들 중에서 교사가 된 사람들이 몇 사람 있는데 두 명이 우리 모교 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하고 있었는데, 이제 위에서 지시를 해가지고 10월 17일 유신 쿠테타 이후에 박정희 정권의 지시에 의해서 이 철없는 꼬마들을 데리고 시골길을 이렇게 행진을 하고 다니면서 유신지지 행진을 하는거여. 그래가지고 집 앞에다가 꼬마들한테 시켜갖고 유신을 지지한다, 뭐 제비 꼬리같은 거 붙이라고 그러고 그러고 어린애들에게 노래를 가르친 거예요. 대통령 대통령 우리 대통열 일 잘하는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고무줄 놀이하는 이런 노래까지 다 보급을 했어요. 그 보급을 교사들이 한 거예요. 시키니까. 그래가지고 인자 와갖고 걸핏하면 라디오로 발로차고 왜 그냐믄 라디오만 틀면 헌법을 이야기하면서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야지 신발에다가 발을 맞출 수는 없는 거 아니냐 헌법도 우리 현실에 맞게 어쩌고 맨 그런 소리만. 그래갖고 인자 중간지대에 있는 원로라는 사람들이 그걸 찬양하고 지지하는 발언들이나 해 쌌고. 박순천이가 어떻고, 라디오 발로차고 맨날 그럴 땐데 내 친구 놈 새끼들이 그 지랄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는 얼마나 화가 날거여. 저녁에 집에 왔길래 욕을 쏟아부었죠. 나쁜 놈의 새끼들 개노릇한다고. 한참 당하고 있던 이놈들이 이제 성질이 났는가 그 중에서 한 친구가 날더러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면서 그래 우리가 먹고살아야 할 수 없이 이런 짓 하고 있다. 그러믄 너는 뭐하냐? 너는 먹고사는데 얽매이지도 않는데. 너는 뭐하고 있냐 이 새끼야. 그러고 나를 손가락질 하는데 손가락이 대포만 하게 보이는 거야. 너는 뭐하고 있냐 소리에. 거기서 답이 안 나와 버리는거여. 나는 뭐하고 있냐. 성질만 내고 있지. 내가 그 자리서 그래 나 지금 너희들한테 화풀이하고 욕하고 있을 뿐이다. 좋아, 앞으로 내가 뭔가를 뭣인가를 할 테니까 두고봐라. 그러나 니들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안 할 망정, 뭣인가를 안할망정 하지 말아야할 짓은 안해야 하는 거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그래, 구체적으로 앞으로 뭘 할거다. 그라고 말을 맞췄어. 너는 뭐하고 있냐는 말에 내가 굳이 한 것이 없으니까. 그래가지고 그날부터 인자 고민에 들어갔지. 내가 뭣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갖고. 그래가지고 인자 백방으로 생각해봐도 답이 없는거여. 총으로 박정희를 쏜다고 해도 총이 있나부터 시작해서 막연해. 뭔가를 해야겠는데, 싸워야겠는데. 내가 뭐 써클활동을 해봤나. 학생회활동을 해봤나. 아무것도 없는거여. 그래서 삼일째 되는 날 꽁꽁 앓다가 다시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부터 내 좌표부터 한번 살펴보자. 그래갖고, 내가 뭐냐 학생이다 인자 답이. 그럼인자 학생으로서의 운동이 뭐냐 학생운동밖에 할게 없잖느냐. 그럼인자 거기가 쪼금 더 감이 잡히더라고. 그럼 인자 학생운동을 어떻게 할건가 한디,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 학교 전남대학. 근디 전남대가 보통 큰 것이 아닌데 내가 감이 안잽히는거여. 내가 다른학교 학생들하고 교류를 해본적도 없고, 써클활동도 안해보고, 학생회활동도 안해보고, 감이 안잡혀. 전남댐나해도. 그 다시또 좁혀서 농대 그런께 감이 좀 잡히더라. 아, 그래 농대 농대는 내가 좀 알지. 일정한 또 영향력도 있지. 나 따르는 사람들도 좀 있지. 그래 농대서부터 시작을 하자. 그래가지고 이제 구체적인 계획에 들어간게 그럼 농대에서 뭣부터 할것이냐. 내가 힘이 있나 당장. 이를테면 내가 갑자기 시위, 데모하자 하고 악 쓴다고 애들이 나올 것도 아니고. 지금 현재 나는 영향력도 없고, 조직력도 암것도 없다. 인자 어떻게 할것이냐. 없으면 힘을 키워가야지, 인자 힘을 키워가야한다는 차원으로 그럼 어떻게 키워갈 것이냐 암것도 고민을 하다가 이제 맨처음에 떠오른 것이 3학년 되면은 이제 초에 거 학생회장, 학생회 임원선거를 해요. 임원선거를. 그래서 요 임원선거를 통해서 학생회를 먼저 장악한다. 좋은 사람을, 내가 믿을만한 사람을 내게워가지고. 농대,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자. 그래갖고 농대에서 영향력을 우선 확고히 하자. 학생회를 장악해갖고. 그러고 나서 그다음으로 나가자. 그런데 1학년 때 문화사 시험을 보고 나오는데 후배 하나가 날더러 사정을 하는거여. 자기가 공부를 안해가지고 대리시험을 누가 봐주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안 나와 브렀다는거야. 그라고 내가 자기가 이제 낙제를 한다는거야. 물팍을 꿇고 싹싹 비는거야. 좀 봐주래. 그게 나는 그때만 해도 뭐 깊은생각을 못하고 학칙이 뭔지 그런거 생각도 않고 뭐 대학에서 그런 것이 많다더라 그 이야기는 들은적이 있어갖고 어 그러자 그래갖고 그 다음이 이 친구 시험이라 글더라고. 들어가갖고 인자 그 내가 공부 열심히 했을테니까 답이야 뭐 사정없이 쓰고 있는디 교수가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가끔보고 수험표 보고 뭐 물어보고 글더라고. 어디 최씨여? 뭐 그런식으로. 근데 내자 나한테 와갖고 이름을 물어보는거야. 무슨 그 친구가 그때 갑자기 이름이, 이름이 뭐이더라 하여튼 여가 또 인연이 복잡한데. 내가 중학교2학년때부터 한자를 안썼거든. 우리말 최고, 우리말 쓰고 한자 안쓴다고. 그런 계기가 있었는데, 그 나는 한자는 내 이름 외에는 절대 안써. 이름은 할수없이 써야하니까. 세상 사는데. 그게 죽어라고 전남대 축산과에서 시험볼 때 한자로 똥 분자를 써서 분의 성분을 말하라. 그라믄 시험지에다가는 똥의 성분에 대해 논하라 하고 바꿔놓고 그럴땐데 하여튼 죽어라고 국어사전, 옥편 가지고 다니면서 군대생활할 때도 갖고 다니면서 신문 볼때도 옆에다 놓고. 편지 쓸때도 옆에다 놓고. 그래서 내가 인지 국어어휘같은 것은 굉장히 좋은데, 그게 인자 읽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어. 하도 해놔서. 초등학교 들어가기전에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 추구 같은 거 다 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가 한자 못 쓴다고 그러면 깜짝놀래. 전남대학교 뭐 이것도 쓰지도 못하고 강진 내 고향 쓰라해도 못쓰고 그러는데 대학교 1학년때 시험보는데 교양국어에서 웃음의 종류 다섯가지를 한자로 쓰시오. 한자라는게 형상성이 있어가지고 요렇게 그리더라도 쓸 수가 있거든. 안써블고. 그런데 갑자기 창남이구나 그놈 이름이. 무슨 창자 무슨 남자예요? 그러니까 젠장할 내가 답을 하다가 갑자기 물어보니까 나갈랍니다 하고 나왔지. 어이 학생 이리와, 그래가지고 기어이 잡혀갖고는 어느 과의 누구냐, 그래갖고 난 또 속없이 다 이야기했지. 빌지도 않고. 아니 뭐 낙제한다고 열심히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나보고 좀 봐달라고 하니까 들어왔다고. 그래갖고 인자 무기정학 당해브렀지. 그니까 학교 교수들이 놀래갖고는 농대교수들이 학교당국 어떻게 해가지고 방학 끝나니까 그것이 인제 풀렸더라고. 근께 어느정도나를 교수들이 신임 했냐믄 예를 들면 토학이라는 게 있는데, 토끼, 마학, 말, 택해요. 봉학, 벌 근데 나는 그중에서 인제 토학을 택했거든. 토끼 키울라고. 그래갖고 토끼를 택해놓고 토학을 택하고 토끼를 샀어요. 새끼를 암수 한 쌍을. 아 세 마리 샀구나. 그래갖고 하숙집 한쪽에다가 토끼장을 만들어서 키웠어. 본대로. 그라고 옹달샘 토끼 새벽에 토끼가 옹달샘에 가서 물먹고 그런 노래가 생각나서 수놈은 옹이 암놈을 달님이 그다음에 샘이라고 이름을 지어놨는데, 그 집에 개 하숙집 개가 똥개가 하나, 요 새끼 동개가 어떻게 문 열고 뛰다는데 샘이를 물어 죽여 브렀어요. 옹이하고 달님이만 남았는데 그래갖고 인제 책에서 배운 데로 결혼식도 시키고. 아 그런데 내가 바보짓 한 것이 새끼를 날것을 대비해서 나는 아주 부드럽게 푹신푹신하게 만들어준다고 볏짚 같은 것을 가위로 곱게 짤라서 이제 팍팍하니 깔아줬어요. 새끼들이 꼬무락꼬무락하다보니까 밀려 블고 바닥에 닿은 거예요, 나무 바닥에. 그날 저녁에 추웠는데 죽어브렀어. 여섯 마리가 죽어브렀어. 내가 친구 집에 가서 자고 아침에 와서 죽어브렀는데, 고놈들 묻어주고는 근디 다음 다음날 토학 시험이여. 그래갖고 내가 학교 가서 아니 세상에 초등학교 다니기 전부터 시골꼬마들 다 토끼 키우거든. 그래도 토끼새끼를 죽여브렀으니 이게 체면이 서. 그래서 인자 토끼새끼들 제문을 TJ 브렀어 시험에다가(웃음) 나는 자격이 없다. 학점이고 뭐고 그래갖고 어린 토끼새끼들에게 명복을 빌고, 날 반성한다고 하고 나와붓어. 그러니까 인자 교순가 난리가 나갖고는 나를 부르더만 바깥에서 문을 잠궈 놓고는 거기서 시험을 다시 보라는 거야. 안 해 븟어. 그랬더니 나중에 학점 나올 때 보니까는 교수들이 본부에 가갔고 그 내 거 신청을 빼븟더라고. 근께 거보고 뭐 수강신청 토학에서. 내가 에프가 나오면 내 장래에 안 좋다고 그래갖고 아 그걸빼브렀더라고. 그 정도로 인제 교수들도 나를 신뢰하고 그랬었는데, 하여간에 이 시험 대리로 봐줬다가 무기정학 당하니까 교수들이 난리가 나가지고 이제 이야기해갖고 방학 때 끝내 브렀어.

1-4. 농대 학생회 선거
구술자: 그래서 인자 출마를 할 수가 없어. 학생회장에. 그래서 민상웅이라고 내 동긴데 그 친구도 이제 군대 갔다와갖고 늦게 진학한 친군데 그 친구가 학점 자격도 되고 뜻이 나하고 인제 좀 통하는 데가 있어서 인자 내세웠지. 설득을 했어. 어떻게 할 거냐, 나가라 학생회부터 바로잡고 우리가 스스로 떳떳할 때 밖에다가 큰소리 칠 수 있다. 근데 학내에서 선거 때 바깥에서 선거와 똑같이 돈쓰고, 못된 짓 하면서 뭐 정의가 어떻고, 뭐가 어떻게 떠들어야 그 얼마나 웃겠냐, 사회가. 힘도 안나온다. 그래가지고는 우리가 당당해야한다 하니까 우리가 맡아서 학생회를 우선 바꾸자. 좋다. 그래서 이제 학생회비 저 이 선거비용은 어떻게 했으믄 쓰겄냐, 그때 이제 유명한 칠백원이 나왔는데, 포스터 몇 개 붙이고, 그라고 인자 마커같은 거 사야 어쩌고, 칠백원 이걸로 끝 선거한다. 그래야 우리가 당당하다. 그거 같고 될까, 한번 해보자. 지더라도 깨끗이 한번 지고, 최선을 다해서 이겨야지만 그래갖고 그날부터 인자 주머니에서 주머니에 돈을 한 푼도 못 갖고 다니게 했어. 같이 하숙을 같은 집에서 하숙을 했는데, 그러고는 내가 교양독서회를 나갔어요. 이제 나도 이제 운동을 할라다보니까 할 수 없지 이제. 공부도 해야하고, 조직도 같이 해야 하고. 거기서 이제 박형선, 문덕희 등등 후배들을 만났지 이제. 이 친구들이 이제 같이 하면서 문덕희 박형선이를 후배들한테 이러이러해서 다 농대생들이었어요. 농대 학생회를 장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풍토부터 바꿔 버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떳떳하고 당당하다. 그러기 위해서 이래저래 돈 칠백원으로 하자. 그러니까 좋습니다 합시다 그래갖고 동조자가 둘이가 생겼어 인자. 그래서 인제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학내에서 조끔 인망, 신망이 있는 친구들을 한 사람 한사람 접촉해갖고 이러이러한 취지로 한다. 학생회를 바로 잡아야한다. 어떻게 할래 참여할래, 안할래 근데 이제 다 이야기하면 좋다 하다가 끝에 가서 그러면은 선거자금은 얼마로 할래요 칠백 원 그라믄 다 일어나브러 그래갖고 질 선거는 안할라요. 그라고 쓸데없는 짓 하지마쇼. 칠백 원 갖고 지금, 장난이요. 그런식이 돼브렀지. 그래 코 씩씩 불고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고 이라도 다니니까 하도 엉뚱한 소리 하고 다니니까 거절해놓고 돌아서지도 자나깨나 생각이 나겠지. 이상한소리 한 것이기 때문에. 요렇게 인자 지켜 보는 거지, 인자 그게 소문이 퍼졌어. 왜냐면 인제 그때 당시 YWCA 서울 전국연맹 사무총장으로 이학영이 남민전 사건, 민청학련 사건 그 쪽으로 들어갔는데, 그 친구가 학생회장 할 때도 그랬는데, 문리대도 대게 소문이 이제 최하 오십만원쓴다 했다고 돈으로. 밥사고 차사고 바깥에서 만나서 맨날 그러니까. 이제 타 단대에까지 소문이 퍼지니까 타 단대의 교수들이 만나자. 그래갖고 뭐가 어떻게 돼갖고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는데, 이래저래이래저래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 난 투표권 없지만 적극지지니까 힘내라고 이기라고 그래 갖고 뽄을 보이라고. 다른 대학내의 모임들에서도 어느 과, 일학년들까지도 좀 이야기 좀 해 달라. 가서 이야기를 하고 그런 것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더라고 타 대학까지. 찾아오기도 하고 농대로 와갖고 도대체 농대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는데 어떻게 된거냐. 그래서 인제 돌아섰던 애들이 그런거 안한다고, 질 선거는 안 한다고 했던 이 친구들이 다시 오드라고. 와가지고 어떻게 진행이 되요? 이래저래 씩씩하니 하고 있다고 하니까 같이 합시다 해갖고 나중에 어떻게 돼브렀냐면 다른 학생회장 출마할라던 애들이 참모들을 모집할라고 보니까 사람이 없는 거야. 다 우리쪽으로 와블고. 그래갖고 단독 입후보로 해서 무득표 당선이 돼 브렀지. 그런 기록을 세웠는데, 그러고 나서 그러다보니까 내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농대 밖으로까지 영향력이 이제 퍼지더라고. 애기하자면 내가 좀 유명인이 됐지. 그렇고 나서 다음에 내가 일을 손댄 게 그건 내가 욕을 바가지로 먹는건데, 아~ 인자 그전에 그때만해도 요즘은 어찐가 몰라도 대학내에 학생회장 선거같은거 하게 되면은 학교 밖에 있는 조직폭력배들까지 개입을 했어. 그래갖고 인자 밥사주라부터 시작을 해서 그러믄 인제 조직폭력배들하고 연결된 학내의 주먹쟁이들이 시비붙고, 그러믄 인자 얼마 용돈주고 뭐 인자 밥사주고 술사주고 그런 못된 풍조가 있었는데 고런 친구들까지도 이제 불러모아갖고 주먹을 쓸라믄 의롭게 쓰란 말이야 라고 설득해가지고 개들이 우리편으로 돌아서게되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쨌든 그러고 당선돼가지고 농대 뒤쪽에 조그마한 술집이 있었는데 막거리도 팔고 라면도 팔고 앉아서. 개 한 마리 시켜가지고 하루 종일내 개먹고 놀면서 쓴것까지 해서 만원이 채 안들었어. 그때 계산해 보니까. 거 예산은 칠백원이 좀 넘어섰는데, 왜그냐믄 학교 당국에 등록하면서 사진 붙이고 뭐 그런 또 절차가 있었어. 그래가지고 칠백원은 좀 넘어갔는데, 어쨌든 끝나고 나서 자축파티까지 한 것이 만원도 안들어갔는데, 그렇게 했어.

1-5. 시험 부정행위 방지 캠페인
구술자: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인자 2탄을 뭣으로 시작을 할까. 그것이 인제 요즘은 어떤 가 모르겠어. 대학 책상에 보믄은 잔글씨로 시험에 앞둬갖고 인자 외는데 골머리 아픈것들 잔글씨로 인제 컨닝할라고 책상에 많이 써논거 있거든.
면담자: 지금도 그래요.
구술자: 지금도 그래?(웃음) 고걸 명색이 학생이 이렇게 내놓고 이렇게 시험 부정행위를 해서야 밖에다 대고 뭔 소리를 해야. 부끄러운 일이다 떳떳해야 한다. 그래서 명랑한 수업 분위기 확립, 그걸 또 내걸고 학생회에서 앞장을 스고 내가 인자 떠들고 다녔지. 그래갖고 인자 교수들한테까지 학교 당국에 요구를 한 것이 뭐이냐면 부정행위 없는 시험을 농대에서 치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엉망으로 낙서가 돼 있는 책상을 전부 페인트칠을 해주라. 그 요구를 했어. 그러니까 인자 교수들이 대학생이면 지성인인데 지성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뭔 놈의 시험 감독이 어떻고 책상 페인트가 중 고등학생 같은 소리 한다고 좀 거부 반응을 보이는 교수들도 나오고 그러더라고. 그때 내가 그 교수들한테 그랬어. 교수님들도 스승의 날 꽃다발주면 좋아라하던데, 아 그러면 교수라는 소리 하지 말고 강사라고 하시라고. 무슨 소리하시냐고 잘못한 거 있으면 제자들이 바로 잡아야 할 거 아니냐고 그라고 스승과 사제, 제자사이를 떠나서도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말을 못하지. 그래가지고 결국은 학교당국에서 전부 페인트 칠해줬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학생회하고 해갖고 제비꼬리를 만들어서 명랑한 수업분위기 확립 그래갖고 인자 학교 들어오는 입구에 서서 인자 오는 학생들을 달아 주는 거지. 그때 당시만 해도 대학 졸업장을 받기 위해서 적당하니 남의 것 보고 어찌고 해서 시험보고 들어온 친구들이 꽤 있었거든. 그래갖고 농대를 무슨 농사짓고 그럴 라고 온 것보다는 전공선택을 쉽게 들어올 수 있고 그러니까 들어온 친구들도 있고. 그 친구들이 난리가 난거야 인자. 이런 개새끼들이 대학 졸업장 좀 받을라고 들어왔는데 훼방을 부린다고. 그래가지고 욕을 욕을 때려 죽여 브니 마니 암매장을 해브니 들려오지, 들려오건 말건 일단 꼬리표를 붙여줘 쳐버리고 이런 개새끼들이 훼방을 부려 싼다고. 내 인생 내가 사니깐 잔소리 말라고 악을 쓰고. 암말 않고 다시 쫓아가서 달고 그랬는데. 차마 때리지 못하니까 이놈들이 그래서 그렇게 시험을 봤는데 우리 과 시험 볼 때 내가 책상을 전부 교수 들어오기 전에 서로 맞보고 앉게 했어. 이렇게. 그래갖고 앞에다가 나가서 칠판에다가 썼어요. 시험감독을 거부한다. 우리를 의심하기 때문에 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이렇게 하겠으니까 나가라고. 인자 교수가 어 그럼 곤단한디, 아 그래요? 그러면 저 나가겠습니다. 내가 싸갖고 나올랑께 교수가 막더라고. 택하십시오, 우리가 시험을 거부하는가, 선생님, 교수님이 거부 하는가 봅시다. 누가 이긴가 봅시다. 교수가 그럼 믿네이, 그라고 나눠주고 나가 블더라고. 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 학생 하나가 볼펜으로 치면서. 개새끼들, 감독이 없으니까 컨닝 못하겠다고. 컨닝 할라다가. 그러니까 좆 같은 놈의 새끼들 때문에 졸업장 못 받게 생겼네. 미치겠다고 어쩌고 하고는 찢어블고 나가붓어. 그러고 인자 우리는 무시험으로 아니 무감독시험으로 봤는데, 그래가지고 이제 농대는 확실하니 일단 장악을 했어 인자. 나 그러면 일단 사람들이 저 사람 바른사람, 소신있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교수들도 고개 끄덕끄덕하고, 그전부터 신뢰를 받았지만.

2-1 등록금인상 반대투쟁
구술자: 그래서 이 농대에서 좋다 그러면 다음 농대를 거점으로 해서 전ㄴ마대 전체로 영향력을 확대를 해야겠다, 뭘 할까 그러고 있는 판에 여름방학 동안에 요즘도 그런일들이 가끔 학내에서 벌어지는가 신문에 나던데, 학생회장단들이 학생처장이랑 모두 설악산 어디 호텔에 가갔고, 뭘 했는가 하여튼 했는데, 거기서 학생회비를 엄청 올려 브렀어. 이제. 많이 올렸어. 이 등록금 인상이지 어떻게 보면. 아, 이거다. 학생들 권위보호하고 연결된 것이니까 요걸 갖고 싸워야겠다. 그래가지고 이제 그때 인제 대의원 회의가 있는데 학생회장단 있고 대의원 회의가 또 따로 있었어요. 대의원 회의에서 의결기군데, 그 대의원 회의를 하는데 내가 인제 부탁을 했지. 대의원 의장한테랑 몇몇 사람한테 내가 방청석에 앉아 있을 테니까 발언 신청을 하면 발언권을 주라. 아주 그 꼴 아니 몰라요 지잘이고. 아니 방청석에 있는 사람 이야기 좀 듣는다는 식으로 해서 주면 될 거 아니냐고. 그래갖고 나하고 박형선이하고 선배 고재득 형이라고 지금 성동구청장 하고 있는데, 그 양반은 인자 거 전남대 교련반대시위에 앞장섰던 분인데, 인자 그리 가서 앉았었어. 인제 이런 저런 애기하다가 이제 등록금 과다인상 학생회비 과다인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왔다구요. 대의원들이 뭐락뭐락하는데 그때 이제 정득규씨였지 학생처장이, 등치도 좀 크고 그랬는데 그 냥반이 미국에 있는 동안에 들어보니까 돌아가셨다고 그러던데 병사로. 그 냥반이 일어나갖고는 그 대의원 발언하고 있는 대의원한테 아 자네 무슨과야? 내가 지금 내가 먹을 라고 올린거야? 다 학교를 위한 것이야 뭐가 어쩌고 어째 앉아! 소리 뭐 어쩌고 뭐락뭐락하다가 쭈그려 앉고 또 누가 발언을 하면은 막 이 사람이 그냥 위압적으로 딱 말하면 꽥 소리 못하고 주저앉고 그래. 옆에 있는 박형선이가 이야기해가지고 발언권을 얻었어. 방청석인데도. 인자 뭐락뭐락 한참 떠드는데 대의원들보다는 야무지게 떠들었는데 또 이사람이 일어나갖고는 소리를 더 높이 올리면서 인자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냐고, 무슨 누가 횡령, 착복 할라고 그러는 거냐고, 막 해쌌고 뭐라 하더니 그냥 앉어블더라고. 인자 내가 성질이 나갖고는 발언권을 주라고 했더니 주드라고. 긍게 내가 아무리 학교를 위한다고 하는 것도 좋지만 학비 부담자인 학부모들을 생각해야 될 거 아니냐. 아니 학교를 위한다고 스쿨버스에 금칠을 하고 의자를 전부 안락의자로 바꾸고, 그러면 그것만 놓고 보면 좋은 거다. 근디 돈을 내는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 해야 될 거 아니냐고. 그러면서 호텔에 가갔고 모종의 흑막이 있었니 어쩌니 한께, 요사람이 악을 쓰면서 ‘학생! 어느 과 누구야?“ 어쩌고저쩌고 막 악을 썼더라고. 그렁게 내가 그런 건 잘 하는 스타일이라 내가 48년생이고, 초등학교 때부터 급장선거를 했고, 그래서 민주주의가 뭐인지 어린회 운영도 해봐서 안다. 내가 급장 6년 한 놈이다. 그런데 내가 사회자한테 발언권을 얻어갖고 발언하고 있는데 어디 개밥에 도토리처럼 튀어나와갖고 악을 쓰냐고, 앉어! 건방진 놈의 새끼 하고 막 욕을 하면서 저 사람 쫓아내라고, 회의도 할 줄 모르는 사람 쫓아내라고 악을 썼지. 그걸 이미 인제 정보를 미리 들은 학보사 친구들이 와서 녹음 해브렀어. 내 밑에다 녹음기를 대고. 악을 써 제꼈어. 정득규가 기가 죽어갖고, 악을 마음대로 쓰고 끝났는데, 요 학생이 방송국 그 녹음 테잎을 학교당국에서 뺏을려고 유리창을 문을 잠가븐게 유리창을 dfu고 들어가고, 기자들이 그놈 들고 도망가고 그래가지고, 이틀 후에 그걸 틀어브렀어. 대의원 대회 있었던. 내 발언하고 그런 것을 그래갖고 인자 난리가 났지. 그래갖고 인자 나를 처벌하라고 학교 당국에서는 압력을 넣고, 농대에서 모범생이다 처분할 수 없다. 그러고 나오고. 그래가지고 인자 그 사건을 통해 졸지에 인자 내가 나중에 들으니까 정보 사찰기관에서도 요주위인물이 되고,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히면서 동시에 내가 노렸던 학내 영향력이 굉장히 커졌어요.

2-2 유신저항 시위
구술자: 인자 그걸 토대로 해서 인제 73년 10월에 서울대에서 10월2일 문리대 데모라는 게 있는데, 그 유신 쿠테타 이후에 최초의 저항이었어요. 그런데 그보다 전에 인자 전남대에서 시위를 계획 했어요. 우리가 이 정도 영향력을 확보했으니까 한번 붙자. 그런디 인자 그걸 몇몇 아는 선후배들하고 이야기 한디 어느 선배가 인제 그걸 이야기하면서 저러다 이놈들 또 제적되거나 감옥에 갈 건데 하는 우려하는 이야기를 한 것이 어떻게 학교 당국에 들어가 븟어. 그 소리가. 그래가지고 나하고 박형선이가 대표적으로 끌려가 가지고 형사들에게 내가 송광사, 형선이가 선암사 쪽으로 하여튼 절에 가서 한 삼일? 절 앞에 있는 여관에서 인제 연금 당했다가 풀려나왔는데, 그래가지고 인제 그 계획이 무산이 됐지. 그때 인제 서울로 청량리 시장 쪽으로 보내가지고 문덕희가 가서 등사기 사오고, 준비 다 해놓고 있었을 땐데, 그러고 인자 얼마 있으니까 서울대에서 문리대에서 시위가 터졌지. 인제 그런 식으로 해서 인제 점차 뭐랄까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됐는데, 그 사이에 인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돌아가신 김남주 시인과 이강씨 두사람이 함성 고발지 사건을 일으킨거지. 그것이 이제 유신 쿠테타에서 두달인가 지났을때였을거야. 한두 달. 전국 최초로 유신에 대해 저항을 한 것이니까 그게 처음에 나온 유인물이 함성 그 다음에 나온 것이 고발. 이렇게 됐죠. 함성 고발지 사건이라고 그러는데. 고걸로 해서 이제 이강이하고 김남주가 끌려 들어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보안법으로 들어갔는데. 가까웠던 선후배들까지해서 몽창, 인쇄한느데 돈이 들거해서 뭐좀 반지같은거 돈꿔달라고 하니까 좀해주고 했던 이경순씨, 지금 영문과 교수지? 그런 사람들부터 하여튼 십여명이 들어가서 혼났지. 국가보안법으로 해갖고 대개 일심에서 나오고 강이씨도 오래 안 있고, 74년 2,3월 경에는 나왔지. 이강씨랑 남주도 나오고. 어쨌든 간에 몇 달 있다 나왔는데, 그 사건이 터져가지고 더 이제 광주 분위기를 뭐랄까 고조시켰다할까 학생들에게 긴장감을 주고 자극을 주고,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거 있었지. 그래가지고 인자 학생들이 가서 인자 방청을 하러 광주 법원에 계속 많이들 가고. 그 일정한 영향력을 주고 우리는 뒤에서 계속 그 작업을 학내의 영향력을 키워가고. 교양독서회로 해서. 그럴때 그때 교양독서회 할때 책이 있나, 인자 뭐 최인훈의 광장, 분단 저저 육이오에 대한 공부를 한다든가 등등 분단의 아픔을 공부한다던가. 그럴땐데 그래서 이제 10월 서울대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 데모를 계기로 해서 전국 각지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나요. 유신반대 시위가. 광주 전남대에서도 인제 학생회까지 나서가지고 그때만 해도 어용학생회 되기 전이었으니까 시위를 하고 그랬죠. 도서관에 뭐 점거 농성도 하고, 그런게 인자 열심히 쫓아다녔지. 그때는 인자 뒤에가 안 섰고 앞장선 족이었지. 근디 일화인데 슬픈 이야기야. 인제까지 그런 애기 안했는데, 알아두라고 얼마나 이 세상이 황당한가를. 전남대 도서고나에서 지금 하얀 건물 그걸 백도라고 하던가? 거기서 농성을 하는데 학생들이 인제 배도 고프고 담배도 없고 그러니까 학생회에서 자기들 돈 대고, 대겠다고 그래가지고 인제 담배, 빵, 이런 거 삼립빵 그때는, 그런거 인자 몽창 매점에서 이렇게 가져오는데 학생회에서 가지러 가니까 이미 벌써 학생회를 팔아가지고 벌써 싹 가져간 사람들이 있었어. 그렇게 세상들이 무섭더라고 근게 거 매점 주인은 농성하고 있겄다 학생회에서 급하다고 이래저래 한 소리 하고 하니까 믿고 준거지. 그걸 또 빼돌리는 학생들이 있더라고. 그렇게 무서와요. 하여튼 세상이. 그런데 하여튼 그렇게 해가지고 열나게 시위하고 어쩌고 그랬는데 처음에 구속하던 정부에서 유화책으로 그해 말에 다 내놔브러 학생들을. 그래갖고 방학, 그러니까 인자 방학 동안에 봄철돼서 준비한다고 플랜카드 만들기 위한 큰 것을 들고 다닐 순 없으니까 양쪽에다가 막 끼어가지고 펴가지고 들고 뛰는 그런 거 생각했었는데, 대나무 삼십센티 간격으로 짤라서 대나무 마련하고, 인자 자금 비축한다고 이야기 해 가지고 박형선이랑 이야기 해가지고, 등록금 어차피 짤리고 감방 갈 거 등록금 내지 말고 자금으로 쓰자, 하숙비 밀린 자꾸 뒤로해서 몇 달 꺼 인자 자금 마련 했지.

2-3 민청학련 사건
구술자: 1․8 긴급조치 1호가 나왔어. 1월 8일 날. 74년. 그때만 해도 5년 이하의 징역이었어요. 좋다. 5년? 살지 뭐. 그러면서 나는 73년 가을에 시위를 보고 느낀 것이 전국적으로 아무리 학생들이 떠들어도, 동시 다발적인 시위가 아니면 효과가 없다는 거지, 정부에서 그때그때 그냥, 대충요법으로 눌러버리면 끝나니까. 그래서 전국적인 연결을 갖고 동시다발적인 동일한 목표와 구호를 내세우면서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인자 그때 인자 4․19적 환상이라고 그랬는데, 4․19환상. 한번 이겼거든 우리가. 한 목소리를 내 가지고 동시다발적으로 떠들어서. 그렇게 하자 그래가지고. 4․19적 환상이라고, 그렇게 해서 인자 그렇게 해서 나중에 인자 반성적으로 한 이야기에요, 감방에 앉아서. 이 정권이 이승만 정권 때하고 달리 얼마만큼 정보력이 강화되고, 군경을 완전히 자기들이 확고하니 장악했고 등등, 정권의 강화된 면을 놓치고 옛날 이승만이처럼 허술한 정권으로 생각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어디선가 피를 흘리면 이겨블 것처럼 생각을 한 것이 얼마나 환상이었는가, 인자 4․19적 환상이라고 그랬는데. 어쨌든 인자 그렇게 하고 연결망 갖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가야하니 어쩌니 하고 있는데, 서울 쪽에서 내려온 거예요. 서울대 생들이 중심이 돼가지고. 그래가지고 내려와 가지고 서울대 구상은 나중에 만나서 들어보니까 전국적인 연결망을 가져야, 똑같은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러기위해서는 호남 쪽, 영남 쪽, 서울 경기 쪽, 요즘 서울경기 쪽이 그때만 해도 경기도 지역 서울지방 이렇게 표현했는데. 그 3대 권역으로 나눠서 서로 연결을 해가면서 정보교환 하면서 어떤 동시다발적인 시위준비를 하자 이런 요지였는데, 그게 인자 광주로 내려와 가지고 전남대의 인자 그런 역할을 책임 있게 대표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인자 당연히 끼리끼리 이 뭐야, 함성, 고발지사건으로라든지, 이강씨 이렇게 접촉을 해 가지고, 김남주등 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 그래가지고 인자 내가 추천된 거지. 김정길이가 와갖고 날더러 한번 만나자 하드만 형님 어째 공부만 모범생으로 하실라요? 아니여 인자 나도 싸울 거여. 그래요? 그럼 한번 만나 보실라요? 좋다. 그래갖고 인제 만난 것이 이철이랑 나병식씨, 황인성이, 이런 친구들이 내려왔었는데, 그래갖고 인자 만났지. 만나서 긴 이야기가 필요 없었지 척하면 삼천리였으니까. 좋다, 하자. 그래가지고 인자 나는 그날부로 이철이랑 전북으로 가가지고 이철 친구 지금 국회의원 돼 있지. 최규선인가 그 친구 만나고 전북대 출신, 요 전북출신인데 그래가지고 전북대 법대생들을 세 명인가 소개를 받았어. 내가 인제 전북대, 전남대, 조선대 하여튼 인자 호남지역을 맡기로 하고, 그래서 인제 다음 어디서 만나기로, 그래가지고 다음부터 대전, 속리산, 조치원, 구포 등등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만났는데, 천안 등등. 어쨌든 rfo가지고 인제 전북대생들을 그 뒤로 약속해갖고 만나고 그쪽 한 7,8명 된 사람들하고 만나고 보냈는데 이게 일정한 거리에서 더 이상 물러나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애매한 거여 이제. 내가 술을 못하는데, 선천적으로 못해요. 내가 알콜 분해요소가 안나오니까. 근데 이제 그런 이야기 할라믄 호탕하니 호탕하게 해야 한다고 그래가지고, 요강만 하다고 했는디 이렇게 큰 맥주잔을 두세 개 마셨는디 아조 우아래로 동시에 앉아서 동시에 뿜어내는데 아 죽어 브렀어. 맥주잔 세 개 먹고, 내가 일년이면 맥주 한잔도 못 마시는데, 한 컵도.
면담자: 집안이 그러신가요?
구술자: 그래, 유전이야. 우리 아버님이 술 한잔도 못하셨어. 하여튼 이만큼도 못해. 감주, 보리 쉰밥으로 만든 감주 먹고도 마루에서 떨어져 브렀다고. 내가 초등학교 때. 마당으로 떨어지고 그랬는데, 산딸기 먹고 산에서 취해서 잠들어 블고. 그 정도로 내가 술에 약한데 맥주 이만한 놈을 마셔가면서 막 떠들고 어쩌고 했지. 그래갖고 두 번 그 사람들이 내려오고, 광주에서 또 여관에서 밤새 그래갖고 실패했는데. 나중에 수사 받을 때 들어보니까 이 친구들이 4월 3l일 긴급조치 4호 내릴 때, 일단 이 친구들 중에서 자수한 사람이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d니제 겁이 난거지. 5년 이상 뭐 사형 어찌고 하니까. 이야기 들어보니까. 내가 연루된 것 같으니까 광주에서도 의대생 하나가 또 그렇게 해서 불어 블고, 광주에서도 몇 사람 있었는데 어쨌든 전북대는 내가 그렇게 해서 며 번 올라갔는데 실패했고. 그때 광주에서 광주일고 쪽하고 중앙여고 쪽은 최철희가 맡았었는데, 후배들 부지런히 접촉하고 그랬는데, 그것도 긴급조치 4호 떨어져 브니까 다 위축돼 블고 유야무야돼 브렀고. 그 친구들도 나중에 대학가서 빵잽이 되고 그랬는데, 전남대 의대 쪽 접촉이 딱 그쪽에서 그게 미리 자수해가지고, 그것도 끝나버리고. 하여간에 그렇게 해서 인제 조직을 해 나가는데 민청학련이란 이름은 뭐 내가 저그 쓴 것이 『운동화와 똥가방』이라는 책이 있는데 기기도 대충 들어있고.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쓴 책이 지금 4호까진가 나와 있는데, 음 요고 나중에 3권 있어. 3권. 3권에가 민청학련 관련 사건 내역에 대해서 내가 자세히 썼어요. 3권에다. 1974년 4월, 실록 민청학련 그 3권에가 내가 전남대 중심으로 이야기를 대표로.
면담자: 이게 시리즈로 나오고 있는 책인가요?
구술자: 현재까지는 4권까지 나와 있어. 앞으로도 더 나올지도 몰라. 요건(4권) 주로 인혁당 관련자들 것인데 가만있어봐.(안방에서 3권을 찾아오심) 여기 있어요, 내가. 당시 있었던 상황을.
면담자: 선생님이 쓴 부분을 한번 자세히 읽어봐야 되겠네요.
구술자: 고것 보면은 굉장히 인제 자세한 것이 나와 있제.
면담자: 알았습니다. 사서 보도록 하죠.
구술자: 가만 있어봐요. 내가 요걸 기증을 해서 가져가도록 할 테니. 내가 여러 권 있으니까. 가져가도 되요. 내 그러고 있는데 준비해 가고 있는데, 동시 다발로 이제 시위를 시작할 시기가 다가온 거예요. 4월 한 중순, 초순? 중 초순. 근데 인자 나중에 수사 들으면서 보니까 밝혀진 것이 저쪽에서 이미 다 안테나에 잡아가지고 이걸인자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던 거지. 그래가지고 이제 동시다발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로 예비검속 비슷하니 해가지고 일망타진 돼 버린거지. 이제 전남대만 이제 다른 데는 다 상황이 끝났는데, 일주일간 자수기간을 뒀거든. 4월3일부터 4월8일까지. 그러니까 우리는 9일 날 보란 듯이 이제 학내 시위를 시도했다가 현장에서 다 잡혀 브렀지.

2-4. 자금조달방법-장학금과 화투
면담자:4월 9일 날이요?
구술자: 여기 요걸 보믄 인제 자세히 나올 거야. 아마 이걸 참고로 하면 될 거야. 이것보다 자세히 한 이야기는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 외에는 다 들어있으니까. 내가 이제 전남대 이쪽을 대표해서 쓴다고 썼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내 중심이 아니라 상당히 자세히 썼어요. 그때 이제 전남대에서 내가 아까 말했듯이 돈이 필요한데, 누나한테 거짓말 쳐가지고 급하다고 해가지고 시집간 누나한테서 돈 갔다가 꿔다 쓰고, 그리고 인자 농대에서 준 장학금이 또 있었어요. 3학년, 4학년이 됐을 때니까. 그래서 인자 우리 농대 교수님들 중에 두 분이 내가 이런 감옥에 갈 각오하고 학교공부 때려 치고, 이거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동조해 준 교수님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인제 내가 학교 출결사항 같은 걸 학교당국에서 파악해가지고 정보부에 보고를 해야했어요. 그때만 해도, 그때 내가 강의실에 거의 안 들어갔지. 사람 만나러 다니는데 바쁘지. 그런데도 나를 계속 출석으로 해 준다던가, 이런 식으로 도와주시고. 장학금을 주실 때도 어떻게 했냐면 내가 돈이 필요한데, 장학금을 주는 날짜가 있어요 이제 관례대로. 안 되겠길래 찾아가서 잘 아시잖냐고 내가 일을 하는데 돈이 급하니까 좀 어떻게 학장한테 이야기 해 가지고, 빨리 좀 나 좀 받게 좀 도와주시라고. 알았네, 그리고는 느닷없이 인자 학장실에서 교수들만 박수치고 거그서 내가 받아갖고 그놈 쓰고 그랬는데. 그래갖고 내가 잡혀갖고 학장이내 모가지 잡고 흔들면서 이 새끼 장학금도 사기쳐갖고 받아갔다고(웃음) 김용식 교수님하고 김재용 교수님 두 분인데 하여간에 두분이서 ‘아이고 세상이 윤한봉이를 가만히 안 놔둔다.’고 자꾸 개탄해 쌌고, 정말로 그 양반들 좋은 분들이에요. 도와주신다는 게 그렇게 교수들이 그때만 해도 살벌했으니까, 어쨌든 간에 그렇게 해서도 하고 돈이 떨어졌어.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형선이하고 문덕희 후배 그 시켜갖고 친구들이 화투를 잘 쳤거든. 그때 인자 삼봉 치기를 학생들이 많이 했는데, 내가 밑봉 대줘갖고 따오라고 그래갖고 밤새워서 치는 거야. 그 다음날 아침에 그 돈이 와야 서울 올라가는데 인자 지금 새벽차를 타야 되는데 안 오는 거야. 욕을 바가지하고 있는데 둘이 와 가지고 눈이 퀭해갖곤느 온 거야 ‘잃었어?’ 그랬더니 ‘땄어요’ 그리고 딱 주고는 그대로 자 블드라고. 그래갖고 고놈 가지고 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면담자: 자금 조달을 선생님 화투쳐서 하셨네요.(웃음)
구술자: 아 어 아니 방법이 없지. 왜냐믄 살벌해 노니까 어디서 나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피해가 가니까. 아주 우리는 철저하니 작업을 했으니까. 등록금 안 내고 하숙비 빼고. 그러니까 나중에 다른 사람은 안했지만 나는 인자 주모자라 해가지고 수사 받을 때 이제 내가 천안, 대전, 설악산, 사방을 돌아 댕기고 사람들 만나고 다방에 하루에 이십 잔 마신적도 있으니까 커피를. 그러니까 나는 커피를 마셔도 잠 안 오고 그런 건 없었으니까. 나이가 사십이 넘으니까 미국에서 딱 걸리더라고 커피가. 가끔 마시면 걸려. 그래서 인자 9시 이후로는 커피를 안 마시는데, 사람 만나다 보니까 이십잔 씩 마시고 그랬다고. 인자 돈을 어서 나서 썼냐고 주소비내용을 쓰라, 교통비, 그럼 이 돈은 어디서 났냐. 하숙비 얼마에서 등록금 학교 장학금 어찌고 저찌고 대충 딱 맞아버리니까 다시는 안 물어 봐블더라. 돈 때문에 고생은 안했어요. 인자 그렇게 해서 피해를 안줬고 주변에. 수사과정에서 알마나 우리가 전남대생들이 순진했냐면 나나 모두 다 김정길이하고 이강씨만 나 소개해준 것 때문에 들어갔고, 감방살이 안 해봐 놔서 교도소에 들어가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진짜로 돈이 거기서는 위력을 발휘한다고, 사회에서보다 더. 거기서는 조폭 위에가 밀수야. 밀수꾼, 경제사범. 그러니까 인자 밀수꾼들은 정치범들처럼 전기고문까지 당한다고. 그래도 끝끝내 자기들 나가서 먹고살 돈은 안 불어. 어디다 감춰논 것을. 그러니까 교도생활 하면서도 밀수꾼들이 돈이 많아. 조폭들은 맨 주먹으로만 하다보니 돈이 없지. 그러니까 결탁을 한다고. 돈 있는 놈들 밑에 조폭들이 딱 그 안에서도 쫄따구 노릇을 해. 조폭이 다 잡을 거 같지? 아니야. 돈이 있는 놈이 위력을 발휘해. 그정도로 돈이 확실하니 위력을 발휘한 곳인데. 뭘 아나. 통금위반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놈이 인제 그때 가지고 있던 돈 그게 다 7천원인가 꽤 큰돈이야 그때. 왜 그냐믄 등록금이 3만원 정도밖에 안됐으니까. 아침에 4월9일 날 아침에 학교로 스쿨버스타고 계림파출소 거기서 출발했었는데, 거기서 택시타고 광주 사직공원 만나서 마지막 모의하고 내려오면서 택시타고 왔는데, 계림 파출소 앞에서 내리면서 아저씨한테 기사아저씨한테 등짝을 딱 치면서 ‘자유만세!’ 그래놓고는 7천원을 주고 내렸어. 나는 인자 그때는 얼마나 속창아리가 없었냐면은 다짐을 할 때마다 한목숨 바치자 민족, 민족의 재단에 한 목숨 바친다. 그냥 들어가서 그냥 사형 당하고 가버리는 식으로, 그 (수사,재판)과정이 뭐인지를 모르고, 생각을 안 해븐거야. 수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생똥을, 고문을 당하고 재판이라는 지루한 절차가 있고, 이런 거 없이 한마디로 말해서 한목숨 끝. 죽을 각오로 끝. 다른 생각은 안하고 긍께 인자 돈이 무슨 필요, 다 줘 븐거지.
면담자: 택시기사 아저씨한테요? 자유만세 외치고요?(웃음)
구술자: 그래갖고 워~ 내가 책에다 썼지만 교도소 안에서 백번은 생각했어. 그돈을. 휘회하고. (웃음) 우씨. 얼마나 배고파 블고 춥고 배고파 브렀던지. 돈이 없으니까. 왜그냐믄 민청학련자들은 형이 확정될 때까지 면회도 안 시켜브렀어. 와, 내가 찐방 사라고 왔다 갔다 해 쌌지, 또 짜장면, 통닭, 햄버거, 아이구 돈이 없으니까. 난닝구 하고 빤스만 입고 들어간 거. 미쳐 미쳐 빈혈 걸려갖고 혼나 블고.(웃음) 거기다가 아조, 못 먹어노니까 이제 변비가 생겨가지고.

2-5. 재판과 까마귀
구술자: 근데 나 뿐만 아니라 여기 다 써있지만 법정에 가면 인제 재판을 받으면 인제 주모자급이 처음에 32명이 같이 받았어.
면담자: 아 선생님 재판은 어디서 받으셨어요?
구술자: 서울 고등군법. 비상군법에 의해서. 계엄령 하니까.
면담자: 조사자체 연행도 거기서 하셨어요?
구술자: 아니 여기서 했지. 여기 인자 전남도청, 구 전남도청에서 이렇게 정문에서 나오면은 여그 인자 분수대 이쪽에 있고 그러잖애. 여기 상무관 있고, 지금 있는 민주의 종인가 뭐인가 이상한 거 세워놨는데 그 자리가 차고지라고 그러는데, 거기에서 허술한 일제 때 건물이 있었어요. 거기가 전남도 경찰국 공작분실이라는 자리야. 거기서 인제 쉽게 말하면 간첩 잡는 곳이지. 고문하는 곳이야. 우리도 거기 잡혀 갈 때까지 지나다녔지만 몰랐지. 허술하니 단층 일본 건물이 있었거든. 그것이 전남도 경찰국 공작분실이여. 정보과라하지 지금. 거가 인자 빨갱이 잡는 곳이지. 거기서 수사를 하지 거기서. 그래가지고 인자 끝나고 나서 광주 경찰서하고 서부 경찰서 이렇게 나눠서 넣는데 세상에 4월 달에 들어갔는데, 5월 말인가? 내가 6월? 두달간 있었어 거가. 그러면서 돈이 없으니까 뭐 사 먹을 수도 없고, 그래가지고 거기서 완전히들 유치장생활 두 달하는 바람에 삐짝 말라 브렀지. 빈혈 걸려블고. 그래가지고 인자 서울 구치소로 올라가가지고, 인제 국방부로 다니면서 군법회의 재판을 받은 거지.
면담자: 몸은 서울 구치소에 있고, 조사나 재판 받으러는 군법회의소.
구술자: 그렇지, 긍게 인자 주모자급이 처음 받은 사람들이 숫자가 많으니까 나눠서 그렇게 하는데, 주모자급 재판이 한 32명 있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변호사들끼리 자기네들끼리 한 애기가 뭐냐면 내가 여기다 썼는데, 전남대생들은 찾을라면 간단해, 까마귀만 찾으면 돼, 다 집에서 넣어줘 가지고 한복 딱 입고 있는데, 나하고 강이씨, 정길이, 관복 아주 흉악무쌍한 색깔이지, 그 색깔이 푸리댕댕한거 물 빠진 것들. 그거 입고 초라하게 앉아 있으니까 까마귀라고, 긍게 뭐냐면은 같은 지방이어도 대구 경북이나 부산 애들은 부모들이 인자 다들 경제력이 있으니까 어떻게든지 영치금도 넣고, 법정에도 오고, 재판에도, 옷도 집어놓고 책도 집어놓고, 우리 전라도 어머니들은, 부모들은 감방에 간 경험도 없고 돈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책도 안 들어와 브러. 옷도 없지, 하여간에 비참해 브렀지, 인자 형선이하고 덕희만 한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그것도 뭐냐믄 그 들어가니까 감방장이 인제 대학생 그러니까 순진하게 본거지. 그래갖고 앉어, 일어서 그런 식으로 신고 받을 라고 한디, 둘이 패블고 방장자리 차지하고는.
면담자: 평정을 했군요.(웃음)
구술자: 응 평정을 하고, 야 이 너 시끼 한복 벗어 건방진 새끼야, 옷도 뺏어 입어 블고, 인제 그 친구들은 옛날 고등학교 때부터 주먹 좀 쓰고, 유도 좀 하고 그랬던 친구라. 그래갖고 이제 이 놈들이 일화가 있지. 대학생들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지그들끼리 물어보고(웃음). 대학생들이라면 이놈들은 물정모르는 순진한 부잣집 도련님 정도로 생각했다가 혼나븐 거지. 그래갖고는 나머지는 전부 비참해브렀지.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여기서 공작 분실소에서 조사받을 때 내가 많이 뚜들어 맞은 이유 중의 하나가 본적, 전남 강진 칠량면 동백리, 여기 강자가 무슨 강자지? 나 한자 모르는데요, 이런 개새끼, 장난하지 말고 무슨 강자야? 아 나 진짜 한자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rid 일어나서 두들겨 패는 거야. 지그들끼리 미리 알아, 미리 다 사전 싹끼고 있더라고 들어가 보니까. 모범생에다 뭐 어쩌고 일고 나오고, 그러니까 인제 자기 본적을 한자로 못 쓴다니까 믿어 지것어. 그러니 디지게 맞았지. 그래갖고 인자 얻어맞으면서 악을 쓴거지, 나도 화가 나니까. 내가 알고도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갖고 내가 그때부터 한자를 안 쓰기 시작해갖고 이렇다고 그랑께는 이런 개새끼가 성깔이 째깐할 때부터 이새끼는 반골이었구만 그래갖고는(웃음) 디게 그놈의 한자 때문에 디지게 맞았고만. 그 뭐냐면은 국민 학교 내 짝꿍이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나만 광주로 왔는데 그때는 우리 집이 아버지가 보증서 갖고 망해갖고 학비를 못대게 됐어. 그래서 내가 조대부중에서 장학 3년짜리 장학생을 뽑아서 거그 가갔고 3년 장학금 받았거든. 그래갖고 인자 고등학교는 일고로 와브렀는데, 인제 와서 보니까는 고학하는 애들이 많더라고. 인제 신문배달하고 어찌고 그리고 내가 여름방학 때 내려갔더니기 친구가 서당에를 다닌대. 숲 속에 있는 서당인데 친구 생각 한다 그래갖고 붓글씨 쓰게 창호지, 먹, 붓 이런 거 사갖고는 서당에를 찾아갔어. 둘이 인제 소나무밑에 앉아서 야 너 서당에 다니지 말고, 광주 올라 와 갖고 신문배달하고, 그때는 인제 쇼빵이라고 그래갖고 이게 엄청 부풀어 오른 빵을 저녁에 돌아다니면서 찹쌀떡처럼 팔고 그랬다고. 쇼빵이요, 쇼빵. 그라믄 그런거 팔고 그러믄 내가 시간나믄 나도 도와줄게 학교 같이 다니자. 이 친구는 인자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 같은데, 지나 놓고 보믄 그때는 몰랐는데, 한문을 모르믄 사람노릇을 할 수가 없다고. 논어, 공자 맹자를 몰라를 몰라서는 사람 노릇하기가 힘들고 그래서 나는 서당에를 다닌다, 무슨 소리 하냐 우리 아버지가 그러고 우리 큰형님이 그러는데 큰형님이 대학 다니고 다 집에서 다학 다닐 때니까 한글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글이고, 인자 그때 이승만이가 들어와 갖고 한글 전용 정책 펴고 그럴때, 곧 있으면 한문 못 쓰게 되고, 배울 필요도 없고, 나도 서당에 다녔지만 새끼야 암 소용없는 것이야, 그러니까 아니다 한자가 중요하다 그래서 둘이 싸움이 붙어갖고 내가 인제 일어나갖고는 소리를 지르면서 내가 만약에 앞으로 한문을 쓰게 되면 호로 개 상놈의 새끼라고 악을 썼지. 그 뒤로부터는 안 써븐거지. 뭐냐믄 어릴 때부터 서당에 다니고 그러면서 사자성어라는 게 무서운 거라고 일종의 정치적 구호 같은 건데, 장부일언 중천금, 뭐 한다던가 일구이언 이부지자가 어떻고, 언행일치가 어떻고 뭐 이런 쓸데없는 것들이 그냥 남자는 베짱, 여자는 절개 이런 식이지. 긍게 서당에 다니는 나이 많은 사람들하고 맨 어울리다 보니까 쫄다구 노릇 하면서 듣는게 맨날 그런 소리야. 긍게 인자 한번 한자를 쓰면 호로 개 상놈의 새끼라고 맹세를 해노니까 그놈 지켜야한다고 해가지고 지금까지도 안 써브렀지. 그래갖고 그놈 땜에 디지게 뚜들어맞고, 애로사항 많았지. 이를테면 고등학교 때 집에서 용돈을 부쳐왔어 그때는 우체국으로 우편환 이런 걸로 많이 오는데, 그러면 우체국가서 돈을 찾을라면 지금은 한자를 안 써도 되는데 한자로 일금 이라고 써있으면 일천 얼마하고 한자로 써야한다고. 근디 인자 고거 쓰기 쉽지. 한자 형상이 있으니까, 일고 다닌다고 그때는 일고란 광주에서 이거(최고) 아니야? 사람 봐 갖고는 써주쇼, 그러믄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쳐다봐. 난 아직도 맹세해갖고 배래븐게 한 두 가지가 아닌데(웃음), 하여튼 그때 그렇게 해서 혼나고 그랬지. 그래가지고 인제 재판해서 다 들어갔는데, 서울 구치소에서 이심 끝나고는 인제 상고포기 그리고 형이 확정돼갖고, 안양으로.
면담자: 선생님 형이 얼마나 받았어요?
구술자: 그때 내가 15년 에다가 자격정지 15년, 긴급조치 1호 4호, 국가보안법, 내란 예비음모뭐 그렇게 됐지. 국가보안법으로 들어갔지. 그 다음에 나하고 정길이 김정길이하고 이강씨 서이 빼고 나머지는 인제 국가보안법이 빠졌지. 내란예비음모는 모두 들어가고, 그래 내란예비음도든 뭐든 아나 우리가 인자 진짜 막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법체계도 모르고 들어가 갖고 광주 경찰서에서 인제 그 공작부 수사 끝나고, 광주 경찰서로 넘어오니까 그때사 정식으로 형사들이 와서 조사를 받는 거지. 그래갖고 인자 취조를 받는데 이 자식들이 인자 그때는 독밖에 안 남을 땐데, 정부 전복할려고 했지? 그래, 아니라고 그랬어야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랬소 엎어 블라고 그랬소, 엎어 블라고. 그래갖고 내란일비 들어가고 그런 식이지 완전히. 그런께 공소장을 받았는데 인자, 기소가 돼 갖고, 기소장이지. 국가보안법 몇 조 몇 항 그런디 국가보안법 몇 조 몇 항이 뭐인지 알아야지. 옆방에 있는 정치범한테 도대체 국가보안법 몇 조 몇 항이 무엇이냐 그렁께 웃드라고. 그런 식으로 엉망으로 도대체 정치범도 될 수 없는 놈들을 정치범으로 몰아넣은 거지 인제. 우리도 그렇고, 너무 순진했고. 그라고 인자 안에서 통방 하면서 내란예비음모 정부 전복하자고 했던 부분을 부인하자 하고 짰어. 하이고 그냥 한 번 했다고 했는디 어떻게 엎냐이걸. 느가 뭐 한번 했다고 항께 밀고 가 블자. 다 안된다고 나만 빡빡 우기다가 압력을 너무 받아갖고 할 수 없이 그래 그렇게 하겠다 그러는데, 법정에서 진술을 하는데, 나는 이제 재판 받을 때 다른 사람들 세시에 만나거하고 두시에 만난거하고 차이가 없는데 아 그러 아니라 세시에 만난게 아니라 두시에 만났구요. 재판이 길어. 그래갖고 앉아 있는 사람들 지루하지. 나는 그게 싫어갖고는 검사가 읽어 가믄 그랬죠? 조금 틀린데가 있는데, 그렇다고 합시다. 그렇다, 그렇소, 나갈라고 하니까 유신헌법을 반대하죠? 내가 묶인 채로 여기까지 가 묶어가지고 뒤로 제껴 가지고 ‘부정한다’ 고, 아예 악을 써 브렀더니 마지막으로 딱 그러더라고. 정부 전복 할라고 했죠? 내가 ‘아뇨!’ 그랬더니 아니 엊그제 조사할 때는 했다고 했잖냐고 아 때려서 그랬지 내가 미쳤냐고, 거짓말 하는데 속으로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래갖고 인제 다 승인하고 그거 하나만 싹 오리발 내밀었는데 그래 봤자지, 정치적인 사건이라 인자 공작분실에서 그때 분실장이 5일째 되는데 유치장으로 넘기면서 한 말이 참 그 사람 말이 기가 막힌 말이 뭐냐믄 양담배 주고 그러면서 나보고 이번 사건은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내일 나올 수도 있고, 평생 못 나올 수도 있고, 그 비관도 낙관도 하지 마라. 이건 정치적인 사건이다. 정치적인 사건은 원래 그런거다. 정치적인 환경이나 조건이 바뀌게 되면 너희들은 언제든지 나온다. 그 이야기 했더라고. 맞아요. 15년 어쩌고 했는데 그냥 열 달 쪼금 있다가 나왔으니까 전부, 그거 인제 민청학련 사건이라고. 민청학련 이름은 여기 다 썼지만, 다 알고 있겠지만 유인물 뒤에 뭐라고 쓸 것인가, 주최를 갖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민주 청년 총학생회 연맹, 민주청년학생 총연맹이라고 쓰자 해서 쓴 거지 그것이 조직이 아니거든. 조직이 있으라면 목적, 강령이 있어야하는데, 그것도 없고, 조직구성도 누가 대표고 뭐 대장이고 그런 것도 없고 그러니까. 인자 거기 인자 그것이 반국가단체로 몰기가 어려우니까 학생들의 순수성을 왜곡 훼손시키기 위해서 국민들 반공의식을 이용해서 만들어ㅓ 낸 게 인혁당사건, 그 얹어브렀지. 그래서 이 양반들만 여덟 분이 희생을 당해브렀지, 그 고리로 여정남 선배 경북대 졸업생이 신 여정남 선배가 당해 브렀고.

2-6. 인혁당과 민청학련

면담자: 선생님 인혁당하고 실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전혀 없었나요?
구술자: 그러니까 뭐냐면 사건 자체로 보면은 인혁당이라는 것이 아예 당이란느 조직 자체가 없었고, 옛날에 인혁당을 일차 사건 때 억지로 조작을 했다가 검사들이 기소 못하겠다고 사표 쓰고 그랬잖아. 그래갖고 다 무혐의로 나와 블고 두 사람만 형을 좀 받고 그랬을 정도였는데, 요 사람들이 인자 다시 이 사람들이 모여서 재건할라 그랬다고 인혁당 재건사건의 사건이거든. 민청학력사건에 관련된 부분이, 재건 위야 재건이 된 건 아니여. 그래갖고 엮어 넣은 거여. 근디 인자 왜 그렇게 된거냐면은 여정남 선배가 경북대에서 영남지역에서는 인자 경북대가 정치의식이 높았기 때문에. 학생운동에 전설적인 지도자지 인제 이 양반이 인제 졸업한 이후에 주로 선배들을 이렇게 접촉하는 과정에서 의식있는 사람들 만나게 되거든 또, 마찬가지 사회에서 그런 생각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또 후배들 밥이라도 살라고 그러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자꾸 키울 라고 그러고, 그거 그렇게 해서 만난 분들이 인혁당 재건의 관련자들이야. 인제 여정남 선배가 접촉하고 그런 사람들이. 그러고 또 인제 뭐냐면 인혁당 재건의 사건 사람들은 백퍼센트 조작 이라는 건 참 드물어요. 근게 이 양반들이 의식이 좀 있어. 좀 우리 식으로 우리 시대 상황으로 보면 60년대 예를 들면 그 양반들이 일차 사건 때지만 조끔 진보적이고 민족적이었지. 근디 다만 법을 위반했느냐 안했느냐는 다른 거지. 이제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거기다가 같이 고문당하고 고생을 했잖아. 그러믄 처음의 공유라는게 엄청난 거 뭐랄까 연대의식이랄까 결집력 이걸 갖게 되는데 끼리끼리 당한 사람들끼리 가끔 사회적으로 빨갱이로 몰리고, 소외되고 탄압받고 그러믄 끼리끼리 만나게 돼 있다고, 끼리끼리 만나다보니까 자꾸 이제 쏙닥쏙닥 삐틀어가는 소리들 많이 하잖아. 뒤에서 이 그룹에 여정남씨가 연결이 된 거지. 조직으로 조직원으로 가입을 한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는 인자 아끼는 후배가 된 거지, 쓸만한 후배. 그란디 요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인혁당 재건사건에서 곤란했던 게 이분들 중에서 한분이 대남방송을 라디오 단파 듣고 노트에 메모하고 그놈을 돌려 본 것이 나왔어. 고것이 인제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된 거지. 어쨌든 간에 여정남 선배가 인자 학생운동 쪽 후배들이 이철, 유인택 요쪽 그룹들하고 또 관계를 가졌거든. 왜 그냐믄 학생운동 출신이니까. 긍게 이제 학생운동권에서는 전주대 그라믄 아 전북대 그라믄 누가 있고 이런거지 그래서 이제 그 유신 치하, 유신헌법이 나오자 유신 쿠테타가 나오자 그런 생각들을 비판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위기감을 느낀거야. 야야 큰일났다. 이 상태로 가다가 안 된다. 그래서 인자 나름대로 모여서 쑥덕쑥덕쑥덕하는 과정에서 여정남 선배가 이제 서울, 서울대 출신들 운동권 친구들하고 연계를 가진거지. 동시다발적으로 해야 되지 않겠느냐 등등. 그래서 이제 여정남 선배는 인혁당에 소속이 안 돼있으면서도 민청학련과 연계를 시킬라믄 고리가 필요할 거 아니야, 이 고리로 집어 너븐거여. 여정남 선배를. 나중에 증거 인멸을 위해서 증인인 여정남씨까지를 죽여븐 거지.
면담자: 아 그때는 증인이었어요?
구술자: 아니 역사적으로 보게 되믄. 이 두 사건의 조작에 연계를 고리 역할을 했거든. 여정남씨가 저놈들 작품에 의하면. 그런데 여정남씨가 나중에 이거 순 조작이다 그라믄 이거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블잖애. 긍게 인자 조작 증인을 없애븐 거지. 그래서 여정남씨까지 죽여븐 거지. 젊은 나이에. 사형당해 브렀지. 근데 이제 그런게 전남지역에도 내가 귀국해서보니까 다 나와 계시던데 옛날에 이제 해방 공간이라던가 전쟁 전후, 그런과정에서 이를테면 조끔 좌익적 성향, 민족적 성향을 가졌던 어르신들이 숨을 못 쉬고 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419이후 잠깐 봄이냐 하고 나왔다가, 다시 맞어블고, 다시 또 이제 지하로 들어갔다가, 이게 70년에 이후에 유신 쿠테타 터지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꾸 어른들이 예를 들면은 우리들이 이제 운동관계로 해서 무슨 집회를 한다던가 하게 되면 꼭 와서 얼쩡얼쩡해 왜 그냐믄 자기 관심영역인데 대견하기도 하고 새끼, 자기들 보기에는 좌적 입장에서 보면 새끼 빨갱이들이지. 인제 관심있게 볼 수밖에 없지. 자기 좋아하는 남녀관계 그렇잖아 자꾸 얼쩡얼쩡하듯이. 근디 인자 우리는 애써서 저 사람 가까이 하면 나중에 혼날 수도 었다. 조심. 일부러 그래가지고 피했다고. 광주에서도 많이 피했어 그사람을. 행사 끝나고 남녀은 인자 한쪽에 가서 술 먹고, 꼭 그 자리까지 와. 그라믄 우리는 빠져 나와블고. 근디 여정남씨는 그런 거 안 했어. 거리를 안뒀든 거지. 그래븐 것이 당해븐 거지. 광주에서는 그걸 무척 조심 했다고 90년대 와서 보니까 그 양반들이 다 전면에 나와 갖고 통일운동한다고 뛰어다니시고, 그러다가 한두 분 돌아가시고 그러는데 70년대만 해도 그양반들 내놓고 움직이들 못했어. 뱅뱅뱅뱅 돌았지 주변에. 긍게 인자 예를 들면 내가 75년에 내가 처음으로 보도연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보도연맹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듣게 되었냐믄은 민청학련사건 징역살고 그래갖고 나와 갖고 75년 2․15조치로 석방이 됐다고. 그래갖고 나와 갖고 몇 달 있다가 내가 기독병원에 재중병원이라고 그러지 거기에 인자 누구 문병을 갔다가 나오는 길에 화장실에 들렀어. 남자화장실이라고 서 있는데, 오줌 싸느라고 서 있는데 인기척이 나는데 돌아볼 거여 옆에 사람이 서 있는데, 오줌 싸느라고 서 있는데 인기척이 나는데 돌아볼 거여 옆에 사람이 누가 있다고 신경도 안 쓰는데. 근데 갑자기 나이 드신 분이 ‘고개 돌리지 말고 내 이야기 좀 들어주쇼.’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고개 안 돌리고 가만히 있었더니 보도연맹 이야기를 하는거여. 그래가지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연에 대해서 ㅇ라고나 계셔주쇼. 관심 좀 가져주쇼/’ 그러고는 안돌아봤어. 고개 돌아봤다가는 누군지 알으믄 골치 아플 것 같애서 그래가지고 인제 보도연맹이라는 말을 억울하게 죽은 이렇게 전쟁 직후에 그랬단 이야기를 갖고, 기회만 닿으면 시골에 가서 어른들 만나면은 보도연맹이라는 게 뭐예요? 그라고 인자물어가지고 보도연맹이 얼마나 무서운 학살사건인가에 대한 내막을 알게 되었지. 근게 나는 80년 81년 미국 간 이후 미국에서 5월 강연 같은 거 하게 되면은 양민학살의 역사와 518 이런 주제로 하곤 했는데, 그래갖고 제주 4․3, 보도연맹 이런 사건들부터 얼마나 많은 학살을 했는가 하고 연결시켜가지고 5․18 그랬는데, 그런게 인자 거기서 그 보도연맹이라던가 살아남았던 사람들 중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은 내 손잡고 울고. 그러다라고 그러면서 그들이 들은 이야기 또 듣고, 그래서 나는 80년대부터 많이 알았지. 근게 그런 흐름 그 사람이 내 오줌 쌀 때 따라 들어온 것은 나가 인제 신문 지상에 방송에 많이 나오니까 날 알아본 거지.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민족운동의 입장에서나 좌익 입장에서도 커 나오는 새끼 정도로 보는 거지. 그니까 슬그머니 자극을 주는 거지. 그런 예가 많아요. 그런 자극이라는 게 윤강옥이라고 민청학련 사건 때 인자 문리대 생이었는데 들어갔다가 지금은 한창 김대중씨 따라다니다가 서울 수도권 그 쓰레기 매립장 이사던가 간사론가 있는데, 그 친구 이야기도 들어보면 재밌어요. 교도소 안에 있는 좌익수들 중에서 장기수들, 비전향 장기수들 이 교화내지 전향하기 시키기 위해서 교도소들 마다 현장 시찰 프로그램이라는 게 있다고. 그래갖고 새마을 운동 잘 돼 있는 데, 잘돼 있는 공장, 보면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발전 했는가 이런 걸 인제 보여주고 인자 보고서 소견문, 소감문 같은 거 쓰라고 하고 봐갔고 근데 삐딱하니 써갖고 맨날 뚜들어 맞고 그러지. 그래서 가까운 사람이믄 70년대 이야기 들어 보믄 지금도 소가 발을 갈고 있다. 북조선에서는 트랙터로 하고 있는데, 이따위소리.
면담자: 아 소감문을 그렇게 쓰는 거예요?
구술자: 그런 식으로 쓰는 거야. 비전향장기수들 그 사람들이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인데. 그것 아니믄 살아있는 의미가 없는데, 그라믄 인제 뚜들어 패 블고 그런식이지. 근디 인자 거기 사람들이 사직공원 팔각정엔가를 공원에 나왔었던 모양이야. 강옥이가 무심결에 거기를 갔는데 사복 입혀서 나오고 교도관들도 사복을 입고 모은대잖아. 근데 거기서 좌익수 한 사람이 강옥이를 보고, ‘현실을 직시해!’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키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거야 이 사람이. 게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러는데 그래서 인제 저쪽 사람이 끌고 가고 긍께는 인자 알아보니까는 교도관이고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그게 그것에 하도 충격이라 뇌리에 잊혀지지 않지. 그런 세상 살다보면 그런 게 있다고. 작은 계기로 인해서 엄청난 변화가 촉발되는 그런 세상이 있는데. 이상해 하여간에. 아까 애기하지만 괜히 원자탄 떨어져도 이 자리를 뜨지 말자 했는디 괜히 앉았다가 다 일어나븐게 나도 같이 따라 일어나블고 머리 깍아븐게 할라믄 하고 말면 말고 이런 결단을 내려븐다던가. 내가 민청 때 나는 좀 특이했는데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내린 다음에 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후배들한테 유서를 쓰라고 했어. 유서를 우리들 가면 죽는다고. 근데 다 유서 못썼대. 왜 못 썼냐 그랬더니 눈물나갖고 못 쓰겠대. 나도 못쓰고 말았는데. 그러고 내가 고향에 내려가서 아버님한테 가서 다른 사람들 다 깜짝 놀래.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냐고. 아버님한테 가갔고 아버님 제가 아무래도 이 정치판 돌아간 것이 눈뜨고 못 보겠어서 학교 제적당하고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죽을 각오했다는 소리는 안했어.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싸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아버님이 이러고 앉아서 듣고 계시다가, 그래 해라. 그런데 앞장만 좀 스지 마라. 앞장 스지 말라는 말은 아버님으로서의 이야기여. 하라는 말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한 말이고. 예, 앞장 안 스겠습니다. 거짓말 치고 나왔지. 그 이야기 들으면 다들 놀랜다고. 대게 인자 부모들 그러믄 벽장 안에다가 넣어 놔 분던가 난리가 나블지, 경찰에 신고를 한다던가. 자식이 죽게 생겼는데 감옥에 가고. 우리 아버님은 해라. 앞장만 스지 마라 그러시는데 내가 인제 징역살고 나왔으니까 일주일 전에 돌아가셔브렀지. 내 그만큼 아버님에 대한 신뢰, 아버님이 나에 대한 신뢰를 가졌기 때문에, 부자지간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제. 긍게 나는 부모님들한테 갑작스런 충격을 주는 것보다 미리 가서 이야기를 하고. 하여간에 세상은 재밌어. 어쨌든 간에 그렇게 해 가지고 민청학련 사건 열 달 조끔 넘어서 남았지.

2-7. 징역살이

면담자: 어디 교도소에 있었어요?
구술자: 안양 교도소에서. 안양에서 잠깐 있다가, 그 다음에 인자 대전. 대전 교도소 특사로 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대전 교도소가 구 교도손데 일제 때 건물 그대로 독립운동 한 사람들, 사상범들 때려잡았던 4동이라는 것이 그거여. 교도소 안의 교도서소. 그래가지고 완전히 철망도 없고 식구통만 있는, 그래갖고 바깥에서만 열어보고 닫아브니까 방은 전부 독방, 운동장도 대전교도소는 이라고 보믄 독방이 이러고 있다고 하면은 요 앞에 이런 식으로 운동장이 콘크리트로 사방이 높게 그래가지고 가운데 나무 하나씩 있는 거여. 그라고 인제 요쪽 구석지에 배수구 하나씩 있고, 그라믄 여가 문이 있어가지고, 여기다 넣ㅇ느 거지. 혼자 넣어놔. 그라고 혼자 가브러.
면담자: 아, 혼자 운동하셨어요?
구술자: 그러지, 대전 교도소에 특사에서는 혼자 운동해. 그라고 여기 들어가서 사방은 4미터 돼. 4미터. 바닥도 콘크리트 높은 담장. 나무 가운데 하나. 여기 인자 혼자서 뺑뺑이 도는거지. 이제 그러다가 어지러우면 요쪽으로 돌고. (웃음) 아주 무서운 곳이야 이거. 근디 교도소마다 분위기라는 게 있는데, 음산해. 대전 교도소. 거기서 이제 출소했는데 아무리 그때만 해도 교도소 겨울이 되면 가마니를 준다고. 가마니 깔고, 바닥에 가마니 깔고 있고. 화장실 유리창이 dqjtdj. 비닐로 덧창같이 해서 막아주고. 가마니 깔고 앉었고. 아 근디 피부병이 인제 교도소에 가면 제일 어려운 게 피부병인데 영양상태가 안 좋으니까 온갖 피부병이 다 있잖아. 피부광「p서도 모르는 피부병이 있다고 그래. 교도소 안에서는 그렇게 종류가 다양한데. 거기서 살고 나와 갖고 일년, 이년이 자나도 안 나은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바깥에서 아무리 치료를 해도, 근데 뭐 약을 바를 수가 있나. 혼자 있으니까 그라믄 인제 혼자서 약을 발라야하니까 벽에다가(약을)칠해요 먼저. 벽에다 칠해놓고 인자 몸으로 가서 상의 벗고, 인자 등을 발라야 하는데 손이 안 다니까. 그래갖고 인제 몸으로 인제 벽을 문지르는 거지. 근데 겨울에 얼마나 콘크리트가 차요. 섬뜩섬뜩하지. 그러니 제대로 발라지지도 않고. 제대로 낫지도 않고 그래서 피부병으로 고생들 했고. 그렇게 해서들 다 어떻게 살고 나오는데.
면담자: 선생님 통방 같은 거 안하셨어요? 특사에 있는 선생님들과.
구술자: 아니 대전교도서에서는 특사가 구조가 여기가 우리가 들어가 있는 여가 특사 병실이여. 병실이었어. 그란데 병실도 한명씩 들어가게 돼 있는 거야. 그 다음에 특사가 요쪽에가 있고 운동장이 여가 운동장이 있고 그래갖고 여기서 나와서 여기서 운동을 하고 그랬던 거야. 긍게 옆에 사람들하고 통방을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면 여가 철창도 다 닫아져 있으니까 만날 수도 없고, 이건 말만 들었지. 우리는 특사 병실에만 있었으니까.
면담자: 민청학련 관련된 사람은 여기 특사 병실에 있었던 거예요?
구술자: 그러지. 여기 특사 병실에.
면담자: 왜 선생님 병실에 있어요?
구술자: 공간이 없으니까. 독방에다 널라도 보니까. 그러니까 전국 각 교도소로 나눠졌는데 우리는 대전으로 가서 거기서 있다가 나왔는데.
면담자: 대전으로 몇 명 가셨어요?
구술자: 대전에 한 그때 아홉명인가? 각 교도소로 나위어. 근데 하여튼 세상 평범하게 산 사람들이 못 겪을 것들을 겪으면서 많이 배웠지, 세상사가. 많이 배왔고 지금도 속없이 하루는 인제 출소하기 1호 조치 며칠 전에 갑자기 교관들이 와 가지고 ‘효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근게 나는 또 아 효도, 부모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불효고, 부모님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만드는 게 효도다. 나는 불효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 얼굴에 똥칠을 했냐 뭐냐, 당당하니 할 이야기 할 소리 하고 그랬는데. 그랬더니 ‘그래?’ 하고 넘어가고, 그 인자 나중에 나와서 보니까 우리 아버님 돌아가니까 동아일보에 크게 나왔어 이제. 나 때문에 홧병으로 돌아가셨다고 그래가지고. 인자 그 기사보고 나한테 물어 보드라고. 그놈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들었을 거여. 저기 아버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말 안 해주니까 나와서야 알게됐는데. 교도소 생활 중에서 두가지 것만 내가 이야기 할 것이 있는데, 하나는 이제 재판과정에서 교도소에서 법정으로 가는데 서대문 구치소에서. 김지하씨랑 모두들 같이 재판을 받았거든. 그니까 지하 형님이 맨날 우리보고 너는 뭐 전봉준 닮았니? 너는 김개간 장군 닮았다드니, 그러면 인제 나하고 정길이 강이씨한테 자꾸 인제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또 유행가 이야기가 나오면은 김 거 나훈아보다 뭔진이?
면담자: 남진.
구술자: 남진 맞어. 남진이가 잘 부른다고 빡빡 우기고, 다른 사람들 다 나훈아가 낫다고 그러는데(웃음), 그래갖고 맨 전라도 애기만 하는 거여. 그 나는 처음에 뭐 저렇게 편협한 뭐 그때는 지역주의니 뭐니 그런 용어도 안 쓸때니까 그러지만 뭔 저 양반이 저렇게 전라도에 대해서 묘한 집착이 있나. 병적이다 그랬어. 뭐 황톳길이 어쩠고 그러면서 그 김지하씨에 대한 좋은 인상에 상당히 찌그러졌어. 뭐 저렇게 편협하노. 전라도 경상도 가르고, 가수까지 빡빡 우기고 앉아있고. 그런데 이제 재판 과정에서 이 까마귀, 거의 우리 전남대생들 재판할 때는 가족에게만 가족 한두명에게만 방청을 허용했거든. 그때 변호사가 법정에서 구속되고 그럴 판인데 뭐 안와, 이쪽은 다른 지역에서는 다 올라와갖고 있는데 우리는 없어. 그라고 인제 뻔하지. 안양에서는 인제 그때가 10월이면 추울 땐데, 내의도 없지, 런닝 바람에 양말도 없지, 고무신신고 이라고 뛰어 오는데, 그때 일본 하야까시하고 그 다음에 누군가 두 사람이 있었는데, 민청학련 관련 사건 관련으로. 한 사람은 특파원이고 한 사람은 모르겠는데. 하야까시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내의 양말 이런걸 주더라고. 그때만 해도 이 전라도 촌놈이 내의는 동내의만 있지. 가을에 입는 얇은 내의는 생각도 안 해보고 살 때였는데, 얇은 내의를 주더라고 일찍. 첨봤지 나는 그때만해도 입은 사람도 안 봤으니까. 그런데 인제 받고 싶은데 아무래도 일본놈들 것은 받아야 뭐 어쩌고 생각하다가 돌려줘 브렀어. 아 그럴 수 있냐고 고집피우지 말라고, 그 인자 다른 지역 애들은 다 양말신고 그냥 내의 입고 뛰는데 그냥 검정 고무신에 맨 양말로 란인구 바람에 뛰 다니고, 맨발로 뛰 다니고 그러다가 인자 다음 재판 또 끝난 2차, 3차들 인자 서울구치소에 온 거예요. 인자 온다고들 누구야 그래서 얼른 내다보니까 전대생들 후배들이 오는데 그때 인자 눈물이 나오던데. 내가 서울 구치소에서 이감을 할라고 나오는데. 가지고 있는 짐들을 다 가지고 나와야 할 거 아니에요. 지금도 기억나, 서경석이부터, 서울에 있는 애들은 그걸 범털담요라고 하는데, 호랑이 그려지고 그런 두툼한 우리는 집에서 그걸 본적이 없지. 고놈에다가 온갖 책에다가 해 갖고 한복 입고 안에서 잘 먹고 운동은 안하니까 디룩디룩 살들 쪄갖고 이러고 매고들 나오는 거야. 근데 뭐 나나 정길이 이강씨나 똑같지 그냥 이제 교도소에 인제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이 있는데, 매점에서 수건도 제일 싼거, 비누도 제일 싼 거 이렇게 되거든, 란닝구도, 수건도 제일 싼거 폭 요만해. 길기만 하고 몇 번 써 갖고 칙 찍어지는 그런건디 고놈을 요렇게 접어서 바느질 하고, 끈 넣어서 그것이 살림 보따리가 되는 거여. 그것이 개털들의 보따리야. 그 보따리가(웃음). 제일 싼 그 수건으로. 고놈 하나에다가 인제 빨래비누 반 쪼가리 세수비누 요만한 반조각, 치약, 칫솔, 빤스, 란닝구 하니씩. 왜그냠느 잠깐 합방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 얻은 것들. 그래갖고 그래갖고는 다 독방에 나머지 기간에 독방에 있는데. 인자 달랑달랑 그것을 쇠불알이라고 오뉴월 쇠불알이라고 탁 들면 요만해가지고 이렇게 늘어져 있으니까, 고놈 하나 달랑달랑 들고 손가락에 끼여 가지고 나가는데 다들 이라고 들고 나오는 거야. 황당해블지 나는. 뭐여 이거 나는 요만한 놈 하나 쇠불알 하나 들고 있고 저놈들이 이렇게. 그래갖고 인자 안양으로 왔었는데, 어 저 후배들 온다고 그래서 나가서 티비 창문으로 우~하니 오는데 형선이하고 덕기하고 주먹으로 해갖고 한복 뺏어 입은 놈, 물건들 좀 뺏었는가 이라고 좀 들고 있고 나머지는 이학영이부터 시작해서, 열댓 명이 다 나 같은 쇠불알 하나씩 들고, 못 먹어 노니까 인제 뻔하지 기미하고 주근깨 하여튼 적당한 표현이 없는데, 꾀죄죄 해갖고 집 나간 애기들 얼굴 해갖고 그라고 걸어오는데 다 하얀데, 막 눈물 나올라고 그러더라고. 아하 지하형이 저래서 그런 소리를 했나 보구나, 전라도. 그거 한번 처절히 느낀 적 있고. 근디 인자 그걸 나는 배타적인 저라도 지역의식이라던가 그렇게는 안 받아 들였어. 현실이 이렇구나. 그 다음에 인자 책들인데 하루 종일 앉아있는데 독방에서, 책이 들어들어오나. 인자 다른 방 다른 대학생들한테 빌려보는 거지. 그라고 인자 자기들 볼만한 열권 들어오면 그중에서 보고 싶은 책들 싹 빼놓고 인자 나머지를 별 볼일 없는 것을 주는데, 빌려서 보믄 안에가 인자 은행잎도 들어가 있고, 그 밑에가 뭐 죽는 그날까지 기다리겠어요. 그라고 딱 본게 여자친구들한테 온 거야.(웃음) 그런 것들이 몇 있는 거여 인자. 그때 인자 느낀 거 생각한게 뭐냐믄 그래 내가 나가 면은 다음 징역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옥바라지를 충실히 해야겠다. 두 번째가 우리는 여자가 한명도 없지 인자. 우리 민청학련사건 전남대가 학교로는 서울대 다음으로 숫자가 많은데 17명이 구속되었으니까. 두 번째로 많아요. 근데 여자들도 운동가를 키워야겠다. 그런 다짐을 좀 하고 나와갖고 그걸 실천에 옮겼는데 그건 나중 이야기고. 그 다음에 이제 한 가지가 내 인생 차원에서 사상적 차원에서 어떤 자그마한 전기가 됐는데 그게 뭐냐믄 내가 농대를 다니면서 어릴때부터 꿈이 있었어요, 나한테. 어린시절부터. 그게 뭐냐면은 세계에서 제일 멋진 정원을 갖는 것이 내 꿈이었다고. 정원을. 그래가지고 막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하고 호수가 어떻게 하여튼 뭐 외국 영화를 보거나 시진첩을 보거나 하 이런 정원을 내가 가져야지. 묘한 거 있어갖고 대학 다닐 때 내가 축산학관데 임학과에 조경학이라는 게 있어요. 고걸 또 학점 신청해가지고 A학점 맞고 그랬는데. 가서 조경 농촌에 들어가서 목장하고 그러면서 완전히 목가적인 집 그래갖고 정원을 멋지게 꾸미고. 그래서 인제 그 정원을 꾸미는데 뭣을 어떻게 꾸미고 뭣을 어떻게 꾸미고, 근데 이제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하고, 생각한 거 하고 비교해보니까 조경학에가 다 나와 있는 거여. 내가 생각한 것이 긍게 자존심이 팍 상했지. 근데 한 가지 없더라고 조경학에가 정원에 이렇게 꾸미는 것에 있어서. 그게 뭐냐면은 내가 인제 이 호수, 연못 같은 데다가 뗏목으로 만들어서 사방 직사각형이나 원이나 그 우에다가 흙을 1미터, 2미터를 쌓아가지고, 바위도 놓고 나무도 심고, 화분도 만들고 정자 비슷허니 만들고 일종의 인공 섬처럼 만들어서 이 썩지 않도록 그 밧줄을 만들어서, 쇠밧줄을 만들어서. 밑에다가 인자 닷을 놓는거지 그럼은 인자 고게 바람에 따라서 요쪽으로도 밀려가고, 저쪽으로 밀려가고 그럼 인자 이쪽으로 밀려왔으면 내가 나가서 달밤에 피리나 불고(웃음). 그라믄 인자 호수가 바람타고 이렇게 왔다갔다 하고. 꽃을 거기서 얻고 거기서 인자 시나 읊으고 한다는 식으로. 고런 생각을 옛날에 정원생각을 하면서 했었거든. 그건 없는 거야. 책에가. 그런 정원에 다양한 형태의 조경이 있는데 연못이나 호수에 그런 인공 댐을 배처럼 만들어갖고, 그 속에 이렇게 꾸미고 있는 것은 없는거야. 고것은 내 자존심을 찾았지. 그래, 다 다른 것은 있다 하더라도 요것은 나만의 독특한 독자적인 것이다. 그래 나는 꼭 그렇게 해야지 그래갖고 조경학을 에이 맞고 그랬는데. 그런데 대전교도소에 있을때, 그때 내가 지금도 확실히 어느 출판산가는 기억이 안나는데, 현암사같았는데 다산 시문선이라는 책이 나왔어요. 다산의 시학 관련 서적이 아니라 다산이 개인적으로 쓴 시, 그 다음에 편지, 자식들에게 자식들하고 교환한 편지 이런 것들을 뽑아서 쓸만한 것을을 모아서 만든 책이 다산 시문선이었어요. 좀 부피가 좀 이렇게 좀 큰책이었는데, 보통책보다. 그 다산 시문선을 읽으면서 내가 인자충격을 받은게 두가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내가 그때까지만 해도 민청학련사건때 썼던 선언문 중 하나가 민족, 민주, 민중선언 그런게 있었잖애. 민중소리를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뻔하지 뭐 학자들이 쓴거지. 근데 따라서 쓴건데. 나는 어렸을때부터 큰 부잣집만 아니었지만 시골에서 부잣집이었거든. 배고픈지를 몰랐으니까 인제 아버지가 아버님이 보증서가지고 잠깐 어려울 때 빼놓고는, 배고픔을 모르고 시골 부자였는데, 몰락한 지주 집안이었으니까. 그래도 정미소하고 뭐 창고하고 그랬으니까. 근데 인자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 하면서 강진만 유역에 민중들의 처참한 삶ㅇ르 시로 읊은 것들이 여러 편 나와요. 그 시들을 읽다가 너무 충격을 받아븐거야. 이 민중들 고달픈 삶에 대해서. 오. 왜그냐믄 내가 시 좋아해갖고 온갖 시집은 다 모아갖고 서양놈들 뭐 그냥 시 다 허고 우리나라 시인들거 다 모아놓고 거식하고. 시도 쓴다고 써그랬쌌고 그런데, 아 그냥 다산 시문선에 나오는 그 처참한 민중들의 그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삶을 그 비참한 삶의 모습을 그려놓은 시들을 보고는 눈물이 쏟아져 블더라고. 그것이 오늘의 민중들의 삶으로 나한테는 받아들여진거여. 나 이런거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말로 민중 어쩌고 떠들면서 내가 배고파보지 않아서 몰랐구나. 이런 놈의. 그래갖고 다산이 이제 다르게 보이더라고. 아 단순하게 학자가 아니었구나 이 사람이. 이런 민중에 대한 애절함 가지고 있었구나. 그래갖고 인자 거기서 충격을 받은 거 다시 말해서 ㅁ니중에 대해서 이백년전의 인물의 그 어떤 작품, 문학적 작품을 통해서 충격을 받은거야. 그 다음에 인자 그것이 진짜로 나에게는 충격이었는데, 다산이 자녀에게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뭐가 있냐면은 이 농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는 땅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래서 밭둑에도 콩을 심고 뭐 그라고 노는 땅이 없이 그러면서 뭐가 나오냐면은 연못이나 호수 같은데 수면도 뗏목을 뛰워서 이렇게 이렇게 해갖고 거기에 흙을 놓고 거기다도 보리도 심고, 채소도 심어서 생산을 해야한다 이런 대목이 아온거야. 인자 거기에서 내가 완전히 벼락을 맞어븐, 왜그냐믄 다산의 출신배경이 나보다 훨씬 너무나 훌륭한 가문의 자제였거든. 긍께 굶주림을 모른 가난을 모르는 민중을 모를 수 있는 그런 계급적 출신 배경인데, 나는 인자 그래봤자 조끔은 부자라고 했어도 형편없는 그 사람하고 비교하고 아랫계급인데, 나는 그 위에서 이렇게 해서 호수에 정원만들어갖고 거기서 음풍농월할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은 그런 출신배경속에서 고관대장 했으면서 생산을 위해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거기서까지고 놀리지말고 그 공간도 작물을 키워야 한다고 편지에 써놨던거지. 발상은 똑같애. 거기다 뭐 뗏목 뜨;우는 것은 거까지는 같은데 이거 완전히 다른 차원이여.나는 인자 유한 게급적 발상이고 그 사람은 민중적 발상이고, 근데 계급적으로 보면 다른 꺼꿀론데, 그 사람이 유한계급이고 나는 아닌데. 분류한다면은. 나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인제 충격적인 질문이 떨어져븐거여. 얼마나 부끄러워블던지. 독방에 앉아서 몇 일 책을 덮어블고 앉아서 어떤 뭣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났는가. 어떻게 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고 그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는가. 그래가지고 의외로 나는 이제 그 무슨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맑시즘이 어떻게, 뭐 가 어떻고 하는 그런쪽의 충격을 받은 것 보다는 느닷없는 다산 시문선을 통해서 이제 내가 충격을 받아갖고 내가 얼마나 좀 심한말로 이제 부르주아적인 사고를 하고 있고,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은 가서 재판을 받아보는 과정에서 한 삽십이명 인자 일차 주모자급 재판인데, 내가 반공 딱지를 못 뗀 어떻게 보면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왜그냐면 인제 내가 쩐남대 선언문을 썼는데 거기에 어떤 대목이 나오냐면은 그때만 해도 인제 가능하면 들어가서 빨갱으로 안 몰리기 위해서 일부로 북을 좀 까는 내용들이 한줄씩 들어가고 그랬다고, 518직전에도 뭐 이 전남대 시위때도, 북괴는 오판말라 이런 피켓도 들고 그랬는데, 근데 그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괴의 어쩌고 저쩌고 이런 대목들이 들어간다고. 선언문에가 인제 전남대가 유일했다고 그것이. 남침야욕에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괴를 의식해서라도 민주정치를 해야하는데, 이런 식으로 한다 잘못했다, 이런 내용인데. 근데 이제 내가 다산 시문선을 통해서 두 가지, 그 아까 호수나 연못 위에 그거하고, 그 다음에 이제 당시에 그 강진만 유역지역의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한 그 어찌됐든 관료고, 선빈데 그 사람이, 학자가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그런데에 대해서 충격을 받고, 그랬던거야. 긍게 인자 ㅁ낳은 것이 생각을 하고 나서 아 내가 나도 모르게 이러이렇게 형성이 됐구나, 사고나 사상이, 이런 문제점이 있구나. 그래갖고 인자 그 다음부터 다시는 조경이야기 인체 꺼내지도 않기로 하고, 포기. 그러면서 어떻게 마무리를 했냐면은 내가 생각하는 저 정원을 꾸미라고 하니까 호수도 있어야지, 바다도 좀 있어야지 백사장도 좀 있어야지 산도 있어야지, 어쩌고 하다가 보니까 그것이 자연이 돼븐거야. 그러믄 아 이건 내가 혼자서 가질 수 없는거, 이미 나는 다가지고 있다, 언제라도 볼 수 있다, 긍게 나는 가진 것으로 하고 끝. 이렇게 정리를 해 버렸는데, 나 혼자만 가질 수 없고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것, 지구상에 다 있지 ㅇ낳느냐, 이러고 끝냈어. 인제 그런 이제 나름대로 독방에서의 체험이 있었어요. 인자 나왔어. 인자 반공딱지도 상당히 떨어진 채로, 내 자신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리고 그러니까 하하 관제 빨갱이라는게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관제 공산당이. 많은 생각을 했고. 그래가지고 인자 나와가지고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모두 환영회도 하고 영웅대접을 했지 왜냐믄 어차피 내 국내외의 압력과 호소에 의해서 정부가 인자 일괄 석방을 했기 때문에, 그때 인자 찍힌 일부 현 학생이 아니 졸업생들일부하고 몇 사람 빼놓고 다내놨지 그때.

3-1. 월남전 종결과 탄압국면
구술자: 그런데 그때가 인자 2월 16일날 내가 나왔는데 대전에서 빨리 나온데는 2월15일날 그 하루전에 나오고. 그런데 잘 알겠지만 4월달에 들어와 가지고, 9일날 4월 9일날 인혁당 관련 8분이 사형당하셨어. 8분이 그냥 사형당해브렀어. 그때 내가 전남대 거 도서관 앞에 있었는데, 백도 앞에. 그 소리를 전해듣고 얼마나 화가 나는지 거기서 또 내가 일어나갖고 또 한번 맹세를 했는데, 내 한 목숨 다바쳐 이놈의 독재정권, 학살정권하고 맞써 싸우겠다고 악을 썼는데, 약속은 지켰는데, 그것이 인자 충격적인 사건으로 왔고. 인자 이 들어가서 감옥살이 하면서 많이 수없이 되풀이해서 반성한 게 아하~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허약한 정권이 아니라는 거지. 단순한 정권이 아니라는 거지, 거짓, 그냥 막강한 하나의 체제라는 거 이것을 동시 다발적인 4․19식 환상을 갖고 달려들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그러고 우리가 얼마나 힘이 없었고 미약했는가, 시위도 한번 제대로 못해 본 채로 세상만 시끄럽게 만들어 놓고 이거 뭔 꼴이냐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인자 그랬는데, 반성도 많이 했는데. 아 그냥 4월9일날 딱 그런 일이 터지고 나서 사형 집행한거 보고는 진짜 이놈들하고는 사생결단을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제. 그러고는 에 이 약속했던 대로 감옥 안에서 복학이 안됐제, 안됐는데 여자후배들도 좀 의식화 시키고 옥바라지 모임도 만들고. 그래야겠다. 그게 인자 옥바라지를 솔선해서 하자 그래갖고 그때 인자 못나오신 분들 나머지 이영배씨부터 김지하씨 다시 들어가 버렸지 인자 인혁당 사건 조작 폭로했다가 다시 들어가셨는데, 김지하씨 이런 분들에 대한 인제 책 넣고 인자 옥바라지를 개인적으로 시작을 그때 했어요. 근데 글쎄 이 이야기는, 어째든 그건 인자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할까말까. 어쨌든 인자 그러고 있는데 분위기가 처음에는 영웅대접하고 여기저기서 밥 사주는 사람도 나오고, 그랬는데 교수들도 가면 환영하고 막 들어오라 그러고, 어떻게 지낸가 해쌌고 강의 시간 됐는데 십 분 늦게 들어가면서까지 나하고 앉아서 이야기할라고 그러고 그랬는데 월남전이 막바지에 이르러가지고 월남 베트남이 붕괴되기 시작한 거지. 그래가지고 4월30일 이제 베트남 통일이 돼 버린 거예요 끝나버린 거지 인자. 그러고 나니까 이제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게 된 거지. 위기감을 느낀 체 하는 거지 정부 차원에서는 그걸 빙자해 가지고, 탄압국면으로 돌아선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때 민주회복 국민회의니 무니 해갖고 인제 우리들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들어간 뒤로 74년 후반기 만들어진 게 민주회복 국민회인가 있었어요. 광주지역에서는 홍남순 변호사 등 이 양반들이 주축이 되어서 만들고 그랬는데, 모조리 이제 그 민주를 외치는 모든 단체를 인자 깨기 시작한거예요. 어느 정도 심했냐면 그 해 8월에 이제 장준하선생님이 의문사를 하셨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는 완전히 암살로 봤어요 그게. 근데 내가 그때 나는 책판매관계로 다른 데가 있었는데, 광주에서 광주 출신 서울에서 학교다니다 광주 출신으로 감방에 갔다나온 친구 일부하고 광주친구들이 모여서 이 장준하 선생님 추모식 같은 것을 한 거예요. 돌아가셨으니까. 그것도 자취방에 모여서 사상계 같은거 갖다 놓고 몇 구절 읽고 그러면서 근디 그 정보를 이놈들이 이제 듣고는 잡아다가 뚜들겨 팬 거예요. 이제. 그래가지고 누가 이거 제안했냐부터 시작해서 뭣 땜에 했냐고, 등등 그래갖고 뚜들겨 맞고는 그러니까 그때는 월남 베트남전 핑계로 해갖고, 엄청나게 이제 탄압을 합리화 한거예요. 그래갖고 사정없이 조여블땐데, 뭐다 갔다가 이제 강제로 두들겨 패갔고, 탈퇴해서는 탈퇴서약받고 탈퇴서 받고, 반성문 막 받고 깨질 때에요. 다 깨졌어. 전국이 다 깨졌어. 다 깨졌는데, 인자 그렇게 8월달 인데, 그렇게 장준하선생님 추모식 했다가 들어가서 뚜들겨맞은 친구들이 하도 분해갖고, 홍남순 변호사를 찾아가서 변호사님 우리가 너무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이거. 소송을 좀 제기해야겠습니다. 변호사님이 좀 도와주십시오 긍께 홍변호사님이 글쎄... 글쎄... 그래갖고 앉아있으니까 이 친구들이 처음에는 왜 이러나 그러다가 인제 계속 그렇게 사정을 해도 글쎄 글쎄하고 있으니까 배신감을 느껴갖고, 아 그럴 수가 있습니까 뭐 어쩌고 저쩌고, 인자 그라고 나가니까 허허, 계속 글쎄 글쎄하고 답을 안해븐거여. 무서운 사람들이여 무서운 사람들이여 글쎄 글쎄. 인제 나중에 그것을 변호사님이 왜 그런가를 여기저기 다니면서 변호사를 욕하고 원망하다가 알게 된 건데. 민주회복 국민회의 광주본부가 전남본부가 하여튼 그 양반이 책임을 맡으셨는데, 안기부에 끌려가갔고 정보부지? 그때는. 해체 서약을 하라 그거여. 해체한다는 각서를 쓰라고 한거여. 긍게 이 양반이 안한다고 그러니까 이 자식뻘도 안되는 이 나이 어린것들이 홍변호사님 고추를 잡고 30센티 자로 두들겨 패븐거여. 변호사를. 그것도 60이 넘으신 분을. 그래갖고 홍변호사님 도저히 못 견디고 쓰러져븐 거여. 인제 그런 분이 어디가 수를 당해 노니까 고추가 이렇게 붓도록 뚜드려 맞아브렀으니 말을 못하고 있는데 또 뚜들어맞았다고 후배들이 이거 소송을 어쩌고 하자고 하니까 이 양반이 알거든. 이게 소송으로 될 문제가 아니라는걸. 이놈들이 얼마나 무서운 놈들이라는 걸 르랑께 글쎄, 무서운 사람들이여, 무서운 사람들이여, 그라고 안하셨던거여. 긍게 변호사를 그것도 낸호고 인권 무료 변호하고, 엠네스티 활동하셨던 분을 그렇게까지 했을 정도로. 그래갖고 전국에까지 다 깬거여. 다 깨졌어. 모든 민주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게 떠든 조직이 다 깨졌어. 우리는 4월 달에 왔제. 다시 모였는데 뭐냐믄 이 베트남전이 이렇게 싹 끝나게 되고 탄압이 심해지니까 그저 길가에서 보면 오, 하고 아는 체 하고 서로 밥산다 하는 사람들이 싹 보믄 도망가는 옆 골목으로 새 블고, 그걸 느껴 이제. 학교 들어가서 교수님 실 딱보믄 오 왔는가, 근데 어 나 좀 강의 들어가네 그래갖고 도망가 블고. 안 놀아주지, 상대를 안 하는 거지. 완전히 나병환자 전염병 보균자같이 그렇게 상황이 변해 버린 거여. 밥은 저리가고 용돈 저리가고. 그러면서 탄압이 어느정도 심했냐면 이제 학교도 복학도 안 되지, 취직은 말할 것 없지, 집에서는 애물단지지, 이제 집에서도 찬밥. 그랑께 교통 인제 버스 요금이 없어갖고 회의에 못 나올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 된 거지. 그 인자 가정학습 같은, 이를테면 과외지. 그런 것 좀 할라고 해도 부모들한테 저거 빨갱이다, 애 장래를 버린다, 왜저런 놈한테 배울라고 하냐 그래갖고 훼방 부려갖고 막아블고. 담당이 딱 정해져가지고, 그땜나 해도 수가 많지 않으니까 아예숨을 못 쉬게 만든거야. 달달달달달 볶아가지고,

3-2. 월부책장사
구술자: 극단적인 예로는 그 해 말에, 내가 도저히 안 되겄길래, 두가지 일을 벌렸는데 이게 살아야 하니까 먹고 산다기보다는 나 자신이 먹고 산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여기서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버틸라면 서로 의지해야 하니까 뭐 세력을 키우고 뭐 싸우는 것은 둘째고, 우선 우리라도 지켜서 살아남아야한다는 그런 절박감 때문에 모질게 좀 한 것들이 있는 게 인자 그게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월부 책장사 했고 하나는 포장마차 그렇게 했어요. 우선 4월달에 징역 갔다 나온 민청학련세력들이 중심으로 해서 구속자회를 만들었어요. 민주회복구속자회라고 그래갖고 내가 초대회장을 맡았었는데, 그래가지고 뭐 학습도 뭐 체계 있게 못하고 자꾸 만나는 거 이제 서로 의지할 수 밖에 없으니까. 뭐 아무도 우리를 상대해주지 dskg는 그런 외톨이가 돼 있는 상황에서 거 구속자회를 만들었는 게 그 구속자회도 다른 지역은 다른 지역들도 만들었는데 다 깨졌어요. 지그들이 탄압하니까. 근데 광주만 그것을 지켜갔는데, 예를 들면은 이제 포장마차, 월부책장사하기전에, 용봉 축제라고 그러죠, 6월 달인가 5월 달에 전남대 개교기념일 행사. 옥바라지를 하겠는데 그 다음에 이제 이 버스비가 없어가지고 못나오는 정도, 담배를 제일 값싼 담배도 못 살 정도에요. 긍게 인자 나는 아예 운동 뛰어든 이후부터는 가방을 똥가방이라고 그랬는데, 가방이 헐어서 똥가방이 아니라 그 안에 벼라 별것이 다 들어 있다고 그래갖고, 아예 담배를 거기다가 여러갑씩 담고 다녔어요. 빤스에다 런닝구에다가 이쑤시개부터, 하여간 손톱깎이까지 집도 절도 없이 동가숙서가식하고 다니니까. 그 안에 담아논 게 후배들이 가방 열어갖고 담배 가져가고, 옥바라지 해야 하고 돈이 필요하니까, 버스비 없다고 하면 형님, 왜, 서울에서 오랜친구가 왔는데 국밥이라도 하나 사먹고 싶은데 하다못해 돈이 필요한 거예요. 돈이 인제. 그래서 용봉축제 때 가서 얼음, 아이스케끼 인제 케키 장사를 하자 그래가지고 전부 모였어요. 처음에는 호기스럽게 다들 자기도 통을 매겠다고 가다가, 형님 동생하고 아는 동생들이 달라드니까 이 원수들이 난처해갖고 싹 (빠지는 거지), 좋아 그럼 내가 하지, 얼음 매고 악을 쓰고 다닌 거예요. 우리 어렸을 때 들어서 얼음과자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인제 학교당국에서도 처장이 나서갔고 사람을 시켜서 날 좀 보잔다고 갔어, 갔더니 목표액이 솔직히 말해서 얼만가, 우리가 주께 좀 가소, 무슨 소리하요, 우리 깨끗이 돈 벌어서 깨끗하게 쓸라고 그러는데, 우리가 사 먹으면 될 것 아닌가, 그거야 내가 장산디 좋죠, 인자 한 통을 딱 사주더라고. 직원들 나눠주고, 그래서 얼른 또 한통을 받아갖고는 또 악을 쓰고 다니니까 오라고 하더만 아 목표액을 말하라고 주께. 인자 그래갖고 인자 안받고 팔고 다녔는데, 끝까지. 악을 쓰고 다녔어요 그냥. 인자 악밖에, 그때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악밖에 없었어. 독, 뭐 다른 거 없어. 신념 그런 건 뻘소리여 그거 뻘소리. 길게 봤을 때 이야기고, 상황 상황을 놓게 되면은 얼마나 독하냐, 악하냐의 문제, 악을 뽐느냐의 문젠데, 그래갖고 인제 그걸 팔고 다니고. 그 다음에 이제 지금은 인제 후문에서 들어가면 오른쪽이 요란해져 브렀던데, 거가 거의 한 만평이상이 그전에는 거 공터 였어요, 초지, 풀밭 그래갖고 전남 농대에서 초지를 조성해갔고 거기를 벴다고요, 사람들을 사서. 거 지금 건물들어서고 난리가 났던데, 전남대 깝깝하게 돼 브렀는데, 옛날에는 시골이었는데, 인자 전남대 내가 축산과니까 농대쪽하고 이야기를 해가지고, 교수들한테 이야기를 해갖고, 일당사서 사람 일당쓰고 쓸 바에야 우리를 써라. 우리가 베서 돈도 이렇게 이렇게 좋은데다 쓸란다, 그렇게 해라. 거기서 인자 벗어 부치고서 베는데 남주가 또 김남주 시인이 입이 걸거든. 그런데 학생들 웃고 떠들면서 왔다갔다 하더니 남주가 화가 나가지고는 욕을 욕을 하면서 시발놈들아 느그들 그렇게 세상이 좋아서 낄낄거리고 웃고 사냐부터 악을 쓰고 그런 일도 있고 그랬는데, 그것도 이틀하고 쫓겨나 버렸어. 압력이 들어와 갖고, 그래서 인제 내가 그러던 차에 김정길이가 몸이 아주 안 좋아진 거예요. 왜 그러나믄 전기고문을 민청때 받았는데, 전기고문 유일하니 김정길이가 받았는데, 날이 으스스하거나 비가 오고 그라믄 몸을 추스르지도 못할정도로 지팽이를 집을 정도로. 그렇게 됐는데 골, 우리가 옛날부터 어렸을때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골병 든 사람은 똥물, 오래된 똥물을 마시면 좋다더라. 인자 고 이야기 돈이 없으니까, 해결책이. 그게 또 어떤 사람들이 좀 흑염소를 고아서 먹이면 좋고. 그 인자 오래된 똥을 어딨냐 절간밖에 없다. 절로 보내야 한다. 절로 보내면 먹고사는건 거기서 돈내야 하숙인데, 돈, 흑염소 사먹일라면 돈, 어떻게 하냐 답이 없어, 좋다 그럼 내가 나서겠다. 그래갖고 내가 월부책장사를 나섰어. 아 뭐 왕비 열전부터 시작해서 희망없는 아조 책이라도 돈 버는게 목적이니까. 그래갖고 딱 해갖고 개학하고는 젤먼저 서부경찰서 정보과정을 찾아갔지. 인자 그 사람이 우리들 뚜들어팼고 그런 사람중에 한 사람이여. 책좀 사주쇼, 나도 인자 먹고 살아야 될거 아니요. 복학도 안시켜주고, 취직은 뭐 당신도 뻔히 알잖애 안해 더 안시킨다는거. 과외도 못하게 하는 판에 먹고 살아야하니까 나좀 사주쇼. 그랬더니 사주더라고. 대학에 들어가서 교수들을 좀 만났더니, 교수들이 뭐라 하냐면은 그렇게 나 만나면 반갑게 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총장한테 먼저 가보소 총장이 사면 참 우리가 편하겄는데, 우리도 사기가. 그라고 총장한테 갔어. 사주쇼 그랬더니 이건 판공비가 아니라 내 개인 공금에서 나간 돈이라고 함녀서 사주더만. 그래갖고 인자 팔고는 교수들을 찾으러 다닌거여 교수 연구실마다. 속없이 나는 많은 교수들이 사줄줄 알았어. 그랬더니 막 뭐 어쩌고 저쩌고 핑계를대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나브렀어. 아예인자 교수들 저 복도끝에서부터 시작해서 누구 교수실인지도 안보고 고개 숙이고 땅땅 뚜드려갖고 열고는 책좀 사주쇼. 아 뭐 어쩌고 안녕히 계십쇼. 땅땅 두드리고 계속 방마다 돌아다녔어. 그래갖고는 한번은 얼마나 화가나는지 너무 안사주니까 한 놈도. 비율로 봐서 너무 안사줘븐게 상대 앞에서 문리대 옆에 상대 앞에서 악을 썼어. 이런 개새끼들이 없다고, 쌍놈의 새끼들이 형도 확정되기 전에 제자들 모가지 짤라놓고, 제자들이 이러이러한 일 이렇게 이렇게 해서 과외도 못하게 탄압받는거 뻔히 알면서, 개새끼들이 좀 그런데좀 쓸라한게 책 한권 안 사준다고. 교수새끼들 내가 전부 고무신, 그때 내가 고무신 신고 다녔는데, 귀방맹이를 발라븐다고 도둑놈의 새끼들 말이야. 제자들 죽이고 잘 먹고 잘산다고. 악을 막 쓰고 그랬더니 인자 소문이 났어. 인자 얼른 사줘브러야지 욕을 바가지로 안 먹는다더라.(웃음) 그래갖고 인자 사정없이 뚜들고 다녔는데. 내가 그때 이제 재수달이 없으니까 어떻게 돼 브렀냐믄 그 내가 그 허리가 인제 안 좋아져가지고, 고문의 후유증이 뚜들어 맞은것도 있고, 자세가 나쁜것도 있고 그래가지고 그 그래갖고 이제 이러고 다니는 못 피고. 어정어정하니 근데 이게 찜질하는게 있어요. 핫팩인가 고걸 담고다니면서 가방에서 좀 꼽아서 주라고 댑혀주라 해갖고 이렇게 딱하고 다니고 그랬는데, 아 그러고 다니다가 아폴로 눈병이 유행이 됐는데, 눈병이 와브렀어 인자. 그래갖고 인자 여가 여 소눈깔처럼 이만해져갖고 고름이 끼고, 안대를 매고 허리 이래갖고 이 본관에서 학생회관 식당있는데 지금은 구 본관 요쪽건물. 지금도 학생회관 거가 식당있제. 거리가는 이렇게 길이 좁아. 걸어다니는 길이라. 옆에가 잔디밭이고. 거기다가 왕비열전부터 시작해서 삼국지부터 시작해서 온갖 책 선전팜플렛들 얼룩덜룩한거 쫙 펴놓고는 허리 못 펴니까 가압 여기다가 놔두고 여그(눈) 안대하고 책좀 사주쇼, 책좀 사주쇼 얼굴도 안들고. 그라고 한시간내 한나도 안 사드라고. 그래갖고 그라고 돌아다녔어. 악으로. 요놈이 좀 어지간 하니까 또 요리 오더라고. 요쪽으로 안대 돌려매고. 그래가지고 인자 화가 나갖고는 독심으로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해갖고 지방으로까지 해서 강진, 완도, 장흥 막 돌고. 그래가지고 그때 당시에 2백 4십만원을 벌었다고. 엄청 큰 돈이지. 그래갖고 내가 두달하고 그만두니까 서울 본사에서 나 좀 더 해주라고 찾아서 내려오고 안만나고 그랬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때 독으로 했어요. 교수들도 욕 나한테 많이먹고 그러고 또 일면 세월이 흐르고 보니까 그 좋지도 않은 책을 교수들보고 사주라고 빡빡 우긴것도 억지는 억진데, 그때는 인자 그 생각보다는 자기들은 좀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인자 안해주니까 독기가 어떻게 하면 독선이야. 일종의 나는 옳으니까, 선하니까 안 도와주면 나쁜놈 이렇게 되는거지. 잘못이긴 한데 그때 내가 심하게 했어. 하여튼 긍게 인자 뭐냐믄 인제 독밖에 안남은거여 악밖에. 이 상황을 이겨낼라믄 이렇게 할수밖에 없다. 그래갖고 새끼들아 경찰도 사줬단 말이야. 근디 느그가 안사줘야 말이지. 느그 봉급이 얼만데, 이런 식이지. 그래갖고 안대 매고 다니는데 한번은 내가 보길도까지 들어갔어 인자 완도를 돌아다니는데 보길도 하면 전남대, 무슨 시험장인가 하여튼 건물이 있어요. 콘크리트 건물이 있는데, 전남대건물이여 농대것인가 무슨 임업 현장인가 인자 잠자리가 있나 시골에 그때만해도 관광지로 알려지기 전엔데 그 인제 그 건물 옥상에서 저녁을 암것도 없이 친구도 뭐고 없이 거기서 날을 새는데, 동네 꼬마들이 밑에서 막 놀고 있더라고. 그 인자 그때는 어떤 자세로 그때 그때를 살아갔냐 그 이야긴데 내가 인자 누워서 별 보고 있다가, 내가 누군가,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나선 인자 명색이 운동가다, 운동가가 이 보길도라는 섬에 들어와갔고 내가 무엇인가를 해 놓고 나가야학건데, 여기서 잠만 자고 나갈 것이냐. 뭣을 할까. 그래갖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또마들한테 지금부터 씨를 뿌리자 그래작고 꼬마들 홀렸어, 그래작고 노래를 가르쳐준다고 그래갖고 인자 꼬마들한테 애들 재밌는 이양기 잘하니까 어렸을때도 뭐 교회에서 노래, 이야기대회 같은거 항시 일등하고. 그래가지고 애들 엄청 웃겨가지고 딱 끌어모아놓고는 내가 그때 노래를 가르친 것이 이제 그 인자 지내놓고 나면 슬픈 이야긴데 선구자 노래를 가르쳤어 이제. 그 인자 나중에 친일파가 쓴 엉터리방터리 시고 어쩌고 해븐께 김 팍 새는데, 감옥안에서 그렇게 악쓰고 불렀던 노랜데. 이 노래를 이친구들이 어느날엔가 인자 입에 오르내라다 보면, 부르다보면 나이들면 아하 이레 이런 노래였구나 어떤 아저씨가 이렇게 가르쳐줬는데 이게 또 어떤 진로의 영향을 줄수도 있겠다. 씨를 뿌리자 노래의 씨를 그래갖고는 밤새 이제 선구자 노래를 가르쳤어. 애들이 따라서 하여튼 잘 하더라고. 그렇게 해서 인자 보길도 와서는 이정도 그라고 나가고. 지금 박형선이라고 지금 매젠데, 매제가 됐는데 그 친구가 지금 꽤 부자됐지. 그렁게 건설업에 성공해갖고 그때 인제 이 친구도 똑같이 집에서도 찬밥, 복학도 못하고 나 소한도, 그쪽으로 다니고 그럴 때 따라다녔는데. 나보고 형, 술을 좋아하거든, 막걸리 딱한잔만. 무슨소리냐 우리가 뭐 때문에 이걸팔고 다니는데, 아니 형님 딱 한잔만, 한푼이 없을때니까 그대 자기가 나도 그렇고. 이 돈은 우리 개인 돈이 아니야, 엊다 쓸 것인데? 그래갖고 끝까지 못 사먹게 안줘브렀어. 그랑께는 아이고 옷 벗어 부치고 빤스만 수영복이 어딨어, 물에 들어가서 헤엄치고 나와블더라고. 긍게 나는 인자 잊어브렀지. 미국 89년에 왔을때 아이고 그때 그 막걸리 한잔도 안사주고 그렇게 맺혔는데. 인자 그런식으로 팔아가지고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서 정길이 염소 사갖고 절에 들어가라고 구례사쪽으로 보내고. 하여튼 그때 비참했어요 인자. 형님, 인자 집세를 못내갖고 길바닥에 쫓겨나니까 어떻게 해서든. 대인시장 내가 93년에 귀국해갖고 대인시장을 갔는데, 왜그냐믄 대인시장에 들어가면은 이쪽에서 전남여고 있는 쪽에서 이렇게 내려와갖고 대인시장으로 들어가면은 요쪽으로 가면 여기 기사식당이 있었어요. 그때 백원이면은 밥을, 백반을 먹는거야. 그다음에 요쪽 요쪽으로 오면은 팥죽집이 있어. 내가 미국 가기 전에 거가 80원까지 했어요. 거 팥죽이 올라 갖고, 40원 60원 80원까지 갔는데, 그라고 인자 팥죽 한 그릇에 미원, 아 이제 미원이 아니라 당원, 당원하고 인제 나박김치 같은거 하나. 딱 정했어요 그때, 손님오면은 특별한 손님이라고 하면은 국밥, 인자 그것이 최고여. 국밥. 그 돼지머리 딱 걸어놓고 국수 이렇게 사리 딱 삶아서 놔두고 송송송 썰어서 인자 국수하고 해서 주고. 그게 그때 꽤 비쌌지. 그 국밥을 손님 올 때 최고. 그러고는 인제 주로 때우는 것이 팥죽이었어요. 뉴슈가 하고 당원, 그런거 놓고 그래서 인제 그때 생각나갖고 대인시장 가서, 갔더니 거기는 시설이 옛날하고 달리 멋지게 지어져가지고 깨끗해졌던데 옛날에는 허술했는데, 그 인제 대인시장 거기는 안 잊어버리는데. 그래가지고 인제 그걸 가지고 보태쓰고 이러 저리쓰고 그 어려움 속에서 지켜간거예요. 꺽이지 않도록.

3-3. 포장마차
구술자: 그 가을에 도저히 안 되겄기에 안되겄다 나만 뛰다닐것이 아니라 같이 해야것다. 그래갖고 내가 투자를 해서 이제 수레를 두 개 만들었어요. 포장마차. 그래가지고 포장마차를 한팀은 인자 학영이쪽에서 하고, 한쪽은 이제 형선이랑 이쪽에서 덕희랑 이쪽에서 하고. 내가 인제 그걸 만들어가지고 그것도 인제 산 것이 아니라 만들었어요. 수레 허술한 놈 하나 사갖고 와서 위에 언지는 것 등등. 인제 그걸 제제소하는 후배가 있어가지고 거기가서 했는데, 그라믄 인자 새벽부터 인자 시장에 가갖고 돈주머니 만들어갖고 차고, 계란에다가 오뎅, 계란 까서 넣고 어찌고 그런거 하는데 내가 인자 학교에 가서 소문을 냈어요. 후배들한테. 그 아까 말했던 여자회원도 키우겠다, 여자 의식화운동도 하겠다 그랬는데 그 독서 뭐 독 이름들이 그때는 서클들 만든 이름들이 많은디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잊어븐디. 오래가지 못하고 맨날 깨졌으니까. 내가 또 그다음에 바로 들어가블고 그러는 바람에. 이야기를 했더니 오빠들이 형들이 그때는 형들이 이제 포장마차를 한다 그래가지고 와서 이제 어스름해질 때 되면은 수레가 나오니까 그때 맞춰서 나와갖고 그릇도 씻어주고, 오뎅국물도 해주고 이제 준비들 해줬다고. 그러고 인제 죽어라고 형선이랑 덕희는 주대는데로 받아먹는게 인자 소문듣고 선배나 아는 친구들이 와갖고 한자, 그라믄 인자 매상이 오르니까. 계속 이러고 마시고 새벽에 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은 혀가 이라고 돌아가 가지고 형님(술에 취한 목소리로), 그라고 인자 돈보따리 내려놓고 자고, 그런데 하루는 교수들이 와가지고 쓸만한 교수들이 와가지고 다들 민주교육지표랑 관련된 사람들이여. 그사람들이 와가지고 내가 이렇게 막 먹소 막 먹어, 여기서 제일 비싼거 뭔가, 막 먹으라고 그라고 뭐 하다가 그 속 이야기를 하는거야. 이런 상놈의 새끼들이 아니 대학 당국에서 교수들한테 이러이러한데 가면은 이러이러한 놈들이 이런 포장마차를 하니까 학생들 보고 거기 못가게 하라고 지시를 하라고 했다는 거야. 아무리 근다고 새끼들이 학교에서 제적당한놈들이 먹고살라고 한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고걸 못 가게 해야. 그러고 인제 화가 나갔고 자기는 오기로 왔다고, 먹어먹어 내가 내께. 막인자 그러지 당연히. 그 소리 듣고 바로 쫓아갔어, 그 다음날. 학교로 그래갖고 본관 앞에서 이런 개 상놈의 총장부터 개새끼들 모가지 따븐다고. 이런 개새끼들이 없다고, 그래가지고 인자 악을 쓰고 그랬는데 그 다음에는 뭐가 탄압이 들어오냐면 경찰서에서 우리를 잡아가는 거야 인자 단속을 하는 거야 포장마차를. 거가 인자 우리 위치가 장동 그쪽이라 광산동 경찰서가 가까웠거든 지금 동부경찰서하고. 그게 인제 우리 때문에 다른 포장마차들까지 맨날 끌려가는거야. 그래갖고 인자 그 사람들한테 흘려준거야. 당신들 때문이 아니라 저놈들 때문에 근다. 그 사람들이 인자 우리 욕하는 거야. 개새끼들이 먹고 살라는데 장사 훼방 부린다고 빨갱이새끼들이 인자 그런식으로 같은 포장마차들이 악을 쓰고. 그라고 인제 나중에는 이제 잡아들이는거여. 그라믄 경찰서에 가면은 경찰서에 가면은 경찰서에 지금은 주차장 생긴데 그런데는 놔둬블고 유치장에다 너분거지. 그래갖고 하룻밤 자고 즉심으로 넘기는. 그라믄 직심에서 벌금내면 나오고, 아니면 인자 일주일 이내에 구류생활을 하는 거지. 하 인자 학영이랑 등치 큰 놈들이 인자 경찰 잡으러 오면은 수레에 싣고 뛰면은 컵 떨어지고 그릇 엎어지고 난리, 하루는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 이놈의 덕희가 들어와야 될 때가 됐는데 자취방 얻어놓고 있을땐데, 아침에 인자 갔더니 그 유치장에 통금위반자들하고 같이 앉을자리 가 앉을자리가 없으니까 빼곡한거여. 서서 하룻밤을 보낸거지. 얼마나 화가 나던지. 이런 절대로 우리 돈 없으니까 돈 벌라고 한놈한테 무슨 벌금이냐고 몸으로 때우자고 우리는 때죽이 많으니까 교대해가면서 계속하다 보면은 나중에 먼저 들어간 또 나오믄 또 들어가고 이렇게돌믄 되니까 야 다른 사람들 오늘 저녁에 시킬테니까 벌금 내지 말고 구류살아브러라고. 예 알았습니다. 근데 구류를 때우는디 계산해보니까 이번놈 더 나가브러. 그 액수가 할 수 없이 벌금 물고 나와브렀는데. 하여간에 그런식으로 긍께 거기서 무슨 큰 돈 벌 생각은 안했지. 왜그러냐면 그렇게라도 해서 버티지 않으면 예를 들어 집에서 이라고 앉었고 하면 한없이 약해지는거거든. 인자 뭔가를 부딪치고 이 독을 내뿜어야 사니까 악으로 사니까 인자 그런 일을 해가지고 또, 포장마차 본전도 못 찾고 넘어가게 됐는데 그때 젤 어려운 것은 다른 포장마차 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가지고 우리를 원망하는 거지. 견딜수가 없지 그렇게 되면은. 인자 그렇게 해서 포장마차도 버틴적이 있고.

3-4. 탄압국면 2
구술자: 그 다음에 아 내 두가지 것 이야기 해브러야 마무리가 되는데 하나는 이제 내가 돌아가선데, 민청학련사건 2․15조치로 석방돼서 나왔는데, 구속자들 중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나온 사람들이 있어 재판에 안가고 서울구치소까지 갔다가. 그 사람들이 이제 대표적인 것이 이제 이현택이라는 농대생 친군데, 그 다음에 인제 김윤봉, 지금은 이름을 바꿔서 윤환이라고 윤봉인데, 둘다 농대생이여. 둘다 등사기 이걸 잘 못해갖고 이거 민청학련 이거 보면 다 나오는데, 요 지기집 방 빌려주는 애가 윤봉이여. 아무것도 의식도 없는 주먹쟁인데 여 방 빌려줬다는 것 때문에 서울 구치소에서 여기까지 와 븐거지. 그 다음에 이제 그 이현택이라는 그 윤봉이를 우리한테 소개해준 친구고, 그라고 인자 등사를 처음 해보니까 기름 배합을 잘못해갖고 아물해도 글씨가 잘 안 나오는거여. 글씨가 뚝뚝 끼고 그라고 날새기를 하고 그랬는데 그때 인자 내가 먼저 해볼게. 달려 들어가지고 한번 좀 해봤던 애야. 그 친구도 들어가브렀는데.(웃음) 그라고 인자 서울 구치소에서 기소유예로 나왔는데, 구속되자 학교에서 제적을 해븐거여. 같이. 우리하고 같이. 그런데 인자 2․15조치로 나오는데 75년에. 복학을 해줘야 하는 거야 복적을 이놈들이 학교에서 한해주고 있네. 그래서 내가 학교로 가갔고 이름이 무슨 관식 하여튼 새끼 이름이 생각도 안 나는데 총장이. 총장실 난리가 나브렀지. 나쁜 놈의 새끼들이 없다고. 인제 도대체 형도 확정되기 전에 짤라븐 스승이라는 것들이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부터 시작해서 아니 죄가 없으니까 기소를 안 한 거 아니냐 그럼 됐지 왜 복적을 안 시켜주냐, 인자 우리가 정보기관에 알아봤더니 정보과애들이 누구누구까지를 제적하라 지시해 본 적이 없다는 거여. 알아서 긴 거지. 그래갖고 사정없이 퍼븟었어 나쁜놈의 새끼들이 없다고. 그 인제 이놈들이 대뜸 복직을 시켜갖고 그 친구들은 졸업을 했다고. 인제 나는 아직도 제적을 제적생이지만 어쨌든 그 학교당국하고 그거하고 부딪힌 일 있었고, 에 그 다음에 내가 아까 이야기를 여기까지 해브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가.
면담자: 현대문화연구소는 언제 만들어진 건가요?
구술자: 아 그것은 두 번째 나오는 이야기여. 두 번째 징역살고 나와서 이야기여
면담자: 구속자협의회는요?
구술자: 구속자협의회는 인자 첫째 나와 갖고 4월 달에 만든거고.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면담자: 카톨릭 농님회 뭐 이런 것도 다.
구술자: 그것은 아니지 그것이 이제 광주지역 전반에 운동하고 연결된 부분인데 함평고구마사건이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의 연결은 두 번째. 갔다 나와서 이야기여.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관련된 부분은 에 그렇게 하고. 4월 달에 그렇게 했고, 그렇게 했고 돈 모은다고 이런다고 뛰어 다니던 거. 그 다음에 인자 당시에 남주가 이 경찰서에 옆 골목에 골목에 카프카서점이라는 걸 열었어요. 카프카 서점. 김남주가 그래가지고 당시에는 사회과학서적이 없을 때라 책장에가 놓여있는게 전부 창비, 신서, 그래가지고 시집들과 전환시대의 논리 등등 인자 그런거 들이겠지. 그래서 그런 책들 놓고 팔고. 긍게 인자 운동권에서는 그 책이라도 보는게 숨을 좀 쉬는 길이었지. 그런데 남주가 원체 장사능력이 없어 노니까 원체 돈하고는 무관한 사람이야. 전생에부터 이미 경제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아부지한테 돈 받아다가 피땀 흘려 번 돈 다 까먹어 버렸지. 망해브렀지. 그란디 거가 인자 카프카서점이 아성이었지 맨날 거기서 장기두고, 인자 나는 인자 그라고 인자 월부책 받을 때 후배들 방에서 장기나 두고 앉어 있고 속없는 새끼들 그랬지. 어쨌든 광주지역에 거 탄압분위기 속에서 그러면서도 꾸준히 학내 서클활동을 해쌀라고 서클들을 여러 개 만들고, 그렇게 해서 고리 나가 븟고.
면담자: 선생님 여기가 75년도까지 이야기죠 이게.
구술자: 그 다음에 이제 기독교 학생 총연맹. 그 부분인데 서울에서 인제 나상기 선생님이 거가 그 뭐야 KSF 기독학생총연맹이라고 그러기 거기 활동을 했었는데, 민청학련관련자야. 나상기도 여기 광주출신이고, 근데 나상기가 와서 부탁을 해가지고 인제 광주에도 기독학생운공을 좀 하고 싶다. 그래서 인제 몇몇 후배들을 거리 Ep 줬지. 그래갖고 인제 광주에 인제 기독학생 총연맹이라는 단체가 생기면서 교회운동이, 학생운동 대학에가 교회운동의 시작계기가 됐고, 하여튼 대학에는 하여튼 여러 갈래의 서클들을 만들어갖고 여학생들도 많이 참여하게 만들고, 그래가지고 후배들을 많이 키워냈지. 클럽활동 하고 옥바라지 꾸준히 하고, 돈 번다고 엄한 짓거리들 많이 하고, 참 그때 비참했지. 클럽활동 하고 옥바라지 꾸준히 하고, 돈 번다고 엄한 짓거리들 많이 하고, 참 그때 비참했지. 정말 비참했지. 비참했고, 아 그 다음에 인제 75년 그 이야기까지 오늘 마무리해야겠구나. 인자 해수욕장 이야기가 나오는데, 8월이 돼 가지고 7월? 탄압 상황이라는 게, 교도소에서 얻은 피부병이 밖에 나와서 병원에 다니면서 아무리해도 안 낫는 거여 이제. 교도소 피부병이 아조 고약한데, 근디 이 자 이게 알아보니까 이 바닷물에 가서 해수욕을 좀 하고. 모래찜질을 하고 좀 그라면 낫는다. 그래서 야, 그럼 가자 그래가지고 뭐 우리가 수영복이 있어 뭐. 그때만 해도 인자 레저 그따위 소리 단어도 모를 땐데, 그 인자 닭 한 마리, 산채로 사서 들고, 솥단지, 냄비, 뻔하지 그때 살림들이. 그라 또 우리 스타일이 그래갖고 뭐 남들이야 보듬 말든 그래갖고 인자 모여드는데. 버스회사에서 형사들한테 연행돼브렀어. http://trollwall.egloos.com/4236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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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