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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 녹취록-3 펌

  • No : 69848
  • 작성자 : 뉴스관리자
  • 작성일 : 2013-06-03 19:52:16
  • 조회수 : 2714
  • 추천수 : 1

윤한봉 구술녹취문 (3차)

■ 개요
구술자 : 윤한봉
면담자 : 박현정
면담주제 :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면담일자 : 2006년 2월 22일 오후 2시-5시 (3시간)
면담장소 : 두암동 자택
면담차수 : 3차

■ 상세목록
1.
1-1. 민중에 대한 개념
1-2. 정세분석
1-3. 복직. 복적결정과 토론
1-4. 광주항쟁에 대한 예감과 준비
1-5. 광주항쟁 발발과 피신
2.
2-1. 도피생활
2-2. 김대중
2-3. 귀국후 활동 - 518기념재단과 들불열사기념사업회
2-4. 정치활동, 정당에 대한 견해
3.
3-1. 요즘 근황
3-2. 518과 재단에 대한 평가
















1-1. 민중에 대한 개념

면담자 : (* 그 전에 했던 인터뷰 내용을 되짚어보면서 앞으로 이야기할 것을 정리하고 있는 중) 저번에 박기순 열사이야기까지 해주셨구요.
구술자 : 그건 이제 78년 이야기고. 아, 저, 맞아 78년 12월이지.
면담자 : 예, 그리고 극단 광대이야기, 마지막으로 해주셨던 광대 이야기. 방화사건 주모자로 되가지고
구술자 : 79년 들어가서
면담자 : 예, 그 다음에 박기순 열사. 그렇게 이야기하셨구나. 79년도까지. 예. 거기까지 이야기해주셨어요.
구술자 : 그래서 그러면 오늘이 2006년 2얼 22일 선생님의 마지막 인터뷰구요. 선생님 그래서 제가 518전까지. 79년부터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를 이야기를 들을까 했는데 이 책 (『운동화와 똥가방』)에 나와 있다면. 이게 미국까지, 귀국할 때 까지에요, 선생님? 귀국 다음에 이야기를 할까요? 아니면 그 앞 부분을 간단하게라도 다, 그런데 간단하데 되짚기가 어렵긴 한 대.
면담자 : 하여튼 80년 전. 80년 초 그러니까 내가 긴급조치 9호로 들어갔다가 박정희 죽고. 긴급조치 9호 해제되어 가지고 나온 이후의 이야기를 시작을 하죠. 그때가 79년 12얼 9일인가 내가 나왔어. 긴급조치 9호 해제로 최규하가 해제해서. 그러니까 나오자 나는 팔이 한쪽이 마비된 채로 고문 후유증으로 나와 가지고 내가 세 번째 구속되기 전에 부마항쟁이 있었다고 그랬잖애? 부마항쟁이 인제 나한테 엄청난 충격으로 왔고. 그래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하튼 나뿐이 아니었지. 다들 충격이었어. 그래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현장을 방문하려고 마음 먹었다고 그때 내가 들어가서 고문당하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석방된 다음에 인제 시골에 가서 선산에 가서 성묘하고 집에서 며칠 있다가 며칠 있고 나니까, 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계속 탁탁탁하고 소리나게 두들김.) 1212 쿠데타가 일어난 거예요. 9일 날 석방됐으니까 한 3일 후였죠. 1212 신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거죠. 음...긴가민가들 모두들 했었는데 나는 그때 또 다시 시작이구나. 다 틀렸다. 그런 어떤 민주화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을 상당히 나는 인제 접었지. 또 시작이다. 그러면서 이제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내가 부산으로 갔어요. 인제 부산 들러서 마산 들러서 이렇게 오려고 했는데. 부산 현장을 이렇게 왔다갔다 시위현장, 항쟁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이야기도 좀 듣고 그리고 부산에 좀 알고 있던 친구들 이야기도 좀 듣고. 그래서 거기서 확연히 깨달은 게, 내가 그 동안에 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민중이 어떻게 뭐가 어떻고 떠들었는데 나는 완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민중에 빠져 있었다. 노동자들 농민이라든지 빈민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역사 속에 항쟁의 주역이었던 농민들. 이를테면 이제 갑오농민운동이라든지 의병항쟁이라든지 이런 차원에서만 이해했지 구체적인 우리 생활 주변에 하루하루를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시는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들 우리 주변에서 있는데 이를테면 노동자나 농민으로 분류되지 않은 그 사람들 또한 민중이었는데. 그걸 인제 노동운동, 농민운동 이런 범주 속으로만 하고 생활 속 생활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민중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아! 인제 마산도 갈 필요가 없다, 알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다. 내 인식이 잘못되었던 거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인제 돌아온 거죠. 광주로. 바로 우리 이웃들에 살아 숨 쉬는 민중들이 있었는데 노동자니 농민이니 이런 식의 범주 속에다 넣고 관념적으로만 이해를 했었다는 거죠. 인제 나중에 518로서 확인됐지만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주변의 갑남을녀 들이 들고 일어난 거죠. 그래서 이제 이걸 검증을 해야겠다. 내가 무얼 어떻게 잘못보고 있었는가. 그래서 어떻게 그걸 잘못보고 있었는가 알아야겠다 그래가지고 그냥 부단히 돌아다녔어요, 광주 전남지역을. 시골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할아버지 할머니들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목표 옛날 철선 다니는 용당 같은데 배타고 기다리고 있으면서 배 타려고 기다리는 거기 있는 아줌마들하고도 이야기하고. 광주 대인시장 양동시장 막 헤매고 다니면서 사람들하고 부대끼면서 그들의 표정을 읽고 그들과 기회만 있으면 말을 해보고 그러고 다니면서 인제 확인하는 것이 아, 확~실히 내가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그 동안에 인제 운동하는 우리들 스스로를 선각자 내지 선지자, 선구자. 노래에도 나오는. 해란강변에 말달리던 선구자 식의. 그리고 민중들이 안 따라오고. 우리가 앞서가면 언제가는 따라오겠지. 인제 이런 식의 교만방자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거예요. 완전히 그들 앞에 간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엉뚱한 곳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들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 앞에서 섰던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앞에서 선 것처럼 착각을 했고. 심지어는 (민중들이) 하도 안 움직이니까 더 고생을 해야 정신을 차린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었는데. 더 당해봐야 할 거라느니 그딴 소리나 하고 있었는데. 아 잘못됐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죠. 그런 시각으로 이제 사람들을 보니까 정세분석에 있어서 예를 들면 현재의 농민운동이 어떻고 운동수준이 어떻고 뭐가 학생운동이 어떻고 기독교가 어떻고 종교계 움직임, 정치권 움직임 등 해가지고 우리 힘이 이 정도니까 어쩌고 저쩌고 이런 식의 정세분석을 하던 관점에서 벗어난 거예요, 내가. 그래가지고 이제 우리들 생활 주변의 민중들이 어떤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것이 신경을 쓰게 될 수 밖에 없었죠. 그러고 보니까 이제 그들이 안 따라온다고 가만히 있다고 무릎 꿇고 있다고 욕하고 그랬었는데 그게 아니여. 그들이 지금 그 엄청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김.) 지진이나 화신을 예고하는 변화에 대한 갈망이 그 사회의 정치적인 사회 경제적인 변화에 대한 갈망이 엄청나게 뜨겁게 지금 솟구쳐 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이제 나의 정세분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됐는데.

1-2. 정세 분석

인제 이 정세분석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는데. 내가 뭐 정세분석이나 뭐니 축산학과 다니던 내가 뭘 알아야. 운동도 갑작스럽게 뛰어들게 됐고. 그런데 감방가고 감옥살이 할 때마다 이제 많은 걸 느낀 것이 뭐냐면 서울 출신들 그리고 교회 관련자들이 재판할 때건 교도소에 있을 때건 면회 오건 그러면 듣고 와서 소식을 나누거든. 완전히 신문도 못보고 라디오도 못 듣고 할 때니까. 궁금하죠, 바깥세상이 어떻게 될까. 근데 서울 사람들, 면회 자주 오니까. 그 다음에 교회 쪽. 여기는 인제 해외 창구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거든? 교회쪽이. 다른 사람들은 여권이나 비자를 받아서 미국이나 유럽에 갈 여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고. 여권도 안주고. 인자 목사 신부 이런 사람들이 주로 많이 나가니까. 근데 야튼 한마디로 말하면은 재판받거나 교도소에 있으면서 정세분석을 주로 서울 중심으로 하는데 내용은 첫 번째 들어갔을 때고 그러고 두 번째 들어갔을 때도 그러고 세 번째 들어갔을 때도 똑같애. 뭐냐면 낙관적이야. 굉장히 밝아. 곧, 곧! 심지어는 새벽 3시. 4시. 그리고 곧 석방. 그래가지고 이번 삼일절에는, 딱!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침) 이번 815에는, 딱!(*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침)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딱!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침) 인제 석방될 것이다. 그러고 인자 그렇게 미국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거예요. 인제 알지도 못한 놈의 미국 상원 의원 케네디가 중심이 되가지고 한국인권문제에 대해서 결의안을 채택해서 제출을 했느니 뉴욕타임즈에 뭐라고 나왔다느니 카터 정권이 어쩌고 저쩌고 해가지고 박정희가 코너로 몰리고 있어가지고 어쩔 수 없고 뭐 여당도 동요하고 있고 뭐 그냥 듣고 있으면 신문도 없고 방송도 없으니깐 면회 갔다온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전부, 곧 이야, 곧. 그런데 100% 그 말을 안 믿지만 내가 모르는 이야기니까. 솔곳하니, 나간다니 싫어할 사람 없지. 곧 좋은 세상 온다는데. 새벽 몇시라는데. 근데 아니나(*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짐), 맨날 헛방이야. 틀려. 그럼 인제 김 팍 세지. 우울해. 그런 날은. 한번 두 번 그런 것을 겪고 나서 내가 내린 결론. 에엣, 나쁜 놈 시키들. 나쁜 놈들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엉터리들이지. 나는 인자 느그들 말 안 듣는다. 관심도 안 가져. 귀도 안 기울이여. 씨잘데기 없는 소리 하지마. 콱! 사람 김 빼게. 좋았어. 정세분석 내가 스스로 하겠어. 남이 해 놓은 거 듣고 앉아서 고개 끄덕끄덕 하고 기대 걸었다가 망신사고 그러지 않겠다. 그래서 정세분석을 내가 스스로 하겠다. 그런데 인제 내가 무슨 사회과학을 공부했던 놈도 아니고 내가 무슨 그런 쪽에 오랫동안 운동권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유신 쿠데타 때문에 갑자기 끼어든 놈이. 그래서 뭐 정세전망을 했다가 이럴 것이다 했다가 틀려불면 또 나만 망신되고 똑같지. 그래서 인제 혼자서 연습을 했어. 그래가지고 대외적으로 발표를 않고 속으로 이렇게 될 것 같다. 저렇게 될 것 같다. 이것 보면 이거 이렇게 이렇게 되니까 아마 이럴 것 같다. 그래가지고 인자 맞는가 틀린가 확인을 혼자서 보는 거에요. 한 번, 두 번, 속으로 그걸 계속 하다보니까 상당히 인제 맞아떨어져. 그 재미라는게 남에게 말을 안했지만 내 스스로 아~여지 없이 정확히 봤다. 다른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 먼저는 안해. 가만히 듣고만 있는 거야. 속으로. 슥, 나는 저렇게 생각 안하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보는구나. 근데 누가 봐주면, 보자. 교수니 뭐 내 노라한다는 각 유명한 유명인사들, 서울서 내려 온, 모여 앉으면 주로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지. 그러니까 서울서 내려온 놈들이 완전히 지방 촌놈들 데꼬 앉아서 못 들은 이야기, 뭐 안국동 윤보선씨 집 안방에서 누가누가 만났는데 어쩌고 뭐 어느 목사가 유럽을 산업선교회 관계로 갔다 왔는데 뭐가 어떻고. 여기서는 도저히 못 듣는, 언론에도 없는 이야기니까. 언론에도. 그냥 혹 해가지고 촌놈들이 이라고 듣고 있는 거지. 그때 당시에 일반적인 거였어. 정보의 집중이라는 게 권력의 집중이거든, 바로. 인제 서울이 완전히 그렇게 장악하고 있었던 거죠. 촌놈들이 그냥 헬렐렐레 해가지고. 와~미국의 무슨 인권목사가 왔는데 뭐라 뭐라.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조용히 남아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미국이 어쩌고 저쩌고 상원의원 몇 명이 어쩌고 어쩌고. 내 이야기하고 틀려. 그럼 인제 누가 들어맞는가 보자. 한번 두 번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고. 그것이 70년대 내내 지속이 됐어요. 긍게 내가 79년에 내가 대외적으로 내가 처음으로 인제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될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했어. 그 동안에 내공을 좀 쌓아가지고 거의 맞았는데 그게 뭐 였냐면 이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란의 혁명이 성공했을 때 이야기예요. 인자 미국이 심어놓은 어떻게 보면 강력한 말뚝이었는데 근게 이제 빠진거지. 팔레비 왕조가 미국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무기 구입 계약을 맺어놨다는 것을 내가 신문에서 봤다고. 페르시아 영화를 꿈꾸는 인자 석유자본으로 팔레비가 이란이 완전히 중도 중심국가가 될 것처럼 야망에 불타있을 땐데. 글다보니까 이제 군사력도 엄청 강화하고 그러기 때문에 미국의 참 훌륭한 고객이지. 군수산업에. (*사모님께서 커피를 내오심. 면담자가 준비한 과자와 음료수도 꺼냄. 사모님께서 목소리가 쉬었다고 하시자 윤한봉씨가, 말을 이렇게 많이 해 본적없이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함. 일동웃음) 그래 인제 그랬는데 카터 정권이 들어서면서 주한미군 철수공약을 내세웠잖아요 인제. 단계적으로 철수하도록. 그러니까 정부에서 철수철폐 국회 결의안이 나오고 난리가 났지. 근데 나는 인제 딱 이란 혁명이 성공하자 주한미군 철수는 끝났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지. 왜냐. 인자 사람들이 왜. 상당히 운동권이 들떠 있었다고 인제. 미군철수에 대해서 주장을 했었던 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인자 미국 군수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큰 고객이 하나 떨어져나갔다. 그러면은 당현히 그걸 대처할 새로운 고객을 찾을거 아니냐. 인자 무기라는 것은 만들어 놓은 재고를 파는 것이 아니라 견본만 내놓고 주문을 받아서 생산을 해서 파는 거거든? 인자 발주 생산이라고 그러는데. 그게 이건 이미 팔레비가 살려고 해놨던 최신 전투기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걸 팔아먹어야지 않냐. 그라면 인제 결국은 어디다 팔 것이냐. 용도가 있는 곳에다 팔아야 햐난데 우리가 지도를 놓고 아무리 봐도 긴장, 군사긴장, 그래서 저놈이 때릴라고 하니까 너도 몽둥이를 들어라 식으로 어디 꼬드길 데가 있어야지. 그러다보니까 한반도다. 그럼 한반도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그만큼 한반도에 전쟁 발발 위험이 적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자신만만한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인제 무기 팔아먹으려면 어떤 북의 남침, 또 북의 군사력. 북의 남침이 높고 북의 군사력이 강하다라는 걸 강조를 해야 팔아먹을 수 있는 건데. 미군 철수하면서 북이 강하다 북의 군사가 강하다 무기가 현대화됐다 그러니까 사라 할 순 없는 거 아니야. 결국은 철수 한다고 공약은 했지만 그건 백지화 될 것이다. 그리고 이란으로 갈 무기 우리한테 다 온다. 하니까 에~뭐 어쩌고 저쩌고, 철수에 대해서 이의제기했던 장군이 소장인가 준장인가 한 사람이 보직 해임되어 버렸다고. 저, 카터한테 대들었다가. 주한미군 철수 반대하고 그랬다고. 그런 분위기였는데. 그 사람이 무슨 참모장 이었는데. 어쨌든 그랬는데 이제 나중에 아니나 다를까 미국 뉴욕 타임스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북에 갑자기 탱크 수가 막 인제, 예를 들면 천대에서 이천대로 나오고. 보병 사단이 전투 사단이 예를 들면 20개 사단에서 위성으로 확인한 결과 30개 사단이라느니 요상한 장난이 계속 나오면서 결국 끝에 가서 철수 중단!. 그 다음에 카터 와가지고, 오니까 뭐 인권 대통려이 오고 어쩌고 저쩌고 해가지고 뭐가 어쩌고 기대가 운동권에 잔뜩 들었는데 무기 팔아먹고 쌀 팔아먹고 갔지. 그때 이제 아~ 어쩌냐 내말이 맞았지. 그래가지고 드디어 내가 정세 분석을 대외적으로 하게 되고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이제 그런 시각에서 부마항쟁이 나한테는 굉장한 의문이었던거죠. 왜 도대체 가능하지 않은 일이, 꿈에도 못 꿨던 일이 어째서 발생했는 가야. 그래서 이제 현장까지 가보고 그런 과정을 거쳤던 거죠. 그럼 내가 어떻게 뭣을 잘못 봤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고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제 아,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치심) 광주가 터진다. 광주항쟁을 예감을 한 거에요. 그게 3월 말 경이에요. 그래가지고 인제 확신이 딱 선 것이 아, 광주 터진다. 간단한 거예요. 이 전두환 일당 12 12 쿠데타를 통해서 1단계 성공을 시킨이들이 절대 물러날 수가 없다. 다음 단계로 간다.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군부가. 신군부가. 근데 이제 변화를 갈망하는 70년대 내내 민주화의 열망을 키워 온 각계각층 인제 그 절망의 분노가 있는 거죠. 절망하게 되면 분노하게 되고 폭발하게 되는데. 근데 그런 상황에서 광주가 가장 그 열망이 컸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어느 지역보다 컸기 때문에. 차별과 소외, 빈곤의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에. 여기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충돌하고, 무조건 진다. 어떻게든, 피바다가 될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였죠. 그럼 이걸 어떻게 하느냐. 대책이 없어, 대책이. 왜냐면, 내가 내린 답이 막을 수도 없고 이것을. 그렇다고 이 항쟁을 지도할 능력도 없고. 광주 사람들이. 운동권이라고 하는 게. 그러니까 조직되지 못한, 봉기의 항쟁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광주가 피바다에 잠긴다. 그렇게 된다. 이, 우려가 몇 번을,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정리해보고 정리해 봐도 정세전망이 그렇게 나오는 거라. 인제 터진다. 그래갖고 광주는 피바다에 잠긴다. 그 불안 속에서 인자 80년이 된 거에요. 80년 초에 그 즈음해서도 뭐 불안 속에서 걱정만 할 수는 없으니까. 일은 해야겠다. 대표적인 게 이제 현대문화연구소가 중심이 돼서 적극 밀었던 게 극단 광대 조직사업에 이제 1월에 80년 1월에 결성을 했어요. 박효선 중심으로. 인제 극단 광대를 만들었는데 하튼 풍물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인제. 그걸 일체 내가 투자를 해서 샀어. 연구소에 놔두고 활동하라고. 그래가지고 창단 공연을 하자. 그래가지고 인제 그때 당시에 돼지값 폭락으로 시골이 난리가 났었거든. 돼지 새끼를 팔러 갔는데. 하도 형편없는 가격으로 팔려고 하니까 집에 도로 가지고 오다가 사료 걱정 때문에 자기 집에서 내리면서 돼지를 차 안에 두고 내려버리고 막 그런 정도였으니까. 하도 똥값이 돼가지고. 이 돼지값 폭락 문제를 소재로 해서 하자 그렇게 한게 돼지풀이를 마당극으로 한 것인데 그때 3월에 YMCA에서 첫 공연을 했는데 대단한 성공이었어요. 농민단체들 초청해서 공연도 하고 얘기도 하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랬고. 그런 강연회 등등 이것 저것 조직강화하고 인제 전남민주청년협의회 옛날 구속자협의회가 발전해가지고 한건데 전남 민주청년협의회 조직강화를 위해서 이를테면 감옥에 안간 사람들도 가입을 시켜서 박효선이. 나중에 항쟁지도부에 들어간 정상용, 이양현 이런 친구들이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어려운 시기라고 날더러 회장 맡으라고 해서 맡았는데 그렇게 하고 아주 다양한 조직강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그때 당시 광주 노동운동도 상당히 활발하니. 또 10.26 이후에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이 굉장히 활성화됐어요, 인제. 그래가지고 잘 아시겠지만 사복 봉기가 터지고 동국제강 부산 노동자들이 대 투쟁을 하고 이런 분위기가 있었고. 농민운동 쪽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을 못하고 주책바가지로 농민운동 지도자들 중에 일부가 광주같은 경우는 전남같은 경우는 서경원씨였는데 총선에 출마할라고 해가지고 그것 때문에 되게 싸우고 그랬는데. 우리는 인제 미쳤냐고 막고. 그럼 그 운동하는 사람들 다들 아 저 새끼들 정치 할라고 운동했다 그런 소리 들을 거 아니냐. 왜냐하면, 카농(카톨릭농민회) 회장인데 그냥, 막고 그랬는데. 그런데다 정신을 쏙으니 이게 일들이 제대로 안돼지. 농민운동단체들하고 많이 이야기를 해가지고 농민단체도 그때가 5월 19일날 대규모 시위를 광주에서 하기로 그렇게 결정이 되가지고 전남대학교 학생들도 함께 연대투쟁을 하기로. (그런데) 그때 이야기들이 상당히 재밌어요. 농민들이 인제 분무기에다가 농약을 독~하게 타가꼬
구술자: 농약이요?(*놀라우면서, 어이가 없어 모두 웃었음)
면담자: 이거 분무기로 그래가지고 최루탄에 맞선다고 해서. 아조 전남대 학생이랑 뭐 해갖고 대규모 시위 준비를 하고 그랬어요. 그럼 고놈 맞아불면 최루가스하고 달리 죽, 병원에 입원해야지 인제. 독한 농약응ㄹ 뿌려 불면. 전경들. 하여튼 그런 준비를 해나가는데 나는 계속적으로 불안한 거예요.

1-3. 복지, 복적 결정과 토론

그리고 그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냐면 이, 최규하 정권이 제적됐던 학생들하고 해직됐던 교수들, 복직 복적 결정을 한 거예요. 희망자는 다 받아준다. 그래가지고 인자 또 우리나라 학생운동 사회운동이 한번 요동이 쳤는데. 전국적으로 복학, 복직이 허용되니까 토론 한 번 없이 그냥 물밀 듯이 학교로 다 들어가 버렸어. 짤렸던 친구들이. 모든 대학에서 다. 근데 인제 유일하게 전남에서만 그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토론이 벌어졌죠. 고민을 하고. 그래서 나는 인제 복학 반대를 입장이었는데 논리는 간단했어요. 뭐냐면 그동안의 학생운동이 인제 제적당하고 투옥당하고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학교에서 쫓겨나 버린 거죠. 학생들이. 그러니까 운동의 무대를 필연적으로 이제 사회로 옮긴 거죠. 그래서 사회운동에 어떻게 보면은 일익을 맡은 거에요. 노동운동 농민운동아 아니라 학생운동들이 나와 가지고 교회라든지 출판 등등을 통해서 문화라든지 언론사에 들어 간다는지 학원에 강사로 들어간다든지. 운동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로 들어가면서 현장투신도 일부 있었고 그래가지고 사회운동을 활성화시키는데 학생운동이 큰 역할을 한 거에요, 인제. 학생 운동 인자들이지. 제적된 사람들이. 인제 광주전남지역만 해도 이학영이도 위장취업해가지고 서울 올라갔도 나중에 남민전에 가담하고 그랬는데. 박형선, 이강은 민청세대들인데 농민운동에 투신했고 야에 형선이는 지게지고 농촌으로 들어갔고. 이런 분화들이 일어 났고. 이향연이는 노동운동, 그러니까 사회활동이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그러고 이제 우리가 농민 운동하는 사람들,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하고 접촉해보면 학생들, 먹물들 안 믿어요. 불신을 해. 그러니까 한쪽으로는 부러워하면서도 한쪽으로는 미워하는 그런 미묘한 것이 있었는데. 불신. 너희는 달라야. 계급이. 너희들은 언제든지 먹고 살 걱정을 안해도 되는 사람이지만 우린 여기 떠나면 죽는다는 것이자. 그래 그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연대하기 위해서 많은 별 노력들을 했거든요. 내가 저번에 이야기했던 쌀 생잔자대회 때 밥 한다든가 이런 것이 다 이런 노력의 일환이거든요. 우리는 하나다. 함께 하자. 그렇게 해서 또 신뢰를 쌓아갔고 함평 고구마 사건 단식 때 그렇게 뒷바라지하고 참여하고. 근데 이제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다 같이 죽고 같이 살자. 노래도 같이 부르고 그랬는데 노동자, 직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하다못해 학원 강사들에 대해서는 복직 복적이 안되는 거에요. 그러면서 정부에서 교활하게 학생들에 대해서는 복학, 제적 해직된 교수들에 대해서는 복직 허용을 한 거에요. 특혜를 준거지. 근데 그건 정치적 속셈에 뭐냐면 분리를 시키는 거예요. 연대의 틀에서. 분리를 시킨 거죠. 복학 복직들 결정하니까 우우 다 들어가버렸어. 인제 광주에서는 심각하니 그 문제 가지고 모여서 토론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학원으로 돌아가서 학생운동을 계속 하겠다는 마음을 굳힌 사람은 복학을 해라. 남아서 사회운동을 계속 할 사람들은 복학하지 말고 남자. 그래서 이건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러고 우리가 무슨 철혈조직도 아닌데 조직결정으로 해서 강제할 수도 없으니까 자유선택을 하도록 하자. 그래서 돌아가면서 자기 입장을 밝히기로 해 가지고 나는 복학하겠다, 돌아가서 난 싸우겠다. 나는 남겠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는 졸업장을 받고 직장도 잡겠다. 인제 이런 사람들이 나오고 그랬는데 그래갖고 나 포함해서 한 5명 정도 남았어요. 나머지는 들어가고. 그러니까 인자 학원으로부터 자유로워 진 거죠. 상당히. 복학을 안 하니까. 70년대 운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제 전국 각 지역 간의 정보 교환이라든가 유대의 틀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또 인제 작동을 해서 이를테면 인제 가끔 모여서 서울에서 모여가지고 대구 쪽에서 부산 쪽에서 전북에서 전남에서 서울, 경기쪽 이런 데서 한 두 명씩 모이는데 이번에는 419를 앞두고 학원가에서 가두투쟁, 가두진출을 해서 시위를 하는데 구호는 뭘로 하자. 성명서 내용은 이러이러한 형식으로 하자. 요런 어떤 뭐랄까 전략전술도 논하고 정보도 교환하고 그런 자리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는데 그게 이제 4월 10일경에 인천에서 했는데. 박귀연인가? 이름은 여기 책자에 나와 있어. (『운동화와 똥가방』책자를 가리킴) 서울에서 인제 여러 명이 나왔지. 그 다음에 인제 광주에서 내가 가고 전북에서 최인규라고 지금 와서 보니까 목사님이든데. 대구에서 백선우 오고. 다 내책에 있어요 모였어 인제. 근데 그때 인제 전국적으로 가두투쟁이 인제 가두진출이 각 대학마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땐데 전남만 안 움직일 때야. 가두로 안 나오고 있을 때. 우리보고 왜 가두진출 안 하냐고. 근데 전남대는 복학생들 중심으로 해가지고 재학생들하고 똘똘 뭉쳐가지고 어용교수들 퇴진운동을 내걸어서 그걸로 해서 학생들을 묶으로 있었을 때였어. 교수들은 교수들대로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어용교수백서도 내고. 정보교환 해 가면서 안팎에서 서로 함께 하는데 그때 4월 10일 날 모였을 때, 모두들 다 이야기 하는데 이번 419에 전면철폐를 내세우자 말자부터 그런 소리를 하고 앉아있는 거에요.

1-4. 광주항쟁에 대한 예감과 준비

내 입장에선 광주가 피가 보이는데 쓰잘데 없는 소리만 하고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한가롭게. 그래서 내가 회의 말미에 이대로 회의를 끝내선 안되겠다 그래서 잠깐, 잠깐, 결론 내리기 전에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광주전남은, 그때만 해도 광주라는 말은 없지, 전남이지. 전남은 지금 이러이러한 상황이다. 터진다. 그러고 어차피 신군부하고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부산마산에서처럼 피가 흐른다. 근데 엄청나게 흐른다. 대책을 세워라. 광주만 터지면 작살 나분다. 적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타 지역에서도 같이 쳐 줘야한다. 인제 그 논리지. 그런데 뭐 4월 10일인데 아무도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뭔 쓸데없는 소리 한다느니 회의 분위기 깬다느니 여 다른 나라 이야기 하고 앉았다느니 그런 식으로 우스워 보인거지. 내가 잔뜩 다급해가지고 그래도 지방에서는 부산은 부마항쟁으로 피해를 많이 봤으니까 대구가 그래도 가장 강하지 않냐. 광주 이쪽 빼면은. 대구 운동 쪽에서 맞받아쳐줘라. 광주만, 전남만 터져가지고는 박살나분다. 그러니까 백영욱씨 아~우리도 어쩌고 저쩌고 함시롱 먼 말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인제 우물우물하고 넘어가 버리죠. 그래서 하여간에 고민들이 해란 말이야.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근데, 아무도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더라고. 돌아와 가지고 아예 4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한테 그 이야기를 했어. 개똥이를 만나면 이 이야기, 또 두 셋이 만나면 이 이야기.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를 안 기울이고. 아 쓸데없는 소리 왜 자꾸 해싸요, 아이고 그런 날이 좀 왔으면 좋겠조 내가 봤을 때는 어림 반푼어치도 인자 어림없다 이거지, 민중들이 무슨 들고 일어나야 그거지. 우리가 뭐 부마항쟁은 예측이라도 했었냐. 아 그건 어떤 특수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거지, 아이고, 여기는 어렵다고. 인제 그런 사고 특히 부마항쟁을 이야기할 때 어떤 입장이 있었냐면 일부 운동권에서. 그때 당시 인제 이란 혁명을 계기로 한 석유 오일 쇼크라고 그러지? 석유파동이 나니까 세계무역이 엄청 위축이 됐지. 그래서 이제 수출로 먹고 사는 이 나라에 정면으로 타격이 와 불고 그래가지고 부산지역에 수출물량이 떨어져버려. 또, 마산수출자유무역지대도 마찬가지고. 가동률이 떨어지고. 인제 부산의 항만 노동자들이 일감이 없는 거지 인제. 부산 경제가 휘청 휘청하고 마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서 실업, 그 다음에 수입 감소 이런데 허덕이고 있는데 인제 김영삼이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을 했잖아, 그때 국회의원이었는데. 그것이 인제 계기가 되어가지고 화가 나서 인자 확 일어났던 거다 이런 식의, 어쨌든 부마항쟁도 주역은 학생들이 뛰니까 거기에 생활 속에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부두 노동자들 등등 실업자들이 참여해서 그렇게 된 거다. 그런 정도로 분석을 하고 있을 때지. 거기도 마찬가지, 생활 속의 수많은 대중들은 빠져버린거지. 거기도 항만 노동자 전위적인 학생 이런 식으로. 광주는 그것도 없다. 광주는 뭐 공장다운 공장도 없으니까 노동자도 없고 뭐 수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그런 산업구조도 아니고 뭐 어쩌고 저쩌고. 그래 인제 그러다가 5월 5일 날 그때 내가 이야기했던 민주가족야유회라는 걸 인제 하게 된 거죠. 그래가지고 그때 식영정으로 갔어요. 광주호 위에 있는. 거기가서 한 오십명 갔어요. 가족들이 많으니까. 인제 그 자리에서 모두들 인자 진달래는 피지 그러니까 인자 기분들 좋아가지고 모처럼 그러고 있는데 내가 인자 또, 나는 인자 어두운거지. 이게 맨 피만 보이는데.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노래 부르고 있을 때가, 휘파람 불 때가 아니다. 광주 터진다. 그러고 인자 내가 거기서 피바다, 피바다라는 말을 썼거든요. 2천명 이야기를 했는데 광주가 피바다가 된다. 한 2천명 죽는다.
면담자: 아 숫자까지?
구술자: 숫자까지 그때 나도 모르게 이야기 나와버렸는데, 신들렸다고 그러는데 (*웃음)
면담자: 그러니까, 돗자리 까셔도 될 거 같은데요 (*웃음)
구술자: 틀림없이 터진단 말이야. 그러니깐 다들 또, 지금도 안 잊어버렸죠. 정상용이 그 친구도 그렇고. 아이고 형님, 야유회까지 나와 가지고 피 이야기를 하요. 아이고 형님 징하요, 왜 그러요? 안 받아줘, 안 따라줘요. 인자 그라고 돌아왔어요. 근데 이제 안 되겠어. 나라도 생각해야지. 그래가지고 그 당시에 인자, 요즘은 지도가 아주 세밀한 지도까지도 나오는데 당시에는 만 오천분지 일 지도를 가지려면 신분이 확실한 사람 외에는 그걸 못 사게 되어 있었어. 살 때. 단파 라디오 사는 것하고 비슷해가지고. 그 지도를 인제 박화강씨, 그때 광주매일인가 있었는데 지금 한겨례 지국장 하다가 그만 뒀는데. 그 화강이 형한테 부탁을 해가지고 내가 만오천분지일 광주 지역 지도를 구해가지고. 나는 간단했어 아주. 아주 간단한 논린데 상징적으로 어차피 깨진다. 깨지기는 깨지는데 피바다에 잠기는데, 부산마산처럼 막 왁 일어났다가 그냥 갑자기 꺼져버리는 식으로는 피해만 크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는 그걸 성공을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제 도청을 장악을 해야 한다. 최후까지 싸우다가 깨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부마항쟁처럼, 들불처럼 번졌다가 갑자기 꺼져부렀거든. 응? 그러니깐 그게 이젠 역사적으로 어떤 후속 항쟁이 이어지지 못한 거예요. 정치적으로 실패를 해 버렸기 때문에. 도대체 뭘 주장했는지 명확하게 안 나와불고. 그래서 이제 도청을 장악을 하고 끝까지 항쟁을 해야 한다 그것이 내 지론이고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승리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차피 저놈들이 군분데, 무기를 발포를 할 건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이쪽에서도 무장을 할 수 밖에 없다. 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이제 총, 다이너마이트 이런 무기들이 필요하지 않냐. 그러니까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가 있고 이, 다이너마이트는 어디에 있구나 이런 것들 좀 파악하고 도청을 어떻게 점거하기 위해서 도정 주변의 도로를 어떻게 어디 쪽으로 몰려들고 포위를 해야 하고 등등 고런 작전도 세우고 좀 그래야겠는데. 그래서 이제 지도를 구한 거예요. 지도를 구해가지고 이를테면 지원도, 지금은 소태동 쪽인데 거기 나가다보면 거가 채석장이 있었어요. 다이너마이트 창고도 있고. 현장 답사도 하고. 양림동 파출소 뒤에 있는 무기고부터. 이런 것들을 확인하고 다니면서 내 나름대로 성명서를 대 국민용, 그 다음에 국제사회를 상대로 해서 아 우리는 처절하게 싸우다 깨진다. 한국인들 민주화를 위한 몸부림을 너희는 잊지 말아달아. 인제 이런 내용으로 해서 국제 사회에 호소하는 내용 또 크게는 두 가지로 성명서 초안을 구상을 하고. 그러니까 뭐냐면 조직이 비극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막을 수도 없고. 지금 하지 맙시다, 한 일 이년 기다렸다가 합시다 할 수도 없는 거고. 또 터지더라도 조직적으로 이걸 지도해낼 힘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여하튼 피해를 줄일 수는 없지만 피해에 따른 정치적인 성공은 거둬야 할 것 아니냐. 피 값으로라도. 근데 그런 입장이었지. 그래서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혼자서 준비하고 다녀요. 그러다가 5월 1일 날 지금은 그 양반이 아바타 쪽...
면담자: 전홍준 선생님이요?
구술자: 응, 전홍준 선배지. 그때만 해도 의사였고. 근데 전홍준 선배는 광주에서 그 양반이 월남 파병 반대 운동 전개하다 감옥에 갔던 분인데, 선구자적인 분이지. 60년대에 그랬으니까. 그 양반이 인제 아버지가 월북 가셨기 때문에 그 사실 알고부터 운동일선에서 조금 빠진 거예요. 왜냐면 자기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옆에 사람까지 죽이게 되니까. 그런 선구자였는데. 그 양반이 애기 돌인가 백일인가, 나는 애기 돌 하고 백일하고 헷갈려가지고. 하여간에 식사나 하게 오라고. 그래서 거기에 간 사람들이 인제 8명이 갔어요. 8명이 갔는데 그걸 8인 모임이라고 그러는데. 나하고 정상용, 정용화, 이양현, 윤강옥, 김영철이 박용준이하고 윤상원이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8명이었어요. 인제 윤상원이는 항쟁 지도부 하다가 죽었고. 용준이도 시민군으로 27일날 YWCA앞에서 죽었고 영철이는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하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18년간 정신과 치료받다가 죽었고 정상용은 항쟁 지도부 외무위원장 맡았고. 윤강옥이는 기획의원했고 이양현이도 기획위원이었고. 정용화는 인제 현대문화연구소에서 저, 했는데 정용화하고 나만 그날 광주를 빠져나왔던 거죠. 6명이 참여하고 그 중에서 결국 3명이 죽은 셈이 됐는데. 어쨌든 간에 그라고 앉았을 때 인제 그 자리에서 내가, 그때 막 민주화 성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요. 14 15 16일까지. 내가 그 이야기를 또 꺼냈어요. 지금 이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광주 터진다. 대책 세우자. 또 이야기를 꺼냈는데 처음으로, 그 이야기 자세히 좀 해주쇼 이런 반응이 터져 나온 거예요. 처음으로. 그전에 나오자마자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핀잔주고 그런 놈들이. 그래서 인제 쭉 설명을 했죠. 인제 월요일날, 그때가 5월 20일 국회가 소집이 되어 있었어요. 임시 국회가 하튼 21일인가 소집이, 21일. 임시국회가, 그 임시국회에서 김종필 공화당까지 포함해서 개헌해제 결의안응ㄹ 제출한다고 신문에까지 났어요. 합의가 됐어. 정당들 사이에. 근게 모든 정당이 합의한거지. 신군부 빼고는. 그러면 인자 국회에서 결의를 하게 되면 해제를 해야 하거든. 계암해제를. 계엄해제하게 되면 신군부가 물러나게 되는 거죠. 그럼 신군부가 물러난다는 것은 곧 죽는 일이여. 왜냐면 12.12때 이미 그 사람들은 너무 많은 법을 어겼기 때문에. 상관살해부터 시작해서 명령 불복중부터 완전히 반란이었으니까. 군사반란. 그럼 어느 놈이 죽을 짓을 하겠냐 이거죠. 안 물러난다. 고로 21일날 아니면 25일 그 정도로 내다 봤어요. 21일에서 25일 사이에 전면적인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래서 완전히 군사독재로 체제를 갖춘다. 전두환 일당이 완전히 잡는다. 그러면은 인제 광주는 터진다. 제일 먼저. 그러면 박살난다.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승리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러이러 해야한다. 이 이야기를 죽 한 거예요. 그러면서 이래도 내 말이 감이 안 잽히냐. 난 인제 안타까와서 그래서 아, 진지하게 인제 형님이 왜 그런 이야기를 그 동안에 했는지 조금씩 감이 좀 잡힌다. 그래서 나는 인제 신이 났지. 그래서 그러면, 인제 구체적인 이야기를 또 해야 하니까, 한 번 더 모이자. 내가 연락하겠다. (왜냐하면) 남의 집이고 어떤 계획된 모임 자리가 아니니까. 홍준이형이 들락날락 하면서 음식 가져다 나르고. 그 대신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우리는 조심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죽더라도 깨끗이 죽어야 하니까 목욕하고 속옷 갈아입고 쓰잘데 없는 문건 같은 것들 사진 같은 것들 전부 치우고 죽을 준비 하라고.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자지 마라. 먼 일이 터질지 모른다, 지금. 내가 봤을 때는 하루하루 상황이 우리는 살얼음판에서 살고 있다. 언제 얼음 꺼질지 모른다. 집에 들어가서 자지 마라. 신신당부를 했어요.

1-5. 광주항쟁 발발과 피신

그러고 다시 연락하마고. 그래 가지고 그날 모임이 끝났는데 그 이틀 후에 17일날 밤에 기습을 당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나는 인제 그 말 그대로 이미 준비 다하고 있었어. 목욕도 하고 문건들 싹 사지도 싹 치워버리고 집도 뭐 내가 한 곳에서 다니던 사람도 아니고 동가숙서가식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냥 이집 저집 갔는데 17일날 19일에 있을 농민시위, 대규모 시위에 맞춰서 준비하기 위해서 농민회 간부들이 다 광주로 올라왔어요. 구례 최성호씨부터 시작해서 함평 각지에서 올라왔는데 그래갖고 그 사람들이 인제 카톨릭센터 같은데서 모여 앉아서 구호, 피켓 포스터, 프랭카드 뭐라고 쓸 것인가 논의하고 학생들 학생들대로 연대 시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고. 그 문제 갖고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인제 연락이 왔어. 서울에서 서울역 회군 이후에 전국 총학생단들이 전부 이대에서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거기를 인제 신군부가 급습을 한 거지. 그래서 많이도 잡혀들어갔는데 용케 관현이랑은 피했다고. 그 소식을 들었지. 아 이놈들 벌써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는구나. 이 정도로 생각하고 그날 저녁에 나는 농민회의 간부들 최성호씨하고 누구 세명하고 정용화 내 후배하고 그 농민운동 간부들이 왔는데 광주에서 돈없는데 여관에서 잘 수 없을 테고 그러니까 문병란 선생님 집이 있으니까 문선생님 집가서 잡시다 그래가지고 농민회 간부 두 세명하고 용화하고 나하고 문병란 선생님 집에 갔어요. 가서 그때 12시가 다 되었을 땐데, 11시가 다 넘었을 텐데 티비를 보고 있는데 그때 인제 그 미스 월든가? 여자들 수영복 입고 왔다 갔다 하고 그럴 때인데 아니 후보를 선발할 땐가 하여튼 그거 비슷한 거였어 하여튼. 그래가지고 그거 보고 있는데 밑에 자막에서 계엄정국확대, 의회해산, 휴교령, 이게 나온 거에요. 그런데 그 전에 인제 전국 각 대학들이 만약에 휴교령이 내리면 그 다음날 몇 시까지 돌멩이 들고 그 앞에 모인다 약속들을 다 했었지. 그런데 이제, 딱 자막이 나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리는 거예요. 열두시 되기 전이여. 인제 광주에서 집에다가 전화 놓고 있는 사람이 문병랑 선생 송기숙 교수 황석영씨 세 사람 밖에 없었어, 당시에는. 그리고 텔레비전 많은 집도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흑밸 텔레비전지만. 우리야 뭐 집도 절도 없는 놈들이니까. 그라고 인자 전화를 받으니까 누구 잽혀갔습니다. 깜짝 놀라가지고 조금 있으니까 또 누가 전화하고. 그러니까 여기저기 연락하다가 전화가 된 거예요. 형님 지금 눈에다 불을 쓰고 찾고 있습니다. 누구 잡혀 갔습니다. 근데 형선이, 내 매제지. 내 매제는 사업하느라고 보성건설에 들어가 가지고 사업한다고 뛰어다니고 있는데 갸가 잽혀 들어갔다고 하고 김상윤이 잡혀갔다고 하고. 근데 나는 뭐 안 듣고도 사업하고 있는 놈을 잡아갈 정도면 다 잡아간거다. 기습 당한거죠. 아 이거. 와 눈 앞에 캄캄해져불죠. 왜 그냐면 기습을 예측을 못했으니까. 뭐 뜬 눈으로 밤 새우고 새벽에 이제 집에서 빠져 나가 가지고 시내 용화 후배네 집에 가서 잤어요. 안전한 곳에 가서 동태를 살펴 보니까 엉망이지. 다 잽혀들어가불고. 전대 조대 할 것 없이 전부 접수되버리고 학생회 간부도 일부 도망가고 일부 다 잽혀불고. 긍게 인제 박살나분거야, 박살이. 아무 준비없이. 와 그때처럼 내가 후회스러웠을 때가 없었어. 왜냐면 나는 21일부터 25일로 봤지, 17일날 밤에 당할 것을 생각을 못하고, 기습에 대해서는 예측을 못했거든. 그래가지고 19일날 아침에 새벽에 빠져나갔지, 광주로. 뭐 인제 연락할 길이 없는 거야, 다 잽혀 들어가분 것은 파악되었기 때문에. 그때만 해도 전화도 없을 때고 전부 뭐 단칸방 자취하고 그랬는데 그래서 이제 나주로 가 가지고 나주에서, 도피하면서 몰려다니는 것은 바보짓이니까 용화는 어떻게 할꺼냐고 물어보니까 친구네 집에 돼지 키운다고 그럼 그쪽으로 가라 나는 일단 서울로 가서 보고 다음 대책을 논하자. 연락하마 하고 열차타고 서울로 향했죠. 가다가 아무래도 대전에서 내려가지고 대전 상황을 보고 올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대전에서 딱 내렸더니 역에 그 검표하는데 딱 군인들이 서 가지고 명단 쭉 들고 벌써 그러고 있어. 인자 나는 바보짓했지. 거기서. 인자 내가 아조 복학했다 제적당한 학생에다가 감방살이 해가지고 꾀죄죄 해가지고 학생같이 안 보여, 이놈들이 보면은. 혹시 또 몰라가지고 바보짓을 했지 내가. 명단 뽑아가지고 뭐라뭐라 하드라구. 쓸쩍 명단을 이라고 본게 당신 뭐야~ 그래서 아니, 뭐, (엉거주춤한 행동을 흉내내심) 그러니까 빨리 가라고. (* 일동 웃음) 그래가지고 나와서 보니까 차를 두 대가 딱 대져있고 일부 수상하다고 생가하는 놈들 잡아다놨고 몇 군데 들렸드니 다방 같은데 사람들이 말이 없어 말이. 조용해. 가라앉아가꼬 분위긱. 침묵. 아이구야, 이런 상황에서 서울 가봤자 사람 만날 수도 없것다. 도로 어디로 갈까 하다가 우선 도로 내려가는 기차를 탔어. 그런데 한참 타고 가는데 내 가방이 똥가방인데 하도 내가 동가숙 서가식이라. 손톱깎이부터 속옷 한 벌 사전부터 시작해서 빗, 이빨쑤시개 등등 담은 가방을 항상 갖고 다니는데 올려놓고 이라고 앉았는데 저쪽 자리에가 저쪽 보고 이쪽 보고 맞보는 의자가 있었는데 나는 이렇게 앞쪽 보고 있는 의자에 앉았는데 갑자기 어떻게 하다가 앞에 사람하고 눈이 마주쳤어. 이쪽보고 있는 사람. 어디서 본 얼굴이야. 얼른 고개를 숙이는데 그 사람도 어? 놀래는 표정을 짓더라고. 저 사람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나보다 나이는 좀 많은데 궁리를 하다 보니까 목표를 내가 가끔 다닐 때 인제 버스 정류장에 내가 목포 딱 도착하면 나와있는 형사야. 여기서 차 타면 연락하고 그러니까. 항시 감시당할 때니까. 아이쿠야. 근데 마치 이사람들도 주말에 어디 갔다가 온 거에요. 일행들이. 그러니까 자기들끼리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저쪽 보고 앉은 놈들이 여리 돌아보고 그래. 고개 숙이고 있으니까. 와메, 어떡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뭐 어쩌고 저쩌고 해쌌드만 한 사람이 일어나가지고 나를 이렇게 내려다보고 그러면서 가, 복도를. 통로를. 거기 공안들이 타고 있으니까. 아마 이야기를 할라고 하는 모양이야. 휴대폰이 있으면 그때 진즉 끝나버렸지. 근데 그땐 없을 때니까. 그러니까 나도 꺼구로 그 사람들 있는 쪽으로 걸어나왔지. 입구가 그쪽 이니까. 왜냐면 인자 내가 고등학교 때 유도부에 있었기 때문에 낙법을 좀 하니까. 여차해서 뛰어내려불라고, 영화에서처럼. 가방 놔둔 채로 지나오면서 그 사람들 얼굴 한 번 보고는 문 열고 나오니까 열차가 속도를 줄이면서 서요. 아이구야 살았다. 다 서기도 전에 뛰어내렸어. 내려보니까 장성역이야. 어딘지도 모르고 내렸어, 하여튼. 그대로 뛰쳐나가가지고 있는데 그 아줌마 한분이 애기 업고 차 잡을라고 이리뛰고 저리뛰고 있어. 같이 갑시다 타가꼬 광주로 들어왔지. 그래갖고 운암동을 거쳐 내려왔지. 가만있어봐, 운암동인가 어딘가 생각 안나네. 들어와 가지고 검문 한번 거치고 나서 택시 갈아탔어요, 아저씨, 그 내가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임동 쪽으로 갑시다. 그런게 그 쪽에 난리났는데요. 왜요 긍게 거가 머 붙어갖고 싹 쓸어부렀다고. 갑시다. 그래갖고 이제 임동 쪽으로 와가지고 8대 독잔데 농대 다니는 후배가 있었는데 그 애 집으로 가가지고 그래가지고 그날 밤 거기서 새고 그 다음날 낮에는 나는 쪽팔려가지고 도저히 인제 돌아다니지 못하니까 저녁부터 돌아다니고 있는디 MBC불타고 그럴때 시내를 갈고 다녔는데 연락을 누구한테 취해야지, 나는 시위가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내 동지들을 찾아내야 하니까. 그래야 뭘 준비를 하고 뭘 하니까. 아무리 연락을 할라고 사람을 찾아다녀도 없어. 그래서 문병랑 선생님 댁에 갔더니 거기도 아무리 불러도 없고. 알고보니까 다 지방으로 도망가부렀드라고. 그래 인제 의대 앞에 있는 내 동생 집에 갔지. 내 동생집에 갔더니 난리야. 옆집 대문 요만큼씩 칼로 막 파분 것처럼 그렇고. 내 동생은 집에서 난리고. 개죽음 당할라냐고 오늘 두 번이나 났다고. 내 사진 주라고도 오고. 옆집이 대문에 왜 저러냐 한게 군인들한테 돌맹이 던졌던 사람이 도망오니까 군인들이 쫓아들어와가지고 그 집 아저씬데 들어가서 문 잠그니까 문 부수고 들어가가지고 이불 둘러쓰고 잇는 것을 대검으로 찔러부렀다고. 인제 그러면서 나보다 난리야. 벽장에 나 너넣고 잠가불고 나가. 한참후에 우리 작은 형님이 오시더라고. 한봉아 너는 지금 잡히면 무조건 죽음이다. 개죽음이다. 너도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라도 빠져나가라. 그래갖고 인제 아침에 느닷없이 광장이 형님이 준 양복입고 내 조카 없는 내 여동생하고 같이 부부행세해가지고 빠져 나가가꼬 백운동쪽으로 가 가지고 거기서 또 택시타고 남평으로 나주로 이렇게 갔는데 그래가지고 이제 21일이지.
면담자: 21일
구술자: 21일 새벽에 광주에서 나왔어요. 그러니까 19일 날 다시 들어왔다가 19일 날 오전에 나갔다가 저녁에 다시 들어왔다가 21일 날 새벽에 나간거죠. 그러니, 그런것들은 여기(『운동화와 똥가방』을 가리킴)에 자세히 써 있어요. 그래가지고 21일 날 나주에 있는데 차량시위대가 도착해가지고 나주경찰서에서 무기탈취를 해요. 그래서 그거 보고 광주로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 인자 구두, 나갈 때 양복입고 두구 신은 거 구두 버리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얼굴 가릴 수건 하나 사고 그라고 인제 버스에 올라 탈라고 하는데 광주에서 온 차량사위대에 목포에 있는 전남 민주청년협의회 목포 지부장이었던 김남표라고 이 친구가 느닷없이 골목길에서 내 손을 잡는 바람에 얼마나 놀랬던지. 아, 왜 여기에 있어? 자기도 쫓겨 왔다는 소리를 하면서 그래가지고 그 친구하고 둘이 차를 타면 저쪽에서 집중 사격을 받으면 위험하니까 걸어서 들어갑시다 그래가지고 남평까지 걸어왔죠. 그때 남평 그 다리, 건너기 전에 왼쪽에가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주막 비슷하니. 거기 앉아서 음료수 하나 마시고 있는데 헬리콥터들이 와가지고 월남전에서 많이 썼던 고구마같이 생긴, 흉악하게 생긴 게, 와서 다시 건너편에 산마루에다가 특수부대들, 공수부대들 투하해놓고. 그러니까 도로 요소 요처를 그렇게 해서 장악을 한 거예요. 기관총 가져다가. 그래가지고 못 들어가 버렸어. 그래서 화순 쪽으로 돌아 그래서 그쪽으로 화순 쪽으로 도는데 요소, 요소마다 전부 군인들이 장악을 해버렸어. 벌써. 21일 오후가 되면 그렇게 되요. 못 들어와 광주로. 다시 거기서 걸어서 세지지, 그 담에 거 뭐야 금정. 나주. 거리에서 길거리 정미소 집에서 하룻밤 자고 영암으로 나왔다가 영암은 그 광주 진출이 어려운 그 차량 시위대들이 다 영암에서 다 잤어요, 그날 남쪽지역은. 강진으로 가서 인제 김용근 선생님이라고 고등학교 은사 집에서 자고 거기서 용화 만나고. 거기서 다시 광주 진입을 하자. 용화가 그래도 공수부대 출신이라 기대를 걸고 나왔는데 저수지, 거기가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위치를 모르겠어. 지역은 잘 모르니까. 거기 저수지, 한쪽이 저수지 한쪽이 산인데 도로를 또 통제해놓고 차량시위대 몇 대 잡아놓고. 두들겨 패고 있더라구. 어디 빠져나갈 길이 없는 거야. 다시 또 들어갔다가 5월 27일 광주 함락됐다는 뉴스 듣고 성전, 강진을 거쳐서 버스타고 8번 검문 받고 순천으로 갔다가 부산이나 마산 쪽으로 빠질라고 했는데 딱 보니까 검문이 엄청 심하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순천에서 열차타고 서울로 가가지고 서울역 앞에는 완전히 (총)들고 검문하고 있어. 그래 『어둠의 자식들』 썼었던 이철용씨 철용이 형 집으로 삼양동, 성북구 빈민촌에 있는 그 양반 집으로 갔어. 갔더니 이제 광주 후배들이. 한봉이형이 살아있으면 이리 올 것이다 해서 나름대로 도피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2-1. 도피생활
그때부터 도피 생활을 시작했죠. 그래 1년간 서울에서 도피하고. 해외로 나갈 때까지. 그 과정은 여기에 다 들어 있어요. 다시 인제 그 정세분석 이야기를, 내가 도피생활 하면서 반성했던 게 어떻게 내가 정부 기습에 대해서는 예상을 못하고 바보짓을 해가지고 21일, 25일로 봤는가. 엄청나게 반성을 하다가 하여튼 괴로웠지. 도피생활 자체가 엄청나게 괴로웠지. 그런데 내가 도피생활 하면서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내가 이야기 했던 박정희 이제 암살해 불라고 했다고, 그 팀들 중에서 인제 정상용이하고 또 한 친구 또 한 친구 셋이가 도청 항쟁지도부에 들어가 버렸고, 박형선이는 예비검속 되어 있고. 그러니 인제 그 사건까지 아울러서 터질 가능성이 커지니까 거기다가 인제 내가 그 전홍준 선배 집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갖고, 인제 오수성 교수 같은 경우는 윤상원이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알고 있드라고요. 내가 무장투쟁을 하고 어쩌고 해서 도청을 장악하고 했던 이야기를 이 학생회 간부 애들이 들은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한 거에요, 자기들끼리. 근게 자기들 선배들이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으니 우리도 호응을 같이 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또 ‘자유노트’라는 데다가 전부다 기록을 해놓은 거예요, 회의기록 같은 것을. 그게 자유노트 사건인데. 그 노트를 그 학생회 간부 중에 한 놈이 나중에 좀 숨어 있다가 자수하면서 갖고 들어가 버렸어. 다행히 수사가 일단락 된 다음에 그 노트가 나와 가지고 요 내용을 뒤집지를 못한 거예요. 이미 수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유야무야 했는데. 인제 거기서 송선태라는 친구가 자기가 그걸 작성을 했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막 썼다. 생각 없이. 그렇게 오리발 내밀어 불고 끝났는데. 인제 고게 사전에 인제 준비한 것처럼 되어 버리다고. 폭력 폭동을. 거기다 박정희 암살 이야기 나오면 골머리 아퍼버리지 인제. 그런데다가 당시 수천 명을 잡아 넣어노니까 검찰력이 딸린 거예요. 수사력이. 그러니까 전국 각지에서 검찰, 군법무관하고 검사들을 차출을 해요. 그러니까 인제 이 지역 사정을 전혀 모르는 놈들이 많이 왔는데. 그 중에서 인제 이 지역 사람하고 아는 검사들이 정보를 흘려준거죠. 왜냐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한봉이는 이번에 잡히면 죽는다. 딱 죽여불라고 계획을 세우고 있더라. 나 그 사람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그 사람 잡히면 안 된다. 그 이야기가 인자 서울에 도피하고 있는 나한테까지 들려요. 그 다음에 우리 작은 형이 인제 잡혀 들어갔다가 그대 대동교 교사였는데. 학생들이 시위하고 그러는 바람에 수습대책위 관계했다고 나오는데 검사가 불러가지고 당신 동생 윤한봉이는 잽히면 무조건 죽인다. 다른 사람은 안 죽어도 그 사람은 죽는다. 당신 동생은. 그니까 절대 잡히지 않도록 해라. 인제 그때 당시에 오월 항쟁에 대해서 신군부쪽에서는 폭동으로 뭐라 뭐라 했지만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마음속에서는 그게 아니었으니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철저하게 도피해라. 나도 그 사람 모른다. 그러나 내가 와서 보니까 그렇다. 그 정도로 (엄청난 거죠) 근데 그 다음에 인제 내가 한 두어 달 있으니까 사건이 수사가 일단락됐어요. 정동년씨를 수괴로 해가지고, 처음에 홍남순 변호사 송기숙 교수로 하려다가 도통 안되니까 인제 정동년이로 갔는데. 김대중씨 방문해가지고 방명록에 이름 써 놓은 것이 나온 바람에 인제 그렇게 됐는데. 다 끝났다 그런데 내가 잡혀불면 또 다시 시작 한다. 수사가. 그 다음에 광주에 남아 있는 그 나마의 운동영향까지도 싹쓸이 당해 버린다. 인제 나하고 얽히고 설킨 것이 너무 많으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잡혀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인제 박정희 암살을 같이 이야기 했던 친구들 그쪽에서 올라온 이야기가 청산가리를 형님한테 올려 보내자 잽히게 되면 자살을 하라 운동을 위해서 자살을 하라고. 청산가리 이야기가 나왔어. 근게 이제 야 그건 너무하지 않냐. 형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랴. 그래가지고 나한테까지는 안 왔는데, 청산가리가 안 왔는데 그 이야기까지가 들린 거야. 그런 속에서 내가 저번에 이야기 안했었나? 도피하면서 목욕하면서도 입에다 칼 물고 있다고. 그러니까 인제 혼자서 독방을 쓰면서, 방에 있으면서 옷 벗고 상의를 벗고 심장 부위를 이렇게 마커로 그려가지고 그 남민전 사건 때문에 내가 그 그랬는데 남민전 사건이, 폭동의 주범이 잡힐때 자살 시도 했잖애. 그 양반 이재문씨, 그렇게 해서 죽어 버렸으면 간단한데 가슴을 찔렀는데 잘못 찔러갖고 안 죽어분거에요. 그래갖고 이것저것 줄줄이 사탕으로 나와 부렀지. 인제 그것 때문에 내가 인제 여기다 거울 앞에서 심장을 이렇게 그려 넣고는 누가 이렇게 칼 물고 있을 때 잡으로 오는 것은 아니니까 잘 자다가도 급습당할 수도 있고 엎어져서 책 읽다가도 급습당할 수 있고. 똥 싸다가도 급습 당할 수도 있고.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이제 오른손이건 왼손이건 인제 칼을 잡고 정확하니 거기(심장)를 쑤시는 연습을. 여그다가 칼을 항시 꽂고 있었어요. 양말 속에다가. 그래가지고 저녁에 도피할 때 잠을 자더라도 양말을 벗지 않고 잤으니까. 그래가지고 무수히 연습을 한 거예요. 쑤시는 연습. 그 다음에 그거기 실패했을 때 인제 대동맥 경동맥 자르는 거. 그래가지고 이쪽에다가는 면도날 요쪽에다가는 긴 칼, 과도. 날카롭게 간. 인제 경동맥은 면도날 하나면 있으면 긁어버리면 되니까. 그래서 이제 목욕탕에 있을 때 깨 벗고 때밀이하고 이라고 있을 때 갑자기 들이닥쳐 불면 어떻게 할거이야 인자. 그래서 이제 칼 물고 그런 거라고(목욕했어요). 아니, 그때는 진짜 왜 그냐면 눈을 감아도 떠도 맨 피만 보이니까. 그때 그 절박한 처절한 상황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햐가 안 돼. 그런 도피생활을 약 1년 했지. 그래갖고 한 놈이라도 죽이고 나도 죽는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는다. 그렇게 해서 광주를 지켜야 한다. 운동을. 한번은 하도 화가 나가지고 광주로 다시 내려와 가지고는 한번 다시 준비를 한번 할라고 광주로 나 내려갈라요 광주 도피처 좀 준비를 해달라고 하니까 여기 절대로 내려오면 안 된다고. 못 도와준다고. 못 내려오게 강력하니 막아. 그러다가 인제 그런 속에서 해외 망명, 이렇고 있을 바에야 나가서 싸우는 게 낫지 않냐(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좋아라 하지 광주에선. 그렇게 하시죠, 그렇게 하시죠. 그래가지고 이제 상의해서 해외로 나가게 된 거에요. 그래 해외 나가서 내가 미국 배안에서,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망명생활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으로 정한 것들이 이제 그런 거지. 감옥 생활 하듯이 절대 침대에서는 안 잔다. 항시 도피한다는 생각속에서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해서 내가 망명생활을 하는 중에 허리띠를 풀지 않는다. 그 담에 선원들한테 들으니까 미국은 맨 샤워를 그렇게 많이 하드만. 근데 나는 한달에 목욕 한 번씩만 한다. (웃음) 그리고 이승만이처럼 혀 꼬부라져서는 안들어 올라니까 영어는 안 쓴다. 미국생활에 적응하려면 운전을 해야 하는데. 운전 안한다. 내 것을 갖지 않는다. 등등을 안 한다고 아주 다짐을 했지. 그래갖고 고놈 지키는게 제일 힘들었던 게 다른 것은 괜찮은데 허리띠 안 풀고 자는 거. 이제 입은 이 채로 자고 살아. 12년은 그렇게 살았어. 그래서 인제 다른 지역은 괜찮은데 LA는 덥거든. 허리띠 안 풀고 양말 신은 채로 내가 12년 살았는데 인제 내가 허리가 아파 안 좋아가지고 이 수지침을 왕창 맞을 때에 한 일주일 내가 추리닝으로 갈아입었지 그 외에는 내가 허리띠 안 풀어놨어. 왜냐면 이걸 막 왕창 꼽아놓으니까 어떻게 이걸 할 수 없으니까 (*바지춤을 올리는 시늉을 함) 할 수 없이 추리닝을 입었지. 그리고 인제 통장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고 신분증도 없고 뭐 내 방도없고 민족학교 같은 디 세워가지고 인제 거기 한쪽에서 자고 동가숙서가식 하는 식으로 살고. 근게 내가 아무것도 안 가진 채로 옷은 이제 얻어 입고 주워 입고. 그렇게 살다가 비행기 타고 갈 때 식사시간 되면 뭐 먹을거냐 그러면 옆사람 봐 가지고 저 사람 꺼 주라고 저거 주라고. 911테러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신분증 조사 같은 것은 거의 안 해요. 이를테면 인제 저임금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봉제공장이라든지 이런 곳을 그렇게 가끔 일년에 몇 차례씩 급습하는 형식이지 우범자 아니면 길거리 지나가는데 신분증 보자는 예가 없어. 내가 12년간 있어면서 신분증 보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죠. 비행기 맘대로 타고 다니고 (누군가가) 공항에 있는 거 실어서 손 흔들어주면 타고 내리고 기다리고 있다가 태워갖고 가고. 그렇게 해서 인제 각 지역에 가서 조직 만들고 각 지역에 센터 만들고. 그래서 이름을 민족학교, 청년학교 그렇게 하고. 청년들을 의식화해서 인자 재미한 청년 만들고 나이 든 분들 모임 만들고 해외의 한 청년 만든다고 유럽 호주 이런데도 만들고. 12년 하다가 영삼이가 들어와 가지고 (대통령되어서) 귀국 허용해서 들어왔는데 우너래는 내가 87년 대통령선서가 끝나고 나서 88년에 총선이 있잖아요. 총선 때 이미 항쟁 지도부에 있었던 정상용이가 국회의원이 된 거에요. 또 518로 들어갔던 박석무씨도 국회의원 됐고. 다시 말해서 사면복권이 다 돼버린 거에요. 88년까지 해서. 5월 관련자가. 근데 나는 93년에 들어온 거에요. 5년을 더 있다 들어온 거지. 이유가 뭐냐. 인제 미움 탄 거지. 해외 활동이. 해외활동에 의해서 그 분들한테 미움타고 김대중씨의 방해. 내가 김대중씨 욕을 사정없이 해버리니까

3-2. 김대중

면담자: 아! 선생님 그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요.
구술자: 지금 그 이야기를 터놓는 거예요. 에, 88년정도 되니까 평민당이 그때 여소야대지. 큰소리 칠 때지. 근데 518문제가 다 풀렸어요 인제 사면복권까지 다 됐어. 아 국회 의원 될 판인데. 인제 내 귀국문제가 나온 거예요. 다 간다고(귀국한다고) 나는 인사하고 다녔다니까. 미국에서 인자 몇 지역을 돌면서 인자 송별회 한다고 그래가지고 전별금이라고 얼마씩 주고 그랬어. 그라고 다니다가 중단했는데 왜냐면 느닷없이 인제 민정다에서도 동의를 한 거에요. 다 풀렸는데. 근데 이제 평민당에서 동의를 안 하는거야. 근데 동의를 어떻게 안했냐면, 재밌어. 내 매제가 박형선인데 박형선이나 민청학련 때 같이 고생을 했던 해찬이, 이해찬이. 이해찬이가 평민당에 있었는데 이해찬이가 국회의원이 됐어. 그건 5월 관련자는 아니지만 이해찬이가 형선이한테 전화를 해갖고 한봉이 형 귀국을 하는데 협조를 할 테니까, 우리 평민당에서도, 조건이 있다여. 뭐냐 그러니까 뭐냐면 광주청문회라는 것이 있었잖아. 88년에. 그 청문회 증인으로 내가 당연히 와야 한다는 것이 여기 주장이여. 518관련 단체들부터. 당연하지. 내가 있어야지.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까. 근게 청문회 증인으로 민정당에서도 그러고 또 다른 당에서도 다 동의를 하는데 평민당에서 건거야. 뭐냐. 근게 말을 안 하면서 뒷구멍으로 흘러나온 게 이해찬이가 전화를 해서, 청문회 나가서 말을 할 때 우리 김총재 인격을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을 안 해준다는 약속만 받아주라. 내가 청문회 나가서. 그러면 동의하겠다여. 이게 근게 뭐냐면 518전부터 나는 김대중씨를 사정없이 비판을 해부렀으니까. 미국에서는 말할 것 없고. 민족 반역자부터 친미사대기회주의자 만나면 대가리를 박살을 내분다고 개새끼 상놈의 새끼 욕하고 그랬다니까. 왜냐면 80년 518전에 김대중씨에 대해서 내가 각개표를 친 이유가 뭐이냐면 70년대 그 피나는 노력 끝에 어떻게 해서 인자 박정희 부마항쟁 박정희까지 암살당하고 12.12 신군부가 권력을 100%장악 못한 이유는 그 만크 민주화 열기가, 민주화 열망이 강했다는 이야기예요. 한꺼번에 못 먹었어. 그러니까 정치권이나 운동권이 전부 똘똘 뭉쳐서 밀었으면 신군부가 전면에 못 나선다고. 그런데 이 교활한 놈들이 김대중씨 딱 그 복권, 연금 해제 이걸 했잖아요? 그래 싸움을 시킨 거지. 김영삼이하고. 근데 당시 당수는 김영삼이야. 김대중씨는 연금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활동을 못했어. 그러면 실질적으로 당을 끌고 있는 사람은 김영삼이야. 그런데 뭐이냐면 적과의 사움을 앞두고는 철저하니 내분은 막아야 하는 거야. 피해야 하는 거거든. 분열은 안 되니까. 내부 분열은. 그러면 김대중씨가 자기는 연금당한 것은 억울하고 정치활동 금지된 것도 억울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어려움 속에서 영삼이가 그때 잘 했거든. 버텼거든. 당당하게. 그러다보니까 인제 제명도 당하고 그랬는데. 그러면 김영삼이를 존중을 해 주면서 멀리 보고 일을 해야 하는데. 자기가 뭐 대통령 될라고 운동한 것은 아니니까. 풀리자마자 김대중씨가 영삼이한테 조건을 내건 것이 뭐냐면, 입당하라 했거든? 근디 뭐라하냐믄 재야의 지분을 요구한 거야. 재야의 지분. 50%.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이미 그 당내에도 김대중씨 사람이 있는데 자기 부하들 뭐 측근들 다 들어가 있는데 김대중씨 사람들이. 권노갑이부터 다 들어있는데. 근데 재야지분 50%를 요구하는 것은 당을 접수하겠다는 이야기야. 니가 나한테 넘겨라 그것이지. 지분 50%라는 것은 중앙의원들을 말하는 거라고. 대의원들. 당을 내놓으란 이야기야. 그러면 이 50%에 대해서 재야에서, 근게 재야라는 말 자체가 그래. 재야가 조직명이 아니잖아. 운동하는 사람이 전부 모여서 농민운동 노동운동 문화운동 각계각층 여성운동부터 다 모여서 우리가 이번에 선거를 통해서 민주정부를 수립하자. 첫째 그러기 위해서 야당의 통합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통합은 하되 신민 민주당이 그때 신민당이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하되 우리들의 지분을 요구하자. 왜?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을 많이 했으니까 싸웠으니까. 그래가지고 그럼 거기서 50%를 요구하자. 이렇게 해서 논의를 거쳐서 합의된 안이라고 하면 내가 불만이 있더라도 김대중씨 욕을 그렇게 안하자. 그러나 그런 과정에 의해서 비슷한 거 일도 없지. 재야를 업어버린 거지. 자기가 재야의 대표자인양 행세를 한 거지. 지도자 행세를. 지분 50%를 요구하니까 김영삼이, 현실정치인 입장에서는 당 접수하자는 이야긴데 현실적으로 자기가 당순데. 그걸 받아들이겠어? 안 받아들이니까 어떻게 되냐 김홍일이부터 시작해서 아들들 동원해가지고 연정이란게 그때 생긴 거에요. 전국적으로 당 만들기 작업에 들어가버렸어. 신당. 그러니까 김대중씨 아주 유명하지. 그 뒤로도 십여년 생활에 걸쳐서 똑같이 보여줬지만. 일단은 기존에 있던 당에서 자기가 영향력이 약하면은 새당을 꼭 만들어. 쪼개서 나가서 만들든 먼 수를 쓰든지. 그걸 한두번 했나. 그래가지고 다음 조직을 들어갔다고. 또 당 조직 작업해. 그러면서 인제 이 거지같은 언론들 통해서 이를테면 동아기념 몇주년 기념 행사한다 그러면은 영삼이가 갔는데 국회의원 몇 명이 따라갔다. 김대중이 갔는데 국회의원 몇 명이 따라갔다. 맨 그 숫자. 그래갖고 누가 더 세력이 센가. 언론은 맨날 그거 보도한 거에요. 신군부에서는 그 방향으로 끌고 가니까. 압력을 넣어서. 그래가지고 둘이 경쟁하는 것처럼 나와가지고 야당 분열상을 강조를 한거지. 100%김대중씨가 거기서 주역을 한거지. 근데 마찬가지. 87년 대선때도 나는 김대중씨 미국에서 신당 만들어가지고 독자적으로 나가는 거 무지하니 반대를 했어. 전화비 그때 엄청나게 나왔는데 광주다 대고 김대중씨의 출마를 막는 것은 막을 수 있는 힘은 광주밖에 없다. 광주에서 이걸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그러면은 이건 무조건 노태우 당선시키기밖에 안된다. 미쳤다. 이렇게 둘이 나가가지고 어떻게 이겨야 합해도 이길까 말까 한데. 그 논리로 악을 쓴 거지. 후보 단일화. 긍게 인제 김대중씨가 당연히 당권은, 그때도 똑같아 87년때도 그 때랑 똑같았는데 영삼이가 쥐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김대중씨가 너 나와라 내가 할게. 되냐 이거지. 말이 안되지. 우선 영삼이가 나가야(출마해야) 한단 말이야. 그래야 싸움이 되지 싸움도 하나 마나다 이건. 그래가지고 이제 악을 썼는데. 김대중이 이 개새끼 말이야 피눈물로 그 수많은 사람들의 신음 속에서 피 속에서 이뤄논걸 김대중이 저놈이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을라고 한다고 악을 쓰고 그랬는데. 결국은 떨어졌지. 광주도 그렇고 김대중씨도 그렇고 세월이 흐르고 지금도 시인 다 하지만 87년에 대선에서 분열했던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절대로 못 면해요. 호남 사람들하고 김대중하고. 바보짓이지. 바보짓이었으니까. 분명히 노태우 당선시킨게 누군데? 인제 그렇게 해서 내가 비판을 엄청나게 했거든. 광주에서도 김대중씨가 신당 만들라고 작업하고 있을 때 나쁜놈의 새끼가 없다고 말이야. 그 수많은 눈물과 비명과 피를 한 입에 털어넣으려 한다고. 악을 썼지. 근게 미국가서도 그랬고. 왜 그러냐면 미국 와 가지고 김대중씨가 오면서 전두환이가 특혜를 줘가지고 달라를 엄청 가져왔다고. 그래가꼬 워싱텅 D.C에서 집도 굉장히 좋은데서 살고 아파트도. 그거에 대해서 대한민국 노동자들 임금이 어떻게 외채가 얼만데 망명 정치인이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 살면 안된다. 손가락질 받는다. 그런 지적을 그래도 좋 생각있는 측근들이 했다고. 김대중씨 왈, 미국은 자본주의 사회다. 꾀죄죄하니 내가 있으면 상원 하원 어떤 놈이던지 나를 인정을 안한다. 만나주지도 않는다. 대접을 안해준다 이거야. 근데 그건 또 맞아. 비슷해. 그말이 현실적으로. 왜 그냐면 원래 망명정치인이란게 망명객이라는게 꾀죄죄하게 되어 있다고. 아 낯선 땅에 와서 신세지고 있는데. 보호받고 있는데 고놈의 무슨 주류 사회에서 허리펴고 살거여. 근데 김대중씨는 거기서 대접받는 고걸 강조한 거지. 다른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의 망명객 이래서는 안된다 이렇게 살아서는 그런 식이고. 근데 김대중씨는 호화롭게 살았지. 거기 있으면서 777일을 살았는데. 미국에. 단 한번도 민박을 안했어, 거기서. 왜냐면 우리 동포들이 여기서 가가지고 어렵게 고생해가지고 세탁소하고 청소하고 빨래방하고 아조 고생고생해가지고 돈 벌어가지고 제일 먼저 마련한 것이 집이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다음에 차. 임대? 아이고. 이런거 안 통해. 사야지 직성이 풀려. 그러면서 영화에서나 나온 저택을 사. 그럼 자랑하고 싶어. 그러니까 국내에서 유명한 목사 유명한 문인 유명한 정치인들 오면은 다 서로 싸움해. 자기집에서 모실라고. 그래가지고 인제 아침에 봉투 싹 넣어주고. 김대중씨 모실라고 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 천지에. 그런디 민박을 한번도 안했어. 이유는 뭐냐, 신변보호 때문에. 호텔 같은디 특급호텔 들어가면 신변보호야 확실하지. 그라고 전부 특급호텔이야. 어떻게 다녔냐. 나는 그런데 안다녀봤는데 호텔에서도 가족들이 들어가는 룸이 있어. 스위트 룸이라고. 아예 아파트처럼. 요리도 해먹게 되어 있고. 그런 스위트 룸만 이용했다고, 김대중씨가. 보통 객실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제일 비싼거. 이승만이가 일제하에서 항일운동할 때 동포들이 접시닦고 농장에서 일해서 한푼두푼 모은 돈 가지고 각 지역에 다니면서 제일 좋은 호텔에서만 잤어. 그러니까 내가 시애틀 가면 저것이 주로 이승만이가 썼던 호텔. 시카고 가면 저것이 이승만이가 썼던 호텔. 김대중이가 그렇게 산거야. 특급호텔에서. 스위트 룸에서 부인 이희호 여사부터 싹 데고 다니면서. 민박 한 번도 안했어. 카스트로가 유명한 일화가 많은 사람인데 쿠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어. 그 동네 와서 허술한 집에 가서 자. 그러면 카스트로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지역 주민들이 그 집을 그 주변을 다 둘러싸서 서서, 서서 날을 새버리는 거야. 어떤 놈들이 무기 들고 못 들어오게. 주민이 몸으로 인해전술을 막아부러. 그럼 김대중씨가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서 근다고 그러면 진짜로 동포사회에서 호남 출신들 청년들로만 해도 집을 몇 벽을 싸부러. 둘러 싸. 돈 주면 경호원들 얼마든지, 그 정도 돈은 다 내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여. 그러면서 주한미군 철수 반대 강연 나오지. 버클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한다고 그러니까 질문을 던지니까 왜 반대하냐고 백인이 하나 물은거야. 진보적인 백인이. 지금 코리아에서 미군이 나가면 독재가 더 강화되어버린다. 이 사람들이 다 자리차고 나가버렸잖아. 그럼 주한미군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어느정도는 유지시켜주고 있구만 이러고 나가버리고. 마르크스보다 더 못했다고 그랬다고. 맞아 맞아 누구냐 그 필리핀에서 암살당했던 친구 누구지? 마르코스 맞지?
면담자: 예, 맞는 거 같은데요.
구술자: 대환영을 했지. 환영을 했는디, 자유주의 수준에서 못 벗어나니까 손가락질을 받았제. 긍게 인자 주위에서 누가 당신이 살라면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가봐라. 니콰라과 여행을 권한거야. 그래갖고 그 친구가 니콰라과 가서 눈을 뜬 거여. 아, 나 귀국 하겠다. 가서 내가 우리나라 민중들과 함께 하겠다. 그러니까 미국 들어오지 말라는 거지. 들어가 가지고고 암살당해 브렀제. 그러니까 인자 마르코스는 정신을 차렸다는 거지. 근데 김대중이는 못 차린 거여. 그래가지고 미국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요즘 말하는 전문 경영인들 쓰고 자본주들이 뒤로 빠져 있는 이런 거가 결정적인 LA강연때는 자리차고 중간에 나와 버렸는데, 자기가 감옥에 끌려가서 사전 예비 검속 돼갖고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것에 분개해서 518이 터졌다고 강연에서 나와버려. 518발발 배겨이 자기 예비검속이라고.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겠어. 그래서 나와 버리고 그랬는데. 그래갖고 무지하니 내가 김대중씨 비판을 많이 했어. 그래서 내가 한번은 김대중씨한테 돈 모아갖고 볼보차를 사준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나까 김대중씨가 차를 볼보를 아들 줘 블고, 홍업이를 줬제 그때. 자기는 비행기타고 다녀버렸는데, 내가 그 김대중 지지자들 앞에서 그랬어. 친일, 아니 친미 사대 기회주의자 내가 만나면 박살을 내버리겠다고 내 말 똑똑히 전하라고 나쁜 놈 새끼가 없다고. 나중에 들어보니까 전했다고 하더라고.(웃음) 시퍼래 지더라고(웃음) 거기서 김대중씨는 자기한테 돈 준 사람은 충신이야. 애국자고. 충언을, 직언을 하면 나쁜 놈이여. 반역자고. 그래서 자기 대통령 된 다음에 거그서 돈 준 사람들 국회의원부터 하다못해 경정, 무슨 국민생활 건강 공단 뭐 전부 이사, 간사 뭐 LA지역만해도 87명인가 그렇게 혜택을 보고 그랬다는데, 나눠 먹었지 그 일을 홍업이가 다 한 거지. 근데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 내가 인자 광주 청문회에 서게 되면 알거든 민정당 놈들은. 그러믄 살살 또 고놈들이 끄집어 낼 거 아니여. 증인은 김대중씨하고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있던데, 왜 그랬냐고 막. 그러면 내 성깔에 인자 때는 요때다 하고 사정없이 쏘아대 버릴 수 있잖아. 그래갖고 그걸 막기 위해서 그 조건을 단거여. 그러니까 인자 형선이도 화를 내블고, 나쁜 놈의 새끼들이 없다고 말이야. 증언자한테 무슨 사전에 각서가 필요하고 무슨 약속이 필요 하냐, 소신대로 하는 거지. 감방에 있을 때 각서 쓰라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 아니냐. 나한테 연락했더라고 개새끼 지가 나 들어가고 말고를 지가 결정하냐고. 뭐 나중에 안께 진짜 김대중이가 결정한 셈이 돼 버렸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증인 채택에서 정당간의 합의가 안 돼갖고 나는 빠져버리고. 내가 빠져 버리니까 안기부에서는 입이 이만해저 브렀지. 들어오지 말라고, 그러니까 인사다니다가 중단했다니까. 그러니 전별금 받아 가지고 돌려주기도 그렇고 애매해서 혼났는데. (웃음) 그래갖고 오년을 더 살아버린 거에요, 망명생활을. 노태우 5년 전두환 7년, 그래서 12년. 영삼이가 들어와 가지고 귀국허용을 해가지고 그러니까 인자 앞에가 붙은 게 최후의 수배자 이렇게 된 거지. 오년 추가 수배자가 된 거지요, 정확한 표현으로 한다면. 오년 동안 해외에서 더 보냈으니까. 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열나, 오년을 더 보내버렸다니까. 망명생활을. 아주 기분 나쁘고
면담자: 선생님 뭐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건 아니죠?
구술자: 내가 개인적으로 그 사람하고 원한 가질 기회가 없지. 내가 미국에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난 그 사람하고 원한 가질 이유가 없어 내가 뭐 정치인이면은 뭐 하다못해 공천을 받으려고 했는데 안 해줬다던가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정치하고는 첨부터 담 싼 사람이라, 나는 진짜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거든 왜 그냐믄 내가 취미가 그래서가 아니라, 내 성깔을 내가 알거든. 내가 아주 그 뭐랄까 좀 치열한 스타일이라 이를테면 이를 죽이더라고 이렇게 죽이는 (손으로 으깨는 흉내늘 내심) 스타일이라 내가 권력을 잡으면 나쁜 놈들 손을 너무 심하게 볼 놈이라고 그걸 내가 알아. 피가 막 범벅이 될 가능성도 많고 그래 나는 아예 내 성깔이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내가 연속극을 보면서도 근다니까 뭐 사극이나. 요즘 신돈 보면서 화가 아조 머리끝까지. 저런 개새끼들이 나라를 끌어왔으니, 우리 민족이......그냥 때려죽이고 싶은 거야, 드라만데도. 그러니 내가 정권을 권력을 잡으면 쓰겄어. 아예 옆에를 안 가블라 하지. 그러니 성격 고약한 사람은 칼을 안 들어야한다고. 그러니까 나는 아예 정치판을 끼웃거리지를 안 해브니까 나는. 내 김대중씨하고 내가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질 시간도 없고, 기회도 없었고. 근디 인자 나 보고 다 그러잖아. 김대중이 오년간 대통령 겪고 나서, 옛날에 민청학련 동기부터 시작해서 옛날운동권 동기들이란 놈들 중에서 들어와서 보니까 김대중씨 비판한 놈이 없는 거야. 하나도. 근데 나는 들어와서 내 스타일대로 하니까 누가 있건 어느 자리에서건 할말 하는 놈이야. 언론의 자유는 스스로 누리는 거지 누가 주는거 아니다라는 주장이니까 첨부터 나는. 사정없이 해 블지. 그러니까 못마땅해 죽겄지 대들지는 못해. 왜 그냐면 논리적으로건 박살이 나지. 나만 광주에서 맘대로 말하고 산다고 그랬는데, 근데 사람들은 거기서 못 벗어나. 그러다가 김대중5년을 겪고 나서야, 아이고 20년을 앞서 살았습니다, 인제 형님이 옳았던 것을 인정합니다. 다 그래 지금 뭐 그래서 옛날 김대중이 편들고 그랬던 놈들 슬슬 눈치보고. 또 엊그제 얼마 전에는 도청 문제 나오고 그러던데 그 사람은 정치 전문가여. 운동가 아니야 그 사람은. 내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라 저 사기꾼이다. 나쁜 놈이여. 김대중씨가 우리나라 정치인들 중에서 김구 선생, 장준하 선생 제 명에 못 돌아가신 분들이 많지만 야당 지도자는 비주류지도자는 탄압을 받기 때문에. 김대중씨 그 사람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그 사람 정치 정치인이야 정치인. 그렇고 그런 정치인이야 좀 뛰어난. 끝. 인자 호남이 518이 김대중씨 때문에 엄청나게 손해를 봐브러. 호남의 권위, 명예, 518의 권위, 명예, 김대중씨한테 다 바쳐브렀지. 이 지역 518로 남아버린 거 아니야. 전두환, 노태우 사면 받고. 아이고메 말도 안돼. 어떻게 찢어 죽여 버릴까 하다가 어느 날 사면 받고. 화해와 용서 그러니 종교도시로 바뀌었지. 또 갑자기 평화도시로 바뀌노 난리 장방구지 그래갖고 문화도시. 인자 그 이야기 고만하고.

2-3. 귀국 후 활동 - 518기념재단과 들불열사기념사업회

그 다음에 귀국해가지고 여기에 518재단 만드는 것까지 여가 나와 있어. 엄청나게 욕 먹었지. 아마 나처럼 욕 많이 먹은 사람 없을 거야. 5월 관련단체들이 많잖아. 419도 그렇고. 이렇게 보면 뭐 상이유공자회니, 전몰유공자회니 머 많잖아 이런거 이. 근데 아주 극소수가 인제 그런 조직을 실무 집행기그를 장악해가지고. 먹고 살지.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 죽이고 싶지. 하여튼 518 기념비 만들면서 욕 무지하게 먹었지. 그래 어쨌든 만들어져가지고 지금 중요한 역할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연구소 만들어서 그거 그렇게 하고, 주로 강연 다니고, 글 쓰는 것은 싫어하니까. 들불열시 기념사업, 518자유공원에 거기 추모비 세웠는데 봤죠? 대한민국에서 제일 멋진 거여 그게. 내 평가가 아니라 타 지역 사람들이 와서 그렇게 해주라고 얼마나 많이들 그러는데. 그 요즘 들불 기념사업에 사단법인 만들어서 이제 내가 초대 이사장 맡아서 있는데, 들불상 제정해 가지고 일 년에 천만원씩 상 주는 거. 그 작업 지금 하고 있고. 지금 한 일억 오천 모았는데, 이것도 우리나라 운동 관련 상으로는 제일 큰 거여. 천만 원짜리라. 우리나라 상 아주 남발돼갖고, 백만원짜리 상, 이백만원짜리 상, 삼백만원짜리 상. 그리고 옛날부터 상은 내리주는 건데 올려주는 거여. 손자가 할아버지한테 상주고 그런 식으로.
면담자: 들불상은 어떤 사람한테 주는 상인가요?
구술자: 들불상은 들불관련해서 일곱 분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순서대로 들불 박기순상 모범적인 여성 노동운동가. 윤상원상 모범적인 남성 운동가. 박용균, 이건 고아거든. 그래서 모범적인 소년소녀 가장. 박관현, 모범적인 인권운동가 인권일반. 신양일이는 소수자 인권. 김형철, 이건 빈민운동가 모범적이고. 박효선, 모범적인 문화운동가. 이렇게 해서 매년 그분들 이름을 써 주고, 일년에 한번씩 주는 천 만원.
면담자: 한 명씩당 천만 원을 준다는 거예요?
구술자: 응. 큰 상이야. 긍게 인자 그러기 위해서 기금을 2억을 마련하고, 회원들 회비를 일념에 만 원짜리 회비를 대한민국에서 제일 싸 만원이면. 한 달에 거 8백 7십원 씩 내니까. 그래갖고 운영비를 이를테면 일 년이면 백만 원도 안 써. 왜 그냐면 전부 자원봉사. 내가 주축이 돼 갖고 문건 작성해 버리고, 전화비 외에는 거의 안 나가지 우편비하고. 그렇게 해서 인제 주고, 목표액이 5억이여 일단계가 2억인데, 5억 모으면 일 년에 두 명씩 그래가지고 들불 박기순상을 하나는 국내, 하나는 불쌍한 동남아시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흔히 옛날 제3세계 운동가하고 같이 주는 거지 두 사람에게, 천 만원 천 만원씩. 근디 이런 다른데서는 가난한 나라에 대해서 만 불짜리는 엄청 큰 거여.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뭔상뭔상 많아. 아 늦봄문익확 통일상 뭐 오백만원도 안돼. 통일 문화상 한겨례 상 칠백만원, 칠백만원이 큰 거라고. 들불 것이 인제 제일 큰 것이 돼. 그런데 인제 내 건강 때문에 요것까지만 하고 나는 끝 손 뗀다고. 일부 단체도 후원하는 거 그건 하고.
면담자: 선생님 민족미래 연구소는요?
구술자: 아 민족미래 연구소는 95년에 열었고, 그것도 뭐 인자 주변에서 후배들이 전시회금 마련해주고 우당탕탕 해갖고 꾸며주고 어쩌고 시방 에 주로 인자 나는 거기서 강연 같은 거 다니고 그랬어요. 공부하고. 그 동안에 인제 감옥살이 할 때마다 공부를 했었는데, 감옥을 뜸하게 한 십여 년 안했으니까 옥살이를 공부 좀 많이 했고.
면담자: 그러면 지금은 문 받은 상태인가요?
구술자: 아 12월 31일부토 닫았지. 왜냐믄 거기가 3층인데 올라 다니기도 힘들고 내 호흡이 저 산소 발생기라고 전기분해로. 병원에서는 하루에 열다섯 시간 이상 이거 꽂고 있으래. 산소 호흡기를. 귀찮은데.
면담자: 선생님 이렇게 건강이 안 좋아지신 이유가 뭔가요?
구술자: 이게 지금 한방에서는 심화, 화 많이 내고 양방에서는 흡연, 담배 많이 피워서. 이게 폐기종이라는 게 한 이삼십년 진행이 된 거예요 지금.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병이 아니여 지금. 천천히 폐가 나빠 파괴 되는 건데, 인제 내가 94년에 발견을 했는데.
면담자: 들어 오시자마자 발견했네요.
구술자: 지금 내가 정상인의 호흡에 5분의 1밖에 못해. 긍께 5분의 1가지고 사는 거지. 산소로. 그러니까 인제 계단, 육교 같은 데 올라가면 한참 숨을 헐떡거리고 고르고나서 내려오고. 그러니까 아침에 3층에 있는 연구소 출근하다가 올라가면 바로 열쇠를 못 열어. 한참 숨 고르고 나서 열고. 하다 보니까 저항력이 약해지니까 겨울 되면 감기 걸리면 감기는 나한테 저승사자지. 그래 안 해도 호흡량이 적은데, 인자 가래가 기도를 막아 버리니까 그 다음에 인자 열이 생기면 염증이 생겨서 부어, 허파가. 인 또 호흡이 안되지. 자칫 저번에 폐렴으로 가버리니까 119에 실려서 가버리고. 인자 사람을 안 만나. 인자 오늘 여그 왔을 때 감기 걸린 것 같으면 쫓아냈지 내가. (웃음) 그러니까 인자 바닷가로 집짓고 살려고 그러는데 공기 좋은데 가서. 아 어떻게 나는 그런 거 잘 모르니까 누가 옆에서 땅을 샀는데, 길이 없는 땅을 사 갖고 길 문제 가지고 불량한 놈들이 돈을 많이 주라한 거지 인제. 불량해갖고 안 돼. 속상해. 무안 쪽으로 아파트 12평짜리 얻어가지고 우선 인자 광주는 공기가 너무 나쁘니까 옮겨가서 책이나 보고, 인자 또 기공으로 치료 해본다 해가 지고 기수련을 97년부터 시작했는데, 그리고 책 보고, 산보나 하고. 그려. 또 얼른 얼른 해. (웃음) 아 참 내가 책은 줬었지? 하여튼 여기 책에다가 다른 거 안하고 그 야기만 빠졌어. 그전 박정희 암살관계로 심리적으로 부담이 컸었다는 비하인드 이야기만 빠졌지.
면담자: 선생님 정확히 들어온 날짜가 언제예요, 선생님.
구술자: 93년 5월 20일엔가 일단 들어왔다가, 일주일 있다가 나가가지고 인자 보따리 싸갖고 8월 달에 들어왔지. 8월 17일인가에 들어 왔을 거여. 갑작스럽게 5월 행사에 참여해달라고 그래가지고 일단 들어왔다가 나가가지고 보따리 싸 갖고 들어온 거지. 보따리 싼단 이야기는 각 지역에 인사 돌고, 보따리란 게 있나 가방 하나 들고 다니는.

2-4. 정치활동, 정당에 대한 견해

면담자: 선생님 들어올 때 굉장히 언론에서.
구술자: 아 그거야 언론의 생리이지. 생리니까 그렇지. 아 뭐 주변에서 다들 나를 아는 사람들 전부 나는 정치판으로 나가는 것으로 순서가 그랬지. 김남주 시인이 죽었어. 인제 그때 김대중씨가 선거에서 92년 선거에서 실패하고는 정기 은퇴선언 했잖애. 그리고 영국 갈 거 그럴 때지. 김남주가 죽었어. 그 장례식장에 빈소 옆에 서 있는데 갑자기 김대중씨가 온 거야.
면담자: 94년도죠 김남주 씨가 돌아가신 게.
구술자: 그렇지. 긍께 그 갔다 왔는가 가기 전인가 하여튼 기억이 확실치가 않애. 그라고 인자 박석무 선배가 국회의원인데 김대중씨 온다니까 나는 저 짝으로 숨어 브렀어. 이 조화들 뒤로.(웃음) 계면쩍지. 좀 짠하기는 하지. 김대중씨 짠하게 됐잖아. 다들 불쌍해갖고, 광주 사람들 울고 그랬잖애, 은퇴한다고 하니까. 근데 인자 박석무선배가 야 한봉아 한봉아 김대중씨 오셨다 인사드려. 할 수 없이 인사를 했지. (웃음) 내가 그 동안에 인자 미국에서 있었던 일들 왜 인자 날개꺾인 사람인데 짠하지. 불미스러운 점 있었지만 이해하시라고. 나도 마찬가지라고. 김대중씨가 꼭 집에 한번 오라고. 글더라고. 예, 그러고 안 가버렸지.(웃음) 다들 그랬다고. 내가 김대중씨 찾아가면 글로 끝이라 이거야. 무조건 공천, 그럼 무조건 된다는 거지 이거. 국회의원. 미쳤어 내가 정치할라고 하겄냐고 그걸로 끝나버렸지. 하긍게 인자 내 가까운 초등학교 깨복쟁이 친구들 다 모지리, 머저리, 굴러온 것을 왜 버리냐 왜 그러냐고. 오란디 안 가냐고 그랬 샀고. 한나라당이 저번 선거 때 손학규가 전화해갖고, 아 이제 맘 좀 열어. 안 들은 걸로 합시다.
면담자: 요즘 선생님 민노당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구술자: 민노당은, 내가 여기 사람들(필자와 일행을 가리킴)있는 사람들 정치적 성향을 내가 좀 몰라. 이거 말하기 그런데, 나는 인제 아까 87년 대선 때도 독자 후보 주장하다가 안 돼. 아니, 후보 단일화. 그래서 백기완 선생 독자후보론으로 갔다고. 그럴 바에야 멀리보자.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된다. 백선생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 그 뒤로 계속 내 주장은 뭐냐면 우리는 분단냉전특수상황 때문에 우주에서 유일하게 진보정당이 없는 나라다. 그 다음에 김대중 씨와 그것이 다 거슬러 올라가면 한민당도 그러는데, 대한민국 야당은 의사 진보 특수를 누렸다. 내가 맨날 하는 이야긴데. 진보정당이 아닌데, 진보정당을 대중들은 갈망하는 거여.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해줄 정당이 없으니까. 찾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정당인양 하는 거지. 가짜지. 그래갖고 선거 때마다 재미를 본 것이 우리나라 한국의 야당사야. 노동자 농민 옛날에는 노동자 소릴 못쓰니까 농민, 근로자, 서민의 정당의 한국 야당의 의사진보특수라고 그래요. 그래가지고 선거 때마다 언제든지 진보 표를 얻어 묵어. 김대중씨가 그걸 아주 이득을 무지하게 봤지. 그래서 진보정당을 만들자는 움직임에 대해서 여당보다는 항시 야당이 사이비야당 진보정당이 더 박해를 가했다고. 훼방부리고. 왜, 있는데 또 뭐 만들라 하냐고. 쉽게 말하면 광주에서 전국에서 제일 약한 진보 민노당 표가 적게 나오는데 대한민국에서, 긍게 민노당이 숨을 못 쉬어.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 합법화됐으니까. 내가 와서 보니까 불쌍해서 못 봐 브러. 진정추 애들 진보정당 좌파 애들 대한민국에서 제일 약한 데야. 좌파. 사회 경제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봐서는 여가 좌파가 제일 강한 데여. 강해야할 곳이야. 그런데 왜 약하냐. 김대중씨의 표를 갉아 묵는 놈들이라 이거지. 인자 나쁜 놈들이야 쥐새끼같은 놈들이야. 근데 대중들은 무조건 독자정당 진보정당 이야기만 갖고 나오면 인자 죽일 놈 살릴 놈이여. 왜 그냐믄 저놈들이 한나라당이나 민정당표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공화당을 꼭 김대중씨 표 갉아먹는 놈들이야. 사실이 맞거든. 한나라당 찍을 놈들이 민노당 진보정당 찍을 리가 없지. 그러니까 쪽수가 적다 이거야. 저쪽보다. 경상도보다. 그러니까 인자 저가 에를 들면 투표율이 80퍼센트면 우리는 99퍼센트를 해야 이길까 말까한테, 거기서 새끼들이 구멍을 내 갖고 갉아먹고 있다 이거야. 요놈 나쁜 놈의 쥐새끼 같은 새끼들이 이렇게 돼 갖고 여기서는 무조건 진보정당은 욕을 먹어. 비판 흔히 말하는 배신자 반역자 프락치. 이 프락치 소리 무지하게 많이 들었지. 백기완 선생부터 영삼이 돈 묵고 나왔다느니 통일교 돈 묵고 나왔다느니부터 시작해서 무지하니 박해를 받어요. 의사진보 특수를 누린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특수를 깰라고 누가 불쌍한 사람들을 대변하는지가 드러나 브니까. 그걸 깰라고 그런 거여. 그러니 나는 들어오자 마자부터 여 내가 독자후보 지금 진보정당을 주장한지 알고, 내 귀국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한 7만 명 받았는데, 5만명인가 7만명인가 받았는데 그걸 진정추 애들이 받았다고, 좌파애들이. 긍게 자기 성향이 같은 줄 알고, 내가. 그래갖고 국회에도 제출하고 그랬지. 내 귀국 전에. 그러니까 들어와서 보니까 얼마나 웃긴 줄 알아. 이거 일환데 나는 인자 십여 년 만에 왔으니 광주 떠난 지 십삼 년이지. 도피생활까지 하면은 누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여기에 NL계에 전국연합회 계통에서 딱 인자 비서처럼 한 사람 붙였어. 그래갖고 인자 일정을 관리를 해. 나는 인자 뭐 누가 누군지를 어떻게 알 것이여. 친구들 얼굴을 잊어버려 가지고고 한참을 보고 알고 그랬는데. 근데 이라고 있는데 저기 누가 와갖고는 저 진정춘데요. 어 그래. 저희들하고 이야기할 시간을 좀 내주세요. 약속해. 무조건 갈게. 인자 어디 끼어들어갖고 진정춘데요. 그럼 이게 뭐 물어봐. 운동하는 친구들한테 거 민청 민청부터 요즘 그 진정추 애들 어떻게 지내? 그러면 뭐라 한 줄 알아? 자기들기리 서로 얼굴 요러고 쳐다보면서 요즘도 걔들이 있나 그래. 광주가 현실이 그래. 요즘도 그 애들이 있나야.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브러. 관심 밖. 그래서 내가 그 애들 만난다고 하니까 그래? 만나서 뭣할라고? 이런 식이지. 그래서 내가 무조건 후원회장이 되었지 내가. 민노당 후원회장 이었어. 광주. 그래갖고 선거 앞두고 후원의 밤. 얼마나 비참한 줄 알아? 여야 국회의원들 하면은 무등산 관광호텔, 이런데서 해. 한복 입은 여자들도 수없이 동원 많이 되고, 거기서 몇 천장 빌려서 해. 시 전체가 다 나와. 시당 차원에서 지구당이 아니라. 거 얼마나 모이냐 돈이. 내 돈 사십 만원 냈다, 내가 누가한테 이야기해서 백만원 내라했다, 백사십 만원 빼고 나면 오백만원이나 모여. 최고 많이 모일 때가 팔백만원이라니까. 시당 후원의 밤 행사에. 없어. 글고 인자 비참한 것이 NL계는 그렇게 탄압받았어도 분단 냉전 특수상황 때문에 맥이 있어 맥이. 민족을 내세우니까 그 민족이 갖는 신비감 때문에라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일으킨다고 그것이 작용을 해 갖고 그 속에서도 맥이 이어져. 긍게 NL계는 국회의원도 있고, 장관도 있고, 여그 저그 들어가 있어. 이 뽈갱이는 싹쓸이를 해 버렸거든. 좌파는. 그란께 선배라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NL계 놈들을 얼쩡얼쩡하다가 선배한테 차도 얻어먹고 짜장면도 얻어먹고 취직자리 부탁도 하고 다니는데, 70년대 이후에 학생운동권에서 배출한 뽈갱이들은 노동운동쪽 나이가 지금 많아도 50이야. 지금 노회찬이 그 세대들이야 중심이. 그리고 그 위에 권영길씨니 모두 뽈갱이가 아니거든 중간이지. 중도야 거기는. 긍게 지금 40대 후반 정도가 1세대들이야. 맥이 끊겨 브렀으니까 일제하에서부터 싹쓸이 당해갖고. 걔 밥 사줄 선배도 없어. 취직 부탁할 사람도 없어. 예를 들면 내가 와서 보니까 진정추 애들이 한 것이 뭐하냐면 만화방, 그 다음에 생수배달, 목공소, 두부장사 대개 이래. 자본도 없겄다, 뒤 봐줄 사람도 없겄다, 취직도 안 되고 그래갖고 뽈갱이 누가 취직을 해. 그래가지고 바닥 박박 기는 거지. NL계 애들은 달라. 근데 하여튼 어떻게 어떻게 해갖고 민노당에서 인제 지방자치단체만이라도 비례로 해 가지고 처음에 인자 광역에 한 명씩 들어가고 그랬지. 내 조카가 지금 윤난실인데 거기 하나 들어가고 그랬는데. 조금 살만해지지. 그런게 인자 70년대부터 진보정당 수립 이야기만 나오면 운동권에서 브레이크를 걸어 븐게 NL계였다고. 무슨 소리하고 있어, 아 당 중앙이 있고 어쩌고 노동당 이야기죠. 조선노동당. 이러니 뭘 또 따로 만드냐 이것이야. 혁명소조처럼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지 말이 많이 이런 식이지. 비슷한 논리를 사이비 진보정당 그러니까 의사 진보 특수를 누렸던 애들이 그걸 또 강조한다고. 김대중 장학생이었던 김근태부터 시작해서. 김대중장학생이지. 국회의원 되기 전부터 한 달에 오백만원씩 줬는데, 문익환 목사하고 둘이. 그 사람들 입장에서 시기상조론 무용론 아주 교묘한 논리, 민주대연합론 이렇게 애매한 소리 하면서 그걸 계속 막아왔잖아. NL계가 아주 이를 갈았지. 애국자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 김대중, 김대중.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나머지 뭐 특별히 할 거 있나.

3-1. 요즘 근황

면담자: 선생님 토요일 날 무안 내려 가신다구요? 이번 주 토요일날요? 장기적으로 가 있을 생각이세요?
구술자: 거기서 산다니까.
면담자: 이 집은 처분하신건가요?
구술자: 아니 여그는 내 아내가 살고 주말에 만나는 거지. 주말에 내려오고.
면담자: 아 선생님 결혼이야기도 들어야 되는데. 그것만 듣고 끝내면 안 될까요? 선생님의 연애사도 잠깐.
구술자: 뭐가,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네. 한가로운 소리 하고 있어. 이 총체적 난국에.(웃음)
면담자: 아니 분위기를 좀 바꿔보기 위해서 (웃음). 선생님 그러면 아예 그쪽으로 터 잡으시려구요? 그러면 지금 하시던 것은 들불사업회.
구술자: 아 요것만 하고.
면담자: 선생님 은사님 있잖아요. 김용근 선생님
구술자: 그 회장직 다 내놨어.
면담자: 다 내놓으셨어요? 그럼 이거(들불사업회) 하나만 하시는 거예요?
구술자: (들불기념사업회 글을 읽으심) 저의 폐기종과 천식이 갈수록 악화되어 더 이상 사회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들불 기념 사업회 활동만 빼고는 모두 일에서 손을 떼고 요양생활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민족미래연구소도 7월 31일을 기해서 문을 닫습니다. 모금액이 2억원을 돌파하면 이사장직도 사퇴하고 요양에 전념할 계획입니다. 저의 요양생활을 도와주는 셈치고 모금활동에 조금만 더 힘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웃음)
면담자: 가슴 절절히 쓰셨네요. 선생님.
구술자: 아 인자후원만 내가.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실상사 작은 학교, 민족문제 연구소, 뭐 등등 그런 일 한달에 얼마씩 보내는 것만 하고.
면담자: 선생님 수익이 있으세요?
구술자: 내 아내가 벌지. 내 아내가 버는데 우리 집은 이중경제야. 북하고 비슷한데, (웃음) 가정경제는 내 아내가 꼬마들 영어 갈쳐 그룹과외해서 우리는 먹고 살고. 내 활동비, 품위유지비, 그런 것은 인자 후원해준 사람들 있으니까 그걸로. 근디 나를 우습게 보지 말어. 내가 비록 동가숙서가식 했지만 518전부터 국내에서 봉급생활 안하면서 자급자족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사람이야. 운동권에서. 나는 YMCA에서 근무한다던가, 어디서 근무한다던가, 출판사를 한다든가 그런 것도 아니고 이 사람 저 사람 책 사보라고 얼굴이 그게 뭐냐 보약 사먹어라, 속옷도 좀 갈아입어라, 그렇게 준 돈들 모아서 내 활동비 쓰고, 옥바라지도 하고 주변에 후원 활동비도 도와주고 현대문화연구소 꾸려가듯이. 고런 생활을 이미 70년대부터 했었다고. 미국 가서 칫솔하나 달랑 차고, 가가지고 12년 살 동안에 나 밥 굶은적 없고, 얼어죽지 않고, 각 지역에 센타 만들고, 지금 민족학교 같은 경우는 일년 예산이 몇 십만 불씩 돼 지금. 그렇게 돌아와서 재단 만드는데 3억 4천 모금하고부터 이거 2억 모금 김남주기념사업회 들불 추모사업회 모금하고 그런 거 내가 앞장서서 하지. 인자 그거야 돈이라는 것은 사람보고 줘. 프로젝트 보고 안줘. 전두환이가 하면 돈 안준다고. 믿을만한 사람이 해야 돈 주고. 그래서 나는 이를테면 설 되거나 추석 되면 형님 설 쇠는데 보태쓰쇼 그라고 이렇게 봉투 내 논 사람이 꽤 많고. 이번에도 병원에 들어가 있는데, 대외적으로 절대 비밀이여 챙피하게 뭐 폐렴으로 쓰러져갖고 감기 옮은게 아무도 오지마라 그랬는데 어떻게 아는 사람들 어떻게 어떻게 투병에 보태 쓰십시오, 입원비 쓰고도 돈을 상당히 벌었어. 나는 그렇게 살아. 인자 그렇게 번 놈 갖고 후원도 하고. 내가 술을 안해버리니까 그라고 내가 잡스런데다는 돈을 안쓰는 사람으로 소문난 사람이거든. 화투를 친다던가 술 퍼먹고 객기 부려갖고 노래방 가서 악 쓴다던가 그런 것도 없어. 내가 옛날에는 승부욕이 강했다고. 바둑, 장기 같은 거 지면 밤새도록 두자고 하고 못 자게 하고 그런데 운동하면서부터는 진짜 큰 승부가 뭔지를 안거야. 한 나라의 운명을 가지고 민족의 운명을 가지고 밀고 당기고 싸우고 있는데 바둑갖고 쌈하고 앉었고 이런 거 우습게 보여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인제 누가 심심해서 두자하면은 즐기면서 두지. 이길라고는 안하고. 그러다보니까 나한테 돈이 오면 쓸데없는데다가는 안 쓰는 사람이라는걸 아니까, 인자 그런 신뢰가 쌓이니까. 그 다음에 내가 뭐 양복입고 머리에 뭐 바르고 폼 잡고 다녀야 그런데다 돈을 쓰는데, 지금도 나는 구두부터 시작해서 전부 얻어입고 그라고 옷은 겨울 되면 골덴바지 얼마나 따뜻하냐고. 속에는 양동시장에 만 삼천원짜리 내의 보온메리라고 해갖고 옛날 70년대 나온 두꺼운 내의가 있어. 인자 고거 떨어지면 품절되면 안 될 것 같아갖고 지금 세 벌을 사놨어. 지금 죽을때까지 입어블라고. 그놈 입어블고. 내가 그러고 산디 누가 뭐라고 할거야. 여 집도 내 여동생이 사준거라고. 금호지구에 12평 영구임대 아파트에 살았거든. 요(TV)받침 요것은 양동 가구시장에 가갖고 여기가 이라고 상처를 입어갖고 여기 한쪽에다 쳐 박아 뒀드라고. 반품한다고. 싸게 산 놈인데 우리는 그 시절을 잊지 말자고 하고 악착스럽게 이사하면서 갖고 와 갖고 살아.
면담자: 선생님 미국쪽에 선생님이 아직까지 관여하고 있는 것은 없는거죠?
구술자: 나는 인자 일종의 고문이지. 그래가지고 맨날 회원들 오고 가고. 일 년에 내가 한번씩은 가고. 그리고 여기 들불은 현재 1억 5천 얼마 모았는데 미국에서 재미동포들이 천 백 만원. 천 이백만원 모았구만. 같이 해. 북녘 동포돕기 운동 하게 되면 내가 여그서 돈 모아서 보내고. 내가 한 삼천만원 모금했을거야. 우리는 유엔 통해서(보냈어).
면담자: 선생님 518관련해가지고 선생님 보상받거나 그런 거는.
구술자: 응 받았어. 나는 인자 안할라 그랬는데 우리 작은 형님이 신청을 해 놔가지고. 할수 없이 내가 건강이 이래버리니까. 저거 두 개가 슬로우 쿠커 여그다가 인자 도라지 더덕부터 시작해서 온갖 폐에 좋다는거 모과, 한 열 댓가지 넣어서 여덟시간 중탕을 해가지고 짤순이 이 쓰레기 물짜는 건데 한약 짜서 마시고 요런 것만 해도 한 달에 한 사십 만원 들어가. 약재로. 환자가 돼 노니까.
면담자: 선생님 일년 내내 이러신건 아니죠?
구술자: 겨울이 힘들어. 겨울이. 그렁께 내가 보온메리가 어쩌고 추위에 신경을 쓰는 거야. 다섯 겹을 입어. 내가 나갈 때. 감기는 저승사자야 나한테는. 담배연기는 독가스고.

3-2. 518과 재단에 대한 평가

면담자: 마지막으로 518이랄지 재단이 잘하고 있는가랄지 선생님에 대한 견해랄지 선생님이 저희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 해주세요(웃음).
구술자: 근데 아니 인자 518이 어차피 거의 다 해결됐어. 518은. 진상규명부터 시작해서 전두환, 노태우 광주사람들, 518단체들도 사면 복권에 동의해버렸으니까 더 이상 할말도 없고, 역사적으로 이렇게 정리 잘 된 것이 없어 지금까지. 가장 가까운 시기에 일어났던 거 아녀. 과거사 진상에서도 광주가 제1호가 돼 버렸지. 나머지 부분은 미진한 부분들은 작가들 문인들하고 언론인들 중에서 학자들 중에서 더 파헤치고 할 사람은 있겠지만 이미 골격은 완벽하니 나와 있다고. 그런데 그 동안에 518이 정치적인 거품이 많이 끼였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민족 항쟁사에서 유일한 봉우리처럼 만들어 브렀지. 이걸 518을. 나머지 것들은 다 죽지. 그러나 여러 봉우리들 중에서 큰 봉우리일 뿐이지. 그 거품도 김대중 정권이 물러나면서 인자 빠지기 시작한 거거든. 정리가 되기 시작하고. 아마 정치적 비중은 다음 정권까지 유지될 거예요. 왜 그냐믄 현재로서는 한나라당이 다시 집권을 하게 될 건데, 그 사람들이 호남옹호 차원에서라도 자기 집권 내내 정치적으로 이걸 이용을 할거라고. 그러고나면 정치적인 거 하품이 빠지지. 인제 역사적으로 정리가 되고. 이번에도 새로운 자료들 나왔다고 하던데 518자료는 별거 없어 내용보니까. 비밀에 묻혀버리고 말지 핵심적인 부분들은. 하여튼 작가, 언론인, 학자들한테 맽기고 끝. 5월 단체들 부분도 이제 비극이지만 일단 보훈단체로 바꾸었다고 입지가. 그래서 인제 그것도 정치적 위상이 이제 바꾸었고, 이제 내는 기념사업 할 때도 강조해지만 결국 남는 게 이제 재단이야. 5월 기념하는 활동에서는 정신계승 차원에서. 518기념재단이 이제 잘해나가도록 고 부분은 내가 죽는날까지는 신경을 써야지. 왜 그러냐면 지금 내가 무안으로 병이 깊어가지고고 내려간다고 하니까 호시탐탐하고 있는 못된 사람들이 지금 준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는데, 그 사람들 착각하고 있지. 못된 놈들이 이사장 되거나 상임이사가 되거나 사무국장 되거나 어떻게 해갖고, 일종의 권력처럼 기득권처럼 휘두르려고 하는데 그거 용납을 안 할거니까 그래서 5월이 제대로 기틀을 잡도록. 앞으로 5년 정도만 잘 나가면 기틀이 잡혀질 거라고. 왜냐면 이게 사학재단같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인 농간만 없으면 여기서 돈 빼먹을 수도 없는 구조고, 재단이. 그래서 그것만 한 5년 잘 막아주면 지금 출범 십년에 엄청 자리 잡았어. 초기에는 날마다 싸움이었지 싸움. 왜 그러냐면 저게 광주에서는 비정치권에서는 최고의 권력이었거든. 대통령이 되거나 어쩌고 하면은 시장하고 같이 대우를 해주니까 총장이 저 아랫니까 국립대 총장이. 이러고 대통령 앉히고는 한쪽에 518재단, 한쪽에 시장 이 정도니까. 그러고 전국 어디 가서도 해외에서도 518재단 이사장 그러면 위상이 있다고. 근데 그걸 노리고 장난을 많이 한 놈들이 있었다고. 내가 악착같이 저승사자가 돼가지고, 싸워서 욕은 내가 다 먹고. 그러고 재단은 이사진 선출 절차를 제도화 시켜 버렸기 때문에 이를테면 인제 부마항쟁쪽에서 한명, 거기서 추천을 해서. 제주 43에서 한 명, 그 다음에 민주 민변에서 한 명,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들 모임. 그 다음에 이제 유가협에서 한 명 그 다음에 이제 부산, 대구, 전북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그 지역 518단체들에서 한 명. 이 민언련 기자협회에서 한명, 시민단체 협의회에서 한 명 그 다음에 시 선출직이니까 시 의회에서 한 명 도의회에서 한 명 이런 식으로 이사진 선출 자체를 특정 세력이 좌지우지 못하도록 해버리고 거기에 이제 마지막으로 특정세력이 탁 들어갔지. 재단 창립을 했던 모임이 이제 창립 모임이 후원회로 바뀌었어. 이 후원회에서 네 명. 그 다음에 인제 유가족에서 한명, 부상자에서 한 명 구속자에서 한 명, 후원회에서 네명 이렇게 해갖고 열다섯 명이거든. 그러니까 이제 후원회 네명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 서이 합해서 일곱명 밖에 안돼. 열다섯 중에서. 5월 관련 단체 관련자들이 과반이 안 되는 거지. 미달이지. 일곱 명이니까. 부산 대구 이렇게 돌아가면서 한다는 것도 후원회 네 명목 중에 한명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래버리니까 5월 관련자들이 5월이 자기들 전유물인양 재단을 전횡을 할 수가 없게 돼있어. 그 다음에 그 단체들에서 추천해 오기 때문에 완전히 전두환 스타일이라던가 사기꾼 같은 애들이 이사장 되거나 그럴 수가 없어. 왜냐면 이라고 딱 보믄 보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야 대부분. 산전수전 겪은 사람들이라 운동권에서 인제 사기꾼이 못돼. 그 다음에 이제 그런 사람들에게 이번에 이사장 뽑는데 신경을 좀 써야합니다. 누구누구요. 이런 사람입니다 하면 알아들을 사람들이야. 타 지역에서.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니까. 원로들. 그러니까 미치고 자빠지는 거야 이 5월 단체들이. 왜 그냐믄 저 5월 구속자에 누군데요 하면 모두 모르거든. 그 다음에 인자 이사회 할 때 보믄 요놈들이 그냥 무식한 소리 해쌌고, 말도 안되는 소리나 해쌌고, 그리고 광주 지역에서 이사장을 돌아가면서 주로 맡으는데 광주지역에서 원로라는 사람들이 순서대로?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 형편없는 사람들. 그냥 50대 초반으로 내려왔는데 금방 금방이지 세대교체가. 노인들은 다 해봤자 바로 우리들 윗 선배나 이홍길교수 그래 박석무씨 거기 63세대들이고. 지금 그 세대로 내려 온 거야. 그라고 또 한 몇 년 있으면 민청세력으로 내려오지. 지금 우리 세대들 60이 돼 가지니까. 그 다음에 긴급조치 9호 세대. 이렇게 내려가지. 그래서 보면 열다섯 살에 518에 참여했던 애들도 벌써 40이여. 40넘었다고. 인자 그 애들이 금방 50이야. 근데 그 애들 중에서는 재단 이사장감이 없어. 왜 그냐면 완전히 총 들고 뛰었던 시민군들이 인자 악바리들만 있는데 재단을 끌어갈 인물들이 없어. 인제 젊은 고등학생들이나 그 애들이 일부 참여한 애들이 있는데 애들이 곱게 못 커브렀어. 너무 굽어버려서 안되지. 그러면 완전히 새로운 세대들로 인자 바뀌겠지. 어떻든간에 재단 이사진 구성 자체 구조가 그렇게 딱 제도화 됐기 때문에 이제는 함부로 못하고. 정치권에서도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여건 야건 유명정치인들이 자기 사람으로 재단을 장악해블고 이런 꿈을 못꿔블게 돼 있다고. 다른 공공 기관이라든가 정부 산하기관이라든가 사회단체 중요한 것들은 법인들은 벼라별 문예진흥위원회 어떻고부터 시작해서 전부 정치권 입김을 낙하산 타고 내려온다고. 여그는 못해 왜냐면 시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정부 돈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도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완전히 한 푼 두 푼 모아갖고 만든 개미재단이거든. 재단 설립에서 이런 경과를 거쳐서 만들어진 재단이 없어, 아예. 목돈은 내놓지. 큰 돈이라고. 전부 한푼 두푼 모아서 만들었거든. 해외 동포들까지 해서. 그러니까 개입을 못해. 정부권에서고 뭐고. 시장도 지 맘대로 못하고. 그래서 전망이 좀 있지. 내부에서의 문제점들은 거의 없어. 그 다음에 인제 직원들도 좀 맘에 안든 직원들이 많긴 하지만 공채 형식으로 했기 때문에 노조결성도 이사장부터 시작해서 노조 결성을 권했으니까. 인자 신분 보장하고. 당연하지 518정신이 뭔데 권위적으로 너 나가 그럴 수가 없지. 그렇게 해서 안정됐지. 재단이 희망이 있어. 그리고 인제 기금은 80억 정도 되는데, 부족하지. 다행히 정부 예산으로 해서 매년 20억 이상이 올해는 25억 정도 나왔다대. 나오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커. 운동관련으로는. 여기 활동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운동이야. 범위가 좀 넓긴 하지만. 광주에서도 이렇게 재정적으로 물적 여유를 갖고 운동한데가 어딨어. 이것이 인제 말썽 없이만 잘 하면은 예산이 잘 안깎이거든. 말썽이 생기야 깎이제. 잘 해나가. 그러니까 요즘 아조 흡족해. 왜냐믄 나한테 뭔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나한테 들어오거든 그래갖고 나보고 인제 이것 좀 처리해주시오 부탁하는데 요즘 나한테 연락 없는 거 보면 아 잘 돌아가는구나. 인자 선거 때 되면 인제 이 후원회에서 이사 네명을 뽑아 올려. 그 속에 한 사람은 이사장이고 한 사람은 상임이사야. 이것이 내규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관행이 됐어 이제. 개똥씨를 우리가 이사장으로 추천합니다. 그러믄 인자 상임 이사는 또 인자 이사장이 또 추천을 해서 하니까 셋트로 해서 그라고 올려. 그라고 요 네명 이사 뽑을때 여그서 인자 표대결을 해갖고 낄라고 장난하지. 여그서 갈라져브러. 재단을 만들 때, 5원 단체들 관련자들한테서만 돈을 모았던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 그러니까 시민운동단체들이나 운동권출신들한테 참여를 종용을 했거든. 그래갖고 인자 참여를 했어. 근데 요 사람들 숫자가 5월 관련자들 숫자에 반 정도 돼. 반정도 되는데 이 5월 관련단체들 속에 또 전남대 총학생회생부터 시작해서 운동권 출신들 숫자가 많아. 그래갖고 합해보면 요쪽하고 과반이 돼. 그러니까 인자 선거 앞두고 이번에 개똥이 말똥이 닭똥이 소똥이로 하자, 그러면 그렇게 돼. 그러니까 인자 그걸 어떻게 뒤집어볼라고 나머지 애들이 별 짓을 다했는데 몇 차례 깨졌어. 그러니까 인자 포기. 긍게 내가 없어지면 닭똥 소똥이로 결정을 해도 통일적으로 안 움직이리라는 기대와 희망 속에서 못된 것들이 봄 되니까 벌레 나오듯이 이렇게 고개 내밀고 있는데 코뼈를 좀 분질러버려. 재단은 희망이 있어. 이제 한 오년만 있으면 안정 될 거야. 그렇게 되고. 인제 다만 프로그램을 생산적으로 잘 개발해서 나가야 하는데, 돈은 있는데 그것을 알뜰살뜰이 못 써버리면 문제가 있을 거야. 몇가지 성공적으로 안착된 프로그램이 있지. 예를 들면 518마라톤 같은 거 아주 성공적이야. 짧은 거리 마라톤이지만. 꼬마들부터 끌어들이라고 젊은애들 글짓기를 하는 것부터. 하여튼 나는 처음부터 기념은 계승이다. 계승은 교육을 통해서. 교육은 젊은 세대들을 상대로 미래를 내다보는것......
면담자: 선생님 앞으로 계획 같은 거.
구술자: 가서 도 닦고 건강관리하고.
면담자: 선생님 건강하세요.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선생님께 정세교양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구술자: 정세는 나는 앞으로 그러기로 했어. 하도 남들이 비올 것이다 그러는데 해뜰 것이다 그래갖고 얼마나 그것이 외롭고 고달픈 것인지 몰라요. 이를테면 518때도 그렇고. 87년 대선에서도 그렇고. 그런 그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여 내가. 다들 저쪽이야 동쪽, 나는 서쪽.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옳다는 것이 증명이 돼. 그믄 그 사이에는 증명 될 때까지는 고달파. 그래서 나는 5년 이후의 이야기는 안하기로 했어. 너무 고달파. 그것은 이론으로 되는 거 아니여 전망. 거기는 조끔 직관이라든가 통찰력이라든가 타고난 게 있어요. 정세분석 해보면 똑같은 정보자료를 제공했는데도 전망에서는 확실하게 차이가 나더라고. 그것 보면은 옛 사람들이 얘기하는 통찰력이든지 직관이 필요하다는 것이자.
면담자: 선생님 그 동안 몸도 안 좋으셨는데 세차례 인터뷰 하시느라고 너무 홀가분하시죠? (웃음)
구술자: 홀가분하지. 무안 내려오면 연락해.
면담자: 알겠습니다. 선생님 핸드폰 없으세요?
구술자: 있는데 번호는 안 갈쳐줘. 이번에 내가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 겁이 나가지고 휴대폰을 준비했다고. 어디 가다가 문제가 생기면 얼른 119를 눌러야하니까. 이제까지 없이 살았다가 할 수 없이 이번에 했지.
면담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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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