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2008대불총세미나, 2주제 호국이념과 실천 방안 .../정병조 교수

  • No : 67633
  • 작성자 : 뉴스관리자
  • 작성일 : 2008-05-18 22:16:22
  • 조회수 : 2361
  • 추천수 : 0

 

호국불교의 이념과 실천 방안에 관한 연구


鄭柄朝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東國大 교수)


1. 호국 불교의 성격


불보살(佛菩薩)을 공양하고 재(齋)를 여는 집단적인 모임을 불사(佛事)라고 한다. 혹은 어느 특정한 경전을 설법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나라의 안녕을 빌기 위해서 거국적인 모임을 갖는 수도 있다. 황룡사(皇龍寺)에 9층목탑을 세운다든지 또는 고려대장경을 완간(完刊)한다든지 하는 일들도 모두 불사라고 볼 수 있다.

한국 불교는 호국과 기복(祈福)으로 그 첫발을 내디딘다. 법흥왕이 불교 도입을 결심한 것은 국가의 발전에 유익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로 고대국가에서 불교 수용은 국가의 단위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불교의 도입은 곧 건축 ․ 미술 ․ 철학의 발전을 의미한다. 또 국민정신의 응결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는 첩경이었다. 소수림왕이나 침류왕의 경우도 국익과 결부된 불교 수용이 근본목표였다. 이와 같은 호국적 사상 경향은 억불로 일관한 조선의 경우까지 계승된다. 극명한 사례는 서산 ․ 사명의 전쟁 참여였다. 당시의 기득권 세력이었던 유생들이 앞다투어 피신했던 것과 비교할 때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불사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모임은 역시 호국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불사에는 회향(廻向)의 의미가 담겨 있다. 자신의 행운이나 성취를 부처님 덕으로 돌릴 줄 아는 미덕(美德)이 있었던 것이다.

신라때에는 자신의 집을 절에 희사(喜捨)하는 사례가 많았다. 당대의 고승 원효는 자신의 생가(生家)를 초개사(初開寺)로 고쳤고, 자장은 자신의 집을 원녕사(元寧寺)로 바꾸었다. 아이를 땅에 묻으려던 효자 손순(孫順)은 홍효사(弘孝寺)라고 자신의 집을 절로 바꾸었다. 이것은 보은(報恩)이라는 불교적 인생관의 자그마한 발로였다. 실로 한국은 부처님을 고맙게 여길줄 아는 사회, 불법(佛法)을 따스하게 느낄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사회였다.

한국불교는 호국적 성격의 법회가 주종을 이루는 바, 다시 그 성격을 세부적으로 논의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형태의 법회 성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호국(護國) 호법(護法)적 특성의 법회이다. 나라에 어떤 위급한 상황이 닥칠때라든지, 혹은 왕실(王室)의 안온(安穩)을 기원하는 국가적 행사를 의미한다. 이성격의 법회에도 두 가지 패턴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지도자를 교화하는 법회로서,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등이 실례이다. 주로 지도자의 자질과 국민의 자세를 강설(講說)하는 대규모 집회이다. 다음으로는 밀교적(密敎的) 색채의 법회로서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등이 있다. 이것은 어떤 신이(神異)로운 불력(佛力)으로 국가의 위난을 막아보려는 심리적 욕구를 반영한다.

두 번째로는 식재(息災)를 위한 법회이다. 예기치 않던 천재지변이라든지, 아니면 괴이하고 순조롭지 못한 천기(天氣)의 순환을 바로잡기 위한 모임이다. 신라 초기에는 일관(日官)이라는 일종의 점쟁이가 대궐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가 왕의 측근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때는 주로 경을 읽음으로써 그 불순한 천기(天氣)를 바로 잡았다. 특히 신라초기 선호(選好)되었던 강경(講經)법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화엄경》 ․ 《약사경》 ․ 《금광명경》 ․ 《법화경》등 주로 대승불전들이다. 가뭄 ․ 홍수 등 천재지변 속에서 한국인들은 불신력(佛神力)으로 그것들을 조복(調伏)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셋째는 일반 백성들의 윤리의식 고양(高揚)을 위한 법회였다. 불교의 특정한 교리가 대중들에게 어필하려면 마땅히 근기(根機)에 따른 법회가 필요하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을 강설한다는 것은 따분한 일이다. 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이야기꺼리를 만든다던지, 아니면 「놀이」를 하는 방법 등은 훌륭한 대기(對機)의 방편이다. 『<점찰법회(占察法會)> ․ <과증법회(果證法會)>』등은 대표적 실례이다. 즉 놀이문화를 통한 불교의 민중적 정착을 시도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위령제의 성격을 띠운 모임으로서 어느 특정한 인물의 추모법회가 대종을 이룬다. 이 경우 물론 망자(亡者)의 왕생극락을 염원하는 <아미타>법회가 주로 열리지만 때에 따라서는 전몰 유가족을 위한 합동위령제로서 <팔관회> 같은 법회가 열리기도 한다.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에서 죽었을 때 그를 위한 인용사의 법회라던지, 문무왕이 전쟁 포기를 선언하고 세운 무장사의 법회 등도 모두 이와같은 사상의 발로였다.

다섯 번째는 신행결사(信行結社)로서 서로의 종교적 신행(信行)을 다지는 모임이다. 신라때는 이것을 <보(寶)>라고 하였는데, 일종의 <계>와 같은 모임이었으며, 오대산 신앙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또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 지눌이 시도하였던 정혜결사(定慧結社), 또 그후의 백련결사 등도 모두 비슷한 사상적 맥락을 가진 법회였다.


2. 지도자의 길(인왕호국법회)


고대 전제왕권에 있어서 왕의 실력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을 뒤덮고도 남음이 있었다. 왕의 권위는 하늘에 비유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의 간곡한 바램은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는 일이었다.

뛰어난 지도자는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으나, 얼빠진 지도자는 나라를 망친다. 그러나 지도자는 국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세습되어 간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이 왕의 권위에 필적할 수 있는 인격집단은 불교세력이었다. 왜냐하면 왕을 세속의 권력자라고 한다면 불교는 초세속(超世俗)의 리더였기 때문이다.

고대의 역사에는 이 두 강자(强者)사이에 늘 어떤 긴장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왕은 자신의 의사대로 따르지 않는 종교인을 거세(去勢)하려고 하였고, 또 종교인들은 그 고약한 행위의 인과응보를 강조하기 마련이다. 동양에서 이 둘의 선명한 관계정립이 최초로 문제된 것은 4세기 초반 중국에서의 일이다.

남조(南朝)시대의 혜원(慧遠)이라는 스님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이라는 논설을 발표한다. 혜원의 논리는 세속의 권력집단인 왕실에 대하여 불가(佛家)는 굽힐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 미묘한 문제이다. 종교와 사회와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상호의존적이다. 국가가 없으면 종교집단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국가의 논리는 종교도 국가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따져도 자신을 능가하는 권위 - 설사 그것이 어떤 신비의 탈을 쓰더라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 됨직도 하다.

그러나 남조의 경우와 달리 북조(北朝)에서는 일찌감치 그 복잡미묘한 문제를 처리해 버린다. 그들은 왕즉불(王卽佛)의 신앙 아닌 신앙을 창조하였다. 임금은 하늘이 낸 존재, 부처와 다를 바 없다는 애매한 논리로 세속과 초세속을 동시에 거머쥐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지도자의 길을 논의하는 법회를 주도한 인물은 원광(圓光 531-630 ?)이었다. 그는 바로 중국의 북조에서 불교를 배웠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주도한 <인왕호국법회>의 성격이 다분히 왕실지향적이었음은 피할 길이 없었다. 원광이 중국 유학을 마치고 우리나라로 귀국한 것은 6세기 후반 그로부터 30여년간이 그의 본격적인 교화활동 시대이다. 세속 오계를 설파(說破)했고, 걸사표(乞師表)를 썼다. 그의 도예(道譽)는 신라를 덮었으며, 원효 ․ 의상 등 신라의 별들은 바로 원광의 사상적 영향 속에서 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법회는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을 강설하는 모임인데, 백명의 고승을 청해 증명한다는 뜻에서 「인왕백고좌회」라고도 한다. 그러나 백명의 고승을 모실 정도로 당시의 신라불교가 성숙했을까하는 점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또 훗날 원효의 이 대회 참석이 거부된 것 등의 설화가 있음을 볼 때, 고승의 기준도 문제가 될 법하다.

이 법회는 물론 국왕(國王)에 의한 국토의 수호가 목적이었다. 국왕을 경에서는 인왕(仁王)이라고 격상시킨다. 왜냐하면 인왕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메카니즘에 의한 호국이 아니라, 반야를 수행함으로써 정보(正報)의 국토를 지키는 일이 오히려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천태대사 지의(智顗)의 소(疏)에는 이와같이 지도자의 길을 명시하고 있다. 「은혜를 베풀고, 덕을 넓히기 때문에 어질다고 한다. 백성을 교화함이 자재로워서 왕이라도 부른다. 인왕은 주관이 되며, 그에게 다스려지는 국토는 객관이 된다. 반야를 지님으로써 인왕은 국토를 안온하게 가꿀 수 있다.」(施恩布德 故名爲仁 統化自在 故稱爲王 仁王是能護 國土是所護 以持般若故仁王安穏)

즉 반야에 의거하는 임금이야말로 인왕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한면 지도자의 자질과 그에 따른 과보(果報)에 대한 암시일 수도 있다. 진흥왕(540~575 在位), 진평왕(579~631 在位)등은 거의 매년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무슨 감회가 흘렀을 것인가?

우선은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일이다. 민심을 장악하는 첩경은 존경받는 지도자의 길이다. 그런데 무엇이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첩경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인왕(忍王)이 되는 길이다. 자신을 칭찬하더라도 우쭐거림이 없다. 혹은 욕지거리를 하더라도 성냄이 없다. 선악(善惡)을 너그럽게 포용함이 지도자의 자질이다. 인(忍)을 키울때 비로소 무사(無私)가 가능하다.

이렇게 될 때 다스리는 자와 다스려지는 자 사이는 착취와 압박의 대립관계일 수 없다. 그 둘은 하나일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자의 관계가 늘 대립의 악연(惡緣)으로 이어지는 듯한 인상은 본질적으로 지도자의 오만 때문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왕을 투표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을 따르면 백성은 왕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왕은 백성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음미할만한 주장이다.

공무원은 분명히 백성들의 세금으로 생활비를 충당받는 우리의 고용인이다. 그래서 공무원을 공복(公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의 현상이겠지만, 어떤 이들은 우리의 위에 군림하고 있다. 유행가 가수는 분명히 팬이 뽑아 주어 명성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팬이 어떻고」를 염불처럼 되뇌인다. 그러나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들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집에서 살고 있으며, 어마어마한 자동차를 굴리고 있다.

이 현상을 통털어서 우리는 가치의 전도(顚倒)현상이라고 한다. 《반야심경》에서 말씀하신 「전도몽상(顚倒夢想)」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볼때 지도자는 결코 백성 위에 군림하여, 그 위세를 뽐내는 자일 수 없다. 그는 진심으로 백성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존재여야 한다. 불교의 이상적 군주로 꼽히는 아쇼카대왕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치라는 것은 백성들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다.」

무심코 우리가 쓰는 어휘 가운데 「정치적」이라는 표현은 무언가 복선이 있다는 뜻이다. 좀 복잡하고, 적당히 에누리를 해야 하고, 진실되지 못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도의 정치는 속이는 정치가 아니라 그 속인다는 생각을 무너뜨리는 정치이다. 진흥왕과 진평왕의 시대를 풍미했던 이 인왕법회는 이후 신라의 지도자들을 반야에 의한 인왕의 길로 접어들게 한 직접적인 동기였던 것이다.

3. 원광의 사상적 기여

불교가 충효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경전은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 《금광명경》․ 《부모은중경》․ 《육방예경(六方禮經)》등이 있다.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육방예경》을 제외한 나머지 불경은 위경(僞經)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땅에서 중국인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경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왜 이와같은 위경이 생겨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하는 점에 대한 논구(論究)를 병행해야 한다. 불교를 비방하는 상투적인 논법(論法) 가운데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교(教)라는 비난이 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서부터 우리나라의 고려 말엽에 이르기까지 이 논리는 불교에 대한 유교의 선전포고문 서술용이었다. 불교는 여기에 대하여 적절히 응답(應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불교에도 충효가 있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중국에서는 일련의 위경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불교의 충(忠)은 인왕(仁王)을 전제로 한다. 즉 인왕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국토, 진리가 머무는 국토에 대한 확신이 전제된다. 효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맹목적인 수직윤리로서가 아니라, 부모의 업(業)을 올바로 가꾸게 한다는 보살정신이 담겨 있다. 따라서 불교의 충효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정법(正法)이 머무는 국토를 지키고, 정업(淨業)을 부모님께 갖추어 드린다는 보살정신의 실천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호국불교의 이상을 가장 바람직스럽게 현실 속에 적용시킨 인물로 원광을 꼽을 수 있다. 원광에게는 두 가지의 사상사적인 부하(負荷)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첫째는 왕실 중심의 불교를 서민 가슴 속으로 끌어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이다. 억울한 사람, 고통받는 이의 편에 서는 불교가 될 때, 진실로 중생은 부처로 성숙된다는 확신을 원광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불교의 내실화(內實化)라는 점이다. 교학적(教學的)인 뒷받침이 없는 불교는 주술(呪術)과 타락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공부하는 불자, 신념에 바탕을 둔 교단이 되려면 역시 튼튼한 학문적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원광은 그 점을 실현한 사상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원광에 의하여 지시된 세속오계는 바로 호국불교의 전형적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당나라에 걸사표(乞師表)를 쓰는 원광의 변(辯)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제가 살기 위해 남을 해롭히는 일에 가담한다는 것은 승려로서의 본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대왕의 땅에서 대왕의 초목(草木)으로 연명하는데 어찌 그 영을 거역할 수 있으리까?」 앞의 표현은 출가사문으로서의 내면적 고민을 토로한 완곡한 거절이다. 뒤의 경우 그러면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실리적 목적을 반영한다.

그는 현실과 이상을 모순없이 조화시키려고 한 실천적 사상가였다. 결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옹고집장이로서가 아니라 국가의 이익과 불교의 이상을 적절히 조화시킨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결코 현실에 안주(安住)하는 적당주의, 절충주의, 기회주의 등과 동일시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원광의 가르침 속에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교묘한 견강부회가 없기 때문이다.

4. 정토를 가꾸는 일

스스로 해탈하고 이 사바세계를 정토로 가꾸어야 하는 것은 불교적 이상이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이것은 너무도 고원(高遠)한 세계였다. 끼니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관념적 불교가 먹혀 들어갈 리가 없다. 오히려 부처님이란 우리에게 쌀 한톨을 내리는 영적(靈的) 존재라는 가르침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 분은 대단한 위신력(威神力)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빌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가르침이 범람할 도리 밖에는 없다. 더구나 불교가 왕실이나 귀족층에게 선호됨으로써 대중의 눈에는 불교가 혹시 「높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닐까하는 의구심도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는 본질적으로 고통받는 중생의 편에 서 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어진 숙제는 이 귀족화 되어가는 불교를 어떻게 민중들의 가슴속으로 끌어내리느냐 하는 점이다. 원효의 무애(無碍) 행각이나, 원광의 세속오계 등은 모두 이와같은 사상적 맥락을 통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팔관회가 놀이마당으로 변환된 것은 바로 불교의 대중화를 시사하는 의미깊은 일이다. 민중의 가슴속에 부처님은 더 이상 「거룩한 신적(神的) 존재」는 아니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쉴 자리 여백의 미를 마련해 주는 자비로운 분일 따름이다. 생활에 지치고, 삶에 피곤해진 심신들이 부처님 덕에 안식될 수 있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불교의 「한국적 수용」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근엄하기만 한 법회가 아니라 「휴식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법회를 운영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명백히 상치되는 두 갈래 흐름을 본다. 하나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열반의 길이며, 또다른 하나는 현실에 바탕을 둔 세속의 불교이다. 이 두가지 흐름이 극단화 될 때 우리의 불교는 타락하고 만다. 귀족불교는 사치와 허영에 물들여지고, 서민불교는 주술(呪術)과 체념으로 얼룩진다. 그러나 양자가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불법(佛法)의 생활화는 이룩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렵게 말한다면 「진속원융(眞俗圓融)」이 되고, 풀어서 쓴다면 「생활 속의 불교」가 될 수 있다. 호국불교를 실천하는 방안은 바로 생활불교와 지성불교를 정착시키는 일이다. 생활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삶에 무르녹는다는 뜻이며 지성불교는 문(聞) ․ 사(思) ․ 수(修)가 제대로 이행되는 불교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랜 세월, 이 불이(不二)의 상징성이 갖는 의미를 의식적으로 외면하여 갔다. 혹은 편견에 의해서 혹은 선입견에 따라서 그 지고한 상징의 의미를 캐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념적인 뒷받침과 실제적인 행동강령이 어우러질 때 우리의 불교는 빛났었다. 즉 사상적 가교로서 정부와 국민의 괴리(乖離)를 버티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틈바구니가 벌어지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인간이 사는 곳에는 그와같은 문제들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때 적어도 국교를 표방하는 불교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여 왔는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현실과 타협해 버리는 방법이다. 그냥 빌고 절하면 되고, 사물은 공(空)이고, 마음은 부처다. 이렇게 되뇌이면서 개금(改金)하고 단청하며 복을 빌면서 지나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현실을 멀리하는 탈속(脫俗)주의의 입장이다. 홍진(紅塵)에 묻힌 세속을 웃어 주며, 고고하게 살다가는 것이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며, 중생이 서러운 것은 무명(無明)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구름에 달 가듯이 세속의 방관자로서 한 생(生)을 마감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와같은 태도도 불교를 믿지 않는 것 보다는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의 삶의 태도는 결코 불교의 올바른 자세라고 볼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바로 보살정신을 함양하고 실천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탁악(濁惡)의 현실 속에 불토(佛土)를 구현하려는 장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자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길이다. 그때 불교인은 국민들의 열등한 믿음을 고양(高揚) 시켜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지니게 된다. 즉 얼마만큼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노력하느냐 하는 원행(願行)으로서의 불교의 사상이 집약(集約)되는 것이다.

보살은 바로 그 궁극적 이상의 구현자들이었다. 현실을 한탄하는 나약한 지성으로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 이상을 심으려는 참 구도의 나그네들이었던 것이다. 오늘의 불교가 지향해야할 이상도 바로 이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비로소 호국불교가 지향하는 정토구현이 완수 될 수 있는 것이다.


5. 미래불교의 방향

과거의 불교가 번영할 수 있었던 까닭은 불자가 시대정신을 리드하는 엘리트 집단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 속에 불교의 정신적 위상은 갈수록 축소되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 청정성의 제고와 불교적 이상을 현전화 하는 응용불교의 제창만이 불교를 새롭게 위상 지울 수 있는 첩경이다.

이 시대의 불자들은 이와같은 안목과 사명감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20세기까지 인류의 관심사는 「실존」의 문제였다.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는 인류의 문화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 코드였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참혹한 세계대전,  경제라는 새로운 대결 구도 속에서 인류는 이제 보다 실질적인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 21세기에 들면서 인류는 「생명과 환경」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DNA 해석에 의한 유전자 조작은 생명의 연장을 낳았고 이제 우리는 대체 장기, 복제 생명의 출현을 기정화 하고 있다. 컴퓨터 문명은 이제 인공지능 쪽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으며, 끝내 인류의 멸망을 유발 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또 자연파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회생불능의 상태라는 과학의 경고도 일반화 되고 있다.

또한 세계화의 도도한 물결 앞에서 더 이상 「민족」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민족은 정서적이며 허구적인 개념일 뿐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제 인류는 민족이라는 공동체 보다 인간, 그리고 생명의 동질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불교는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과거의 호국불교는 한국이라는 지역과 국민을 지킨다는 의미가 강했다. 그러나 미래의 호국불교는 정법을 지키는 불교라는 새로운 해석의 시대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와 국경이라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동서남북의 사방에 진리의 법음(法音)이 세워지는 나라, 가치와 질서를 존중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는 나라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들의 평화로운 공존,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참 생명의 가치가 현양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호국불교의 개념은 호법불교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다. 국제적인 감각을 지니면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는 신불자(新佛子)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불교는 응용불교(Applied Buddhism)로서 전개될 수 밖에 없다. 「불교의 현대화」가 과거의 목표였다면, 미래는 「현대의 불교화」를 도모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추천

네티즌 의견 0

스팸방지
0/300자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