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멓게, 우리 가슴도 타들어갔다 2008/02/12 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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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당국, 문화재청의 "적극진화" 요청 받고도 2시간 물만 뿌려 라이터 2개 발견… 경찰 "방화 전과 용의자 1명 붙잡아 조사중"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2/20080212001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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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기만 달랑 8개 배치… 화재진압 '기본수칙'조차 없어 무인 경비시스템, 화재직전 작동했지만 아무런 도움 못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2/20080212001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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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경고·조짐 여러번 무시당해 서울역 노숙자 "2층에서 불피워 놓고 잔 적 있어" 오윤희 기자 / 조백건 기자
숭례문(남대문) 화재 가능성은 그동안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관리 당사자인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이를 소홀히 여겨 국보 1호가 불에 타버리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심지어 서울역 주변 일부 노숙자들은 숭례문을 집 삼아 살기도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취객이 숭례문에 무단 침입한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1991년 8월엔 만취한 50대 남성이 훔친 승용차로 숭례문 철제 출입문에 충돌하기도 했고, 1997년 2월엔 만취한 30대 남성이 일본인 관광객 2명과 함께 숭례문 통제구역에 침입했다가 체포된 적도 있었다. 2006년 숭례문이 일반에 공개된 이후에는 무방비나 다름없는 상태로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문화재 관리 당국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2005년 4월 낙산사 동종(보물 479호)이 불타 버린 이후 문화재청은 주요 목조 문화재가 화재로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방재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정작 국보 1호인 숭례문은 우선 순위에 밀려 방재 시스템이 설치되지 못했다. 서울시도 평일엔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경비원 3명을, 일요일과 공휴일엔 1명만 숭례문에 배치하고 오후 8시 이후엔 무인 경비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결국 일요일인 10일 화재 발생 시각 숭례문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
천장 속으로 번진 불길, 지붕구조 몰라 놓쳤다 ● 왜 못 껐나… 전문가 분석 이재준 기자
잿더미로 변한 숭례문(남대문)은 수십 대의 소방차와 소방대원들이 동원됐고, 불을 진압할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왜 불길을 제대로 잡지 못했을까. 11일 숯덩이처럼 변해버린 숭례문을 둘러본 전문가들은 초기대응에 실패했기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 국보 1호인 숭례문의 구조와 특징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통 지붕 양식 몰랐다
불을 끄기 위해 숭례문 2층에 들어간 소방대원들은 연기만 나는 것을 보고 불길이 어느 정도 잡힌 것으로 간주했다. 결국 다시 불길이 점화되는 것을 막지 못해 숭례문이 전소(全燒)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경원대 박형주 교수(소방방재공학과)는“소방대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내용이 노란색 연기가 나는데, 붉은 불씨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며“이는‘적심목’이란 우리나라 전통적인 지붕 양식을 소방대원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남대문 2층 지붕은 전통 건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기와·보토(30~60㎝ 진흙층)·적심목(지붕에 넣은 원목)·개판·회반죽(1㎝ 두께)·서까래’인 6겹으로 되어 있다. 지붕에 들어가 있는 나무 구조물인 적심은 밑에선 개판·회반죽에 가려 보이지 않고, 위에서도 지붕과 진흙층에 가려져 있다. 박 교수는“소방관들이 보았다는 노란색이나 검은색 연기는 적심목이 타 발생한 것”이라며“지붕 내부에서 타고 있더라도 밖에선 불길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보통 나무가 탈 때엔 흰색 등의 연기가 나지만 진흙 등에 덮여 있는 적심목은 산소가 부족해 불완전 연소하면서 노란색 등의 연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한국 전통 건축 전문가인 고려대 주남철 명예교수(건축공학)는 때문에“적심목에 옮아 붙은 불을 끄려면 지붕 가장 밑부분인 1㎝ 두께의 개판·회반죽 부분을 완전히 들어내고 밑에서 물을 쏘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소방관들이 회반죽과 기와에 가려 있는 적심목의 존재를 몰라 불길을 일찍 차단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기와·진흙층 먼저 걷어냈어야 문화재 전문가들은 “지난 1961~63년 숭례문 보수공사를 할 때, 기와 바로 밑에 있는 진흙층인 보토에 석회 성분을 많이 넣었다”고 말했다. 진흙에 석회를 섞은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습기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소방관들이 외부에서 엄청나게 물을 뿌려 댔지만, 내부에선 오히려 불길이 활활 번져나갔다. 전문가들은 숭례문 지붕으로 번진 화재를 잡기 위해서는 지붕 맨 윗부분인 기와·보토 부분을 먼저 걷어낸 뒤 물을 뿌렸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화재청·소방당국 말이 안 통했다 숭례문이 잿더미가 되기까지 5시간17분 동안 문화재 보존 책임이 있는 문화재청과 화재 진압 책임이 있는 소방당국의 의사 소통은 꽉 막혀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지, 책임자가 언제 현장에 도착했는지조차 서로 말이 다르다. 본지가 입수한 소방당국의 화재 당일 일지에 따르면 문화재청(대전광역시)에 숭례문 화재 발생이라는 비상연락이 간 것은 오후 8시56분. 문화재청 담당자가 화재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10시4분이다. 불이 난 지 1시간8분이 지나서야 현장에서 소방당국과 문화재청의 공조가 이뤄졌다는 뜻이다. 현장 소방관은“숭례문은 문화재여서 우리 마음대로 판단해 진화작업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화재 초기 소방당국에 “국보 1호이기 때문에 조심스럽 게 화 재 를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 불길이 커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문화재청은 불이 난 지 47분여가 지난 오후 9시35분이 돼서야“남대문이 훼손돼도 상관없으니 적극적으로 불을 꺼달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소방당국은 문화재청의 통보를 받고도 2시간5분이나 지난 11시40분에서야 지붕 기와 일부를 들어내는 작업을 벌였다. 한국화재소방학회 손봉세(경원대 소방방재학과 교수) 학회장은“화재초기에 처음부터 두 기관이 화재현장에서 도면과 진압방식에 대해 실시간으로 교환하고 대화했다면 이처럼 문화재 전체를 태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2/200802120018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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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은? 종묘는? 창경궁은? 목조 문화재들 화재위험 노출… 100곳 중 30여곳 소화전 없어 이한수 기자 / 곽수근 기자
11일 오후 서울 동대문(흥인지문·보물 1호) 앞. 왕복 6~7차로 도로가 동대문을 감싸고 있어 일반인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차량 통행이 뜸한 밤이나 새벽에는 쉽게 건너갈 수 있는 거리다. 서울 종로구 관계자는 "낮에는 직원 순찰과 적외선 감지 등 보안시스템으로,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는 민간 경비업체의 무인 경비시스템으로 동대문을 관리하고 있다"며 "소화기를 늘리고 관리대책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11일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가로 30m, 세로 20m, 지붕 높이 20m의 거대한 2층 목조 건축물로 바로 옆 대웅전을 압도한다. 1962년 국보 제67호로 지정됐다. 통일신라 시대 쌓은 석조 기단과 지붕 기와를 빼면 전체가 100% 나무로만 지어졌다. 천장과 벽면 곳곳에는 열·연기 감지기가 달려 있고, 이것들은 건물 외부 벽면에 붙어 있는 화재경보장치에 연결돼 있다. 내부와 법당 밖 좌우에는 각각 2개씩의 소화기가 갖춰져 있었다. 앞마당에는 옥외 소화전이 설치돼 있다. 이처럼 소방 안전장비 관리 상태는 좋은 편이지만 소방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소방도로가 없어 사찰측은 여전히 대형 화재를 염려하고 있다. ◆방재시스템 관련 시행령 없어 국내 목조 문화재들은 이같이 화재 위험에 노출돼 있는데도 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과 관련한 법규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문화재보호법 제88조는 문화재에 소방 설비를 설치해야 한다고 포괄적으로만 규정되어 있다. 문화재청이 국정감사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목조문화재 100곳 중 30여곳은 소화전이 설치되지 않았고, 소화기가 없는 곳도 있었다. 2005년 4월 낙산사 화재 이후 문화재청은 중요 목조문화재가 화재 등 재난으로 손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방재시스템 구축사업을 추진했다. 지난해부터 1차로 약 15억원의 예산을 들여 해인사·봉정사·무위사·낙산사 등 네 곳에 수막설비(건물 주위 바닥에 물총처럼 물을 쏘는 노즐을 20~30㎝ 간격으로 배치한 설비)와 화재가 발생하면 조기에 경보를 울리는 시설을 설치하기도 했다. 남대문도 우선 구축 대상인 중요 목조문화재 124곳에 포함됐으나 순위가 48번째여서 방재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았다. ==========
실측도면 있어 희망적… 복원 2~3년 걸릴 듯 ● 숭례문 되살릴 수 있나 유석재 기자
화재로 무너져 내린 국보 제1호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의 복원 공사는 어떻게 진행될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자료가 보존돼 있기 때문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국보(國寶) 지위는 일단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는 문화재청의 방침과는 달리 원형대로 복원하더라도 국보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거의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지정 해제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2~3년 동안 200억원 들여 복원
◆"쓸 수 있는 부재, 10%도 안 될 것"
남은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계획도 현 상황대로라면 제대로 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김동현 문화재위원은 "(숭례문 누각의) 1층에는 그런대로 화재에서 살아남은 부재들이 많이 있고, 2층에서도 일부 포부재(包部材)는 화를 면했다"고 말했다. 포부재는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맞춰 댄 나무쪽인 공포(?包)를 구성하는 부재다. 그는 "겉만 조금 그을린 나무라도 최대한 복원에 활용하기로 했지만, 그게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타지 않은 부재들도 물에 너무 많이 젖었기 때문에 다시 쓰기 어려울 것이고, 활용할 수 있는 부재는 10% 미만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무거운 부재가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기 때문에 석축도 구조안전진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옛 숭례문 부재 중 2005년 충남 부여의 한국전통문화학교로 옮겨져 보존된 서까래·포부재·기와 등 350여 점이 있지만, 부러지거나 부식돼 복원 작업에는 쓸 수 없는 상태다. ◆실측 도면으로 복원한다고 국보 유지? 숭례문의 원형 복원 과정에서 기본이 되는 자료는 지난 2006년에 나온 182장 분량의 정밀 실측 도면이며, 참고자료로는 1965년에 발간된 수리보고서가 활용될 계획이다. 정밀 실측 도면은 당시 숭례문의 모형 제작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후대에 숭례문이 파괴될 경우라도 복원을 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리보고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원하기 위해 1961~1963년 이뤄진 대규모 보수공사의 보고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실측 도면을 통해 원형대로 복원하게 되면 국보 지위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지만, 지난 2005년 산불로 녹아버린 낙산사 동종이 복원을 했는데도 보물에서 해제된 등의 전례를 볼 때 전망은 어두운 편이다. ==========
남아있는 부재(部材) 최대한 활용해 원형 복구 부족한 나무는 강원도 금강소나무 쓸듯 유석재 기자
숭례문(남대문)의 복원작업에는 어떤 나무가 사용될까. 원래 숭례문의 부재(部材)로 사용된 나무들은 모두 소나무다. 1960년대 초 보수공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숭례문 누각 기둥의 최대 길이는 2.98m, 최대 지름은 58.6㎝ 정도였다. 당시 공사 때는 강원도 삼척에서 베어 낸 금강소나무를 부재로 썼으며, 전체 부재의 10% 정도를 대체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2/20080212001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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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화재보험가액 고작 9500만원 복원엔 200억원 들어… 문화재 고려없이 목조건물로만 계산 김진명 기자
국보 1호 숭례문이 '9500만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2/20080212001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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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지은 이름… 태조실록 '속칭 남대문'이라 적어 ● 역사 속 숭례문 8괘로 보면 불의 괘… 불길의 형상 본따 세로로 현판 써 이덕일 역사평론가
숭례문이란 이름은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鄭道傳)이 지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서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지은 것이다. '태조실록' 5년 9월조는 '속칭 남대문'이라고 적어 남대문이 일제의 비칭(卑稱)이 아님을 말해준다. 세종 29년(1447)과 성종 10년(1479)에 중수했는데, 중종 31년(1536)에는 문신 김안로(金安老)의 건의로 종을 달아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 종은 곧 울리지 않게 되었다. 폐사(廢寺)에 방치되었던 종을 가져다 달았는데, 종소리가 동남쪽의 지맥(地脈)을 제압해 국가 운수에 불리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 종은 명종 18년(1563)에 사라진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왕후의 분부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졌다가 어느 사찰에 전해진 뒤로는 행방을 알 수 없다.
숭례문은 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이 음방(陰方)으로 여자의 방위라면 남문인 숭례문은 양방(陽方)으로 남자의 방위였고, 8괘로 숙청문은 '감(坎)'괘로서 물을 뜻하고 숭례문은 '리(離)' 괘로서 불을 뜻했다. 양방의 숭례문은 늘 개방한 반면 음방의 숙청문은 가뭄 때만 열었다. 실록에서 "날이 가물어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었다"는 기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문 남쪽에 만든 연못이 남지(南池), 또는 연지(蓮池)였다. 숙종 32년(1706)에는 연못의 물빛이 푸르다가 붉게 변하면서 끓는 물처럼 뜨거워져 고기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다른 대문의 편액이 모두 가로로 썼지만 숭례문만 세로로 쓴 것도 불이 타오르는 형상을 나타낸 것인데, 사신을 맞는 장소이므로 서서 맞는 것이 예법에 맞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명작으로 유명한 숭례문 편액을 쓴 이는 아직 논란거리다. 오세창(吳世昌)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유진동(柳辰仝:1497~1561)의 글씨라고 말했지만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라고 전하고 있는데,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는 '崇禮門(숭례문)' 탁본이 남아 있다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기이한 이야기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편액을 잃어버렸는데 남지에서 밤마다 빛이 나 파보니 숭례문 액판이 묻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편액은 조선 전기 명필인 정난종(鄭蘭宗:1433∼1489)의 글씨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정난종의 글씨라면 3년 전 화재 때 녹아버린 낙산사의 종명(鐘銘)도 그의 글씨이니 우리 시대와는 악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건재했던 숭례문이 우리 시대에 타버린 것은 선조들은 물론 후손들에게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 중의 수치이다. 번드르르한 외양만 추구할 뿐 기본에는 허술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다시 보여준 것이다. 세종 15년(1433)에 숭례문 밖에 군포(軍鋪)를 지어 순라군들을 상주시켰다. 복원하는 숭례문에는 연못도 만들고 군포도 지어 사람이라도 상주시켜야겠다. 현판이라도 건진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1/20080211017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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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통신 "밤에는 경비도 없는 국보 1호" ●외신반응 도쿄=정권현 특파원 / 이태훈 기자
외신들은 '600년 풍상을 견뎌온 한국의 국보 1호인 남대문(숭례문)이 단 5시간의 화재로 하룻밤 새 무너져 내렸다'며 주요 뉴스로 전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남대문의 전소(全燒) 붕괴에 한국 사회가 강한 충격을 받고 있다고 전하면서, 남대문을 복원하는 데는 적어도 2년 이상이 걸릴 것이며, 200억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추정했다. 교도통신은 남대문은 국보 1호인데 소화기 이외의 소방설비가 없고, 심야에서 아침까지는 경비원도 없다고 지적했다. 로이터통신은 "어린 학생부터 평범한 서민들까지 검은 잿더미로 변해버린 국가적 상징을 전율하며 바라봤다"고 전했다. 통신은 또 "남대문은 매일 외국인을 태운 수십 대의 관광버스가 와서 서는 명소였으며, 인근에 같은 이름의 전통 시장으로 연결되는 한국 관광산업의 중심이었다"고 전했다.
AFP통신은 "남대문은 일본의 잔인한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역사적 건축물이었다"고 전했다. 말레이시아 국영 베르나마 통신은 11일 '한국인들이 국보 1호 남대문의 붕괴를 애도하다'는 제목의 서울발 기사에서 "음력설 이후 첫 월요일 아침, 깊은 슬픔이 서울의 거리를 휩쓸었다"고 보도했다. 아랍어 위성뉴스 채널 알자지라는 "화재가 서울의 역사적 건축물 남대문을 파괴했다"며 "많은 방문객이 검게 타버린 잔해 앞에서 슬퍼했다"고 전했다. ===============
"눈앞에서 국보 1호가 '와르르'… 9·11 같은 충격" "임란 때도 지켰는데… 우린 역사의 죄인" 김철중 기자 / 정혜진 기자
● 시민 반응
전문가들은 '국보 1호'가 잿더미로 변하는 전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의 심리적 충격을 우려했다. 울산의대 강릉아산병원 정신과 백상빈 교수는 "미국의 상징물인 세계무역센터가 9·11 테러로 무너지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미국 사람들이 심리적 공황에 빠진 것처럼 남대문 붕괴를 눈으로 지켜본 한국 사람들이 엄청난 상실감과 참담함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재난 현장을 직접 눈으로 지켜보는 경우 정신의학적으로 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투사'(投射)현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불안감과 공포감이 더 증폭된다고 백 교수는 덧붙였다. 건국대병원 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흔히 '남대문이 열렸다'는 말을 해왔듯이 남대문은 이순신 장군 동상과 함께 우리를 지켜주는 상징물이었다"며 "남대문을 잃은 상실감과 불안감은 우리 가슴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신영철 교수는 차분한 대응을 주문했다. 그는 "집단적인 분노가 자칫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으로 발전할 수 있다"며 "허탈한 심정을 누르고 꼼꼼히 사후 대책을 논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외국의 문화재 정책 일본-49년 금당벽화 화재 후 '예방의 날' 지정 도쿄=선우정 특파원 / 파리=강경희 특파원 / 베이징=이명진 특파원
일본의 '천 년 사찰'인 나라(奈良)현 호류지(法隆寺)에서는 1949년 화재로 고구려인 담징의 금당벽화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현재 이 사찰의 금당(金堂)과 남대문 등 일본 국보(國寶)로 지정된 건조물의 실내는 직경 2㎜ 이하의 가는 동관(銅管)이 감싸고 있다. 화재시 발생하는 열로 공기가 팽창하는 것을 감지해 화재 사실을 1초라도 빨리 알리는 자동 화재탐지 설비다. 화재에 취약한 목조 유물이 많은 중국도 1978년 개혁개방 이래 문화재 보존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다. 모두 118곳의 문화재급 목조건축물을 가진 중국은 화재로 인한 소실을 막기 위해 1984년 '고건축물 소방관리규칙'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중국의 주요 문화재 시설들은 아예 자체 소방서를 두는 경우도 있다. 베이징의 자금성(고궁)에는 1975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지시로 설립된 '자금성 소방중대'가 내부에 상주하면서 불이 났을 때 1~2분이면 긴급 출동할 수 있는 24시간 화재 감시체제를 구축해 놓고 있다. 티베트의 포탈라(Potala·布達拉) 궁전도 1984년부터 200명 규모의 소방대를 상주시켜 정기적으로 주변 잡초 제거 작업을 벌이 네티즌 의견 총 0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