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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내용

  • No : 69609
  • 작성자 : 편집자
  • 작성일 : 2012-12-09 11:24:06
  • 조회수 : 3442
  • 추천수 : 0

영규대사와 팔백 의승

-금산벌전투를 중심으로-

 

일 시 : 2012년 12월 6일 14:00~17:00

장 소 : 대 전 유 성 관 광 호 텔

내 용 : 금산벌전투와 영규대사의 800의승군

발표자 : 재원 김 덕 수 법사

 

목 차

 

一. 영규대사와 팔백의승군

1. 序言

2. 임진란과 영규대사

3. 영규대사

4. 임진왜란시 영규대사와 청주성 탈환

二. 기허당 영규대사와 800의승군

1. 첫 승전보는 영규대사와 의승군의 공로

2. 의승군 활동의 불교역사적 의의

3. 의승군의 활동은 국난 극복의 역사

4. 임진 정유왜란기의 의승군 활동

三. 결 어

一. 영규대사와 팔백의승군

1. 序言

먼저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조선불교 탄압사를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말입니다. 불교 탄압사를 알아야 그 시대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시대 사항을 바로 이해해야 임진왜란과 당시 국민실상과 전란의 실상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억술 숭유정책의 조선조 오백년은 그야말로 불교 수난의 역사와 굴욕의 역사였습니다.

조선조때의 유교와 유생들은 무조건 불교를 적으로 삼았습니다. 불교가 있고서는 유교가 살아남지 못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불교가 유교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만행을 절대 군주의 권력으로 자행했던 것입니다. 불교는 성리학이 틀렸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불교는 유교와 다른 철학적 이론 체계를 갖고 있을 뿐입니다.

一. 유생들은 자기들 생각과 다르면 모두 적으로 간주했고 다른 것은 무조건 틀렸다 하고 적대시하에 죽이고, 학대해 말살했던 것입니다. 후일 그것이 사색 담쟁이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국민 의식속에는 오늘날에도 불교 탄압 의식 그대로 재연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종교적인 배타성과 행위라든가 올바른 역사 의식 보다는 자기신앙과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백안시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정치 작태에서도 볼 수 있는 현안들입니다.

조선 실록에 의하면 불교 말살과 탄압을 주청한 상소가 10만건이 넘습니다. 그중에서 몇가지만 예를 들면

1. 젊은 승려는 모두 환속시켜라(태조 이성계)

2. 비구니는 모두 환속시켜라

3. 여자는 절대 절에 못 가게 하라(조선 헌법)

4. 남자는 아예 절에 못 가게 법으로 정했다. 절에 가면 벼슬길이 막히고 서민 노예 전락시켰다.

5. 새로 왕이 등극할 때마다 불교를 없애라 끝없이 상소를 올렸다.

ㅇ 비구, 비구니를 강제로 환속시켰다 자꾸자꾸 스님이 되니 아예 법으로 금하고 구속시키고 그 집안을 모두 벼슬길을 막았다.

6. 불교는 인간 정신을 갈가먹는 해충이다. 세상과 인간의 적이다(1480년 조선 실록)

7. 불교는 음탕한 여색과 같다. 짖밟아라(1514)부교 탄압사는 여성 탄압사로 연결된다. 절에 간다는 이유 하나로……

8. 나라법으로 백성이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했고 강력한 처벌을 했다. 4.8(부처님 오신날)절에 등을 달면 승려, 신도, 다 처벌했다.

9. 관원, 벼슬아치, 유생들에 의해 전국의 사찰과 불상이 계속해서 파괴를 감행했다.

10.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불상에 땀흘리는 이적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 민심이 동요하니 이를 말하면 입을 찢고 처벌했다. 심지어는 불상의 목을 자르고 솥에 고, 절을 불태웠다.(1700년~1800년)

11. 절, 토지를 몰수하고 승려을 강제 환속시키고 과중한 공출과 부역을 시키고 죽이거나 종, 노예를 삼고 승려 신분을 가장 천한 7천에 묶어놨다. 아울러 도성 출입도 금하였다.

한, 일 합방때까지 이같은 만행이 계속되었다. 조선조 오백년은 불교탄압과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 사상에만 젖어 있었다.

이같이 박받고 피해한 사항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못하고 왜적의 방황 살육을 피해 백성들은 가까운 절로 피난했고 이들을 보호하고 사찰을 지키기 위해 승려들이 목숨걸고 싸운 것이 의승군 활동의 시작이다.

영규대사와 충청, 전라 지역의 승려들이 권율을 도와 최초의 전승을 가져오게 했고 금산벌 전투에서 조헌을 도와 영규대사와 800여 의승이 전원 옥쇄했는데 조헌 선생의 살아남은 제자들에 의해 의병만 공을 상소했고 승려들은 그 누구도 챙길 수 없었다. 통탄할 일이다.

2. 임진란과 영규대사

宣祖 25년 4월 13일 왜적이 대거 침략해 부산진 부사 정발이 전사하고 이어 동래부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이 피살되니 이것이 임진란의 시작이다.

왜적은 3방향으로 나누어 북상했다.

제1진은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가 중앙 도로를 택하여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안동, 선산을 거쳐 상주에 이르러 순찰사 이익군을 대패시키고, 一진은 加藤淸淨<가또오 기요마사>가 좌도를 택하여 장발, 기장 등을 거쳐서 좌 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 영천, 신령, 의흥, 군위, 비안을 거쳐 풍률, 문경으로 빠져 中路軍과 합쳐 조령, 충주로 들어가 申砬군을 敗하고 다시 여주, 양근, 용률, 경성 동쪽으로 죽산, 용인, 한강에 이르렀다.

또 1진은 林吉成<모리요시마루> 동래, 김해, 성주, 예지, 금산,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현으로 나와 청주를 점령 후 경기도로 계속 북진하니 적기와 총검이 천리에 끊이질 아니했다.

그들이 지나는 지점마다 10리 혹은 5~6십리 간격으로 허한 지역에 군영을 설치하고 擧火相應하였다.

적이 한강 남변에 이르렀을 때 이곳 수비를 맡은 도원수 金命元은 천여 병력으로 대치했으나 적의 포탄이 亭上에 떨어지자 패주했고 적은 도강하여 유도대장 이양원 마저 守城을 포기하고 영동방면으로 퇴주하여 한양성은 공허하게 되었다.

◎ 왜적은 불과 22일만에(4月 13日 부산 동래 → 5月 3日 수도 한양성 입성) 수도 한양에 입성했다.

4월 29일 충주에서 申砬이 패하자 선조대왕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몽진의 길에 올랐다.

개성에 머물고 있던 선조는 적이 한양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피난했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下三道大軍마저 대패하니 관군에 대한 기대는 절망이었다.

선조대왕은 6月 22日 의주로 피난했고 明나라에 의탁하고자 했다.

明나라에서는 선조대왕을 받아주지 않겠으며 압록강을 넘으면 밀폐하겠다 위협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난감한 저치에 놓였다.

이때 청주성 전투에서 권률장군과 영규대사의 승병들에 의해 청주성을 탈환했으며, 이에 힘입어 의병과 승병이 팔도에서 일어났으며 이순신도 해전에서 승리했다는 장계를 접한다.

이에 선조는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휴정)에게 국난을 타개해 줄 것을 다음과 같이 간곡히 부탁하였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 때에 그대는 어찌 나를 잊었는가? 이 위급한 난세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대에게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없는가?”

이에 휴정 서산대사는 「이 나라 백성으로 나라를 위해 전국의 승려를 모아 왜적과 싸울 것이며 늙고 병든 승려는 기도드리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원군을 청하고 전국민이 의분히 일어서게 해야 합니다.」

선조대왕은 옳게 여겨 휴정(서산)에게 「八道16종선교도총섭」에 명하고 순안 법흥사에 승군 총본부로 삼았다.

관동지방에서 사명 유정과 호남지방에선 뇌묵당 처영, 영규대사가 대표적인 의승장이었다.

선조실록에 임진년 11월 19일 선조는좌의정 윤두수 등 대신들에게 “天兵(明나라 원병)이 언제올지 모르니 우리 군사만으로 거사 결전함이 옳지 않겠는가 하니 좌의정 윤두수가 답하길 우리 병력이 너무 약해… 여러 진에 군사가 이르지 않아 매우 군세가 열약합니다. 다만 승군은 많고 그 세가 점점 떨치고 있습니다.” 하였다(선조실록 권32.…).

승군은 왜군의 철통같은 방위와 악착같은 반격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돌진하여 많은 왜군을 베었으며 청주성, 평양성 등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明나라 장수 이여송).

승도 중 최초로 봉기한 이는 “영규당 기허”스님이었다. 임진란 당시 공주(금산) “청연암”에서 수도하는 한편 선장을 갖고 무술 연마에 게으르지 않았다.

주1) <趙寅永撰에 기허당 영규대사 殉義碑銘, 이능화편 조선불교통상 上 P.466 참조>.

그는 전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제자 등을 모아 훈련해 왔다. 순의비명에……

“나라의 큰 변란으로 어가(왕이)가 도성을 버리고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규대사는 3일간 통곡하고 스스로 장수됨을 자청하여 공주목사의 허락을 받아 승병을 모으니 단번에 수백명에 이르렀다….”

「前略 島夷之變 聖駕播越 師憒甚三日哭 自薦爲將 州牧許項 壯而許之 乃紏義僧數百人…」

○ 조선의 유명한 학자 이광수 기록 ⇒ “굶어 죽은 송장이 성안에 가득하니 하루 동안에 산사람이 열이면 8명이 죽어갔다(백성 80%가 죽었다).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대낮에 죽은 사람 인육을 먹는 일이 예사이고 큰길, 골목길 할것 없이 죽은 자가 서로 베다시피 즐비하였으며 수구문 밖에 송장은 산더미 같았는데 성보다 두 길이나 높았다.

이 같이 임진왜란의 참혹상을 보고 제일 먼저 분연히 일어선 것이 기허당 영규대사였다.

3. 영규대사

지금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계룡면사무소 앞에 영규대사의 작은 공적碑石 하나가 있습니다.

그 비석에는 조선 최초에 승병을 일으키고 궐기한( ? ~1592) 정례비 인데 靑蓮庵에서 수도했으며 休靜 서산대사의 제자이며 왜구가 침략 약탈한다는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통곡하고 승려 수백명을 모아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으며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 연곤평(錦山 延昆坪) 전투(1592년)에서 그를 따르는 800여명과 의승군과 함께 전원이 옥쇄했다는 기록과 또 일설에는 금산벌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혼절했다가 이곳 월암리까지와 숨을 거두었다는 기록입니다.

정려 좌측 비문에 “崇禎紀元 後發酉年”으로 되어 있어 1693년(숙종 9년)에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碑를 세운 이덕윤(李德潤), 유중(劉重), 각총(覺聰)스님, 박경태(朴景泰) 등 生尊 연대를 살펴보면 101년 후(숙종 9년)가 아닌 1813년(순조 13년) 221년 후에 건립된 것으로 짐됩니다. 그것도 높이 1m가 채 안되는 아주 작은 비석이었습니다.

정면에는 “義兵僧將靈圭之門”이라 했고,

정각에는 “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義僧振威 將軍靈圭大師之閭”

(단기4328년 乙亥九月 二五日 改題 충남공주군수) 이라고 했습니다.

계룡면사무소 영규대사 비각으로부터 약 500m쯤 떨어진 공주군 계룡면 유평리 산 아래에 正左向 언덕에 영규대사의 묘소가 안장되어 있다.

묘비는 1810년(순조10년) 계룡산 甲寺 승려가 조성한 것을 다시 원효사 沙門釋一華 스님이 주축이 되어 공주군수 이병화, 兢庵스님(김윤뇌) 그리고 공주 寺庵연합회에서 단기 4327년(서기1994년) 甲午 仲夏에 묘비를 세우고 정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비 정면에는 “義僧將騎虛堂靈圭大師殉義實蹟碑”라 했고 옆면과 뒷면에는 영규대사의 공적을 약술해 있다.

묘비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선조때 임진란의 참상을 어찌 차마 형연하리오. 당시 왜구가 대거 침입하여 三南이 연패되어 선조대왕의 어가는 의주로 천도되고 국가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이때 佛門에서 승려들이 의병을 일으킨 분들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병을 규합하고 지휘한 청허 서산대사와 관동지방의 유정 사명대사와 관서지방의 義嚴僧將과 湖南지방의 승장, 雷黙스님이 있었으며 또 한분이 있었으니 湖西지역에서 제일 먼저 의거한 기허당 靈圭대사였다.

大師의 性은 밀양박씨이고 이름은 영규이며, 호는 기허당이다. 공주 판서(板峙)에서 출생하였는데 先世의 계보와 史蹟은 모두(迷상) 알 수 없다.

대사는 일찍이 계룡산 갑사에 입산 출가하였고 후에 청허 서산대사의 門下에서 불교의 眞諦를 전수하였으며 또 瑞鳳寺 等 諸寺에 머무는 바도 있었으나 계룡산 甲寺에서 가장 오래 주석하였다.

大師는 청허서산대사의 문도로서 외모가 질박하고 노둔한 듯 하여 어질고 지혜로움을 드러내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奇略兵法의 拘負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茂環만은 홀로 알아 器重히 여겼다.

禪杖으로 무예를 익힌 대사는 왜구의 침략소식을 듣고 분을 이기지 못하여 3일간을 통곡하고 諸僧을 寺門에 會集하여 비장한 결심으로 목숨 걸고 적을 물리칠 것을 서약하고 그들을 인솔하여 출정하였다.

때마침 청주가 몰락되매 즉시 방어사 李沃과 더불어 출전하자 李沃의 군이 大敗하여 대사는 홀로 부하들을 거느리고 몇일동안 고투하여 부딪치는 대로 적들이 거의 다 쓰러질 때 때마침 文烈公 조헌이 도착하여 그와 합세하여 공격하니 대사가 가장 선두에 앞장서서 드디어 청주성을 회복하였다.

이 싸움에서 불행하게도 수하 승장 茂環이 전사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므로 조정에서는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正三品”의 벼슬을 제수하고 袈衣를 하사하였으나 이때 대사는 이미 금산에서 사투하여 위용을 세우고 있을 때이다.

애초에 청주성을 수복하고 대사는 문열공 조헌의 意事를 좇아 금산에와 ○月 ○日 ○時에 격적하기로 기약하였는데 폭우의 雨天관계로 因하여 약정한대로 적을 치지 못했다.

영규대사는 조헌에게 관군의 원조를 기다려 합동으로 협공하고 진지, 壘舍를 구축하기를 재촉하였다. 대사가 말하기를 대비가 없으면 적을 어떻게 대항할 수 있으리오. 하니 조헌이 묵묵히 말이 없다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본래 우리의 병력으로는 적을 당할 수 없다. 이제 우리가 속전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충의를 보여 분격으로 용맹스러운 사기를 진지하에 공력하려 함이라 하였다.…

계속 반격해 오는 적을 감당할 수 없어 조헌의 의병은 들판에서 총알받이가 되고 쓰러져 갔다. … 조헌선생의 전사소식을 전하여 피할 것을 권했으나 영규대사는 죽으면 함께 죽을 뿐이다 하고 끝까지 함께하여 영규사의 800의승도 함께 옥쇄하였다. 대사도 상처가 심해 쓰러졌는데 모두 사망한 줄 알았다. …

… 영규대사는 다시 소생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다시 남은 승병을 모으기 위해 천신만고로 불당리까지 이르러 목숨을 잃었다. …

… 대사의 위국충절이 일월과 같이 빛나다.…

4. 임진왜란시 영규대사와 청주성 탈환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조선의 관군들은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왜군들을 막지 못하고 후퇴만을 거듭하였고 국왕인 선조 역시 한양을 버리고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 가는 수모를 겪으니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나라를 지키고자 분연히 일어선 이들이 바로 의병들이었으니 경상도의 곽재우를 비롯해 고경명, 김천일, 정문부 등이었다. 그리고 우리고장에서는 조헌, 박춘무, 영규 등이 힘을 모아 왜적과 싸웠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임진년 8월 초하루에 있었던 청주성 탈환전투였다.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주역을 맡았던 집단은 이곳의 토반 세력이었던 전찰방 박춘무가 이끄는 향병 세력과 승장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 및 조헌의 의병단이었으므로 이 글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조헌은 본래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했으나 충청도 옥천에서 낙향생활을 하던 중 임진왜란을 맞게 되어 이곳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의병도 모아지지 않고 경제력도 빈약하여 제대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보은 차령에서 소수의 왜군을 공격해 전과를 올린 것을 보면 그들의 사기만은 충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헌은 충청도 일대에서 많은 의병도 모을 수 있었고 지역민들로부터 경제적 후원도 얻게 되어 임진년 7월 4일 공주의 용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본격적인 의병활동에 들어갔다.

본래 청주성 전투는 처음부터 계획되었다기 보다는, 임금을 지키기 위해 북상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즉 호남에서 북상하는 고경명과 함께 적을 토벌하자는 계획을 수립했는데 북상하던 고경명이 금산의 왜군을 공격하게 되자 조헌은 좌의대장이 되어 황간, 영동 이하의 적을 막고 박춘무는 우의대장이 되어 금강 이북의 적을 막아 고경명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작전은 7월 9일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무산되고 결국 박춘무, 조헌, 영규에 의한 청주성 탈환전이 시작된 것이다. 조헌이 청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회덕을 거쳐 형강에 다다른 것은 임진년 7월 29일이었다. 당시 청주성에는 왜군 제5번대 봉수하가정이 이끄는 7천의 병력 중 일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청청도 방어사 이옥과 조방장 윤경기가 이끄는 관군이 싸웠으나 패하고, 승장 영규대사와 박춘무의 의병부대가 진퇴를 반복하며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조헌의 의병부대가 진군해 모두 합세하게 되었으니 영규의 승병부대는 일단 청주 안심사로 철수하였다가 조헌의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빙고현을 넘어 청주 서문 쪽으로 진격하고 박춘무 의병부대도 합세하였으며 관군들은 북문 쪽에 진을 치기로 하였다. 결전의 날인 8월 초하루 이들은 청주 서문을 집중 공격하여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며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아군이 승기를 잡고 성벽으로 넘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며 천지가 어두워지고 사졸들이 추워 떨게되자 의병들은 무심천을 넘어 잠시 물러섰는데 이 날밤 왜군들은 성벽에 깃대를 세우고 성내 도처에 방화를 하고 왜적들의 시신을 거두고 북문으로 빠져 도망을 가 버렸다. 이렇게 하여 의병부대는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북문에 매복하기로 한 관군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왜군들이 무사히 도망치게 되었고 이에 박춘무가 이들의 뒤를 쫓아 공격하게 되었고, 조헌과 영규대사는 근왕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금산의 왜군을 공격하다가 임진년 8월 18일 모두 순절하였다.

이렇게 힘을 합쳐 이루어낸 청주성 탈환은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로는 임진왜란 발발이후 조선의 관군이나 의병을 통틀어 최초로 이루어낸 대전과요 큰 읍성을 적으로부터 탈환한 최초의 전투로서 전국의 많은 관의병들이 사기를 진작시켰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미가 있었으며, 둘째 이 청주성 전투에 앞장선 이들은 조헌, 박춘무와 같은 유학자와 영규대사라는 불자였다. 조선조에서는 숭유억불책으로 불교가 탄압 받고 승려들은 최하의 신분으로 전락되어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되었는데 평소 유학에 의해 배척되었던 불교 세력이 국난을 당해 유학자들과 함께 손을잡고 국난극복에 앞장섰다는 의마가 있으며, 셋째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관군과 합동작전을 전개했다는 의미가 있다. 임란발발후 삼남지방에서는 도처에서 관병과 의병간에 적지 않은 마찰과 갈등이 있었다. 그것은 지휘권 문제라든가 전공의 소재등 여러 이유에서였는데 청주성을 탈환하는 데에서는 그러한 큰 갈등 없이 함께 손을 잡았는데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청주성 탈환은 비단 관군, 의병, 승병들만의 공이 아니라 400년전 이곳 청주에 살았던 우리조상들의 뛰어난 국난극복 정신의 발로라고 해야 할 것이니, 우리 후손들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으로써 깊이 그 정신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二. 기허당 영규대사와 800의승군

청주성은 왜군의 주력이 북상한 후에도 왜병이 잔류하고 있으면서 4개월간이나 인근 각처에서 온갖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이에 분격한 영규대사는 일천의 의승병과 함께 沃川의 趙憲이 의병을 규합하여 청주성 서문으로 밀어닥치기는 8월 1일이었다. 이 때 公州 靑蓮寺僧 騎虛靈圭도 그가

「吾等之起 非有朝廷命令 若有畏死之心者 勿人吾軍」

‘우리들이 일어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거든 우리군에 들어오지 말라.’

이라고 외침으로써 다투어 모여든 800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청주성으로 진격하여 성외에서 진두에 서서 대진했다. 靈圭 휘하의 승군이 청주성에 당도하기 전에만 해도 청주수복은 좀체로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드디어 육박전이 전개되어 승군이 개미떼처럼 성벽에 기어올라 發喊突入할 때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고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한 때 혼란이 없지는 않았으나 靈圭는 이를 잘 통어하고 먼저 성문으로 올라가 사기를 돋구었다. 비록 낫으로 무장을 하였어도 자못 군율이 엄했던 승군이 공성에 있어서 선봉이 되고 있었음은 다음

‘승려 영규(靈奎)가 의(義)를 분발하여 스스로 승려들을 많이 모아 성 밑으로 진격하였는데 제일 먼저 돌입하여 마침내는 청주성을 공략하였습니다. 그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그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천 명의 승려들이 돌진, 전군(諸軍)이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僧人靈奎奮義自募, 多聚緇徒, 進逼城下, 最先突人, 遂政淸州. 觀其號令風生, 其下無敢違, 叱咤之間, 千僧躍進, 諸軍恃而無恐云.」

라고 한 備邊司의 啓로써도 알 수 있다. 실로 청주수복에 있어서 영규는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발성이 있었던 날이 바로 언제였는가는 모호하다. 다만 8월 1일 성문외에 이르렀던 후로부터 연일 왜적과 대치했으리라는 데서 8월 1일 이후의 일이었음은 틀림없겠으나 여기에 다행히도 이를 짐작하게 하여주는 승군의 활동이 청주지방에서 왜적을 토멸하고자 모여든 40여명의 승군이 8월 9일에 있을 관군과의 합동작전에 기대를 걸고 遊擊戰을 펼치고 있었다는 다음 기사이다.

듣건데, 문의와 청주의 적을 토벌하고자 승병 40여명이 그 길로 와서 고산등지의 승려들과 약속하길, 각기 일시에 공격하자 하였다. 따라서 목사 이광과 더불어 여러 장군이 오늘 토벌키로 하였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 걱정이다.

(『쇄미록』, 임진년 8월 9일)

「且聞文義淸州之賊討滅, 僧兵四十餘 自其道入來, 與高山等處僧人爲約, 各相勤督急擊, 故光牧更與諸將, 今日入討約束云. 而時未聞 成敗如何, 可盧可廬!」(『鎖尾錄』 第1 壬辰日錄 8月 9日條)

이를 보건대 8월 9일 현재에도 청주는 미수복 상태에 있었으며 또 權慄이 통솔하는 관군도 오지 않았다. 따라서 靈圭와 趙憲은 관군의 지원을 결국 단념하고 8월 10일 이후에 총공격을 가함으로써 청주성을 발성했으리라고 보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런 견해가 옳은 것이라면 청주대전이 바로 있은지 18일만에 靈圭가 錦山敵討伐에 나섰다고 하는 설은 좀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8월 18일의 금산적토벌에 앞서서 있었던 청주대전이 바로 영규가 청주성 서문으로 당도했던 8월 1일 바로 그 당일의 일로 착각케 하여 주기 때문이다. 청주성을 수복한 영규와 조헌은 이어 남쪽으로 내려가 8월 18일에는 금산적토벌에 나섰다. 금산은 知禮에 그 본부를 두고, 영남지방을 제압하고 있던 林吉成<모리요시마루> 小旱川陸景 휘하의 왜군이 전라도로 진출할 수 있는 가장 요진한 곳이었기 때문에 왜군이 매양 눈독을 올린 곳이었는데, 도시 이 금산적토벌은 처음부터 무리한 것이었다. 조헌이 영규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관군의 지원을 기다리지 않고 사지로 출동하매 영규도 불가피 휘하 2,000여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금산성外에서 결진했다. 그들은 이 전투에서 오히려 포위당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을 뿐만 아니라,

‘18일, 충청도 의승병 이천여명과 조헌의 의병 천팔백여명은, 관군에 알리지 않고 가벼이 적진에 나아갔다. 적은 네문으로 나뉘어 나와서 의군들을 둘러쌓다. 의군들은 힘써 싸우니, 적 사망자는 50여명이며, 부상자는 무수하였으나, 의군의 사상자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남은 이는 곧 물러나 흩어졌으며, 의병장 조헌과 승병장 영규는 나왔다고도 하나, 아직까지 소재를 알 수 없다. 만약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였다면 분명 적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쇄미록』, 임진년 8월 22일)

「十八日, 忠淸義僧二千餘名 及趙憲義軍一千八百餘名, 不告本道官軍, 輕進賊窟. 賊分出四門, 圍立義軍. 義軍力戰, 賊死者五十餘名, 傷者亦無數, 而義軍死者不知其數. 其餘則退散, 義將趙憲及僧將靈圭出來云云, 而時味知去處. 若不歸其道, 則必死於賊手矣.」(『鎖尾錄』第1 壬辰日錄 8月 22日條)

라고 한 바와 같이 8월 22일 현재까지도 영규의 생사는 조헌의 그것과 함께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亂中雜錄』가운데

‘27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과 의승장 영규 등은, 금산에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었다.’

「二十七日, 忠淸道義兵將趙憲 僧義將靈圭等, 討賊于錦山 敗績死之.」

라고 한 기사는 27일에 가서야 그들의 전사가 확인되어졌거나 또는 재차의공격이 이날 또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어떻든, 금산적토벌전은 비록 전멸로 되돌아갔지만 이로 인하여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왜적의 기세는 좌절되고 호남과 호서는 더욱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충청도에서의 승군활동이 그 얼마나 믿음직 했었는가는 吳希文이 그의 생생한 피난생활을 기록한 『鎖尾錄』가운데

「聞忠淸僧兵, 不畏其死 直人不退, 故到多處捷云. 若以此僧爲先峰, 則庶可成功矣.」

‘듣자니 충청도의 승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곧장 진격하여 물러서지 않는다. 때문에 여러 곳에서 승리하였다고 한다. 만일 승병으로 선봉을 삼았다면, 공격에 거의 성공하였을 것이다.’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도내 각 사찰의 승들은 대개 모두들 赴戰 하였던 것이니, 吳希文이 임진 익년 11월 6일 심방했던 林川 普光寺에서도 이미 많은 전사자를 내놓고 있었으며, 또 조정에서 조헌의 기별을 듣고 下敎한 宣慰文 가운데 挺身討賊한 道內 大小戰亡人員의 한 사람으로 僧 處永의 이름도 열거되어 있음은 모두 다 그 一例라 하겠다.

그는 그렇다고 치고, 청주수복에 대해서는 宣祖도 처음에는 그 소식에 반신반의 하였을 정도로 의외의 일이었던 모양이다. 선조는 영규에게 그 군공으로 승장으로서는 최초로 堂上職을 내리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左議政 尹斗壽는

‘승려를 당상관에 제수한 것은 개벽(開闢) 이래 아직 등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의당 특이한 법전을 써야 합니다.’

「僧爲堂上 開闢以來未之聞矣. 今則宣用殊典矣.」

라고 하며, 의승군의 활약에 고무되어 서산대사 体靜으로 하여금 승군을 모으게 하자고 건의한다. 그런가하면 의승군의 공적을 애써 폄하하는 유신들도 있었다. 尹承勳

‘윤승훈은 아뢰기를, “영규는 자신이 승군을 모집한 것이 아니라 감사가 선발하여 영솔케 한 것입니다. 호령이 엄명하고 곧바로 전진할 뿐 퇴각함이 없이 한마음으로 싸웠습니다. 청주의 왜적은 이 군사가 아니었다면 이길 수없었을 것입니다.’

「尹承勳曰 : “靈圭非自募僧軍, 監司抄發, 使領之矣. 號令嚴明, 直前無退, 一心爲之. 淸州之賊, 非此兵, 則不得勝矣.」

라고 하여 관군의 공으로 돌렸다. 이는 승군의 공을 충분히 인정하는 경우일지라도,

‘큰 무공만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사람 됨됨이와 재기도 심상치 않으니 우선 상을 주고 환속하게 하소서.’

「不唯大功可嘉, 爲人才氣, 赤非尋常, 姑爲先賞, 使之還俗.」

라고 하였으니, 상을 받고 환속하기를 원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을 의승군이 누가 있을까 씁쓸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戰功者라 할지라도 승려의 신분을 가진 자에게는 일반에 대한 경우처럼 軍功처리를 하여서는 아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같이 조정에서 영규에 한 군공포상을 두고서 왈가왈부 시비가 벌어지던 9월초에는 이미 그는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뒤였다. 마침내 그의 공이 높이 치하되어 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던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앞서 우리는 청주에 모여든 40여명의 승군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었다. 그들이 청주대전에 참가했었는지는 仔詳치 않으나 분명히 영규 휘하의 승군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것은 備邊司에서 올린 啓가운데

‘충청도는 나의 문호(門戶)이므로, 그 방비가 급한 것이 양남(兩南)에 버금갑니다. 충주로 말하면 상류(上流)의 중요한 곳이고 또 양령(兩嶺)이 모이는 곳이니 충주를 잃으면 장강(長江)의 험조(險阻)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忠淸道, 國之門戶, 防備之急, 亞於兩南. 如忠州則乃上遊之重, 且居兩嶺之會. 忠州若失, 則長江之險, 不足恃也.」

라고 충청도 지세의 전략적 가치를 논한 다음, 이어서

‘또 승장(僧將) 홍정(弘靖)의 군사 각각 1천여 명이 도내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를 통속(統屬)하는 사람이 없어서 각각 스스로 진퇴(進退)하는지라, 적을 막는 데에 보탬이 없을뿐더러 궤산(潰散)함이 없지 않으니, 이대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且有僧將弘靖, 性靖之軍, 各千餘名, 散在道內. 而皆無人統屬, 各自進退, 非徒無益禦敵, 亦不無潰散意外之慮, 不一二足.」

라고 했듯이 충청도에서는 영규 휘하의 승군 외에 弘靖과 性靖 등 양승장이 거느리던 승군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비변사의 啓는 임진 익년인 선조 26년 都京還都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弘靖과 性靜 등 양승장이 승군을 조직하고 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진작 靈圭와 거의 때를 같이 했을 것이니 청주지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던 40여명의 승군은 바로 弘靖과 性靖 등 양승장 휘하의 승군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리하여 靈圭 전사 후로는 弘靖과 性靖 휘하의 승군이 충청도 승군의 핵심이 되어 갔었으리라 본다.

이와 같이 충청도에서 승군이 활동하고 있었을 때 전라도 승군은 그 활동을 어떻게 전개하고 있었을까. 우선 전략적인 지역으로 보아 茂朱地方과 德裕山一帶는 경상도이 왜군이 전라도로 전진하는데 처리하여 두어야 할 요로였으므로 피아간에 수없이 공방전이 그곳에서 벌어졌다. 9월 14일 潭陽 玉川寺僧 引俊이 지휘하던 약200여명의 승군이 무주로 달려갔었던 일도 그 공방전의 하나였던 것이다. 또 같은 9월에도 斗仁이 지휘한 남원지방의 승군도 李應水를 그 將으로 하는 70여명의 의병과 함께 무주로 보급하여 주기까지 했으나 義兵將 李應水의 적절치 못한 지휘로 말미암아 보급도 함께 패배당하고 되돌아 왔었다. 한편 전주로 들어로려는 왜적을 진산에서 제지함으로써 호남의 보전을 가져오게 한 權慄이 도성수복을 위하여 북상의 길에 오를 때 海南 大興寺에서 궐기한 승장 진묵당 처영도 승군을 거느리고 이에 호응했다. 그들은 마침내 水原 禿山城에 이르러 결진했다. 그리하여 그들 權慄과 處英이 지휘했던 행주산성에서의 승리는 바로 이로부터 5개월 후인 翌 宣祖 26年 2月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라도에서도 승군들이 부전하게 되매 사찰은 대개 노승들만 남게 되었던 것이니 덕유산 및 靈覺寺의 경우도 그러했다.

1. 첫 승전보는 영규대사와 의승군의 공로

상이(선조대왕) 이르기를,

“청주(淸州)를 다시 빼앗았다는 말은 정말인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趙憲이 僧將(灵圭)과 함께 진격하여 함락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上曰 : 淸州復拔之言信乎?

斗壽曰 : 趙憲興 僧將灵圭進拔云.」

○ 宣祖 30권. 25年(1592壬辰 / 명萬歷 20年 9月 11日 戊辰 3번째 기사에 중(僧) 영규, 임태, 남절, 조광익 등에게 상을 내리라고 청한다. → 비변사가 아뢰기를,

“충청도는 적의 요새가 되는 곳입니다. 적들이 청주를 차지한지 이미 넉달(4개월)이 넘었습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右道를 엿보며 휵독(방화, 살육, 강간 등)을 부려 우리의 腹心의 근심이 되어온지 오래입니다.

중(僧) 영규(靈奎)가 의(義)를 분발하여 스스로 중들을 많이 모아 성밑으로 직격하였는데 제일 먼저 돌입하여 마침내 청주성을 공략하였습니다.

그가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그 수하 중들이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천명의 중들이 돌진, 諸軍(관군 등 조헌의 병)이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큰 무공만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사람 됨됨이와 재기도 심상치 않으니 우선 상을 주고 환속하게 하소서."

「僧人, 靈奎, 奮義自募, 多緊緇徒, 進逼城下, 最善突入遂功淸州. 觀其號令風生. 其下無敢違. 叱咤之間 千僧躍進. 諸軍恃而無恐云. 不唯大功可嘉. 爲人才氣. 變非尋常. 姑爲先常. 便之還俗.

상이 이르기를 僧軍은 귀멸되지 않았는가?

本司에서는 영규를 堂上에 올리려 하는가?

그렇다면 당상으로 올려라 하였다.

영규대사는 公州사람이다.

본 도의 순차사에게 말하여 도내의 승군을 선발 僧 영규를 장수로 삼아 청주의 왜적을 토벌화였다.

영규대사와 조헌이 청주성 탈환 후 군사를 옮겨 금산의 왜적을 치다가 모두 싸움터에서 죽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매우 애석해 하고 또 그들의 의기를 장하게 여기고 있다.

두수가 아뢰기를 “승려를 단상관에 제수한 것은 개벽(開闢)이래 아직 듣지못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같은 위급한 상황에선 의당 특이한 법전을 써야 합니다.

또 윤승훈이 아뢰기를 영규는 승군을 모집했을 뿐만 아니라 감사의 재가도 얻었습니다. 그는 호령이 엄명하고 곧바로 전진할 뿐 퇴각함이 없이 오직 한마음으로 싸웠습니다.

청주, 금산의 왜적은 영규가 아니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上曰 : 僧軍不至遺散乎? 本司欲以靈奎爲堂上乎? 然則可陞堂上. 靈奎公州人也…… 斗壽曰 : 僧爲堂上. 開闢以來未之聞矣. 今則宣用殊典矣. 尹承勳曰 : 靈奎, 自自募僧軍. 監司抄發便領之矣. 號令嚴明. 直前無退. 一心爲之. 淸州之賊 非此兵. 則不得勝矣…….

○ 공주에 있던 승려 영규가 모집한 승군 8백명을 거느리고 함성을 지르며 돌입하자 諸軍이 승세를 타고 수급 51과를 참획하였는데 난음 적은 밤을 틈타 도망쳤습니다.

왜적이 각 지방에 가득하여 날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는 것이 끝이었습니다. 갈수록 흉포가 극심합니다.

「有公州僧人靈奎. 率自募 僧軍 八百餘名. 發喊突入. 諸軍乘勝. 斬獲首級 五十一顆. 餘賊乘夜逃适……」

(금산벌 싸움)

비변사가 아뢰기를…… 奉常寺僉正.

조헌은 힘껏 싸우다 진중에서 죽었고 의병승장 영규도 승도들과 적진속에 싸우다 죽었으니 아울러 포장하여 증직시켜 주소서.

「 且奉常僉正 趙憲. 力戰陣亡. 義僧將靈奎. 赤赴敵而死. 竝爲褒贈.」

승장 영규에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증직하였다.

「贈 僧將靈奎同知中樞府事.」

기재사초(하) 「寄齊史草(下) 朴錦溪 東亮著에 충청감사 윤선각(尹先覺)이 아뢰기를,

“큰 왜적이 청주에 들어와 군사를 나누어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僧名이 영규라고 하는 자가 있어 그 무리를 모아 모두에게 낫을 들리고 매우 엄히 호령하여 적을 만나도 피하지 아니합니다. 또한 패배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적은 마침내 성을 버리고 갔습니다. 모두 영규의 공이옵니다.”

하였다. 그를 당상으로 올려서 첨지를 삼고 옷감 한 벌을 내려주었다.

○ 조헌은 고경명이 패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금산의 적은 복심(腹心)의 병(病)이다” 하고 말하기를 “금산의 적은 복심(腹心)의 병(病)이다”하고 영규대사에게 글을 보낸 다음에 그 경계에 나가 머물면서 다음날에 같이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명령은 이미 내렸으나 비가오고 진영에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 영규대사가 조헌에게 말하기를 “병법에 준비가 있어야 근심이 없다 하였습니다. 진영을 만드는 작업을 아직 끝내지 못하였으니 내일 싸우는 것은 불가합니다.”하니

조헌이 속으로 얼마동안 생각하다가 대답하기를 “왜적은 본래부터 우리의 적수가 아니지만 내가 빨리 싸우고자 하는 것은 단지 격동된 충의를 따르고 날카로운 士氣를 타자는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적은 군대를 끌고 먼저 나왔다. 이 때 영규대사는 군영을 대강 갖추었는데 조헌의 군대는 훤히 보이는 벌판에 나와 섰다.

적이 달려드니 장군이 큰소리로 고함치고 짧은 무기로 서로 교전하여 살상이 상당하였다.

적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아지니 조헌의 군대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조헌의 군대(의병)는 영규대사의 승병진영으로 옮겨 볼 수 밖에 없었다.

왜적은 뒤를 밟아 이 기회를 타고 쳐들어오니 크게 혼란스러운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그런 중에도 영규의 800승군은 맨주먹으로 치고 싸웠는데 오히려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아니하였다. 오래지 않아 조헌은 난병(亂兵) 속에서 죽었다.

어떤 사람이 영규에게 말하기를 “조헌 의병장이 죽었습니다. 적은 감당할 수 없이 더욱 많아지니 잠시 이곳을 떠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영규대사는 크게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죽으면 죽었지 어찌 혼자만 살 수 있겠는가?”하였다. 종일 힘써 싸우다가 영규도 죽고 의병도, 의승군도 모두 죽으니 감히 후퇴하여 살려는 자가 없었다. 왜적도 이날 밤에 경상도로 도망갔다.

왜적은 이때부터 감히 다시는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니 대체로 왜적의 군세가 크게 꺾였기 때문이다.

조헌과 영규가 기병할 즈음 원근에서 모두 말하기를 “어찌 적을 평정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하였다.

○ 영규는 청주에서 왜적을 격파한 뒤 얼마 안되어 금산벌에서 죽으니 조정에서 내려주었던 비단 옷감 등은 전달되지 못하고 중도에서 돌아왔다.

이때 감사 이광은 한구석에 움츠리고 숨어서 사람의 공이나 허물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고경명 등의 죽음도 조정에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던 것이다.

2. 의승군 활동의 불교역사적 의의

○ 의승군 활동 불교사적 의의

- 승군 활동으로 억불정책의 명분이 약화됨.

- 조선 전기 연산군때 승려들을 강제 환송시키는 등 큰 법란 전개.

- 명정조 문정왕후때 잠시 탄압중지, 선. 교 양종 승과 부활되나 문정왕후, 보우선사가 죽자 승과폐지하고 탄압재개

- 임진왜란시 승과 출신 휴정서산, 유정사명, 처영, 영규 등 맹활약

- 엄청난 희생과 천대 속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봉기, 집권층 양반 사대부와 마찰을 피하며 자국적인 교단을 유지

- 소극적으로 전승기원 법요, 적극적으로 의승 돌격진 선봉.

- 의승군 호국정신은 3.1운동으로 이어짐. 고종 31년(1894) 동학혁명, 청일전쟁, 노일전쟁

○ 의승군 성격

- 이승군은 자의적으로 봉기한 특수단체로 많은 억압을 받았다.

- 의병은 대개가 전직관료와 유생들이었으므로 관군과 거의 동등한 입장에서 관군의 무능력을 호통내지 규탄하며 독자적진 활동을 하였다.

- 승군은 탄압 속에서 정치세력은 물론 사회적 계급도 양민이하 7천이 하나로 묶여있던 때이다.

- 조정관료들은 유공을 세운 승장에게는 환속을 권하고 전승도 대부분 유생 출신의 의병에게 돌아갔다.

- 모든 승장들은 대부분 환속에 불응하고, 불교의 입장을 외면하지 않았다.

○ 승군 봉기의 사회적 배경

- 선조24(1591)년 일본 평의지 재차 부산도착 하반하지 않고 변장애 오라하고 듣지 않자 철수

1592년 임진 2월 조정에서 심각성을 깨닫고 대장 신립을 경기도와 황해도로, 이익을 전라도와 충청도로 급파 병력 등 시설을 점검하였으나 활과 창이 있을 뿐이었다.

- 선조25년 4월 13일 왜구 대거 부산침략 부산진 검사 정발이 전사, 동래부 함락부사 송상현의 피살로 난이 시작됨.

- 왜적이 3갈래로 나누어 침략. 제 1진은 중도, 약산, 밀양, 청도, 대구, 인동, 서산, 상주에 이르러 순변사 이익군을 패하고, 제2진은 좌도를 택하여 장발, 기장, 울산, 경주, 영천, 신령, 의흥, 군위, 비안, 풍진, 문경, 조령, 충주로 들어가 신립군을 패하고 여주, 죽산, 한강에 제3진은 성주, 지에, 금산, 추풍령, 충북 영동현, 청주, 경기도로 진입 한강 남변에 이르고,

- 도원수 김명원이 1천여 병력으로 대항하나 포탄이 떨어지자 모두 도주한다.

4월 29일 신립 장군이 충주서 패하자, 왕은 서행을 결심 피난케 된다.

- 개성에 머물고 있던 선조 대왕은 적이 입성했다는 말을 듣고 임진 5월 3일 4일만에 개성에서 평양으로 온다.

- 왜적은 북진을 계속되고,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하산도 대군마저 대패하니 관군에 대한 기대는 절망이었다. 한편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은 서조가 함경도 방면으로 피난 할 것을 생각 침입 함.

- 조정은 적 침입의 격퇴에 완전 실패하고, 명나라 원군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선조는 6월 22일 의주로 옮김. 다행히 6월 팔도 전역에 승군과 의병이 봉기 적이 더 이상 전진 할 수 없게 하고, 이순신에 의한 해전에서의 승리는 북상하는 적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 선조 25년(1592년) 승려중 최초로 기허당 영규대사가 전란을 예견 승려들을 모집 훈련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임진년 8월 청주성 탈환으로 최초로 대성과를 올렸다. 이후 조헌의 700의병 금산벌 싸움에 영규대사는 참여 800의승이 함께 전몰하는 피나는 싸움

- 의승장 信은 진주부를 무대로 적을 격파

의승장 法正은 황해도 중화에서 적을 격파

의승장 영규대사는 충청도에서 적을 격파

(전투, 정보, 군수품, 훈련정비, 외교 등) 임진왜란 전투 전반에 걸쳐 의승군에 의해 주도되었다. 도성축조까지 승군에 전담되어 사원은 패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선조는 승군에게 평양성 탈환을 명하고 승군이 선봉이 되어 관군, 명군 합세하여 전국을 역전시킴으로 탈환하게 됨.

- 관군이 너무 허약하여 선조이가 환도 호위까지 승군이 담당하게 하였고 선조는 오직 승군만을 의지하게 됨.

- 사명대사 유정은 전후 팔공, 금호, 용기 등 축성축조를 비롯 4천여석의 군량미 조달, 일만여명분의 집기 제공, 등등...

- 사명대사는 정예 의승군과 왜장 가등청장 근거지에서 생포 포위 수차례 평화 회담을 전개하여 국교재교시 일본으로 건너가 포로 3500을 데려오기도 함.

- 양난이후 산성축조, 경계임무 등 의승입번전제등 남, 북한산성 축ㅈ.

- 선조 29년 (1596년) 북한산성 논의.

병자호란(1636년) 참화 후 효종 때 재론

숙종 37년(1711년) 착공 10월 완공

- 남한산성, 북한산성 각성스님 책임 하에 축성 1년에 6회씩 교체 전국 승려 동원 2개월씩 부역 함.

3. 의승군의 활동은 국난 극복의 역사

우리 모두가 알고 계시듯, 의승군이란 이름 아무런 조건없이 나라를 위해 국가의 위란을 극복하고자 일어선 의병승을 뜻하는 것입니다.

의병은 벼슬에서 물러난 국가원로들에 의해서 각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지반관속의 벼슬아치를 호령하고 지원요청 등을 자유로이 할 수 있었지만, 승군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불교가 숭유억불 정책으로 끝임없는 탄압을 받고 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승려의 신분은 가장 천민인 칠천에 묶여서 인권이 송두리째 말살되고 멸시받아 그 고통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때에, 그들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 던져 왜적에 맞서 싸웠다는 것은 세계인류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불교의 대승적 견지에서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이 그 사상적 배경이 아니면 절대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지면 관계상 본고에서는 다 언급할 수 없으나 호국 삼부경 등에서 밝히고 있는 正法, 慈悲, 平等, 思想을 근거로 1700여년간 계승되어 온 “成就衆生, 淨佛國土” 건설의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국방 편제에도 종교의 성직자가 종군하는 군종제도가 한국, 미국 등 세계 각국에 있습니다. 예컨대 기독교 성직자 목사를 군목이라 하고, 천주교 성직자 신부를 군종신부라 하며 불교의 성직자 스님네의 종군을 군승이라합니다. 이와 같이 종교 성직자의 종군은 계급과 급여가 있고 그들이 활동하는 모든 국가가 지원하고 군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사에 나타난 의승군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조 오백년이 망할 때까지의 모든 활동과 활동에 필요한 모든 군수물자까지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승병장’이니, ‘팔도십육종 선교도총섭’이니 하는 이름만 줬을뿐 그 어던 지원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이름뿐 노예해방 전쟁에 끌려간 노예같은 신분이었다 하겠습니다. 관병장들이 의승군을 마음대로 부리고, 위협하고 어려운 전투에 선봉에 세우곤 했던 것입니다.

본 주제 발표에 앞서 먼저 여러분께 물어 보고 싶습니다. 얼마전 화재로 불타버린 우리나라 국보 1호 숭례문의 대목장이 누군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을 지은 대목장이 각희(覺喜)스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이씨 조선은 3,600여개의 사찰을 폐쇄시켰습니다. 연산군 때는 고려때 세운 속리산 법주사 동 미륵부처님도 파괴해 없애 버렸습니다.

한글 제정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도,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에 의해 만들어진 ‘이두’문자에 기초하여 스님들의 노력이 뒷받침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면 여러분은 믿겠습니까?

세종대왕의 은밀한 보호아래 훈민정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인 「석보상절」「월인청강지곡」「월인석보」등을 스님들이 짓고 초안하여, 소헌왕후의 왕생극락을 발원하였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국가와 백성이 佛法을 믿고 따르면 나라와 백성이 태평성대를 이루어 잘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만일, 폐불을 일삼은 숭유억불정책의 당시 상황하에 스님네가 한글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용납됐겠습까?

뿐만 아니라, 아직 더 고증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지만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수군 의승군의 활약 또한 눈부신 전과로 연결했으며 거북선 제작도 보월, 보운 스님이 반야 용선에서 착안하여 제작되었다는 것입니다.(이종익, 「사명대사」)

일제말기의 백운 스님은, 일본왜장 일기 속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이순신은 거북선의 제작건의를 두 번씩이나 반려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의승군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한다.

의승군들의 무주(無住)의 정신과 탐관오리들의 탐욕에 의해 공은 자기가 갖고 위험한 전투는 승군이 도맡았던 것입니다.

충청남도 금산에 가면 조헌의 700의총의 있습니다. 하지만 영규대사의 800의승의 옥새는 지금껏 그 누구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난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올바르게 조명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같이 역사의식이 결여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동 반도를 우리의 영토라던 우리가 지금은 한반도에 그것도 남북이 분단되어 서로에게 총뿌리를 겨주고 있는 실정 아닙니까?

특히 이웃나라 일본은 삼국시대부터 수없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으며 지금도 독도를 자기땅이라 억지쓰고 있습니다. 어째서 독도를 자기 땅이라 억지 스는 것인지, 언제부터 이 같은 주장을 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국력이 약화되었을 때입니다. 만일 우리의 국력이 일본을 능가하고 세계 최강의 나라였다면 그래도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 주장 할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는 일이 아닙니까?

나라가 힘없으면 얕잡아 보고 빼앗으려 합니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침략을 했습니까? 그들의 침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쟁과 부정부패는 국민을 피폐하게 만들고 끝내는 나라를 멸망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한․일간에 역사 왜곡 사례를 많이 보았습니다. 승자의 역사 논리로 인류사는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유생들에 의해 불교가 폄하되고 왜곡된 것들을 오늘날까지 바로잡지 못하고 묻혀 있는 실정입니다.

4. 임진 정유왜란기의 의승군 활동

이성계의 건국에 神照僧將을 중심으로 참신한 승려들이 건국의 기반이 되었고 왜적을 물리치는 주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공신들에게 나눠줄 보상의 땅이 절실했다. 따라서 1차적으로 지방호족과 결합된 고려 말 권승들의 사찰을 폐사해서 그 토지를 몰수해 갔다.

재정상의 이유로 시작된 폐불정책은, 고려말 비대해진 사원경제와 과도한 불사로 국가재정이 파산에 직면하게 되었고, 승려에 부여된 특권은 왕왕 악용되고 특권의식과 안일에 빠져 사회기강이 문란해졌음을 지적하면서, 점차 혹독한 폐불정책으로 바뀌어 간다.

조선왕조는 이렇게 숭유억불정책을 쓰게 되었다.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점진적으로 억압하여 사원 수를 대폭 줄이고 불교재산을 박탈하고 종파도 선․교 양종으로 정리해 버리고 승려의 도성출입을 막고 승려를 七賤의 하나로 묶어 버렸다.

世祖나 문정왕후와 같이 불교를 비호하는 때도 없지 않으나 5백년동안 불교억압 정책은 도도히 이어졌다. 이같이 계속되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말미암아 신라 1,000년, 고려 300년 동안 꽃피운 찬란한 불교문화와 국민의 호국정신은 사라지고, 계속되는 당파싸움으로 결국은 망국의 길을 걸어서 임진왜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선조대왕 25년(1592) 4월 13일 새벽 짙은 안개속에 일본왜군 부산상륙 2~3개월만에 3도가 함락되고, 서해안 일부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가 파죽지세로 유린당했다.

선조대왕의 失政과 벼슬아치들의 부패, 그리고 끊일줄 모르는 사색당쟁으로 관군은 별반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가기에 급급했고 왜군의 방화․살육으로 국민들만 죽음의 들판에 내몰리게 되었다. 전국의 각 사찰로 몰려드는 피난민과 사찰보호를 위해 승려들이 각 지역의 각기사찰을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항전하다가 6월 이후 전국 팔도 승려들이 연대하여 봉기하게 되었다.

선조대왕은 왜군이 서울(한양)로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간다. 왕이 떠나면서 졸지에 왜군앞에 무방비로 버려진 백성들은 임금이 탄 수레에 돌을 던지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압록강아래 의주까지 피신한 선조는 아예 명나라에 몸을 의탁할 생각이었다. 이때 유성룡은 대가(임금수레)가 동토(우리땅)를 떠나면 조선은 우리것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유성룡의 만류 때문에 선조가 압록강을 못 건넌 것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압록강을 건너오면 한 건물 안에 유폐시키겠다하여 명나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이다.

절대왕권국가였지만 민심은 이미 떠났고 부패한 벼슬아치들은 자신보호에만 급급했다. 그러니 “병사를 소집해도 모이지 않았고 설사 군사로 뽑혔다 해도 모면하려는 이들로 가득했다”라고, 국보 132호 「유성룡징비록」은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장수들은 전장에 나가지 않는다고 부하들의 목을 베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장수들이 부하와 백성을 속이고 자기 가족들끼리만 도망친 예도 허다하다. 그러니 병사가 모일리 없고 또 전투를 그르친 장수들을 조정에선 문책도 안했다.

부패한 관군의 무력함에 반하여 승려들은 온갖 갖은 탄압속에서도 백성보호와 사찰수호를 위해 목숨을 던져 전쟁터의 최선봉에 서서 봉기함으로 의승군의 성립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결국 護法 護國하는 부처님의 正法사상은 꺼져가는 조선을 구하는 희망의 불씨를 당겼다. 선조는 영규대사(~1592)가 권율과 합세하여 500명의 승려를 이끌고 처음으로 청주성을 탈환하였다는 낭보를 받고 급히 서산대사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 淸虛 休靜.西山大師(1520~1604, 중국5가7종의 한종파인 임제종에 속하며 한국임제종인 보우대사의 7대손이다)에게 선조대왕은 “八道선교도총섭”으로 임명 승려들의 총궐기를 요청함.

이에 따라 서산대사는 제자 惟政四溟大師(1544~1610)에게 명하여 전국팔도의 승려들에게 호소문을 보내 의승군을 모집 총궐기를 결의한다. 明將 李如松이 사명대사를 칭송한 詩는 이렇게 상황을 전한다.

無意圖功利 專心學道禪 今聞王事急 摠攝下山嶺(공명과 이욕에 조금도 뜻이 없어 도 닦는데만 전심전력 하시더니, 나라의 급함을 듣고서는 신선이 총섭되어 산을 내려 오셨네.)

첫 전승을 가져오게 한 영규대사는 조헌의 700의병과 함께 800의 의승이 왜적3만과 맞서 싸우다가 전원이 옥쇄했다. 후일 유생들에 의해 영규대사의 800의승은 빠지고, 조헌의 700의병만 기리는 사당을 세워, 금산의 칠백의총으로 오늘에 이른다. 이같은 통한은 이루다 말 할 수 없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조차도 의승군을 연구하는 이를 찾기 힘들 정도이다.

승군은 조정의 아무런 지원없이 이름뿐인 “팔도선교도충섭”으로 죽음전쟁터 선두에서 나약한 관군을 대신하여 국난극복을 위한 최전선에서 전투의 주역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적의 보급로 차단, 정보수집, 평양성, 탈환작전, 형주대첩 및 선조대왕어가환도 호위까지 모두 의승군이 도맡았다.

이같이 최전선 전투에서 군수조달, 산성축조, 후방 경계, 임무까지 거의 모든게 의승군에게 의해서 이루어졌다. 유생과 벼슬아치들은 그 공을 가로채기에만 급급했다.

왜적 가등청정과의 평화회담 전개도, 벼슬아치나 유생들은 모두 하나같이 기피하여 할 수 없이 사명대사(惟政 1544~1610)가 그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고, 宣祖37년 (1604년) 강화사절로 4차례나 일본까지 건너가 국교를 재개하고, 일본에 끌려간 우리 동포, 포로 3500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등 후일 仁祖14년 丙子胡亂 등 조선조 5백년의 국방은 승군에 의해 지탱되었다 해도 관언이 아닐 것이다.

∙ 휴정의 제자 1000여명 그중 70명은 뛰어났다. 정관일선․유정사명․편양언기․소요태능, 그 중 靜觀日禪은 명종2년 (1547년) 15세에 출가해서 백하 선운스님에게 법화사상을 배우고 후일 서산대사의 법을 전해 받았다.

한편 서산대사의 1000여명 제자중 70여명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고, 그 증에 靜觀日禪스님은 승려들이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것은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고 보고 승단의 장래를 걱정하며, 사명대사에게 글을 보내어 “전쟁이 끝났으니 빨리 관복을 벗고 승가의 본분을 다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四溟도 이에 따랐지만, 조정의 거듭된 요구에 다시 2차, 3차, 4차일본에 건너가는 소임을 다하고 선조에 편지를 남기고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선조25년 4월 13일 (혹은 14일) 임란과 함께 흩어진 민심을 모으고 전승으로 이끌어 간것은 승려였으며 선조27년 지리산구성산성, 악견산성, 합천이숭산성, 서울 남한산성 등(승도 각성스님) 모든 노역이 승려에게 전위시키고, 아무런 대우없이 국토수호의 중임이 맡겨졌다. 전쟁 이후에도 산성축조 및 보수, 병영설치 주둔까지 ‘義僧입승제’등으로 국방에 필요한 모든 노역과 경계 임무 수행까지 승려에게 도맡겨졌다.

예컨대 사명대사가 선조 29년(1596) 조정에 북한산성의 필요성을 건의하였으나 이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병자호란의 참화를 입고서야, 승려들에게 오히려 강제하여 산성축조의 업무를 맡겼던 것이다. 국방의 정책입안에서 실천까지 이름없는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조선전기 연산군 때는 승려를 강제환속시켜 법란을 일으켰고, 명정조, 문정왕후 후원으로 잠시 선․교 양종의 승과가 부활했으나 곧 폐과되었다. 그러나 이때 잠시 부활하였던 승과에서 급제하였던 서산․사명 등에 의하여, 국가의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불교입장 (계율)에서 보면, 승려의 전쟁참여는 不殺生계율에 위배되는 일이다. 승려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호국불교는 식의 비판적 해석과 함께 정치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교리를 불교가 왕왕 이용되어 그 연장선상에서 승군이 조작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때의 의승군이 없었다면 나라를 잃고 말았으리란 점은 분명하다.

삼국․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가 국교로 받아들여 그 중심에서 지원을 받았지만, 조선시대의 의승군으로 전쟁참여는 어쩌면 탄압받는 불교승단을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면도 있었을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서산․사명을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국가존망의 위기에는 의용군을 조직하여 국방에 투신한 예는 인도, 중국 등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유한 역사적 사실이며 이것이 한국불교의 호국사상을 보여주는 산 증거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護國的 佛事와 외적퇴치, 그리고 국위선양과 民族安全을 보장해 왔다. 그 속에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 왔으며 民族魂으로 民族精神으로 자리잡아 왔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본래부터 구족해 있는 佛性을 깨쳐서 自利利他의 삶을 살게하는, 正法정신, 慈悲정신, 平等정신을 구현함에 있다. 正法 ․ 慈悲 ․ 平等 사상이 곧 護國 ․ 護民하는 護法의 原理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남․북 대치 현실을 극복해야만 할 것이다.

◎ 지도자의 나라 나라 지키는 교훈 7가지(솔선수범)

1. 衆智를 모으는 국민 합의(애국사상고취)

2. 국민의 화합과 단결(국론통일)

3. 법규를 지키는 질서(엄격한 법질서)

4. 원로를 존경하고 경청(민족의 정신문화 계승)

5. 부녀자를 소중히 함(윤리도덕 숭배)

6. 선조를 공경함(역사, 문화 계승 발전)

7. 성직자를 존경함(종교지도자의 모범) 명심할지어다.

騎虛堂 靈圭大師 행 장 (요약)

● 선조25년 4월 13일 왜적이 대거 침략,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관군은 후퇴만 거듭하고, 선조대왕은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길에 오르고, 왜적은 온갖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 영규대사는 밀양박씨이고, 이름은 영규이며, 호는 기허당이다. 공주 판서에서 출생하여, 서산대사를 은사로,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하여, 서봉사 등에서 주석한바 있으며, 계룡산 갑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주석하셨음.

● 임진왜란의 참혹상을 보고, 제일먼저 분연히 일어선 분이 기허당 영규대사 였다. 영규대사는 승병을 모을 적에 말하기를

“우리들이 일어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승군에 들어오지 말라”

......吾等止起 非有朝廷 命令 若有畏死僧 之心者 勿人吾軍......................

(조선실록 권29.선조25년 계축 1592.8. 25)

● 청련암에서 수도하시던 중, 이와같은 나라의 큰 변란으로 어가(선조 대왕)가 도성을 버리고, 피난 하였다는 소식과 왜구가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3일동안 통곡하며 애통해 하시다가, 충청. 전라. 지역의 승려들(1300여명)을 모아, 공주목사의 허락을 받아서 스스로 승병장이 되어 박춘무, 조헌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였다.(임진7. 29)

.......前略 烏夷之變 聖駕墦越 師撌甚三日哭 自薦爲將 州牧許項

壯而許之乃紏 義僧數百人....................以後僧侶千三百餘人...................

(조선실록 권29.선조25년 계축 1592.8. 25)

● “공주에 있던 승려 영규가 모집한 의승군 8백여명을 거느리고 함성을 지르며 돌입하자 諸軍이 승세를 타고 수급 51과를 참획하였는데 남은 적들은 밤을 틈타 도망을 쳤습니다.

.................有 公州僧人 靈圭率自募 僧軍八百餘各 發喊突入

諸軍乘勝 斬護首級 五十一顆 餘賊乘夜 逃活............

(조선실록 권29 선조 25년 8월 계축 1592년 8월 26일)

● “충청감사 윤선각이 아뢰기를 큰 적이 청주에 들어와 군사를 나누어 살육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僧名이 靈圭라고 하는 자가 있어서 그 중(僧)무리를 모아 모두에게 낫을 들리고, 호령을 매우 엄하게 하여, 적을 만나도 피하지 아니하면서, 청주성의 적을 공격하여 연일 서로 대치하였는데, 비록 크게 이긴일은 없으나, 또한 패배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적은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도망 갔습니다. 이 모두 僧 영규의 공이 옵니다” 하였다.

.......忠淸監司 尹先覺 啓曰 大賊入淸州 分兵搶殺 有僧名靈圭者 能聚其徒

階特鎌子 號令甚嚴 見賊不避 遂進政政淸州之賊 連日相持 雖無大勝

赤不退 賊遂葉城而去 階靈圭之功也......................

(충청감사 윤선각 장게曰⇒대동야승 권36. 기제사초 하, 대동야승 권52)

● 八月 十七日 갑진일 문열공 조헌과 건국 이래 가장 격렬한 전쟁터에서 문열공과 승군이 이만의 적병을 격파하니 실로 신선이라 하겠다.

.......八月 十七日 甲辰 文烈 錦山 十里 太宗以來 本國發 僧軍 二萬 擊破.....

<甲寺 영규대사 비문에서>

● 영규대사도 불가피하여 휘하 2,000여 승군을 거느리고 금산성 外에서 결진했다.

.........十八日 忠淸義僧 二千餘各........

● “듣자니 충청도의 의승병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곧장 진격하여 물러서지 않는다. 때문에 여러 곳에서 승리 하였다고 한다. 만일 승병으로 선봉을 삼았다면 공격이 거의 성공 하였을 것이다”

..............開忠淸 僧兵 不畏其死 直人不退 故到多處捿云 若以此僧爲先峰 則遮可成功矣...................(쇄미록 제2 癸巳日錄 11월6일 條)

● “27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과 의승장 영규등은 금산에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었다.

....二十七日 忠淸道 義兵將 趙憲 僧義將 靈圭等 討賊干錦山 敗績死之也.....

(난중잡록 선조 임진 8월條 대동야승 권 26)

● 비변사가 아뢰기를 조헌은 힘껏 싸우다가 진중에서 죽었고 의병 승장 영규도 승도들과 적진 속에서 싸우다 죽었으니 아울러 포장하여 증직시켜 주소서.

........具奉常儉正 趙憲 力戰陣亡 義僧將 靈圭 赤赴敵而死 竝爲襃贈............

(선조실록 권45)

● 승장 영규에게 “동지중추부사”를 증직하였으나 장게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전사하였음..

......贈 僧將 靈圭同知中樞府事.......

(조선실록 권30 선조 25년9월 무진 條 1592년 9월11일)

● “충청도 영규대사의 휘하에 의승군 승장 弘立과 性晴등이 있었고, 비변사 帳啓에는 담양 옥천사 僧 引俊 의승장이 지휘한 약200여명 승군과 僧 斗人 의승군이 이응수를 將으로 전투했고, 권율장군이 도성 수복을 위한 북상길에는 해남 대흥사에서 궐기한 승장 진묵당 處瑛이 행주상성 승리로 이끌고, 덕유산 영각사 의승도 함께 했다. (쇠미록 제 1임진일록 9월 14일조)

●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인 금산벌 싸움에서 조헌의 700의병과 영규대사의 800 의승군들이 치열하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니 감히 후퇴하여 살려는 자가 없었다.

왜적도 이날 밤에 경상도로 도망갔으니, 이때부터 왜적은 감히 호남지역을 침범하지 못하였으니 대체로 왜적의 군세가 크게 꺾였기 때문이다.

고증할 수 있는 참고 문헌

● 조선왕조 실록

● 해동 불교 원류

● 조선불교 통상

● 재조번 사지(대동야승권36)

`● 기제사 초하(대동야승권52)

● 쇄 미 록

● 임진왜란 승군고(이장희)

● 한국 사학 논총(1969.이홍직박사 화갑기념)

● 임진왜란과 불교 의승군(1992년 경서원, 김덕수편저)

● 영규대사 비문(정인보) 등 참고<계룡산 갑사>

三. 결어

기허당 영규대사를 비롯한 임진․정유왜란 때 천시와 악박속에서도 구국의 일념으로 살신성인 한 조선조의 의승군 스님네의 목숨 던진 무주상 보시 정신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고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나라, 이 겨레의 미래를 위해서 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특히 나라가 풍전등화의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을때 제일 먼저 일어선 기허당 영규대사와 그를 따르는 800여명 의승군의 청주성 탈환과 금산벌 싸움에서의 옥쇄를 우리는 가슴깊이 새겨야 한다.

조선조 오백년은 불교는 억압받고 고통받으면서도 나라가 위난에 처했을때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고귀한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기꺼이 나라와 백성의 희생을 대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이기심에 눈 먼 위정자나 정치지도자들은 당리당약에 빠져 나라가 위험에 빠지게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역사는 이같은 임진왜란때의 의승군 스님에의 위대한 희생을 잊고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 조헌의 七百 의총은 국가가 기억하고 그 보다 훨씬 공이 큰 영규대사의 800 의승은 잊혀지고 지금도 외면당해야 하는가? 이러고는 절대 역사가 바로설 수 없고, 나라의 미래가 안전하고 튼튼하게 발전 할 수 없다.

만시지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800 의승탑이라도 국가가 세워서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받들어 보은의 삶을 살고자 하는 한결같은 마음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발표자 소개>

◎ 재원 김덕수는 충북 청원 출생

○ 聽雨스님을 은사로 동진 출가 수행(운허, 탄허스님 등에게 공부)

○ 경남대학교 종교학과 졸업

○ 동국대학교 및 대학원 졸업

석사 논문 : “佛典上에 나타난 호국사상”

○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

논문 : “아함경上에 나타난 붓다의 교육사상”

○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

논문 : “로마 교황청의 조직 행정”

○ 원광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박사학위논문 : “조선의승군 思想史 연구” <철학박사>

◎ 論著

○ 육군법요집 및 국군법요집 최초 발간

○ 군인 정신이 샘 (지휘관 정신훈화 교육용)

○ 자아발견(홍법원 간행)

○ 불교의 철학 사상(평화당인쇄소)

○ 원효대승 기신론소 번역

○ 불전상에 나타난 호국사상

○ 불교의 경전上에 나타난 전쟁관

○ 임진왜란과 불교 義僧軍(경서원 발간)

○ 고려 승군에 관한 소고

○ 임진․정유․왜란 승군 연구 의의와 과제

○ 六祖 혜능의 禪思想과 壇經의 역사적 意味

○ 천수경 해설

○ 금강경 해설 외 다수

◎ 경력

○ 군승 2기로 임관, 국방부 군종 실장(불교계 최초)

○ 제22대 육군 군종감(불교계 최초)

○ 6군단 不二寺, 월남 십자성 불광사, 부산군수사령부, 금련사, 삼무사, 광명사, 육․해․공․계룡대 호국사, 자운대 자운사 창건

중앙법당, 1군법웅사, 3군 선봉사 주지, 1993년 5월 명퇴 전역

○ 세계 불교도 우의회(W.F.B) 한국이사

○ 한국 종교사학회 부회장

○ 충남대학교, 원광대학교 겸임 교수

○ 전북대학교 대전대학교 대학원 강사

○ 현재(사) 대한생활불교 이사장

○ 도솔사 창건(부모살던 집을 절로)

○ 불교어린이집, 외국노동자의집 운영

○ 계룡산에 1만평 부지 마련, 국제수련원 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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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