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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통혁당(북한지하당) 출신 韓明淑 연구

남편은 통혁당 간부로 장기 복역, 韓씨는 좌익사건으로 두 차례 구속. 변함 없는 親北反美 행태.


1. 통혁당(북한지하당) 출신 한명숙의 변함없는 從北反美



천안함 폭침 뒤 정부를 비판

4.11총선 비례대표 당선자인 韓明淑(한명숙) 前 민주통합당 대표의 言動(언동)에서는 대한민국 정통성에 대한 인식을 찾기 어렵다. 그녀의 일관된 반미·친북적 주장은 종북적 이념체계와 체험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물일 것이다. 韓 씨는 공직에 있을 때는 물론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대한민국적 가치를 공격하고 북한 정권을 감싸며 동맹국을 비난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韓 씨는 2010년 3월26일 천안함 폭침 이후 같은 해 6·2 서울시장 선거 후보로 나서서 비난의 초점을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에 집중해왔다. 그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10년 민주정부가 구축한 평화를 부정하고 있다…(중략) 부정할 뿐 아니라 전쟁불사라는 전쟁 먹구름을 몰고 오고 있다”, “46명의 꽃다운 청춘을 차가운 바다에 수장시키고…(중략) 선거 방해로 꽃다운 청춘의 목숨을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韓 씨의 이 같은 주장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기간 69억 5000만 달러어치의 금품을 북한정권에 건네주고도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2006년 10월9일 핵 실험 등 북한의 도발이 끝없이 계속돼 왔다는 사실과 배치되는 것이다.

韓 씨는 북한이 핵보유 선언(2005년 2월10일)을 하자 “북한 나름대로의 국익이 있기 때문”이라고 감싸며 “미국에 對北체제보장과 경제 지원을 요청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이듬해 북한이 핵실험(2006년 10월9일)을 하자 “핵을 가지고 어느 나라를 전시적인 도발을 하려는 게 아니다”, “미국의 제재와 일관된 금융압박이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며 北을 옹호했다. 햇볕정책으로 북한이 남한의 지원을 받은 뒤 핵무기를 만들었음에도 오히려 “김대중 前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통해 넓혀 오신 남북 간 화해협력의 큰 길이 더욱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主敵(주적)인 핵무장한 북한을 감싸고 同盟(동맹)을 욕하며 主敵을 돕자는 주장들이었다.

미국이 김정일 비판하면 발끈

미국이 북한의 위조지폐 제작 문제를 제기하자, 그녀는 2006년 2월13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미국은 6자회담의 성사 이후 모처럼 마련된 평화정착의 기운에 증거 없이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의 僞幣(위폐) 제작은 확인된 사실임에도 ‘증거 없이’란 비난을 했다. 노무현 정권 때인 2006년 韓美정보당국은 “북한이 지폐를 제조하는 곳에서 100달러 위조지폐인 슈퍼노트를 생산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韓 씨는 미국의 김정일 비판에 대해서도 적대적 반응을 보여 왔다. 콘돌리자 라이스 美 국무장관은 2005년 6월 북한을 “暴政(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북한 정권의 성격은 자명하다”고 말하였다. 한 씨는 같은 달 21일 “라이스 장관의 발언은 모처럼 조성된 6자회담 재개의 긍정적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적절한 행동”이라며 “韓美외교채널을 통해 적극적 시정을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韓 씨는 그 이튿날에도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은 6자회담 복귀 자세를 갖춘 북한에 또다시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자, 韓美정상 간 합의정신에도 반하는 것”이라며 “국내적으로도 장관급회담 북한 대표단이 들어올 때 보수단체가 자극적 플래카드를 붙이고 시위를 했는데, 우리 국민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비난했다.

韓 씨는 성실한 한국인이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온 인물이다. 그는 “국보법은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 역사를 바로 이끌고자 하는 양심세력을 무참히 잘라냈다”(2004년 9월6일)며 2004년 10월 국보법 폐지안 공동 발의에 나섰고, 2006년 3월24일 총리 지명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국보법 폐지 당론에 찬성하는 데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한명숙-박성준 夫婦 연루 통일혁명당 사건

한명숙 씨는 1968년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 朴聖焌(박성준) 씨와 함께 실형을 선고받았다. 박성준 씨는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韓 씨는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 형을 받았다.

통혁당 사건은 1968년 8월24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다. 통혁당 관련자들은 金鍾泰(김종태)를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하여 金瓆洛(김질락)·申榮福(신영복) 주도의 ‘민족해방애국전선’과 李文奎(이문규)·李在學(이재학) 주도의 ‘조국해방전선’ 아래 다양한 서클·조직·학사주점 등을 조직, 공산혁명을 획책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이 합법·非합법, 폭력·非폭력의 배합 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 봉기함으로써 共産(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해왔다고 발표했다.

A4 용지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통혁당 관련 판결문엔 이런 대목이 있다.

<통일혁명당이 북괴의 무력남침에 대비한 사전 공작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유격전을 기도하여 무력행사를 준비하였으며, 과거의 남로당 조직을 부활시킨 조직체일 뿐만 아니라 지식층의 청년을 포섭하였으며, 잡지 반포, 黨小組(당소조)의 조직, 당원에의 적색사상 교양, 데모 조정, 해안선 답사, 유격전술요원 입북, 간부진의 빈번한 入北(입북)과 국가기밀 누설, 거액의 공작금 지원 등이 있은 사실…(하략)>

주범 김질락의 自認, “北지령받는 지하당이 분명”

통혁당의 기본성격은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공산 지하당이었다. 1967년 5월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越北(월북)해 조선노동당에 입당했고, 당원 이진영·오병헌은 1968년 4월22일 월북, 교육을 받던 중 19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정착하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김종태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美貨(미화) 7만 달러, 韓貨(한화) 3000만 원, 日貨(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지령 방송인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 수령을 위한 揚陸(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띄고 있었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김종태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하기도 했다. 북한 753부대 소속 무장공작선은 1968년 8월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軍警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이승탁·김일룡 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는 김종태를 구출해 월북시킨 뒤, 북한 정권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주범 중 한 명인 김질락은 옥중 遺稿(유고) 《어느 지식인의 죽음(원제: 주암산)》(행림서원 刊)에서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 地下黨(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 상황과 활동 상황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 됐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쓴 바 있다.

그는 같은 책에서 越北 당시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노동당에 “우리 통혁당은 남조선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地下黨(지하당)임을 자처하고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각계각층에 대한 군중공작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적고 있다.

‘남편은 북한지하당 小組責, 부인은 小組員’

강인덕 前 통일부 장관은 자신의 저서 《공산주의와 통일전선》에서 조선노동당과 통혁당은 지령을 내리고 받는 중앙당과 지하당 관계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통일혁명당은 출발부터 북한 中央黨(중앙당)의 하부조직으로 발생한 것이다. 통일혁명당 창건의 필요성, 그리고 조직적 사상적 준비는 모두 북한 조선노동당이 계획한 것이다…(중략) 당원은 제각기 독립된 인자로서 핵심을 유지하며 평양에서 발신하는 지령에 따라 단독으로 활동하면서 그 경과를 중앙당 대남사업 담당부서에 보고하는 형태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발표에 따르면, 韓 씨의 남편 박성준 씨(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4년, 25세)는 1967년 6월 신영복에게 포섭된 ‘당 小組責(소조책)’으로서 妻 한명숙 및 朴○○, 金○○ 등을 小組(소조)로 포섭했다. 그는 “서울 상대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는 것이다.

공안전문가 A 씨는 당 小組責과 小組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의 지하당에서 입당한 당원 중 최소 조직을 細胞(세포)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3명의 당원이 1개 세포를 이루며, 3개 세포가 1개 小組(소조)를 이룬다. 小組와 細胞는 지하당 활동의 최소 조직을 가리킨다. 지하당의 小組와 細胞,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간부인 당 소조책이었다는 것은 당연히 지하당에 입당한 당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당시 중앙정보부는 韓 씨 등 小組를 ‘통혁당 당원’으로, 박성준 씨와 같은 당 小組責을 ‘통혁당 간부’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朴 씨에게 중형을 선고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박성준 씨에게 국보법 위반, 내란음모,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공산당 조직원이었다는 이야기

당시 韓 씨에 대한 통혁당 사건 관련 판결문 일부는 이러했다.

<북괴는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反국가단체로서, 북괴가 간행하는 표현물이나 기타 사회주의 서적을 반포하는 행위는 북괴가 시도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행위로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피고인 한명숙 등은 박성준으로부터 북괴 간행 ‘청춘의 노래’를 빌려 받고, 박성준의 부탁으로 엥겔스가 쓴 ‘사회사상총설’ 1권을 받아 그 책에 있는 ‘공산당 선언’을 노트에 필기하고, 박성준의 지시로 이○○, 최○○와 같이 읽고 反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하는 한편 찬양·고무하는 표현물을 취득 복사, 보관, 반포하여 북괴를 이롭게 했다.>

중앙당인 조선노동당의 통제를 받았던 지하당 통혁당은 당연히 共産(공산)혁명조직이었다. 김질락의 手記(수기) 중 1965년 11월초 통혁당 준비위원회 결성 당시 책임자 김종태의 제안 설명 중 일부를 인용한다.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反帝(반제)·反봉건·反식민의 민주사회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 우리의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 공산당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 “남반부를 불법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美帝(미제)와 그 走狗(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중앙당의 지도 아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 창당을 선언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이 낭독됐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질락은 1968년 12월18일 공판정에서도 “그 동안 공산주의를 위해 싸워왔으나 이제는 공산주의자로서 죽고 싶지 않으며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죽고 싶다”고 후회했었다.

평양에 김종태 거리

통혁당 사건의 주범인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사형을 당했고,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북한은 통혁당 사건 이후 연루자들에 대한 영웅화 작업에 나섰다.

1969년 1월25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는 김종태와 이문규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종태가 1969년 7월10일 사형집행을 당한 후, 그에게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같은 해 7월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7월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김종태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區(구)분대·區분대당위원회·공업기업소·협동농장·교육문화·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 내각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 외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내리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 사범대학’으로 改名(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김종태 거리’가 생겨났다. 1969년 11월6일 이문규가 사형을 당하자 역시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그러나 죽기 직전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뉘우친 김질락은 변절을 이유로 외면당했다. 살아남은 최고위급 통혁당 간부인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88년 특사로 출감했다. 韓 씨는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이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아내로서 옥바라지 한 것뿐, 알지도 못하고,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밝혀왔다.

출옥 후 박성준씨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노동당이나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포섭된 적도 없다(2006년 4월3일 동아)”,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오마이뉴스)”,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조선)”, “신영복 선생으로부터 책을 빌려 받은 것이 전부인데 15년형을 받았다(2006년 3월25일 문화)”고 밝혔었다.

전향 간첩 김용규氏 증언

통혁당 사건에 연루, 복역한 후 출소한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박성준씨처럼 통혁당이 북한의 노동당과 무관한 조직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와 관련, 전향한 거물 간첩 출신의 金用珪(김용규)씨는 자신의 저서인《소리없는 전쟁》과 《時效人間》을 통해 통혁당 조직이 북한 노동당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증언했다. 金씨는 두 책에서 “통일혁명당은 1961년 12월, 전남 무안군 임자도에서 면장을 지냈던 지방유지 최영도가 甥姪(생질)인 남파 공작원 김수영에게 포섭되면서 시작됐다”고 밝히고 있다.

최영도는 세 차례에 걸쳐 평양을 다녀오면서 노동당에도 입당을 한다. 전남도당 책임자가 된 최영도는 지하당 조직망을 확산하는 한편 과거 남로당에서 전남도당위원장직을 맡았다가 수사기관에 체포돼 10년형을 살고 나온 정태묵을 다시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북한은 최영도의 조직을 전라남도 지도부의 正(정)조직으로, 정태묵의 조직은 후보조직으로 二元化(이원화)시켜 관리하며 조직을 확산해나갔다. 노동당 연락부로부터 서울의 유력 인사를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은 최영도는 생질인 김수상을 내세워 김종태를 포섭하기로 한다.

反정부 감정을 갖고 있던 김종태는 오히려 본인이 더 적극적으로 북쪽과 선을 닿게 해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포섭은 쉽게 이루어졌다. 평양으로 밀입북한 김종태는 간첩교육을 받는 한편 金日成과 만나기도 했다.

간첩 교육을 받은 후 다시 남한으로 돌아온 김종태는 김질락, 이문규, 이진영, 임진영 등 친척, 친우 등 측근들을 손쉽게 규합해 통혁당 서울시 지도부를 구성했다. 金씨는 자신의 책에서 북한이 통혁당 재건을 위해 계속 공작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73년 7월에는 자신이 직접 통혁당 재건 공작계획에 참여했다는 사실도 함께 적고 있다. 포섭대상은 과거 김종태와 연계되었던 인물들이었다.

통혁당 재건 계획과 관련해 김용규 씨는《소리없는 전쟁》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는 북한의 공작망이 우리 사회 어느 곳까지 깊게 뻗쳐 있는지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낮과 밤을 이어 지시문을 모두 해독하고 보니 그것은 그동안 평양의 공작팀들이 각각 관리하고 있던 일부 현지조들과의 접선암호와 특정 조직원들의 기록 대장이었다. 기록대장에는 발전소, 전신전화국 등 요충부문에 점 형태로 특별 관리하던 개별적 대상도 있었고, 2∼3명 또는 4∼5명으로 구성된 조직도 있었다. 그 중에는 최근에 구성된 조직도 있고, 1960년대 초·중반에 布置(포치)된 교수와 박사들로 구성된 조직, 언론계·종교계·公共기관, 그리고 각 단체에 뿌리박은 조직들도 있었다.”

北노동당 연락부, 왕재산 간첩단 사건에도 관여

통혁당을 관리했던 북한의 조선노동당 산하 연락부(舊대외연락부, 現225국)는 남파 간첩 침투, 지하당 구축 등을 주 임무로 하는 대남공작 부서다. 연락부는 공작원을 남파시켜 남한에 지하당을 만든 뒤, 혁명 가능성이 커졌다고 판단되는 시기에 지하당을 매개로 남한 체제를 전복하는 것을 활동 목표로 삼고 있다. 지하당 구성원으로 남한 내 政界(정계)·군부·사회단체 등 각계각층 인사를 포섭해 국가기밀을 수집하는 한편 북한 체제와 김정일 一家(일가) 선전 등의 책임을 맡기고 있다.

체제에 위협이 되거나 비판에 앞장서는 요인을 암살하거나 테러하는 임무도 띠고 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對南(대남)사업을 관장한 후 대외연락부는 남한지역을 관장하던 10개 지역 담당과를 4개 지역과로 통폐합하고 그 대신에 4개의 남조선 지도층 고위인사 포섭당담과를 신설했다.

연락부 소속의 대표적인 공작원으로는 ▲남한출신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오른 거물간첩 정경희를 비롯, ▲92년까지 지하당인 남조선로동당을 만들어 김낙중 등을 관리하다 북한으로 도주해 2000년 사망한 이선실, ▲95년 10월24일 부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검거된 ‘부여간첩’ 김동식, ▲15대 大選(대선)직전 적발 체포된 ‘울산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자살), ▲98년 12월까지 반국가단체인 민혁당을 지도하다 여수 앞바다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돌아가다 해군 광명함의 포격을 받아 반잠수정이 격침됨으로써 사망한 대외연락부 5과장 윤택림 등이다. 연락부와 연계된 남한 내 지하당 조직은 통혁당과 함께 1992년 大選(대선)을 앞둔 시점에 적발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 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에서 밀파된 거물급 간첩의 지휘를 받아 1995년 적화통일을 목표로 암약한 남한조선노동당 가담자 95명을 적발했다. 이외에도 1994년 구국전위 사건, 1999년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2006년 일심회 사건, 2011년 왕재산 간첩단 사건에도 연락부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박성준, “미국의 한반도 전쟁책동 막고 평화 지켜내야”

한명숙 의원의 남편 박성준 씨는 출소 후에도 이념적 확신을 버렸다는 증거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는 이른바 反戰(반전)평화운동에 열심이다. ‘이슬람 지하드’(聖戰)는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고 정당화하기도 했다. 9·11테러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다(以上 ‘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논문 中)”고 말했다.

일부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9·11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 ‘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중략) 미국이 무슨 짓을 했기에 테러리스트들이 그토록 처참한 보복을 생각해내게 되었는지, 그들의 사무친 한과 절망과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합시다.”

박성준 씨는 미국의 이라크전은 “군수산업의 이익을 도모하고, 석유이권과 중동패권을 노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 전쟁이 아닌 침략(2003년 3월25일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으로, 아프가니스탄전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고 그 나라의 자연을 마구 짓밟고 완전초토화하는 것(2002년 3월21일 著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 등)”이라 비난했다.

그는 91년 걸프전에 대해서도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괴해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백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 등 병으로 죽어갔다(‘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등)”고 주장해왔다.

박성준 씨는 특히 미국의 對北제재가 한반도에 전쟁을 부른다며 북한정권의 不法행위를 제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펴왔다. 2002년 경 쓴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 는 글을 일부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설마 하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북한 민중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중략) 부시대통령과 미국정부에게 화해와 평화를 향한 우리 겨레의 역사적 행보를 방해하지 말라고 단호히 경고하자…(중략) 만에 하나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덮쳐온다면 우리는 휴전선 일대에 평화의 천막을 치고 평화를 호소하는 갖가지 이벤트를 벌인다.”

북한정권의 反인륜 범죄는 비판 않아

그는 같은 글에서 “우리의 평화와 우리의 안전을 남의 손, 外勢(외세)·강대국 미국에 맡겨놓고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미국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에 맞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며 미국의 한반도 전쟁책동을 막고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전론 또는 평화론의 외양을 띄고 있는 박성준의 ‘反美’ 노선엔 평화를 부수는 북한의 테러나 도발, 특히 핵개발에 대한
비판이 없다. 김일성·김정일의 700만 민족학살이나 정치범수용소·공개처형, 탈북자 강제송환과 영아살해·강제낙태 등 끔찍한 만행에도 침묵한다.


학살자들에 대한 그의 관대한 잣대는 후세인에게도 적용된다. 후세인은 중동의 屠殺者(도살자)로 불렸다. ▲1987년 18만의 쿠르드족 독가스학살 등 수십만의 자국민을 처형해왔고 ▲2000년 대통령 및 친인척 비방 시 ‘혀 절단刑’ 등과 전기고문·눈알 뽑기·강간 등을 자행해왔다. ▲후세인의 폭압을 피해 이라크 인구 2300만 명 중 약 400만 명이 해외로 도피했다. ▲1980~1988년 이란과의 전쟁, 1990년 쿠웨이트 침공 등 전쟁과 失政(실정)으로 세계 석유 매장량 2위인 이라크는 1000억 달러 빚더미에 올라섰다.

박성준 씨는 기독교 한 지파인 퀘이커 신도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 퀘이커 공동체 ‘펜들힐’에서 “평화학”을 공부했다.

그는 2006년 부인이 국무총리로 있을 때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운동에도 참여했다. 朴 씨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비폭력평화물결’은 2005년부터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 차원의 주요 활동에 참여했었다. "비폭력평화물결’은 한 총리 취임후인 2006년 5월 2일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 주요 범대위 단체들과 함께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보장 위한 평택지역 강제수용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비폭력평화물결’은 벨기에에 본부를 둔 비정부기구 ‘비폭력평화(Nonviolence Peaceforce)’의 한국지부로, 박 씨가 도입했다.

한명숙과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북한 발행 불온책자 및 공산주의 사상학습

한명숙 민통당 前 대표는 통혁당 사건 이외에도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反共法(반공법)을 위반, 징역 및 자격정지 각 2년6월을 선고받았다. 크리스찬 아카데미(現 대화문화아카데미)는 1965년 이른바 ‘자주적인 노동운동 활동가’ 양성을 목표로 조직된 기독교계 단체로 알려져 있다.

당시 구속된 인물로는 한명숙 前 대표를 비롯, 이우재(前 한국마사회 회장), 정창렬(前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장상환(前 민노당 정책위원장), 황한식(現 부산대 경제학과 교수), 신인령(前 이화여대 총장), 김세균(現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등이 있다.

중앙정보부(中情)는, 이우재의 경우 교인이 아니면서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침투, 농촌사회분야 간사인 다른 5명의 인물들과 공모해 대한민국 정부의 정치-경제 등 사회제도를 부정해왔다고 발표했다. 통혁당 사건에도 관련됐던 이우재는 남한 체제를 변혁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실현한다는 목적 아래 불법 용공(容共)서클을 비밀리에 결성, 북한의 평양방송과 통혁당 목소리 방송을 듣고 이를 학습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북한에서 발행한 마르크스-레닌 유물사관 및 정치-경제학과 과학적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혁명전술 등의 내용이 담긴 《현대사상연구》 등 50여 점의 각종 불온 책자를 탐독하는 등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했으며, 反국가단체인 북한의 체제와 노선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들은 ▲단선연계(單線連繫: 상하 간 두 사람만 알고 그 이상의 상하·좌우는 모르게 조직된 일직선형의 조직) 방법으로 동조세력규합 ▲동조자 포섭 및 조직 확대를 위한 자금조달 ▲서클조직의 비밀유지를 위한 행동강령 등을 제정-결의하고, 농촌-도시노동자와 여성사회 등에 침투 조직 확대를 기도했다고 중정은 밝혔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설립자 강원용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설립한 인물은 姜元龍(강원룡) 목사(1917년 10월30일~2006년 8월17일)로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 출신이다. 姜목사는 1931년 차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만주 용정 중학으로 진학, 이곳에서 문익환(문성근 現 민통당 최고위원 父親)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1940년 일본의 명치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전도사 활동을 했다. 1945년 8월15일 광복 이후 귀국, 서울로 돌아와 경동교회를 설립했다. 1946년 이후 김규식과의 인연으로 김규식-여운형 등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7년 여운형이 한지근에게 암살된 뒤 김규식 등이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민족자주연맹 기획담당 책임자로 참여했다. 1948년 한신대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1949년 김재준 목사의 후임으로 경동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1954년 캐나다 마니토바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1956년)을 거쳐 1957년 미국 뉴스쿨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했다. 195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전신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를 설립, 산업사회와 종교 등의 주제로 강의, 세미나, 학술대회 등을 개최했다. 이후 종교간 대화, 페미니즘 운동, 노동 운동 등에 나섰다.

姜 목사는, 노무현 정권 이후 1967년 발생한 민비련(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을 비롯, 1974년 인혁당 재건위(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등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자 이들 사건에 대해 “100% 사실이라거나 100% 조작이라고 강변(强辯)하는 것은 양쪽 다 똑같은 흑백(黑白)논리”라고 주장했었다.

현재 대화문화아카데미로 단체 명칭이 바뀌어 운영되고 있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에는 남재희(前 노동부장관), 송월주(前 조계종 총무원장), 윤후정(前 이화학원 이사장), 이어령(前 문화부장관), 이홍구(前 국무총리, 중앙일보 고문), 정의숙(前 이화여대 총장), 정원식(前 국무총리) 등의 인사들이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강원용 목사가 배출한 人脈

강원용 목사가 설립한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중간집단 양성교육’을 통해 각계각층에 페미니스트 리더들을 배출했다. 여기서 ‘중간집단’이란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지며 民衆(민중)의 편에 서서 힘을 조직화·동력화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양극화 사회의 화해와 통합에 기여하는 세력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이 이론은 한국 사회를 ‘가진 자’와 ‘못가진자’의 이중 구조로 보고 있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주로 노동, 여성, 농민, 학생, 교회단체 회원을 수강생으로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강사로 참여하면서 합숙 세미나와 강의 등 정규교육과 함께 현장 방문 및 교육, 소그룹 운용, 활동평가회로 후속교육을 했는데, 이 교육의 간사로 활동했던 대표적 인물이 바로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이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가장 활동이 왕성했던 70년대 중후반까지 아카데미 교육을 이수한 여성들이 여성 운동의 큰 흐름을 형성했다.

<주> 아래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주요 여성 인사들의 명단이다.

■정계: 한명숙 前 민주통합당 대표, 김상희 민주통합당 원내부대표, 김희선-김경천-이미경-홍미명-이은영-이경숙 의원, 최순영 前 민주노동당 의원, 이영순 前 민주노동당 여성위원장, 이영순 前서울시 의원.

■학계: 신인령 前이화여대 총장, 장필화 이화여대 교수(여성학), 이상화 이화여대 교수(철학), 김경애 동덕여대 교수(여성학), 손덕수 前대구효성가톨릭대 교수(사회복지학).

■기타: 이정자 녹색미래 공동대표, 서명선, 박인덕 前한국여성개발원 원장, 김근화 (사)여성자원금고 이사장, 이현숙 前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차명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이사장, 신혜수 성매매추방범국민운동 대표, 정강자 前 여성민우회 대표, 김윤옥 前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이종경 前 대한YWCA연합회 사무총장, 차경애 대한YWCA연합회 실행위원, 김금래 동부여성발전센터 소장, 최연수 前 크리스찬아카데미 바람과 물 연구소 관장.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前 정보부 수사관 증언

韓 씨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와 관련해 2001년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韓 씨는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을 중앙정보부의 고문 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해왔다. 2006년 3월24일 당시 총리로 지명된 韓 씨가 국무조정실 홈페이지에 올린 ‘한 총리 지명자의 삶 ④ 고문과 절망’이라는 글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때의 두려움으로 손이 떨린다. 나는 정말, 정말, 정말 그 모멸의 순간이 영원히 내 기억에 지워져 고문이라는 범죄를 알기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가고만 싶다. 나는 아직도 가끔 하나님께 나를 고문했던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아무리 짓이겨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고문의 기억은 여전히 내 상념의 어두운 한 모서리에 우두커니 숨어 있다……

온 몸이 꽁꽁 묶인 채 밤새도록 毆打(구타)를 당했다.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었고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온 몸은 피멍이 들어 부어올랐고 부은 피부는 스치기만 해도 면도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귓전에 울려오는 욍욍거림 속에 나를 고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아스라하게만 들려왔다. 셀 수 없을 만큼 정신을 잃었고 차라리 그 순간이 행복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고문의 고통보다 더 크게 나를 짓눌렀다. 그들이 나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빨갱이’임을 실토하라는 것이었다. 아! 나는 패배했다. 나의 믿음과 나의 각성과 나의 정의감과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진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인간의 믿음은 얼마만큼 우습고 허약한 것인가?>

당시 정보부 수사관, 韓 씨에게 고문 주장 사과 요구

2006년 4월17일 국회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당시 한명숙 대표는 열린우리당 이목희 의원이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당시 고문한 당사자들을 근래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개인의 미움이 아니라 민주화 과정에서 당한 것”이라며 “이미 다 용서했으며 과거의 일을 되살리지 않고 미래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1년 6월에는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에 대한 韓 씨의 고문 조작 주장을 반박하는 전직 정보부 수사관의 증언록이 나왔다.

남산, 더 비하인드 스토리》(시사문화사 刊)라는 제목의 책으로, 전직 중앙정보부 對共수사국 수사관으로 근무했던 이기동 氏의 회고록이다. 李 씨는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이 당시 판결문에 판시됐듯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했다”고 적었다. 고문 논란과 관련, 韓 씨의 피해 주장에 대해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이기동 氏는 1979년 2월 당시 수사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수석간사 이우재, 신인령, 한명숙 등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농민·근로자·청년·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중간집단이론’이라는 사회주의 이론 강의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부정하고 이를 변혁하게 함으로써 사회주의 실현을 획책한 것으로 보고 용공혐의로 이들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한명숙은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이우재·신인령 등과 합류했고 그들 간사 3인은 그곳 숙소 등에서 학원 수강생들에게 사회주의 이념교육 방향 등에 대한 철저한 토론을 통해 결속했다”고 적었다. 이기동 씨는 고문 조작 논란도 다루고 있다. 필자가 전하는 법정의 모습은 이랬다.

<드디어 내가 담당했던 피고 한명숙의 차례. 그녀는 진술 도중 갑자기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 포승으로 묶인 두 손을 좌우로 흔들며 재판부를 향해 말했다. “제가 정보부 남산 지하실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그때 고문당한 저의 좌측 어깨를 좀 봐 주십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재판장이 그녀에게 “어깨를 어떻게 고문당했다는 말이오?”라고 묻자 그녀는 나를 향해 “저기 검사 밑에 앉아 있는 내 담당 수사관(필자인 이기동)이 담뱃불로 내 왼쪽 어깨를 지져 상처가 있으니 한 번 보십시오”라고 하지 않는가? … (중략)

그로부터 20분 후 서울대학교 병원 외과 과장 심 박사가 도착했고 심 박사는 법정에서 그녀, 한명숙의 요구대로 어깨를 들추고 현미경 비슷한 것으로 상처를 살피고 어깨를 방청석을 향해 보이며 “여러분 보이세요? 이 조그마한 흉터가 최근에 담뱃불로 지진 상처 같습니까?” 하고는 다시 재판장을 향해 “이 흉터는 이 사람이 3~4세 때 종기가 생겨 난 흉터자국으로 보입니다. 이상입니다”라고 말했다. … (중략)

아니, 고문이라니! 그것도 내가 담뱃불로 지졌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중략) 혹시 이 글을 읽는 분이 나에게 ‘그때 그녀를 고문했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 한 차례도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했거나 또 어떤 심한 언동이나 다른 방법의 고문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하늘이 나에게 벼락을 내릴 거다’라고 답하겠다. 만약 그녀가 당시 거짓말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신이여 그녀에게 천벌을 내려주옵소서 하고 빌겠다.>

필자는 “오늘날 시대가 좋아(?) 대한민국에서 국무총리로까지 출세한 그녀는 꼭 그때의 ‘담뱃불 고문’ 주장이 허위임을 만 천하에 밝히고(어떤 방법으로든 이 사회에 정정당당하게) 필자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라며 韓 대표의 사과를 촉구했다.
필자는 또 “상호 변호인단을 구성, 확인하고 그 당시 지하 심문실을 완벽하게 녹화한 필름이 있을 것이니 국정원에 요청하여 사회정의 구현 차원에서 국회 청문회를 열어 심문실의 전 과정을 만천하에 공개토록 하자”며 이른바 “좌파·좌익의 허위 고문 주장에 대응키 위해서라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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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