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ject 2008.5.10. 조선-동아를 포함한 일간지들에 참으로 해괴한 광고가 실렸다. 600년 가까이 전해 내려오던 역사를 어느 문중이 중심이 되어 백주에 찬탈했다는 데 대한 호소문이었다. 사6신이란 단종을 즉위시키고 세조에 반대하여 충신으로서의 절개를 지키다 1456년 무지만 고문을 받아 돌아가신 6분의 충신들이다. 이들은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였다. 우리는 이 빛나는 이름들을 초등학생 때부터 달달 외웠다. 그런데 1977년 9월 22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위원들에 의하여 역사 뒤집기가 감행 되었다 한다. 유응부 선생을 사육신 지위에서 박탈하고 대신 김문기로 대체시켰다고 한다. 김문기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선조였다 한다.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시해하기 전에 역사를 찬탈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사육신의 묘역은 노량진에 있다. 여기에 김문기의 허묘가 들어서면서 사6신묘가 사7신묘로 둔갑해 있다. 뿐만 아니라 노량진에 있는 의절사와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대왕 사관에도 “가짜 사육신” 김문기의 위패가 사육신 자리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노량진 사6신묘는 1972년5월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돼 있다. 따라서 이 역사 찬탈행위는 역사편찬위원회와 문화재관리청이 공동으로 주도한 것이 된다. 이 두 기관은 국가나 사회로부터 소위 전문성을 갖춘 기관으로 인정되어 관심의 사각지대가 되어 있다. 역사편찬위원회와 문화재관리청이 이와 유사한 역사변조를 자행한 사례는 여러 개가 있는 것으로 안다. 후손들이 힘이 없으면 역사마저 지키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국가는 역사를 찬탈하고 후손들은 역사를 지켜야 하는 나라, 이 두 기관에 대한 국민의 감시가 절실히 요망되는 것이다. 아래는 2008.5.10.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에 난 신문광고 내용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국민에게 사과해야합니다. 국민여러분 ! 1977년 9월 22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위원들에 의하여 역사 뒤집기가 감행 되었습니다. “진짜 사육신” 유응부 선생을 사육신 지위에서 박탈하고 대신 “가짜 사육신” 김문기로 (김문기는 당시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씨의 선조였다고함) 대체 시키는 역사 날조극이 자행되었습니다. 이 일로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는 “가짜사육신” 김문기의 허묘가 들어서 있습니다. 뿐만 아니고 노량진에 있는 의절사와 강원도 영월에있는 단종대왕 역사관에도 “가짜 사육신” 김문기의 위패가 사육신 자리에 떡하니 안치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고 기가막힌 일입니다. “진짜사육신”은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이 여섯분 뿐입니다. 이 여섯분은 정조대왕이 어정배식록에서 남효온 선생의 “육신전”을 그대로 추인한 것입니다. 정조대왕이 인정하지 않은 김문기는 어떤 명분과 근거를 끌어 댄다해도 그것은 날조된 “가짜 사육신”일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후대의 사람이 선대의 사람이 정해 놓은 사육신의 명단을 함부로 임의대로 바꿀수 없습니다. 천도는 무심하지 않으사 당시 (1977년9월22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담당 편사연구관으로 김문기 사육신 날조회의에 가담했던 김후경(생육신 김시습 선생의 직계후손)씨는 2007년음6월8일 사육신 유응부 선생 사당을 찾아가서 “죄를 청하는 고축문”을 읽으며 이렇게 양심 고백을 했습니다. -양심 고백문 생략- * 이 양심 고백에서 밝혔듯이 강압에 의한 역사날조는 전면 무효이며 따라서 노량진의 사육신 묘에 허묘로 봉안 되어있는 가짜 사육신 김문기 묘는 당장 철거되어야 하고 또 노량진의 의절사와 강원도 영월 단종역사관에 안치된 가짜 사육신 김문기의 위패도 이역시 즉각 철거 되어야 합니다. 관계당국은 조사와 아울러 역사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가짜사육신‘은 사육신이 아닙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김후경씨의 양심고백에서 밝혀졌듯이 ”김문기 가짜 사육신“날조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당시 날조회의에 가담했던 위원들의 명단을 언론지상에 공개해야 합니다. 사 육 신 수 호 회 사육신이란? 단종3년(1455)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가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이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거사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礩) 등이 세조에게 단종복위 계획을 밀고하여 연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박팽년(朴彭年)․유응부․이개(李塏)는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고, 하위지(河緯地)는 참살 당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고, 김문기(金文起)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하였다. 이밖에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가는 등 70여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순사한 조선 전기의 충신.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했다. 명 사신의 환송연 때 거사하기로 했으나 계획이 좌절되어 김질 등의 밀고로 잡혀 고문 끝에 죽었다. 사육신의 대칭으로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聘壽)·남효온(南孝溫)이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성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