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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영화에는 시민군이 계엄군을 공격하는 장면은 거의 없고,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필자는 일요일 인터넷을 통해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연구를 위해 본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박홍수(시민군대장, 배우 안성기), 민우(윤상원, 택시기사) 진우(고3, 배우 이준기) 신애(간호사, 민우의 애인, 박홍수의 딸, 배우 이요원) 정도이고, 사투리 심한 택시기사와 양아치, 김신부이고, 군인으로는 장소장(전교사 사령관), 최준장(7공수 여단장) 배중령(공수대대장) 김대위 정도였다.

택시기사 민우가 5월의 울창한 가로수 사이로 흥을 내고 달리고 있을 때 공중에서는 7대의 군용 수송기(C-54)들이 나르고 있었다. 수송기 안에는 공수부내원들이 탔고, 대대장 배중령이 수송기의 복도에 나서서 사나운 얼굴로 지시를 한다. “우리는 빨갱이들에게 피의 복수를 한다. 가보면 안다. 알겠나?”

마을 사람들은 TV가 있는 집에 모여 전설의 고향을 시청하면서 저마다 무섭다고 야단들이었다. 두 사람의 택시기사, 고3의 진우, 김신부 등 10 여명의 사람들이 야외에 나가 야유회를 즐겼다. 모내기가 한창인 논 위로 수송기가 날으고, 이어서 트럭과 장갑에 공수대원들이 타고 광주시를 향해 달렸다.

이때에 박흥수(안성기)가 등장하여 지갑을 열고 두 택시 기사에게 용돈을 나누어 주었고 이에 기사들은 감읍해 한다. 2인의 택시 기사는 안성기를 ‘대장님’이라 불렀고, 안성기는 자기를 “실패한 군인”이라 표현했다.

5월18일 아침, 전남대 앞에서는 수십명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2열횡대로 교문 앞에 정열해 있는 집총한 공수대" 앞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노래를 신나게 불렀고, 이에 20 여명의 공수대원들이 일제히 곤봉을 박력 있게 빼들고 전광석화의 속도로 학생들을 향해 돌격했고, 학생들은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며 도주해 버린다.

미모의 간호사 신애에게 끈질긴 구애를 펼치는 택시기가 민우는 이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동생 진우(고3), 신애씨와 함께 극장엘 갔고, 극장 화면에는 이주일이 주연으로 등장했다. 민우는 눈물을 흘리고 진우와 신애는 민우의 눈물을 훔쳐보면서 서로 미소를 주고받는다. 이때 갑자기 십여명의 공수대와 그들에게 쫓기고 있던 학생이 극장 안으로 뛰어 들었고, 극장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공수대들이 극장안에 최루탄을 던지고 영화를 보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가격했다. 여기 저기에 피가 튀고, 혼비백산 사람들은 도망을 쳤다. 공수대원 1명이 끈질기게 간호사 신애를 추적했고, 신애는 골목으로 뛰다가 어느 집 앞에서 다급하게 대문을 두드린다.

공수대원이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벽에다 강하게 밀었고, 저항력 없는 여인은 곧 큰 피를 흐릴 찰나에 있었다. 이때 민우가 나타나 공수부대원과 결투를 벌이고 자빠진 공수대원에게 의자를 들어 내리치려 했다. 이때 신애가 멈추라고 소리를 쳐서 공수대원을 살려 보낸다. 따뜻한 인간애가 넘치는 장면이었다.

맹수처럼 가리지 않고 아무나 걸리면 곤붕으로 짝어내리는 공수대원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아니라 사육된 짐승으로 묘사됐다.“석필이가 죽었다. 우리도 나가서 공수부대 놈들과 싸우겠다” 드디어 고교생들이 교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거리로 거리로 나섰다.

공수부대 상황실, 김대위가 여단장인 최준장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브리핑을 했다. “금남로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공용터미널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학생시위가 일반시민의 시위로 확대되었습니다. 강경진압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에 최준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김대위의 뺨을 때린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가야?”

택시를 타고 가는 사람,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 공수대는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끌어내려 몽둥이로 패서 피를 튀게 했다. 팬티만 입혀 트럭에 싣고 달렸다. 이 중에 민우도 있었다. 트럭 위에서도 공수대원들은 발과 몽둥이로 마구 팼다. 피가 이리저리 튀었다. 민우가 차량 위에서 대들어 공수대원과 육박전을 벌이다 교량이 나타나자 그리로 다이빙을 했다. 수십명의 공수대원들이 차량을 세우고 민우를 향해 집중 사격을 가한다. 그래도 민우는 살아났다. 민우는 자신을 해병대 출신이라고 했다. 피 범벅이 되어 병원에 실려온 시민들은 들어오자마자 모두가 생명이 끊겼다. 병원의 벽면, 의사 옷, 간호사 옷 모두에 붉은 피가 튀었다. 간호사 신애가 이마가 찢어진 민우를 불러 꿰매주었다. 의협심에 불타는 의사가 “나와 함께 거리로 나갈 사람 나서라”고 소리를 친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신애가 나섰다. 두 사람이 하얀 응급차를 타고 나가갔지만 거리에서는 일대 살육전이 벌어졌고, 이 새하얀 차에도 총탄이 벌집을 냈다.

시민군 대장 박홍수는 최준장과 동기생으로 공수특전단에서 대령으로 예편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박홍수(안성기)가 공수대 현역 후배들의 안내를 받으며 전교사 2층에 있는 동기생 최준장에게로 간다. 두 사람은 서로 반말을 하면서 날선 말을 주고받는다. 박홍수는“자네 총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아나? 사람일세”최준장에게 싸늘한 눈빛을 꽂으면서 나간다.

공수대는 지능이 모자라 보이는 어린 청년에게 몰매를 퍼부었다. 고교생도 맞아 죽었다. 시민들은 두 사람의 시체를 리어카에 싣고 거리를 돈다.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을 철폐하라” 이 구호에 공수대들은 미친 광인들이 되어 몰매를 퍼붓고 사정없이 총을 쏘았다. 시민들은 도망하다가 무차별로 학살당했다. 도로에서는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부등켜안고 절규한다.

5월21일, 드디어 전교사 사령관 장소장이 7공수 여단장 최준장에게 철수를 명한다. 도청 상공에 헬기가 떴다. “금일 12시까지 계엄군이 철수합니다. 시민들은 해산하십시오.” 시민들은 승리감에 도취한다. 계엄군은 도청 앞에 횡대로 열을 지어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수많은 군중이 그 앞의 넓은 공간을 메웠다. 곱슬머리 택시 기사와 양아치가 2열 횡대로 늘어선 공수대 앞에서 익살스럽게 만담과 야유를 주고 받으면서 병사들을 조롱했다. 떠나가는 동지들들에게 선물을 주자며 노래를 불렀다. “잘가세요 잘있어요 이 한마디 였었네..” 그리고 애국가를 봉창했다.

애국가가 끝나기가 무섭게 병사들이 갑자기 총알을 장진해 가지고 운집한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앞줄은 앉아서 쏘고, 뒷줄은 서서 조준사격을 가했다. 거리에 있는 수천 시민들이 피를 튀기며 쓰러졌다. 이 때 진우가 맞아 쓰러졌고 그의 형 민우는 절규한다. "부모도 없이 단 두 형제 뿐인데!" 동생을 붙잡고 거리에서 울고 있는 민우에게 시민대장 박홍수가 트럭을 몰고 달려와 민우와 진우를 트럭으로 막았다, “아직 죽지 않았다”하지만 진우는 병원에 오자마자 죽었다. 민우가 트럭을 몰고 무기창고의 벽으로 돌진하여 벽을 뚫었다. 수많은 총기를 탈취하고 수많은 다이나마이트(TNT)를 실어다 도청으로 가져갔다. 이때부터 시민군은 총으로 무장을 한다. 버스를 가지고 계엄군에 돌진하자 계엄군은 버스에 사격을 집중해 벌집을 만들어 버렸다. 부상당해서 내리는 버사 운전사에게도 집중 사격을 했다. 그 운전수는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죽는다. 시민군은 M-16과 칼빈총을 들고 싸웠다. 쫓기는 민우와 신애를 공수대 1명이 뒤따라와 육박전을 벌였다. 공수대가 대검으로 민우의 가슴을 향해 내려 꽂으려는 순간 신애가 공수병의 등 뒤에 총을 쏘았다. 그리고 살인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통곡한다. 그녀는 인간애의 화신이었다.

안성기가 건물 옥상에 위력이 큰 CAL50 기관총을 거치해놓고 마구 불을 뿜어대는 사이에 공수부대는 차량을 타고 도주한다. 5월22일의 도청은 축제 분위기였다. 이들은 계단에 모여 기념사진까지 촬영했다.

광주공원, 박홍수 예비역 대령이 군중 앞에 나서서 자신을 공수부대 대령출신이라 소개하고 시민군 대장이 될 것을 제의했고, 이는 만장일치로 수용됐다. 시위대는 계엄군에 공식사과를 전재로 협상을 요구했고, 공수대는 이를 코웃음으로 받아쳤다. 간호사 신애가 지프차에 확성기를 달고 시내를 다니며 도청으로 나와 함께 싸우자고 호소한다. 도청에서 박홍수는 시민들에게 총기사용법을 교육한다.

이때 TV에서는 “시민피해가 전혀 없다”는 방송이 나왔고 시민들은 거짓말에 더욱 본노한다. 김신부가 뉴욕타임스 신문을 가져와 희망을 주었다. “5일만 더 버티면 우리는 이긴다. 부산에 미항항공모함이 입항했다.” 이에 박흥수는 미항공모함이 우리 편이 아니라 군사독재 편이라고 말해준다.

민우가 TNT 한 박스를 전교사로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TNT가 도청에 가득 차 있으니 협상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박홍수가 이를 나무랬다. “너 폭도가 되고 싶으냐?” 이에 민우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왜 우리가 폭도입니까”

박흥수가 또 최준장을 만난다.“전장군(전두환)을 만나게 해 달라”

최준장이 백소장을 설득한다. “도청진입,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백소장은 최준장에게 “익일 자정을 기해 투입하라”고 지시한다.

공수병 2명이 고립된 채 시민군 앞에 손을 들었다. 시민군이 쏘려 하자 박흥수가 “멍춰라”하면서 살려주었다. 인간애의 표본이었다. 간호사 신애가 가두 방송을 하고 다녔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처들어 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현제자매들이 무자비한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광주를 지킬 것입니다”

도청의 밤, 박홍수가 장엄한 분위기에서 연설을 했다. “서로의 얼굴들을 보아라, 그 얼굴들이 오늘 밤 거룩한 전투를 할 전우들의 얼굴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싸우고 이기기 위해 싸운다. 끝까지 당당하게 싸우자. 여러분들이 자랑스럽다” 이에 모두가 환호했다. 김신부도 총을 들었다.

27일 새벽, 탱크들이 기세좋게 진입했다. 도청건물에 밝은 탐지등이 비쳤다. 헬기 소리도 들렸다. “폭도들은 들어라, 너희들은 포위됐다. 즉시 항복하라”

복도에서 총을 맞은 장대용은 워키토키를 들고 이렇게 외쳤다. “대장님 덕분에 이 양아치 장대용도 태어나서 인간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모두들 끝까지 저항했고, 계엄군도 많이 죽였다. 그리고 2층 복도에서 박흥수는 등에 여러 발의 총탄을 받고 엎어졌다. 붉은 피가 낭자하게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민우가 홀로 계엄군 앞에 섰다. 총을 가지고. “폭도는 즉시 총을 버려라” 계엄군의 마이크 소리에 총을 놓으려던 민우는 돌연 총을 들고 계엄군을 쏜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야, 이 개새끼들아”

화면에는 “우리를 잊지 마세요”라는 자막과 함께 태극기 덮인 수많은 관들과 관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노모들과 어린아이들이 비쳤고, 신랑 민우와 신부 신애의 가상 결혼식 사진이 나왔다. 그 결혼사진에는 광주에서 함께 싸운 사람들의 얼굴들이 찍혀 있었다.

평 가

1. 영화에는 시민군이 계엄군을 공격하는 장면은 거의 없고, 잠깐씩 있더라도 그것은 과잉진압에 대한 당연한 정당방위로 묘사됐다. 공수대는 아무 잘못도 없는 광주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영화관람객들로부터 거리의시민에까지 무차별로 살육했다는 것이 핵심 줄거리였다. 즐겁고 평화롭던 광주를 갑자기 공수대들이 처들어와서 곤봉과 충으로 유린하여 피바다를 만들고 민족사에서 가장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는 것이 전체적인 줄거리다.

2. 시민군대장 박홍수는 실제 인물 박남선이며 박남선은 당시 26세로 운수업체 종업원이었다. RMFJS 그를 공수특전대 대령출신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5.18의 시민군대장이라면 적어도 대령출신 정도라야 품위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무기징역을 받았다. 시민군에서의 그의 역할은 상황실장이었다.

3. 택시 기사 민우는 실제 인물 윤상원이다. 윤상원은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1971년 전남대 정외과에 입학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졸업을 했다. 그는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구속됐다가 특사로 풀려나 광주시위를 지휘했다. 5월18일까지의 시위의 주체는 대학생들이었는데 그 후에는 시위의 주체가 학생들에게서 윤상원이라는 위장취업자가 이끄는 노동자들에게로 넘어갔다. 실재로 광주에서 폭력시위에 앞장섰던 사람들의 80% 이상은 젊은 노동자들이었다. 학생시위가 노동자들에 의한 폭력시위로 그 성격이 바뀐 것이다.

2005년‘월간 말’지에는‘광주민중항쟁25주년 기자수첩’이라는 코너에 이정한 기자의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윤상원 열사”를 이렇게 소개했다. 시인 박노해가 1989년에 “윤상원 평전”을 썼다. 박노해에 의하면 윤상원은 체제전복을 꿈꾸는 혁명투사였다.“노동자 총파업으로 군사독재를 타도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총파업만으로 국가권력은 타도되지 않습니다” 박노해 평전에 의하면 윤상원은 5.18이전부터 무장봉기 준비를 했다. 기자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윤상원, 그가 없었다면 5월의 광주도 없었다”는 말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윤상원이 그 핵심 인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광주 외곽의 광산구 임곡동은 지금 복원사업이 한창이다. 윤상원은 전남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은행)을 다니다가 광주로 내려와 공장에서 위장취업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주도했고,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을 통해 노동자들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중앙위원이기도 했다. 그는 1980년 5월 민중항쟁 기간에‘들불야학 강학’들과 함께 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하였고, 항쟁 지도부를 규합하면서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광주사태 때 투사회보는 9호까지 나왔다. 1980년 5월 26일 마지막 외신기자회견에서 그는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계엄군의 도청 진압이 개시된 1980년 5월 27일 새벽, 결국 그는 복부에 총상을 입고 서른 살의 생을 마감했다.(이정한 기자의 글 끝)

전남대 앞에는 녹두서점이 있다. 사회과학 전문서점이었지만 불온서적의 창고였다. 이로 인해 서점의 운영자 김상윤이 잡혀갔지만,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후배 윤상원은 이 녹두서점에서 사람들을 모으고‘투사회보’를 만들어 여론을 조작했다. 5.18기념사업회에서는“시대의 불꽃 윤상원”이라는 소설을 발간했다.

광주에서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경찰서를 부수고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한 것도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주동하였다. 윤상원은 그들 세계에서 광주투쟁을 기획하고 실행한 주모자요 열사로 통한다. 5월21일 그는 광주 유혈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광주 외곽 지역까지 시민군을 보내 습격하여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해 오게 한다. 그리고 그는 5월21일, 광주를 해방시킨 후 5월27일 새벽 4:30분, 계엄군에 의한 광주탈환 작전에서 사망했다. 소위 진보계에서는 그를 열사요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다.

4. 영화는 5.18일 전남대 앞에서부터 왜곡됐고, 왜곡되지 않은 부분은 거의 없다. 이는 5.18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냥 소설을 쓴 것이다. 참고로 5월18일은 아래와 같이 시작됐다.

1980년 5월18일0시를 기해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포고 제10호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중요 대학에 계엄군이 주둔함에 따라, 극심했던 학원소요는 진정되어 전국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광주지역에 있어서는 격렬한 시위사태가 지속되었다. 5월18일, 전남대 및 조선대에서는 200여명의 학생이 전국계엄령 확대에 따른 향후 활동방향을 논의하고 있었다. 33대대와 35대대는 회합 중이던 주도 급 학생 60여명을 검거하여 수사기관에 인계하고 경계 임무에 임하고 있었다.

같은 날 9시경, 7공수여단 33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 정문에 2백여 명의 대학생이 몰려와 "왜 학원을 군이 점령하느냐, 군은 학교에서 철수하라" 고 요구하였다. 학생들의 이러한 행동은 정동년 등 학생시위 주동자들이 전국비상계엄에 앞서 가진 회동에서 만일 학교 휴교령이 내려지면 전남대 교문이나 전남도청 앞에 모여 계엄군과 투쟁하라는 행동강령을 정한데 따른 것이었다.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어 휴교령이 내려졌으니 귀가해 달라"

계엄군은 이렇게 선무방송을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가방 속 등에 준비해온 돌을 부동자세로 열을 지어 서있는 7명의 공수부대원에게 집단 투석을 하여 계엄군 3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광주에서 먼저 가장 먼저 공격한 측은 학생이었고, 가장 먼저 부상을 당한 측은 군인이었다.

전우가 돌을 맞고 피를 흘리는 것을 본 대원들이 이런 학생들을 가만 둘리 없었다. 공수부대가 무섭게 나가자 학생들은 11시경에 시내로 진출했다. 도청, 가톨릭 센터 일대에서 400-500명 단위로 집단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계엄령을 철폐하라”“유신잔당은 인민의 적이다”“외세를 배격하고 미군을 추방하자” “매판자본과 군발이를 추방하자”, “반공법-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촉구한다”“경찰과 공무원을 타도하자”“김대중을 석방하라”등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정치적 구호를 외치며 시가지 시위를 시작했다.

충정로 파출소, 산수 파출소 등 4개 파출소에 돌을 던지며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오후 3시경에는 광주 시내 학생회관 앞에서 경찰 지프차를 전복시키고 방화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금남로3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페퍼포그에 밀려 중앙로로 꺾어진 다음 때마침 충금지하상가 공사로 나뒹굴던 자갈을 집어들고 충장로 파출소를 향해 내던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유리창이 박살나고 내부에 있던 경찰들이 옥상으로 대피했다. 일단 불이 붙은 군중심리는 경찰에 대한 계속된 공격으로 이어졌다. 낮 12시45분엔 산수동 파출소가 습격을 당했고 황금동 학생회관 앞에서는 도시락을 먹던 경찰들을 시위대가 기습했고, 경찰이 도주하자 페퍼포그 차에 불을 질렀다. 이때 이미 금남로 시위군중은 1천5백명, 충장로 골목골목에는 1천6백명의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음료수 병과 돌을 던지며 시위의 강도를 더해갔다.

광주 시가지 시위 진압작전은 5월18일 오전까지는 경찰력만으로 수행되었다. 그런데 5월 18일 오후부터 파출소가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고 시위 진압을 하던 경찰 지프차에 방화를 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은 전라남도 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요청하였고,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에게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중인 7공수여단 2개 대대의 출동을 지시했다.

7공수여단의 출동지시를 받은 정웅 31사단장은 18일 I5시경, 헬리콥터를 타고 직접 전남대와 조선대에 있던 7 공수여단 33, 35 대대본부를 찾아갔다. 정웅 31사단장은 33, 35대대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지금 전교사 회의에 갔다 오는 중인데 오면서 보니까 광주 시테가 난리가 났다, 경찰은 완전히 수세에 몰려 있는 것 같다. 33대대는 금남로 아래에서 유동 삼거리 방향으로 병력을 투입해서 시위대를 압축하라. 도청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를 차단하고 있으니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의 주요 목을 점령하고 있다가 금남로로부터 빠져나오는 시위대를 전원 체포 연행해서 조선대학교로 호송하였다가 헌병대에 인계하라. 죽음을 무릅쓰고 시위를 진압하라"

7공수여단이 평소 충정계획에 따라 훈련 받은 시위진압 방법은 시위대를 향하여 위력시위와 선무방승을 한 후에 시위대가 불응할 경우 시위대를 세 방향에서 봉쇄, 차단하고 한 방향은 반드시 퇴로를 마련해서 시위대가 해산을 하도록 유도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정웅 31사단장이 내린 명령은 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위력시위를 생략한 채 금남로를 점령한 시위대의 모든 퇴로를 차단, 봉쇄함으로서 체포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더구나 35대대는 이 날 오전에 31사단 96연대에 배속이 되어, 연대장의 지휘를 받도록 돼 있었는데, 느닷없이 차상 급 지휘관인 사단장이 직접 조선대 연병장에까지 와서 시위진압 명령을 하달하였기 때문에, 33 및 35대대장은 사단장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7공수여단 33대대 병력 302명(35/267)은 15시40분경 금남로에 출동했다. 33대대병력이 금남로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2,000여명의 시위군중이 이미 경찰과 대치하여 투석전을 벌리고 있었다. 이 때 권승만 33대대장이 자진해산하라고 선무방송을 하자 시위군중은 계엄군을 향하여 투석을 하기 시작했다. 거듭된 선무방송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에 대한 투석과 화염병 공격이 멈추지 않자 33대대병력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고 극렬 시위자 103명을 체포하였다.

I5시50분경, 7공수 35대대 병력 222명(26/196)은 충장로로 출동했다. 충장로에서는 9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동산 파출소에 투석을 하면서 공격을 하고 있었다. 김일옥 대대장이 시위대를 향하여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방송을 했지만, 시위대는 파출소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계엄군에 대해서도 투석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3시간여에 걸친 공방전 끝에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극렬시위자 173명을 연행했다. 33 및 35대대는 16시 30분경에 시위진압작전을 마치고 숙영지로 돌아왔고, 연행자는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하였다. 광주 시내에 계엄군이 투입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광주사태가 커지게 된 데에는 조직적으로 지어내 시의적절하게 유포한 악성 유언비어가 있었다. 광주의 첫날에 퍼진 유언비어는 아래와 같았다.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 반란을 일으켰다”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을 이틀식이나 굶기고 술과 환각제 등을 복용시켜 광주에 투입했다”

“ 공수부대원이 여자의 젖가슴을 대검으로 도려냈다”

“ 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

“ 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

“ 공수부대원이 광주에 들어오면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죽일 것이다”

“ 대검으로 시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

“여학생을 발가벗겨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

이때의 대부분의 광주시민들은 정부군을 경상도 군 정도로 믿고 있었다. 공수대원들의 과격한 진압광경을 목격한 일부 시민들은 악성 유언비어들을 현혹되어 거리로 거리로 몰려나와 경상도 군인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9시부터 새벽4시로 확대했지만 유언비어에 분노한 시민들은 10,00여명 단위로 증가하여 한일은행 및 도청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자정까지 해산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5명, 경찰관310명이 부상을 입었고, 계엄군은 시위학생 615명을 검거했다.

1980년5월19일자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사회면 머리기사로 작성된 18일 오전 전남대앞 충돌사건기사는 검열로 빛을 보지 못했지만 당시 상황을 그대로 설명한다. 아래는 전남일보의 기사다.

(전략) 5월18일 아침은 여느 봄날의 휴일처럼 무등산에서 떠오른 봄날의 햇살이 광주를 따스하게 안아주고 있었다. (중략) 조선대 정문에 공수부대 7~8명이 집총을 하고 출입을 금지시킴. 기자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자 일체 안된다고 함 … 全南大에 주둔한 7공수여단 33대대(대대장 군승만중령) 병력은 정후문의 출입을 일체 통제하고 있었다. 정문 앞에는 “정부조치로 휴교령이 내렸으니 가정학습하기 바란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오전 9시가 넘어서면서 삼삼오오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중략) 全南大 정문에서 약 30m 떨어진 용봉교를 사이에 두고 학생과 공수부대원들이 대치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숫자는 점점 불어났다. 학생들이 다리를 넘어서면서 공수부대원들이 나와 밀어내는 대치상황이 한참 계속됐다. 군의 첫 경고 방송이 나오지만 학생들의 구호소리가 높아져갔다. 일부학생들은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소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마이크를 들고 앞에 나섰다. “우리는 상부 지시로 全南大에 왔다. 대학은 휴교령이 내려졌다. 즉시 귀가하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해산 시키겠다.” 장교의 말이 끝나자 정문양편으로 공수부대원 4명씩이 2열종대로 대열을 이뤘다. 학생들이 돌을 던졌으나 공수부대원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기사 끝)

진실이 위와 같은 데도 불구하고 광주사태의 주모자요 영웅인 윤상원은 10시30분경 녹두서점의 김상집(좌익)씨에게 전화가 걸어 “전대 정문 앞인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무차별살상하고 있다”고 정반대로 이야기했으며, 이 거짓말은 녹두서점을 통해 전국 대학가 운동권으로 퍼져나가 그대로 대자보로 제작되어 대학가 벽보에 붙여졌다. 5월19일,윤상원이 민주투쟁회보 이름으로 뿌린 삐라는 이런 글귀로 시작된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 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로 유신 잔당과 전두환 일파들입니다. 죄 없이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당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있는 한 동포의 죽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5. 5월21일 도청 앞 사격이 있기 전에 시민군은 대규모 무장을 시작했고, 자기들기리 총을 만지다가 오인 사격을 죽은 사람도 꽤 있었다. 광주시가 해방구로 탈환된 날은 5월21일, 그날의 상황은 이래와 같다.

5.21일 상황은 광주사태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상황이었고, 진압군은 밤새 내내 시위대로부터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20일과 21일 어간의 밤은 ‘철야시위’의 밤이었다. 21일 새벽 2시경에는 2천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 세무서를 습격하여 방화를 했고, 예비군 무기고를 부수어 칼빈소층 17정을 탈취했다. 시위대가 처음으로 무장을 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부터 광주시위대는 총을 가진 무장 전투부대가 된 것이다.

5.20일 자정부터 5.21일 새벽 4시경까지 3천여명 수준의 시위대가 대형차량을 앞세우고 11여단 주둔지인 조선대에 몰려와 정문 돌파를 시도했다. 아침 8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시위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대거 운집해 있다가 육로로 광주에 출동 중이던 20사단 지휘용 지프차 14대와 탑재된 무기를 탈취했다.

아침 9시, 시위대는 방위산업업체인 아시아자동차를 습격하여 4대의 장갑차를 포함 ,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57대를 탈취하여 시내로 몰고 나왔다. 아침 10시, 시위군중 5만여 명이 경찰 가스차, 소방차, 대형트럭을 앞세워 전남대로 3공수여단을 공격하러 왔다. 드디어 무기고 습격이 이어졌다. 대한통운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칼빈 70정을 탈취했고, 이어서 연초제조창, 호남전기, 전남방직 등의 무기고를 부수고 다량의 무기를 탈취했고. 이어서 지원동에 있는 탄광용 화약고에서 다이나마이트를 탈취했다.

칼빈, M-1, 기관총 등 5,403 대의 화기가 피탈됐고, 소화기 탄약 288,680발, 수류탄 52개가 피탈됐다. 시민군은 779대의 차량을 탈취했고, 이들 779대는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였다. 이는 1개 사단 규모의 차량 수에 해당한다. 이들은 이들 무기로 무장을 하고, 복면을 쓰고, 전남의대 11층 옥상 및 수많은 고층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계엄군을 향해 난사했고. 도청, 도경, 검찰청, 법원을 점령했다.

난동자들은 탈취한 차량을 이용하여 화순, 나주, 담양, 장성,목포, 영암, 고흥, 관산 등 17개 도시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털고 난동을 부리며 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했고,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했다.

3공수여단이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에서는 아침 9시경부터 시위대 차량이 계속 시민들을 태워 정문 앞에 집결시키고 있었다. 오전 10시, 시위군중은 정문 앞에 4만여 명, 후문 앞에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군용 트럭, 군용 장갑차와 경찰 페퍼포그차 등 10여대가 시위군중의 선두에 나타났다. 이를 신호로 시위군중들은 정문과 후문에서 동시에 경비 중이던 계엄군에게 투석을 하였고 차량들은 전날 도청 앞에서처럼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격렬한 공격으로 12시경에는 마침내 정문에 설치된 저지선이 무너지고 시위대는 교내로 300미터나 진출했다.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의 마지막 보루인 전남대 숙영지가 시위대에 의하여 점령당할 수 있는 최대의 위기상황이 온 것이었다.

최세창 3공수 여단장은 E-8 가스발사통 20여개를 총동원하여 여단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가스탄을 발사했다. 계엄군의 반격에 당황한 시위대는 이때에야 겨우 물러났다. 이와 같은 공방은 3공수여단이 전교사 사령관의 명령으로 광주 교도소로 이동한 오후 17시30분경까지 계속됐다. 오후 5시30분, 3공수여단이 전남대를 철수하자 시위대는 곧바로 전남대를 점거했다.

12시경, 광주사태 기간중 가장 위험한 사태가 발생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5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여기에서 쌍방 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시민군 사망자만도 50여명에 달했다.

윤흥정은 21일 아침에야 그날 아침 방금 도착한 20사단 61연대와 도청 방어임무를 교대하도록 지시했다. 61연대가 광주로 진입하려 했지만, 광주-송정 간 도로에는 이미 시위대가 바리게이트를 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가 미리 정보를 안 것이다. 예기치 못한 저항에 부딪친 61연대가 이들 시위대를 뚫고 있는 동안 도청 앞에는 10만 군중이 몰려왔다. 도청 주변 건물들의 옥상에는 기관총들이 설치되어 계엄군을 향해 불을 뿜어냈다. 전남도지사는 헬리콥터로 피신해 나와 계엄 당국과는 아무런 의논도 없이,“게엄군을 12시까지 철수시킬 것이니 시민들은 돌아가라”고 방송을 했다. 이 방송을 들은 안부응 11여단 62대대장이 어찌된 영문이냐고 상부에 확인했지만 윤흥정은 “도청을 계속 지켜라”는 말만 반복했다.

13시경,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면으로 나오더니 장갑차 한대가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였다. 병사 1명이 즉석에서 깔려죽었다. 이어서 나머지 장갑차와 대형트럭으로 또 돌진했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 또 다시 그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는 차량에 위협사격을 가했다. 누구를 그런 상황에 투입해 놓는다 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자위수단으로 총을 쏠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은 미국의 분석가들이 칭찬했듯이 끝까지 시민들에게 직접 총을 쏘지 않고 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사람을 조준하지 않고 차량에 대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16:50분, 이런 지경을 당하고서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도청을 지키던 계엄군에 철수를 명했고, 17:50분에 1,200명의 병력은 겨우 숙영지인 조선대로 철수했다. 이로써 광주시는 시민군에 의해 완전 탈취되었고,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이를 민주화 사람들은 “해방구”라고 말한다.

21일의 특기사항은 광주시내에 국한돼 있던 소요가 목포, 영암, 나주, 광산, 담양, 장성, 고흥, 해남 등 17개 도시로 확산된 사실이다. 나주경찰서. 나주 삽포지서, 영광파출소, 금성파출소, 오일파출소가 피습되어 칼빈 780정, M-1 235정, 실탄 46,400발, 권충 28정이 피탈당했다. 목포시청이 점령되고 목포경찰서가 전소했다. 화순경찰소와 화순역전파출소를 방화하고, 예비군 무기고에서 460정의 총과 1만여발의 탄약을 탈취했다. 영암경찰서, 순덕지서가 피습당하고 무기를 피탈당했다.

16:00시, 도청을 방어하던 7공수여단, 11공수여단이 조선대로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수천 명의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몰려와 정문 돌파를 시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7 및 11공수여단은 가까스로 주답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오후 8시, 광주시는 공식적으로 완전한 해방구가 되었다.

무기고 습격에 있어서 특히 우려할만한 것은 무기탈취범의 대다수가 군중심리에 휩쓸려 시위에 가담하였던 젊은 청년들이고 이들 청년들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을 하고 빼앗은 차량을 이용하여 도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총격을 하는 무모한 행동을 함으로서 엄청난 피해를 선량한 시민과 계엄군에게 끼쳤다는 사실이다.

광주시위 사태가 종료된 후에 검거된 무기탈취자의 신원을 살펴보면 금성파출소 무기탈취범 이재권은 육군 방위병이었고, 화순경찰서 동면지서 무기 탈취범 이강갑은 가구점 종업원이었으며, 해남경찰서 무기 탈취범 임채문은 형이 광주시위에 가담하였다는 풍문을 듣고 무조건 가출을 한 미성년자였다.

5월 21일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습격이었다. 5월 21일12시경에 APC.등 차량 9대를 앞세운 무장시위대가 총기를 난사하며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당시 광주교도소를 경비하고 있던 31사단 96연대 2대대 병력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당시 북한은 광주에 있는 수개의 고정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해방”을 시키라는 지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전교사는 이러한 북한의 지령에 비추어 광주교도소의 습격이 제5열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21일16시30분경에 당시 전남대에서 시위대의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던 3공수여단을 광주교도소로 긴급 출동시켰다(김순현 전교사 작전참모 검찰 심문조서).

19:20분경, 광주교도소에 출동한 3공수여단 병력이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교도소 주변에서 방어용 바리게이트 설치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때 교도소 주변에 매복하고 있던 무장시위대가 3공수여단 병력에게 기습총격을 가하여 민간인 2명이 사망하였다.

5월22일, 오전 9시경에는 2 1/2톤 차량에 LMG를 장치한 무장 시위대 6명이 광주교도소를 총격 기습하여 상호간에 총격전이 일어났고, 10시 20분경에는 소방차를 탑승한 무장시위대 10여명이 교도소에 총격을 가해왔다. 5월23일 10시 20분경에도 소방차에 탑승한 4명의 무장시위대가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교도소를 경비하던 3공수여단에게 전원 체포되었고, 19시경에도 무장시위대가 계엄군에 총격을 가하면서 교도소를 습격하여 상호 총격전이 벌어져 계엄군 1명이 부상하고 무장시위대 1명이 사망하였다. 광주교도소에 대한 무장시위대의 무력공격은 5월 21일을 전후하여 6차례나 감행되었는데 광주교도소에는 당시에 간첩 및 좌익수 170여명을 포함하여 2,700여명의 복역수가 수용되어 있었다.


2008.6.2.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