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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이재오를 통하여 본 좌익의 역사

좌익들은 자신들이 벌였던 반국가활동을 민주화 통일 민족 등 애국적 명분으로 위장한다.

 
이재오는 반국가 활동을 하다가 5번씩이나 투옥되어 실제로 10년 이상 옥살이를 했다. 그는 김영삼에 의해 신한국당에 들어와 정체를 위장해 왔다. 좌익들은 자신들이 벌였던 반국가활동을 민주화 통일 민족 등 애국적 명분으로 위장한다. 그들이 옥살이를 한 것은 과거의 군사정부가 뒤집어 씌운 것이라고 호도한다.

이재오의 과거

1. "남민전" 빨갱이 활동으로 투옥

1979년 11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 적발됐다. 이재오는 이에 관련해 복역했다. 남민전은 집요하고도 악랄한 빨갱이들의 조직이다.1960년대 인혁당, 통혁당사건 관련자들이 출감 후 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 각계각층을 규합, 북한과의 연계 속에 결성한 지하공산혁명조직이다.

이 사건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간첩사건으로 관련자만도 100여 명이 넘었다. 남민전은 안용웅(38) 등이 월북, 김일성에게 사업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북한으로부터 구체적 통제를 받아왔고, 남한 내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할 경우 게양할 붉은 별이 그려진 대형 ‘전선기(戰線旗)’까지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이들은 공작금을 마련하기 위해 혜성대(彗星隊)라는 조직을 만들어 재벌 집 강도 등을 계획했다. 김정익 씨는 자신의 책 ‘수인(囚人)번호 3179’에서 “남민전 조직원들은 교도관연락책까지 동원, 교도소 내외에 비밀지령을 주고받으며 조직을 강화시킬 정도로 치밀했다”고 적고 있다.

“계급적인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야 한다. 그 숫자는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재판결과 사건의 총관련자 가운데 1심과 2심에서 39명이 석방됐으며 남민전 사건 연루자들은 지난 1989년까지 모두 만기,특사로 출옥했다. 특히 작가 홍세화(洪世和)는 79년 당시 남미전 사건으로 프랑스에 망명, 공소시효가 만료된 이후인 99년 한국에 돌아와 현재 한겨레 신문 편집국 부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또한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해 역사를 바로세운다는 명목 하에 지난 91년 설립되어 `친일인명사전`편찬사업을 벌여온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중대 국문과 겸임교수)씨 역시 `남민전사건`의 연루자로 이재오와 동지였다.

2. 1986년 ‘민통련’의 민족통일 위원장

1984년 6월29일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출범했다. 민청련 등이 중심이 돼 건설한 단체였다. 노동자·농민 등 기층 대중운동의 역량 강화에 중점을 두고, 조직도 개인 회원보다는 회원 단체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이 조직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1984년 10월16일 문익환·장기표 등을 중심으로 해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따로 조직됐다. 국민회의는 명망있는 재야 원로들이 주축이 됐다. 이 두 개를 통합한 것이 ‘민통련’이다. 1985년 3월29일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에서 이 두 개 단체가 통합대회를 갖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출범시키면서 문익환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총 23개 단체가 가입한 매머드급 민주화(좌익) 탄체였다.

86년 3월30일 5만여 명이 모인 광주에서의 투쟁을 시발로 5월3일 인천에서 5·3인천사태를 일으켰고, 그 결과 민통련 간부 대부분이 수배되고 문익환이 구속됐으며 사무실이 폐쇄됐다. 주요 간부들이 구속 또는 수배된 상태에서 민통련은 87년 5월27일 통일민주당과 민추협을 위시한 제도권 정치세력과 가톨릭·개신교·언론·여성·노동자·농민 등 모든 민주화운동세력을 총망라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후 6월항쟁을 통해 6·29 선언을 이끌어 냈다.

3. 89년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전민련은 민통련의 후신으며 당시 재야세력의 구심점이었다. 1989년 1월에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은 창립 성명서에서 “자주·민주·통일을 민중의 힘으로 달성한다는 민통련의 이념을 계승한다”는 성명을 냈다. 전민련은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을 사회적 이슈로 가시화하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민통련의 명맥을 이은 전국적인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라는 것을 내세웠다.

이부영이 상임의장, 장기표가 사무처장, 김근태가 정책기획실장을 맡아 ‘재야 트로이카’가 됐다. 하지만 90~91년 이부영과 장기표가 신당 추진을 위해 전민련을 떠났고 김근태도 95년 정계에 입문했다. 전민련이 어수선해지자 92년 대선을 앞두고 19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이 결성되면서 해체되었다. 현재 ‘뉴라이트전국연합’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일맥상통한다. 좌익조직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늘 처음에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철저하게 위장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국연합"의 결성 목적은 민중생존권 수호, 전 사회적 민주개혁, 민족자주권 쟁취,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 주한미군철수, 국보법 철폐에 있다. 본부는 서울특별시용산구남영동에 있다.

4. 91년 "민중당" 사무총장

민중당(남한조선노동당중부지역당) 사건’은 1992년 10월 안기부(국정원 전신)가 발표한 남로당 사건 이후 최대의 간첩단 사건이었다. 62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300여명이 수배됐다. 이재오 역시 복역했다. 수 차례에 걸쳐 10년 반을 복역한 이재오는 지독한 빨갱이로 밖에 볼 수 없다.

구속자 중에는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씨를 비롯해 민중당 출신 손병선씨, 전 민중당 공동대표 김낙중씨, 전 민중당 정책위의장 장기표씨 등 재야의 거물들이 총망라됐다.

당시 안기부는 북한 노동당 서열 22위인 거물 간첩 이선실이 황씨를 포섭, 서울 인천 등 전국 24개 주요 도시의 46개 기업과 단체 등 조직원 300여명을 확보해 북한 노동당과 남한 대중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사건의 주역 중 황씨와 김낙중·손병선씨 등은 무기징역이 선고됐으나 이들 모두 98년 8·15특사로 풀려났다.

6.3동지회

1964년 6월3일 서울 주요 대학생들과 시민들 1만여명이 박정희의 한일협정 시도에 반대하는 데모를 주도했던 사람들이 구성한 단체.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