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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이승만의 대동단결론과 통합운동(연대 학술회)

1954년 8.15 해방은 한민족에게 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할 시대적 과체를 부과하였다.

 
▲ 잘못 평가되고 미진한 부분을 지적하시는 이인수 박사(촬영 장재균) 
 
▲ 학술발표 사회 연세대 김동노 교수(촬영 장재균) 
 
▲ 이승만의 대동단결론과 통합론 첫 발표자 왼쪽 김수자 이회여대 오른 쪽 양정신 연세대(촬영 장재균) 
 
▲ 질의 뒤 경청하고 있는 이주천 교수(촬영 장재균) 
 
▲ 학사들은 작은 원칙, 사견을 전체 진실인양 호도하기 쉽다. 발표자 김수자 교수에 질의를 하고 있는 허종하 명예교수(촬영 장재균) 
영어실력이 최강의 무기

李承晩의 생애는 약소국가의 지도자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가난한 집의 학생이 험난한 세파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부유한 집의 학생과는 생활방식이 달라야 하듯이, 약소국가가 가혹한 국제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지도자의 능력과 자질은 강대국 지도자의 그것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李承晩은 조선시대 말기의 이름없는 가난한 백성의 한 사람이었지만, 역경을 이겨내고 개인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성공은 대한민국 국민의 국민적 성공과도 연결되었다.


李承晩의 생애를 보면, 약소민족 또는 약소국가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첫째 자격은 외국어 구사에 뛰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그는 한문에 능통하였다. 한문과 동양고전에 대한 그의 이해는 13세의 어린 나이부터 나이를 속이면서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중국 책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청일전쟁에 관한 중국 책 『중동전기본말』을『청일전기』란 한글 제목으로 번역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중국이 패배하고 일본이 승리하게 된 이유가 문명적 차이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교훈은 한 민족의 장래에 적용시키려고 하였다.


일본어 수준도 상당하였다. 연세대 유영익 교수에 따르면, 그것은 일본책을 우리 말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


그는 국제관계의 공용어였던 프랑스어도 어느 정도 말할 수 있었다. 그가 1933년 스위스에서 부인이 될 프란체스카 돈너를 처음 만나 처음으로 인사한 것이 프랑스어였다. 그가 프랑스어를 배운 것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였는데, 아마 외교를 통해 독립을 찾는다는 의도에서 프랑스어 과목을 수강한 것 같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에게 있어서 최강의 무기는 뛰어난 영어실력이었다. 그가 한 민족의 주권수호와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1905년 테오도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고, 1912년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당시 뉴저지주 지가)을 세 차례나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영어의 힘이었다.


부러할 만한 학력의 소유자

그리고 1921년의 워싱턴 군축회의나 1933년의 국제연맹 총회를 비롯한 수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미국 정부 관리들과 접촉하면서 한국인의 독립을 호고할 수 있었던 것도 영어실력 덕분이었다. 또한 그가 1945년에 미국 국회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 33번의 박수를 받아낼 정도의 감동적인 연설을 통해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할 수 있었던 것도 영어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수많은 외국 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글을 실었는데, 뉴욕타임즈에 난 것만도 1,256 건에 이르렀다. 그의 영어 실력과 한문 수준은 박사 학위 논문이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 1912년에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사실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가 1941년 여름에 일본의 미국 침공을 경고하기 위해 뉴욕의 프래밍 에이취 레벨 출팜사에서 낸『일본 내막기』는 그 해 말 진주함 기습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거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완벽한 영어 때문에 李承晩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하지 중장의 미군정과 마음대로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군사·경제 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나 덜레스 국무장관과 맞설 수 있었다.


李承晩의 두 번째 교훈은 약소민족이나 약소국가의 지도자는 뛰어난 학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李承晩은 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의 일류 대학을 거치면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한 학벌은 미국인이라도 부러워할 만한 수준의 높은 것이었다. 쟁쟁한 학력 때문에 그는 여권도 없는 망국인의 신분으로도 세계를 누비며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다.


李承晩이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는 이유의 하나도 뛰어난 학력에서 온 것 같다. 실제로 그가 한국 땅에서 만난 외국인들 가운데서 자기 보다 학력이 높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가 해방 직후에 포버트 올리버 박사에세 보낸 편지에서 미 군정청의 미국인들을 "미국에 있었다면 하잘것 없는 사람들"이라고 경멸한 사실에서도 어느정도 확인된다.


6.25전쟁 당시 李承晩이 전쟁 수행 보다 휴전에 더 관심을 가졌던 미8군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장군을 공식 행사장에서 직접 비난하는 연설을 했던 사실, 그리고 1954년 미국 방문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도중 한일관계 개선 압력에 반발하여 먼저 자리를 떴던 사실은 모두 상대방에 대한

李承晩의 개인적 우월감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오래사는 장수의 비결도 한 몫

李承晩의 세 번째 교훈은 약소민족 지도자는 오래 사는 능력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지도자는 역경 속에서도 수명을 길게 연장할 수 있는 인내심과 자제력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종 12년인 1975년에 태어난 조선시대 사람이었다. 그는 한 푼의 벌이도 없이 떠 돌아다니기만 하는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겨우 연명하던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소년시절에는 영양실조 때문에 시력을 완전히 잃을 뻔 했던 적도 있었다.


게다가 청년기에는 감옥살이를 했다. 컴컴하고 비위생적인 흙바닥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때로는 나무 칼을 목에 걸고 24세부터 29세까지 거의 6년간을 감옥에서 살았다. 그 때문에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일생 동안 손가락 통증을 느끼며 살았다.


미국에서의 망명생활도 힘든 것이었다. 대학 다닐 때는 학비를 벌고 한국 주권수호를 호고하기 위해 수많은 교회와 YMCA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어렵게 미국으로 데려온 외아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 8세의 어린 나이로 죽는 슬픔을 당하기도 하였다.


학업을 마치고 독립운동을 하는 기간에도 李承晩은 불안정한 떠돌이 생활로 정상적인 건강관리를 할 수 없었다. 무엇 보다도 먹는 것이 시원치 않았는데, 부인 프란체스카 돈너의 자서전『대통령의 건강』(촛불 출판사 발간)에 따르면, 그녀가 1933년에 스위스 제네바의 붐비는 어느 호텔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은 소금에 절인 배추, 작은 소시지 1개, 그리고 감자 2개였다. 그리고 그러한 스타일의 소박한 식사는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일생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도 90세로 장수했으니, 그의 삶에는 어떤 비결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결의 일부는 부인의 자서전에 나타나 있다.


李承晩의 개인적인 삶의 성공을 그가 세우고 지킨 대한민국이 성공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그것은 1 인당 국민소독이 해방의 해인 1945년에 35달러였던 것이 그의 통치 마지막 해인 1959년에 85달러로 늘었던 사실, 나아가 해방 50주년이 되는 1955년에 1만 달러로 크게 뛸 정도로 대한민국이 발전한 사실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대불총성명서]"이종명의원" 제명한 자유한국당 윤리위원회 결정은 잘못이다. 자유한국당이 이종명의원을 "5.18 진상규명 공청회 환영사" 관련하여 출당을 결정한 것은 지극히 유감스럽다. 남남 갈등의 원인 중 5.18 사건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2018년 "5.18민주화 운동 관련 진상규명 특별법"을 만들면서 까지 재조사 하는 것으로 증명 된다. 모든 국민은 이번 조사를 통하여 의문이 명명백백히 가려지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이 법의 조사범위에는 "북한군 개입여부 및 북한군 개입 조작설"이 자유한국당의 제안으로 포함되었다. 문제가 되고 있는 "5.18 공청회"도 분명히 이러한 위 진상규명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실시되었다. 본 공청회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도움을 받아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반대하는 측과의 토론을 위하여 실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측의 주장이 반대측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은 필연적이므로 쌍방간의 이견이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있다. 이것이 민주국가에서 공론의 과정이다. 그러므로국회가 문제를 삼는 것은 부당하다 더욱5.18 진상규명을 국회가 입법하고도, 잘해보자는 국회의원들의 발언내용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제명을 운운하는 것은 민주국가의 국회 모

[대불총] “국민발안제 개헌”반대 성명서 [대불총] “국민발안제 개헌”반대 성명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 우리는 중국폐렴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고, 정권심판을 위한 4.15총선으로 어수선한 틈에 여야 국회의원 148명 들이 “100만명의 국민이 동의하면 개헌하는 국민발안제” 개헌안을 날치기 발의하였습니다. 이 개헌안은 4.15 총선과 동시에 “국민발안제 개헌안” 국민투표를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유신헌법에서 삭제된 국민발안권을 되찾고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선하자고 함이라고 합니다. 또 독일과 스위스는 국민발안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잘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일과 스위스의 정치환경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말하지 않습니다. 독일과 스위스는 우리처럼 남남갈등이 없으며 나라를 뒤엎을려는 세력도 없습니다. 독일은 헌법수호청이란 강력한 기구가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전제주의나 공산주의식 헌법개정의 발안은 못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모든 공안기관이 무력화되고, 종북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상태에서 국민발안이 헌법화 된다면 국가의 혼란은 가중될 것입니다. 100만명은 우리인구의 2%입니다. 100만 명이란 숫자는 노조와 전교조로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인원이 됩니다. 또한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