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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기도로 중국 명태조(明太祖)된 法海스님

-노승으로부터 전해오는 탁발승이었던 ‘주원장’ 이야기-

 
▲ 明 太祖 주원장의 얼굴 


중국의 역대 황제 기운데 유일하게 탁발승(托鉢僧)이 25세에 군문(軍門)에 투신하여 20년만에 황제가 된 사람이 있다. 속성은 주(朱), 아명(兒名)은 여덞째 아들이라 해서 중팔(重八), 법명은 법해(法海)스님이다. 그는 훗날 지위가 높아지자 이름을 품위있게 짓는다며 주원장(朱元璋)이라 개명했다. 그는 탁발승으로서 식주(息州), 진주(陳州), 신양(信陽), 회서(淮西) 등 지방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원(元)나라의 군사들이 자신이 살던 황각사(皇覺寺)를 불태워 버리자 분격(奮激)하여 원(元)나라의 폭정에 대항하여 싸우든 의병인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쓴 홍건군(紅巾軍)에 졸병으로 투신하였다.

중국 땅에 몽고군을 내쫓을 영웅을 고대갈망하던 한족(漢族)들

몽고 징기스칸의 후손이 중국을 침공하여 나라를 세웠으니 원(元) 제국이다. 원을 세운 몽고군은 한족(漢族)이 다시는 무장하여 대항하지 못하도록 한족은 활, 칼, 창 등 무기를 제조하여 지닐 수 없도록 사형의 중형으로 다스렸고, 폭정, 학정으로 통치를 했다. 따라서 탄압받는 한족의 원성은 충천하였다. 한족의 가슴속에는 중국 땅에 하루속히 한족(漢族)의 영웅이 나타나 중국 땅을 지배한 몽고족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漢族)의 영웅이 새나라를 건국하여 폭정, 학정이 없는 천하태평이 오기를 학수고대하였다.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4년(1344, 재위 12년째)의 상반기에 회하(淮下) 지역에는 전례없는 혹심한 가믐이 들어 수확이 어려운 가은데, 메뚜기떼들의 피해(蝗災)와 전염병의 창궐로 백성들이 도처에서 숙수무책으로 죽어 나가고 마을마다 곡성이 낭자하여 끊이지 않았다. 백성들은 비참한 심정으로 비를 내려주십사, 최고신이라는 옥황상제님께 빌어도 보고, 산신님께 빌어도 보고, 용왕대신 등에게 애걸복걸 빌어 보았지만, 비는 전혀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절망 해 있을 때, 원나라의 관리들은 밀린 세금을 거둬 드린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관아에 붙잡아다 “돈을 내던 지, 죽던 지”를 호령하며 인정 사정 없이 곤장을 내리쳤다. 고장촌(孤庄村)에 사는 빈농 주중팔의 아버지 주오사(朱五四)도 밀린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아에 붙잡혀가 죽도록 곤장을 맞다가 실신, 피투성이가 되어 업혀서 집에 돌아왔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64세 4월 6일에 통한의 눈을 감지 못하고 죽었다. 관아의 졸개들은 시신이 누워 있는 집안을 뒤져 쌀 한 톨 없이 빼앗아 갔다. 4월 9일에는 장남인 주중사(朱重四)가 굶주리다가 죽었다. 이어 4월 22일 중팔의 어머니 진이랑(陣二娘)도 굶어 죽었다.

집안에 아버지, 어머니, 형의 시체가 누워 있는 가운데 어린 중팔은 원나라를 원망속에 훗날 복수를 다짐하며 소리 쳐 울고 울었다.

황각사의 행자로 들어가다

중팔은 관을 살 돈이 없어 간신히 땅속에 부모형제를 묻고 나서는 가까운 황각사를 찾아가면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황각사에 들아가 행자 시절을 시작했다. 황각사에는 십여명의 승려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 주지는 덕축(德祝)이었고, 사찰의 큰 어른인 조실(祖室)은 고빈(高彬) 이라는 노승이었다. 고빈은 주중팔의 관상을 보고 마음속에 크게 놀랐다. 장차 크게 될 인물이었다. 중팔은 황각사에 가장 서열이 낮은 행자였기에 낮에는 정신없이 사찰 일을 해야 했다. 고빈 노스님은 남들이 다 잠든 야반삼경(夜半三更)에 코고는 중팔을 깨워 은밀히 글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속에 항상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외우고 원을 세워 가호 있기를 기도하거라. 반드시 관세음보살님은 너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

야반삼경에 특별 과외공부를 시키는 고빈 조실스님을 지켜보는 주지 덕축은 엉뚱한 걱정을 했다. 중팔에게 주지직을 빼앗기지 않는가, 라는 걱정으로 장탄식을 토했다. 여타 승려들도 황각사 주지 노릇을 한 번 하겠다는 소망이 있는데, 조실스님이 중팔을 편애하는 것을 보니 장차 주지 희망은 난망하다고 생각하여 중팔을 시기, 질투, 증오하였다. 그들은 다투워 중팔을 괴롭혔다.

고빈노스님은 중팔에 무엇을 가르쳤을까? 중팔에게 철저히 보안을 요구하면서, 고빈노스님은 매일 밤, 중팔에게 불교의 핵심과 무경칠서(武經七書)를 가르쳤다. 수 년이 흐른 후, 고빈노스님은 주지를 위시하여 다른 승려들이 주지직의 감투 때문에 중팔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어느 날, 밤, 하산을 명령했다. “너는 황각사 주지로 인생의 목표를 두어서는 안된다. 하산하여 탁발승(托鉢僧)으로서 전국의 민심을 살피고, 너의 뜻을 세울 곳에 몸을 투신하라”는 밀지를 내려 하산하게 하였다. 당시 중팔은 18세의 나이로, 법명이 법해(法海)라는 승려가 되어 있었다.

원나라를 멸망시키려는 한족(漢族)의 승려들

당시 중국 땅에 폭정, 학정을 일삼는 몽고족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모든 사람이 신명나게 살 수 있는 한족(漢族)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앞 장 서 대중을 선동, 대중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한족 출신의 승려들이었다. 그 가운데 최고 지도자는 팽형옥(彭螢玉)이라는 고승이었다. 그는 원나라의 폭정, 학정의 고통속에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소식을 주었다. “미륵불이 하생하여 한족의 영웅으로 하여금 원나라를 중국 땅에서 내쫓고, 한족이 태평천하의 새나라를 건설할 것이니 백성은 궐기하라!” 는 것이다. 법해스님도 탁발길에 팽형옥 고승의 예언을 듣고 눈이 번쩍 각성되었다.

팽형옥이 불단(佛壇)을 만들고, 향(香)을 피우고, 경을 외우며 받드는 신(神)은 미륵불(彌勒佛)과 명왕(明王)이었다. 주요 소의경전으로는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이종삼제경(二宗三際經), 대소명왕출세경(大小明王出世經) 등이 있었다. 그는 원주(袁州) 지금의 江西 宜春)에서 출가하여 법해스님의 고향인 회서(淮西) 지역에서 포교 하여 남파(南派)라고 불리운다. 또 다른 계통은 북파(北派)로서 우두머리는 조주(趙州) 난성의 한가(韓家)였다. 한가는 몇 대째 백련교(白蓮敎)의 교주였다. 한산동(韓山童)이 교주가 된 후 예언하기를 “천하에 난(亂)이 난다.”고 선전하며 “미륵불이 나올 것이다. 명왕이 나올 것이다.”하며 지지 세력을 모와 봉기, 원(元) 조정에 맞서 전투룰 벌였다.

팽형옥과 한산동은 한결같이 미륵불, 명왕이 나타나 원나라를 멸망시킨다고 선전하여 봉기했는 데, 봉기군은 의병(義兵)이라 자칭했고, 머리에 홍건(紅巾)으로 감싸 홍건군(紅巾軍)이라 불리웠다. 반면에 원나라에서는 홍건적(紅巾賊)이라 불렀다. 팽형옥, 한산동 두 사람이 떠받드는 신은 미륵불(彌勒佛)이기 때문에 미륵교(彌勒敎)요, 명왕출세를 예언하기에 명교(明敎)라고 하였다. 훗날 법해스님이 세운 한족(漢族)의 나라 이름을 명(明)이라 칭한 것도 법해 자신이 미륵이요, 명왕으로 자처한 것이다.

탁발길에 도깨비에게 깨달음을 얻다

법해는 탁발 길을 다니면서 민심이 원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결의 되다시피 되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어느 날 법해는 탁발길에 어느 부자집에서 벌이는 잔치 음식을 걸인들과 함께 배부르게 얻어 먹고 달 밝은 초원에서 걸인들과 잠을 청하고 있었다. 비몽사몽간에 도깨비들 서 너 명이 몰려왔다. 도께비들은 걸인 하나 하나를 발로 차면서 저주에 찬 악담 논평을 해댔다.

“에구 이 자식은 3대를 얻어먹는 걸인 노릇을 하고 있구만.”, “저 새끼는 4대째야.”
도깨비들이 법해쪽으로 다가섰다. 도깨비 하나가 법해에게 “이 거지 새끼는 뭐여?”하고 발길질을 하려는데, 늙은 도깨비가 손가락을 세워 입에 세우며 “쉬- 이 사람은 황제가 될 운명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양아치로 살고 있고만. 양아치로 살다 죽으면 안되는 데….” 도깨비들은 법해를 향해 이구동성 “안타깝다!”고 말하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법해는 깨어나 곰곰 자신의 운명의 진로를 생각했다.

오랜만에 황각사에 법해가 돌아오니 고빈 노스님은 열반에 들어 있었다. 주지 덕축이 주지 겸 조실이 되어 있었다. 주지를 위시해서 승려들은 법해가 돌아온 것에 심기가 편치 않았다. 주지직을 법해에게 빼앗길까 걱정하는 것이다. 법해를 다시 탁발길에 내쫓으려는데, 법해에게 편지 한 통이 왔다. 마을 친구 탕화(湯和)가 장정 십여명을 데리고 홍군(紅軍)에 입대하여 천호장(千戶長)이 되었다며 법해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법해에게 주지직을 빼앗갈까 시기 질투하는 어느 승려가 재빠르게 하산하여 관아에 황각사에 홍건적과 통하는 승려 법해가 있다고 고변했다.

원(元)의 관리와 병사들은 법해를 붙잡아 공을 세우려 했으나 법해는 재빨리 피신했다. 관리와 병사들은 노기충천하여 황각사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법해는 멀리 숲속에서 불타는 황각사를 향해 큰 절을 올리면서 울며 그동안 자신을 받아 준 부처님, 학문을 전수해준 고빈 노스님께 진심으로 울며 감사의 인사와 작별의 인사를 드렸다. 법해는 하산하여 호주(濠州)에 있는 홍건부대 가운데 곽자흥(郭子興)이 부대장으로 있는 부대에 졸병으로 투신했다. 그 때 법해는 누더기 같은 승복을 입은 25세의 승려였다.

관음기도로 명태조(明太祖)가 되다

홍건군은 대부분 글자를 모르는 무식한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제 법해가 아닌 주중팔은 졸병 신세였지만, 고빈노스님으로부터 배운 병서의 가치가 빛나기 시작했다. 주중팔의 작전대로 전투를 하면 언제나 승리였다. 부대장 곽자흥이 호감을 갖고 주목하였고, 양자로 인연을 맺고 싶다고 다가왔다. 또, 곽자흥의 양녀 마씨(馬氏) 처녀가 청혼해왔다. 부대장의 양자요, 부대장의 사위가 되었으니 그 부대에서는 고속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곽자흥이 죽자 그 부대는 결국 주중팔의 부대가 되어 버렸다. 주중팔은 여러 갈래의 의병들을차례로 격파하여 통일 시켰고, 원나라를 멸망시켰다. 팽형옥 고승과 한산동 백련교 교주의 예언대로 한족출신의 영웅이 나타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제국 명나라를 세운 것이다. 탁발승인 법해스님은 25세에 홍군에 졸병으로 투신하여 45세에 국호를 명(明)이라 하고 황제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의 인생은 고속 출세를 한 것이다.

주중팔은 이름이 상스럽다 하여 품위있게 주원장(朱元璋)이라 개명하였다. 그는 황궁 내실에 법당을 만들어 부처님과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항상 관음기도를 했다고 하며, 법당 뒷방에는 자신만이 출입하는 방에는 그 옛날 자신이 입었던 탁발승려의 헤어진 삿갓, 낡은 승복을 귀하게 보관하고 어떤 때는 낡은 승복을 어루 만지며 울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우리 부처님은 왕자의 자리도 헌신짝 버리듯 하고 출가 수행자가 되었는데, 나는 수행자로서의 길을 가지 않고 황제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 악업을 지었는가…. 부처님 참회합니다….”

훗날, 주원장은 염주를 한 알 한 알 돌리면서 “관세음보살”을 명호 정근을 하면서, 소원을 이루어주신 것에 관음보살님께 감사하고, 이제 자신의 영혼을 관음보살님께 의지한다며 숨을 거두었다.

산사에 들어온 불우한 소년들에게 희망주는 노승들

내가 처음 전북 고창 선운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주중팔이 만났던 고빈 노스님같은 분을 만났다. 향엄(香嚴) 노스님이었다. ‘6,25 전쟁’으로 주중팔처럼 산사에 들어온 나는 절망과 슬픔뿐이었다. 그 때 생각 한 번 잘 못하면, 자살하기 좋은 때였다. 향엄노스님은 용기를 주며 이렇게 말했다.

“명태조 주원장은 너처럼 어릴 때 불우했지만, 스스로 노력해서 마침내 명나라의 황제가 되었다.” 촌음을 아끼지 말고, 공부하고, 늘 가슴에 슬픈 생각은 지우고, 오직 “관세음보살” 기도로서 각오를 다져라. 부처가 되든, 세속에서 성공의 길을 가든, 오직 관음기도를 하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단다.“

무상한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내가 노승이 되었다. 나는 산사에 갓 들어 온 슬픔과 절망의 빛이 보이는 행자, 사미승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첫째, 관음기도를 하면서 중생에 헌신하는 수도승이 되라고 훈시하고, 둘째, 너도 주원장 처럼 큰 일을 할 수 있으니 부지런히 관음기도하고, 면학에 힘쓰라, 훈시한다. 어찌 나혼자 뿐일까?

주원장은 죽기 전에 “부모형제가 원나라의 학정으로 굶어죽지 않고, 하루 세 끼 밥을 먹을 수 있었다면, 칼을 잡고 전장터에 가지 않고, 일 잘하는 농부로 만족했을 것이다”고 술회했다.

끝으로, 그는 명문거족 출신이 아닌 탁발승 출신이기에 당시 명태조를 뒤에서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이 많았지만, 진정한 영웅 호걸에 출신은 문제가 안된다고 반박했다. 그는 죽기 전 스스로 자신의 황릉비(皇陵碑)의 비문(碑文)에 이런 뜻의 글을 적었다. “나는 한 때, 탁발승이요, 유개(流?-걸인) 노릇을 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 한족의 염원인 원(元)을 멸하고, 한족의 제국 명나라를 건국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역사에 남겼다.
이 이야기는, 마음속에 기도하고, 열심히 실천하면 누구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주제이다.◇


李法徹(bubchul@hotmail.com/www.jabg.net)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