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에 연세대 박명림 교수가 이명박 정부의 외교 참사라는 제목의 時評을 썼다. 참사는 參事가 아니고 慘事(참사)이다. 그는 한일정보보호협정 추진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정보의 생리를 잘 모르는 학자의 너무나 단정적인 주장이다. 정보는 겸손하게 다뤄야 할 분야이다. 정보를 만지는 사람이 내가 제일 많이 안다든지 너는 몰라는 식으로 일하면 정보가 오지 않는다. 경찰서를 출입하는 기자가 나는 서장만 상대하면 돼라면서 형사들을 무시하면 맨날 落種(낙종)할 것이다. 막강한 미국 CIA도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과 협력하지 않으면 對테러전을 수행할 수 없다. 정보는 생리상 주고 받는 것이고, 나눠 갖는 것이다. 북한, 중국, 러시아(舊소련)에 관한 한 일본은 정보강국이다. 한국은 일본의 막강한 정보력으로 큰 득을 본 적이 여러 번 있다. 1983년 9월1일 사할린 상공에서 실종된 KAL 007 점보기가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에 의하여 격추되었다는 증거를 맨 먼저 확보한 것은 박명림 교수의 주장과는 달리 미국도, 한국도 아닌 일본이었다. 일본 자위대 감청기지가 KAL기를 격추시킨 소련 전투기와 地上 관제사 간의 대화를 녹음, 이를 미국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부산 사상), 박지원 최고위원(전남 목포), 노회찬 통합진보당 대변인(서울 노원병) 등 야권 유력 인사들이 9일 공개된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에 출연했다고 한다(조선일보 보도).문 고문은 이날 대선에 출마하느냐는 나꼼수 진행자 김어준씨의 질문에, 부산 사상구에 국회의원 출마하면서 제가 정치적으로 조금 더 떴다면서 그래서 이제 분명한 것은 국회의원 해보고 싶어서 이렇게 출마한 것은 아니다. 부산 정치 바꿔놓고 싶고 또 그렇게 돼야만 대선도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 정치를 바꾸는 일에 내가 기여하고 싶다고 해서 출마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노력은 다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저질막말, 거짓선동 패거리인 나꼼수의 도움을 받아 표를 얻으려는 문재인씨의 행태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다. 표가 된다면 포르노 배우와도 어울리겠다는 건가? 나꼼수의 정신적 폐해는 포르노 배우에 비교할 바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에선 벌써 사회적으로 매장되었어야 할 수준의 人格體(인격체)에 영합,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천박한 정신의 소유자가 一流(일류)국가 문턱에 서 있는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 위대한 李承晩(이승만), 朴正熙(박정희)
인터뷰에 나가서, 내가 全斗煥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면 놀라는 기자들이 더러 있다. 모든 대통령은 聖君이어야 하고 모든 스포츠맨은 슈퍼맨이어야 하고 모든 기업인은 無慾의 자선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그러면서 자신들은 모순덩어리이다) 기자들의 눈에는 榮辱(영욕)투성이인 全斗煥 전 대통령의 욕된 면만 보지 않으려 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내가 全斗煥 정권에 의하여 두 번 기자직에서 해직된 적이 있다고 말하면 왜 그런 사람이 全씨를 긍정적으로 보느냐고 이상한 눈초리로 대한다. 公的 판단에 私感을 개재시키면 안 된다는 원칙이 생소한 모양이다. 수치로 본 全斗煥 대통령의 부정할 수 없는 功積을 싣는다.오늘날 한국에서 識者를 자칭하는 사람들중에는 全斗煥 정권을 변호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金泳三 전 대통령이 주도한 소위 역사재판에 의하여 全斗煥 정권의 출범 과정은 反헌법적인 행위로 규정되었다. 이 판결에 대한 異見도 많다. 全斗煥 정권의 출범에 대한 논란과는 별도로 이 정권이 남긴 實積에 대해서는 異見이 적다. 수치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정치는 動機보다는 결과를 重視한다. 객관적 수치로 나타나는 全斗煥 정권의 실적이 역사적
“내가 노정연(노무현 딸) 측으로부터 돈상자 일곱 개를 받아 경연희(노정연의 知人) 쪽으로 넘겨주었고 100만 달러로 환치기되어 미국의 경연희에게 송금되었다”는 이균호 씨의 주장과 그가 공개한 돈상자 사진 檢證.이균호 씨가 자신의 원 룸에 일시 보관하였던 일곱 개의돈상자 중 네 개를 먼저 전달하고 나머지 세 개의 돈상자를휴대전화로 찍어 둔 것. 만 원 권이 꽉 찬 세 개의 사과상자를 이균호(미국명: 제임스 리)씨가 휴대전화기로 찍은 시각은 사진 밑에 2009년 1월12일 오후 3시6분으로 적혀 있었다. 지난 1월8일 경기도 광주의 한적한 카페에서 만난 李씨는 그 사진을 보여주면서 필자에게 이렇게 설명해갔다. 그 며칠 전 미국 코네티컷 주 팍스우드 카지노에서 한국인 담당 이사로 근무 중이던 형 이달호(미국명 돈 리)씨가 동생 이균호 씨에게 전화를 걸더니 경연희 씨를 바꿔주었다고 한다. 李 씨는 형이 관리하는 카지노의 단골손님인 경연희 씨(삼성석유 전 회장 딸)를 두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경 씨는 누군가가 연락을 할 터이니 돈을 받아달라는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직후에 ‘경연희 씨로부터 소개를 받았다’면서 이균호 씨의 휴대전화로 연락이 왔다. 두 사람은 만날
재록: 敵과 惡에 맞선 反共은 愛國이고 正義! 安秉直 교수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보수는 反共을 강화하고 자칭 진보는 從北을 버려야.” 保守가 반공을 버리는 것은 자유와 민주와 시장과 통일과 국가와 양심을 버리는 것이다. 반공을 버린 保守는 가짜이다.1. 後發 민주주의를 先進 민주주의의 잣대로 裁斷(재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安秉直(안병직) 교수가 자신의 문화일보 인터뷰 에 대한 필자의 비판에 反論(반론)을 썼다. 한국 현대사를 主導(주도)해온 反共노선의 효용성과 한국식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재미있는 토론이 될 것 같아 再반론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의 글에 대한 인터넷 독자들의 의견들도 수준 높은 게 많아 배움이 되었다. 安 교수의 인터뷰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 핵심이 간단하였다. 요약하면 이렇다. 安 교수는 반론에서 나의 비판 요지를 잘못 전달하였다. 내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출발부터 온전한 것이었다’면서 과거 정권을 무조건 옹호한 것처럼 썼다. 나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지금도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不毛(불모)지대에서 태어나 공산세력의 도전을
종북망나니들을 가장 쉽게 無力化시키는 방법은 조롱이다. 이들이 아직도 김정일 분향소 하나 세우지 못하는 건 그들도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죽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從北세력은 김일성 김정일이란 惡靈에게 영혼을 판 자들이다. 이들은 敎主 김정일이 죽은 지금 공황상태에 빠져 있을 것이다. 28세 철부지 김정은에게 代를 이어 충성을 바쳐야 하는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것이다. 종북들은 그야말로 쪽 팔리게 생겼다. 그들은 김정일을 믿고 느슨한 한국사회에서 민주투사, 개혁주의자, 복지주의자로 위장, 국민들을 속여 왔지만, 김정은을 경배하려니 일말의 양심과 수치심이 발동할 것이다.인간은 남을 속일 수는 있지만 자신을 속이긴 힘들다. 김정은 시대의 개막은 종북세력들이 조롱거리가 되는 시대이다. 종북조롱시대의 개막이다. 이들이 아직도 김정일 분향소 하나 세우지 못하는 건 그들도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죽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종북세력을 민주, 개혁, 복지세력으로 알고 속아넘어갔던 사람들도 從北的 정체를 알게 되면 침을 뱉게 될 것이다. 좌경화한 언론이 종북세력의 實體를 덮고 넘어가는 걸 많이 도왔지만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그
6.25 남침 때 의정부 戰線을 맡은 7사단장이었으며, 낙동강 방어전의 지휘관(2군단장)으로서 다부동 전투(1사단장은 백선엽)와 永川會戰을 승리로 이끌어 백척간두의 대한민국을 구한 劉載興 전 국방장관이 26일 오후 宿患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인 劉 전 장관은 제19代 (1971∼1973) 국방부 장관도 역임했다. 1921년에 일본 나고야에서 출생한 劉 장군은 충남 공주가 고향이다. 아버지 劉升烈(유승렬)은 대한제국 시절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갔다가 日帝의 압박으로 폐교되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26기로 졸업한 사람이다. 유승렬 장군은 6.25가 났을 때 3사단장(대령)이었다. 父子가 開戰 때 함께 사단장이었다.6·25전쟁 때 함께 從軍했던 父親(左)유재흥은 일본 육사를 1941년에 졸업한 후 일본 본토 방어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일본 항복후 귀국, 국군의 前身인 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가 받은 군번은 10003이고 대위였다. 그는 建軍과 建國에 큰 공을 세웠다.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으로 있다가 1948년에 발생한 4.3 좌익 폭동을 수습하기 위하여 만든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전보되었고, 제6사단장-제2사단장 겸 태백산 지구 전투사령
단군 이래 최대 최악의 권력형 금융사기 사건. 뇌물을 銃口처럼 사용, 자본주의와 法治주의를 무너뜨린 大逆罪 -노무현 정부로부터 ‘최우수 사회공헌대상’ 및 ‘서민금융 최우수경영대상’을 받은 부산저축은행이란 이름의 금융사기단 正體-광주일고 출신 마피아들은 두 번이나 수사・재판을 통과하고도 범행 계속. 대통령과 검찰을 압도한 비호권력-금융사기단의 손실까지 公的 자금으로 메워준 금감원과 자산관리공사의 배짱-“추가 도산과 구속자 피하기 위하여 兆 단위의 공적 자금 퍼 붓는다” 사진을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보실 수 있습니다.왜 작아지는가? 부산저축은행 사건의 본질은 不實경영이 아니다. 建國 이래 최대, 최악의 금융사기 사건이다. 이 사기 사건의 主犯은 광주일고 출신 경영진(대주주)이고 비호세력은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에 걸쳐 있다. 비호세력은 공무원 집단뿐 아니라 언론, 사회단체 등도 포함된다. 大檢 중수부에 의하여 구속되었거나 수사대상이 된 사람들은 금감원, 감사원, 청와대, 국회의원, 기자, 국세청 직원이다. 아직은, 경제관료와 경찰관 및 검사와 판사가 빠져 있다. 이런 권력형 부패사건이 일어나면 발 벗고 나서 목소리를 높이던 자칭 진보세력이 침묵하
한국군이 전면 남침이란 결론을 내린 것은 남침 여섯 시간 뒤였다. 박정희는 고향에서 전보를 받았다. 새벽 3시 직후부터 全(전) 전선에서 인민군의 남침을 전하는 보고가 육본 정보국 상황실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全面戰(전면전)이란 판단을 한 당직장교 김종필 중위는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도영 회고록》 중)장도영 국장은 육본의 국장들 가운데 가장 먼저 새벽 5시쯤 나왔다. 새벽 4시 서울역, 6사단 정보참모로 전출되는 前(전) 전투정보과장 유양수 중령은 전송 나온 이영근 중위와 두 명의 장교들에게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정신 차려 근무하라”고 당부하고 원주行(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네 시간 뒤 원주 사단본부에 도착해서야 그는 6사단이 공격을 받고 있음을 알았다. 김종필은 육본의 국장들에게 연락을 취한 뒤, 귀가하여 막 잠이 든 이영근 중위를 비롯한 정보국 장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새벽잠을 깨웠다. 그는 또 작전국으로 달려가 일직사령에게 “전군에 비상을 걸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사령은 “나에겐 그런 권한이 없다”고 했다. 전군 비상령이 내려진 것은 전면 남침 후 4시간이 지난 뒤였다.인민군의 남침에 대한 작전을 총지휘해야 할 채병덕
어제 오후 朴正熙 기념-도서관 건설 부지에 가 보았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서쪽으로 뻗은 大路는 왕복 8차선이다. 왼쪽으로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人工 野山 난지도(하늘, 노을공원)가 나타난다. 열병합 발전소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날은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기상에 따라 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박정희 기념-도서관 부지는, 앞으로는 난지도와 열병합 발전소, 왼쪽으로는 고층 아파트, 뒤로는 야산으로 막힌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터파기를 하다가 중단된 모습이다. 여기에 朴正熙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지하 1층, 지상 2층, 연건평 약1600평의 건물을 짓기로 확정한 상태이다. 나는 현장에 서서 이곳에 지어선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기념관이 들어설 곳은 앞뒤로 꽉 막힌 곳이다. 물론 漢江이 보이지 않는다. 偉人들의 기념관은 공통적으로 전시 및 보존, 연구 및 교육, 문화 예술적 기능을 한다. 이 기능을 발휘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사람들이 편하게 올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포구 상암동 쓰레기 매립장 옆의 한 건물을 구경하기 위하여 全國에서 사람들이 올 것인가? 어제 한 시간 동안 기념관
나는 12.12 사건과 인연이 깊다. 1987년 9월호 月刊朝鮮에 鄭昇和 당시 계엄사령관을 처음으로 인터뷰한 이후, 이 역사적 사건의 내막에 관한 기사를 많이 썼고 책도 두 권 냈다. 1995년엔 12.12 사건 당시 지휘관들의 육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입수하여, 10월호 부록으로 냈다. 내가 쓴 기사가 수사, 재판, 청문회에서 많이 인용되었다. 취재가 계기가 되어 이 사건의 主役들과도 친해졌다. 鄭昇和측 사람들과 全斗煥측 사람들을 두루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12.12 사건으로 全斗煥, 盧泰愚 정권이 탄생하였다. 광주사태는 그 과정의 사건이다. 역사적 영향력에서 12.12 사건은 광주사태보다 더 크다. 이틀 뒤가 되면 12.12 사건 30주년이다. 우선 12.12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된 鄭昇和 장군의 인터뷰 기사를 싣는다. 한국의 현대사를 변혁시킨 10·26정변과 12·12사태의 현장 한가운데 있던 사람, 그 비밀을 간직하고 조용하게 살아온 鄭昇和 전 계엄사령관이 7년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 우리 군대를「민주국가의 군」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고 주장하는 鄭씨는 그 운명적 밤에 회오리친 역사의 증언자로 나섰다
자유선진당의 비례대표 1번인 李瑛愛 의원이 세종시 원안 고수란 당 방침에 공개적으로 反論을 제기하였다고 조선일보가 오늘 보도하였다. 李 의원은 7일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대통령과 국회가 서울에 있는데 행정부만 이전한다면 國政 운영에 막대한 非효율과 국가 안보에 커다란 위험을 초래한다고 李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론을 지지했다. 李 의원은 또 충청도에 지역구를 갖고 있는 의원들의 입장을 이해하여 그동안 참고 있었다며 세종시는 충청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문제라고 강조하였다. 李 의원은 다른 의원들이 사퇴서를 李會昌 총재에게 맡겼는데도 자신만 동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정치투쟁의 한 방편으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이제는 국회의원이 사퇴서를 낸다고 놀라는 국민도 별로 없다고 말했다. 다른 선진당 의원들은 멋대로 개인행동을 한다, 당이 싫으면 국회의장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떠나라고 비난하였다고 한다. 李 의원이 李會昌 총재와의 온랜 친분이나 黨利黨略을 묵살하고 오직 國益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헌법은 국회의원에게 청렴의 의무, 國益 우선의 의무를 강제한다. 李 의원이 세종시는 충청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문제이다라고 한
1951년 6·25 전쟁 때 미군이 한국 공군에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李承晩 대통령은 불복한 한국군 장교를 처형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張志良(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회고록 내용을 바로잡는 데 앞장선 사람은 張 총장의 후배이기도 한 尹應烈(윤응렬) 전 공군작전사령관이다. 그의 이런 노력은 공군으로 하여금 미군과 李承晩 대통령이 해인사 폭격에 관여한 사실이 없고, 폭격 요청은 경찰이 한 것이며, 金英煥(김영환) 편대장이 스스로 폭격 회피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공식으로 확인하도록 하였다. 올해 82세인 尹 장군은 일본군, 북한군, 한국 공군에 근무한 경험이 있다. 日帝 시대인 1943년 평양3中 재학중 일본의 소년항공병학교에 들어가 조종훈련을 받고 이듬해 자바 戰線에 배치되었다. 소년항공병학교 제15기 졸업생인데, 수십 명의 한국인이 동기생으로 배출되었다. 이들은 해방 뒤에 북한과 한국 공군의 창설에 참여하게 된다. 尹應烈씨는 1945년 8·15 해방을 프놈펜에서 맞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북한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일제 시대 때 전투기 조종 경험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북한空軍 창설에 동참하였다고 한다. 북한空軍 창설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사
李대통령은, 김대중, 김정일 세력에 잘 보여 자신의 인기를 높이고 퇴임 후의 안전을 보장받겠다는 계산인 것 같은데 이는 치명적 誤判으로 드러날 것이다. 李明博 대통령은 헌법정신과 관례를 무시하고 국가반역범죄 前歷者, 對北 불법송금 사건 총책임자, 6.15 반역선언자, 北核개발 지원혐의자의 장례식을 國葬으로 치르겠다고 결정하였다.대한민국의 정통성, 정체성, 정당성을 대한민국의 대표 되는 자가 허물어버린 것이다. 국가의 가치관, 진실, 正義, 명예, 권위를 수호할 의무를 지닌 대통령이 국가를 끌고 가서 反국가 세력 앞에 무릎을 꿇린 셈이다. 대통령이 조국을 능욕한 것이다. 국가를 희생시킴으로써 김대중, 김정일 세력에 잘 보여 자신의 인기를 높이고 퇴임 후의 안전을 보장받겠다는 계산인 것 같은데 이는 치명적 誤判으로 드러날 것이다. 김대중 절대 지지자보다 절대 반대자가 두 배 이상 많다. 이들의 분노는 李明博 대통령에 대한 거부 운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國葬 보이콧 운동도 일어날 것이다. 弔旗 안달기, 弔問 안 가기 운동이 벌어질 것이다. 이런 운동은 김대중 거부 운동이라기보다는 李明博 거부 운동이란 성격이 더 강하다. 李明博과 애국세력은 이제 敵對관계로 바뀔 것
1. 심층취재: 金大中의 초조한 생존투쟁 40년에 걸친 김일성-김정일-김대중 관계의 총정리. 연방제로 맺어진 질기고 질긴 관계. (月刊朝鮮 2006년 12월호) 『미국이 못살게 굴어 核실험』 지난 10월9일 金正日이 核실험을 한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예상 외였다. 金正日이 核실험을 하면 그동안 對北 굴종적 태도를 보여 왔던 盧武鉉 대통령도 일선을 긋고 대결자세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 관측이었다. 10월9일 오후 盧대통령은 그런 자세 변화를 강하게 시사했다. 『한국 정부도 이 마당에 와서 포용정책만을 계속해서 주장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니겠습니까. 효용성이 더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처럼 모든 것을 인내하고 양보하고 북한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다 수용하고, 이렇게는 해나갈 수 없게 된 것 아닙니까』 기자는 이 말을 듣고 나의 홈페이지(natizen.com)에 이런 글을 올렸다. 盧대통령이 정책 전환을 모색하고 있던 지난 10월11일 金大中 前 대통령은 전남大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북한의 核보유를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면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