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땅에 매장되어 있으면서 채굴 능력이 없어 거의 방치 상태에 있는 철광 30억톤, 석탄 300억톤 그리고 장대한 산림 자원 등 지하 천연자원이 자원외교라는 이름 하에 중공의 손에 넘어가고 있다. 중공이 渾春에서 羅津-先鋒까지 도로를 닦고 항만을 조차했으며 주민경제의 장마당에 나도는 물건 태반이 중공제이고 중공의 元화가 위세를 떨치고 있으니 이는 우엇을 의미는가? 중공이 노리는 북한의 屬國化는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中共의 對北朝鮮 機密-File -6-
조선에도 대중공정책의 변화가 엿보인다. 2006년 초두에 김정일이 중공을 비공식방문한 뒤의 일이었다. 중공 땅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장기간에 걸친 이 비공식방문은 실은 갑자기 이루어졌다.
방문 직전 마카오 소재 은행 방코 델타 아시아(이하 BDA)가 미국 재무성의 타깃이 되어대조선금융제재가 가해졌기 때문이다. 동결된 김정일정권의 자금은 2500만 달러로 일국의 자산으로서는 별것 아니지만 만일 미국에 의한 이 본보기가 장기화하면 조선의 대외무역 전체에 파급되어 붕괴를 가져올만큼 위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조선이 알아차렸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술하기로 하고 어떠튼 김정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쪽에서 중국공산당대외연락부를 통해 중공에 전달된 표면상 목적은 중공을 남북으로 잇는 대동맥 京廣線(북경-광주 간철도) 연안의 각 주요도시의 경제발전상을 시찰하고 중공의 경제성장 경험을 배우고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의 방중 목적은 다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중공으로부터의 대조선경제원조와 직접투자를 늘려달라는 요청이고, 두번째는 다급해진 BDA 제재에 관해 중공의 도움을 빌어 미국의 금융제재에서 풀려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중공 당국은 김정일 방문을 환영하고 극진히 대접했다. 이제까지 어느 나라 국가원수에게도 볼 수없었던 초 VIP 대접을 해줬다.
우선, 중국공산당 서열 톱에서 9위까지의 정치국상무위원 胡錦濤 吳邦國 溫家寶 曾慶紅 買慶林 黃菊 吳官正 李長春 羅幹 등 전원이 출석해서 회담을 갖고 그 중 증경홍이나 이장춘 등은 김정일의 여정에 동행해 주는 최고 예우를 베풀어 줬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이 때 바랐던 것은 중공으로부터 외교의례적으로 최고 예우를 받고자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이번 방문의 제일 목적을 이루지 못한채 돌아갔다.
중공 지도부는 계속 조선에 대한 경제원조를 약속하고 직접투자를 늘린다는데에 동의는 했으나 구체적인 금액이나 내용까지는 언급이 없었다. 또한, 조선측이 무엇보다 기대했던 국제금융제재 문제에 관한 협력에 대해서는 중공측은 끝까지 말을 흐리고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2006년 1월 10일부터 18일까지 긴 열차여행을 수행한 외교부 통역관의 말이 의하면 김정일의 표정과 태도는 날이 갈수록 변해가는 것을 알 수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중공측 수행원들과 말을 걸어 농담도 하더니 여행 종반에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제 방에 죽치고 앉아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한다.
공식활동 아닌 시간에는 제 방에 조선측 수행원들 朴鳳柱(총리) 姜錫柱(외무성 제1차관) 朴男基(노동당중앙계획재정부부장) 李光濠(당중앙과학부부장) 등 심복을 모아놓고 빈번히 태개책을 숙의하는 모습이었다.
중공을 떠나는 자리에서는 배옹나온 정치국위원후보 王剛과 악수는 했으나 얼굴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일찌감치 중공도 의지할 데가 아니라는 실망감이 역력한 김정일은 평양으로 돌아가자 즉각 대 중공정책의 일대 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해 7월 미사일 발사 때에는 이미 중공에의 사전통고는 하지않는 정책전환을 분명히 했고 그뒤 중공이 조선에 대한 유엔의 비난결의에 동조하자 북경주재 조선 대사가 연일 외교부에 항의하는 사태를 빚었다.
그뿐 아니라 북경에 사는 친북 조선족들을 조직 동원해서 외교부 앞에 끌고나와 [중공은 배신자] [중공은 배반자]라고 구호를 외치는 행패를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일은 물론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