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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정치철학--정천구, 서울디지털대 석좌교수

  • No : 69987
  • 작성자 : 뉴스관리자
  • 작성일 : 2013-09-18 19:56:15
  • 조회수 : 3123
  • 추천수 : 2

<본각선원 2013년 2학기 금강경 생활특강-금강경과 정치철학>

 

금강경과 정치철학

 

정천구, 서울디지털대 석좌교수, 영산대 전 총장

 

1. 머리말

부처님은 세간세속제(世間世俗諦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관습적 진리)와 승의제(勝義諦, 궁극적 진리)라는 두 가지 진리(이제二諦)에 의해 법을 설하신다고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보살은 말했다. 그는 이러한 이제의 구별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깊은 진실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금강경은 철저하게 세속을 벗어나 궁극적 진리의 세계, 즉 승의제에 도달할 것을 가르치는 경전이다. 이에 비해 정치철학은 국가는 어떻게 조직되고 운영되는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정치는 윤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전쟁의 원인은 무엇이며 평화는 어떻게 구축될 수 있는가? 등 인간이 집단생활에서 직면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다룬다.

부처님은 금강경과 같이 궁극적 진리에 관해 설하셨지만 또한 정치철학의 주제들과 같은 세속제에 관해서도 설하셨다. 8만대장경에 포함된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국가의 기원에 관한 이론, 나라를 지키는 방법에 관한 이론, 통치자의 덕에 관한 이론 등 정치철학적 의미를 가진 가르침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들은 승의제가 아니기 때문에 현대 정치의 문제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당시의 상황에 맞는 세속제를 설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아니라 현대의 정치철학을 말하려면 당시의 정치에 대하여 말씀하신 세속제보다는 궁극적 진리에 관한 금강경의 말씀에 견주어서 정치철학의 주제들에 관한 세속제를 논할 수 있다고 본다. 승의제는 변하지 않는 진리이나 세속제는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가변적(可變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강경과 정치철학” 강의에서는 금강경의 내용을 해설하면서 그 내용이 정치철학의 주제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논의한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설하신 승의제를 기본으로 삼아 현대 정치철학의 주제들에 접근해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금강경의 교설을 원용하여 정치철학이라는 세속제를 추출해 보는 시도임과 동시에 정처철학이라는 세속제를 통해서 금강경이라는 승의제에 관한 이해를 좀 더 풍부하게 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심은 어디까지나 금강경공부이다.

금강경을 공부하려면 먼저 이 경이 세속제를 설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분별로 표현할 수 없는 승의제로 인도하는 경전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승의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염불, 면벽수행과 화두참구, 주력, 간경 등 여러 방법이 제시되어 왔지만 나는 경을 독송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기원정사에서 1,250인의 제자들과 함께 금강경법회에 참여하고 있는 마음으로 경을 읽으면 읽는 사람과 부처님의 정신이 그대로 통하게 된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자꾸 읽다보면 나의 정신이 부처님의 가장 밝은 정신과 공명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경을 읽는 파동 또는 진동이 우주의 근본에서 나오는 진동과 공명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처님은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는 것이 수많은 재물로 보시하는 것보다 복이 크다고 금강경의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2. 금강경과 국가

부처님은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셔서 부처님이 되셨지만 기원정사를 짓는데 숲을 기증한 사람도 기타 태자로 알려져 있고 금강경을 32분으로 나누고 각 분마다 제목을 붙인 사람도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이다. 소명태자는 아예 태자수업을 금강경으로 받았다고 한다.

소명태자가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이라고 붙인 금강경의 도임부에 해당하는 제1품은 부처님이 사위국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 사위성으로 들어가 걸식하시고 본처로 돌아와 발을 씻으시고 좌정하여 정(定)에 드시는 일상생활을 소박하게 그려 놓았다. 진리를 터득하고 진리와 하나가 된 성자(聖者)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부처님이 계시던 사위국이 나온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캔지스강 유역을 따라 서북쪽에 사위성을 수도로 하는 코살라(Kosala)와 동남쪽에 왕사성을 수도로 하는 마가다(Magada)의 두 강대국이 있었고 주변에 16개국의 중소국(中小國)이 있었다. 많은 나라들이 군주국이었고 밧지, 말리, 사캬 등은 공화국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이 설하시던 당시의 정치적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있었고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를 존중하는 풍토가 있었다. 부처님은 정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대규모의 승단을 거느리고 자유롭게 설법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국가의 정치체제를 나눌 때 민주주의국가, 권위주의국가, 전체주의국가로 나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샤카는 공화국이고 부처님이 금강경을 설하시던 코살라나 법화경을 설하시던 영취산이 있는 마가다는 모두 왕국이다. 당시의 왕국은 오늘날의 권위주의국가와 유사하고 공화국은 오늘날의 민주공화국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전체주의 국가와 유사한 형태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체주의는 핵무기와 함께 20세기의 발명품이며 서양정치 철학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군주정치를 비롯한 권위주의 국가는 정치적 반대자에 대해서만 압제를 하지만 전체주의는 인간의 전 생활을 통제하고 생각할 자유도 주지 않는다. 유태인 학살의 주범 중 하나인 아이히만은 남미에서 숨어살다가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거기서 그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평범한 사나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재판을 관찰한 20세기의 위대한 정치철학자인 아렌트(Hannah Arendt)는 아이히만이 그렇게 된 것은 “생각하는 능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전체주의 통제는 사람들의 생각할 능력까지 말살했던 것이다.

공자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 가혹한 정치(苛政猛於虎 가정맹어호)라고 했지만 20세기에 태어난 전체주의 정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인류에게 주었다. 하와이 대학의 럼멜(R. J. Rummel) 교수에 의하면 지난 20세기 100년 동안 전쟁으로 3천 5백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이데올로기 운동에 의해 자기나라 정부에 의해 살해된 인명이 그 4배인 1억 7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나치독일의 6백만 명의 유태인 학살을 비롯해서 구소련의 공산주의 운동에 의해 6천 1백만 명, 중국공산당에 의해 3천5백만 명,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27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에서 희생된 인명은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알려졌던 것 보다 훨씬 많다.

기록을 분석해 보면 부처님은 여러 정치체제 중 공화국을 선호하신 것으로 해석되며 왕조체제 아래서도 정치와 투쟁하거나 정치에 예속되지 않고 정치에 초연한 입장에서 정치를 바른 길로 이끄셨다. 그러나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땅은 중생이 윤회하는 6도(六道) 중 지옥, 아귀, 축생 등 3악도에 해당하여 부처님이 태어날 곳은 아니다. 지옥, 아귀, 축생의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사회가 바로 그런 곳이다. 금강경을 읽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그런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 중 지옥중생이 다 성불할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원을 세운 지장보살과 같은 큰 원력과 능력을 갖춘 대력보살이라야 중생구제를 위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그런 곳에 간다.

금강경이 호국경전으로도 애송되어 왔던 것은 경이 우주의 진리와 하나가 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고 또 사람에게 직관적 힘과 통찰력을 갖게 해주기 태문이다. 위기의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하나하나를 보는 부분적인 지식보다는 전체적 국면을 꿰뚫어 보고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국가지도자에게는 그러한 통찰력과 판단력이 요구된다. 금강경을 읽으면 그러한 판단력과 통찰력을 키워주기 때문에 호국경전의 하나가 되었다고 본다. 이 문제는 뒷부분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3. 금강경과 사상해방

금강경은 제2품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존자가 문제를 제기하고 제3품 대중정종분에서 부처님이 포괄적인 답변을 하신 다음 하나하나씩 질의응답으로 진행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수보리 존자는 최고의 깨달음을 향하여 발심하려면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고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 부처님은 대보살이 이렇게 마음을 항복받을지니 9가지 종류의 모든 중생을 무여열반으로 인도하여 제도하리라는 원을 세우라고 하신다. 이렇게 한량없는 많은 중생을 제도하되 한 중생도 제도했다는 상을 남기지 말라고 하신다. 여시서 중생은 난생, 태생, 습생, 화생 등 결과로 나타난 중생은 물론이요 그런 결과를 가져온 원인을 만든 마음속의 중생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난생은 배은망덕하는 마음을 연습해서 그 결과로서 받은 몸이고 태생은 의지하는 마음을 연습해서 얻은 몸이며 습생은 감추는 마음을 연습해서 받은 몸이다. 또 화생은 잘난 척 하는 마음이 만든 중생이다. 그러니까 중생을 제도하려면 내 마음 속의 원인으로서의 그런 중생심을 제도하면서 동시에 결과로서의 중생도 제도해야 한다. 대승보살은 내 마음 네 마음, 안팎의 구별 없이 모두 제도하리라고 원을 세우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습관적으로 살아가며 자기 마음 닦기도 어렵다. 자기 마음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급급한 것이다. 이에 비해 보살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원을 세운다. 정치란 무엇인가? 공동체의 목표를 정하고 사람들 사이의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일을 하는 인간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 정치꾼은 될 수 있겠지만 나라를 이끄는 정치가는 될 수 없다. 정치가는 대승보살이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려는 것과 비슷한 큰 원을 세운 사람이어야 한다. 20세기 독일의 위대한 사회학자이며 정치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정치에는 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달린 문제들과 엄중한 책임의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으면 자기도 구제하지 못하는 주제에 공동체와 나라를 구한다고 나서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정치가는 드물어서 현실정치가 혼란스러운 것 같다.

그런데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중생을 제도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해본 적이 있는가? 수많은 금강경 해설서가 나왔지만 그런 질문을 한 사람도 해답을 한 사람도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금강경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으로부터 그런 질문과 해답을 들었다. 중생이 중생을 제도할 수 없으니 내가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하지 말고 그런 중생들을 부처님께 바치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중생을 남김 없는 열반에 인도하여 제도하라”는 것이 바로 그런 뜻이다.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 안팎의 모든 중생을 부처님께 바치면 부처님께서 제도해 주시리라는 것이다. 바친다는 말은 드린다는 말과도 같고 조주스님의 선문답으로 유명해진 “내려놓게(방하착 放下着)”라는 법문과도 통하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의 대의이다.

이 3품은 첫 번째 질문인 마음을 항복받는 방법을 설하신 것이고 4품 무위복승분에서 6바라밀을 대표하는 보시바라밀을 설하시면서 두 번째 질문인 마음을 머무르는 방법에 대한 설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제5품 여리실견분에서 “있는바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니 만일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 여래를 보리라” 하는 사구게가 나온다. 모든 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다 바치라는 말씀이다. 상을 다 내려놓으면 대 자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붙잡혀서 고통에 시달리고 부자유하게 산다. 제 생각 속에 누에고치 같이 집을 짓고 머물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운 사람의 경지는 고려말기 나옹선사의 선시에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청산은 날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라는 시가 그것이다.

나라를 책임지는 정치가가 마음을 비우고 고정관념을 바치면 그 국토의 민생이 혜택을 받는다. 예를 들어 중국개혁의 설계사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 전회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 사상해방,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기치를 내걸고 마오쩌뚱 치하에서 가난에 찌들던 중국을 개혁 개방하여 오늘날 미국이 인정하는 G2 강대국으로 부상하도록 했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 사회는 끊임없이 혁명해야 한다는 마오쩌뚱 주의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북경정권을 세운 뒤 사회주의 중국이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데 50년이 걸렸다. 사람이 마음에 머무르는 바가 있어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그런 생각의 노예가 되고 창조적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개인에게 있어서나 집단에게 있어서 마음에 머무르는 바 없이 모두 내려놓고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4. 성불과 정치의 주체

금강경 6품에는 유명한 뗏목의 비유가 나온다. “모든 상은 허망한 것이니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 여래를 보리라”는 말씀을 듣고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에게 “어떤 중생이 있어서 말세에 이런 말씀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라고 질문했다. 부처님은 이에 답하시면서 미래에도 오랫동안 상을 짓지 않고 부처님 처소에서 복을 많이 지은 사람은 무량복덕을 지을 것이니 그런 사람은 아⦁인⦁중생⦁수자상, 그리고 법상과 법 아니라는 상도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뗏목의 비유를 하셨다. 공부하는 사람은 4상과 법상, 비법상 등 어디에 붙들려도 다시 아⦁인⦁중생⦁수자상에 빠진다. 그래서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사람은 건넌 다음에는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비유를 했는데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할 것 있겠느냐? 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성불하는 주체는 누구이며 정치의 주체는 누구인가 라는 불교철학과 정치철학의 중요한 주체 중 하나와 만나게 된다. 개인이 주체인가 집단이 주체인가 하는 문제다. 제6품의 말씀을 비추어 보면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자”(持戒修福者)의 주체는 개인이고 성불하는 것도 개인이다. 부처님의 설법도 개인과의 문답 형식이고 부처님은 일음(一音)으로 설하시나 중생이 근기에 따라 달리 듣는다.

당나라 때 조주스님의 선문답에서 나온 무(無)자 화두는 불성이 어디있는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더니 “없다(無)”고 답변했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 열반경)고 하셨는데 어째서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반문했더니 조주스님은 “업식성(業識性)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니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냥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업식성을 버리지 못해 없다는 것이니 논리적 답변이기도 하다. 간화선에서는 이 선문답에서 무자 하나만을 화두로 삼아 머리로 분별하지 말고 의심이 타파될 때까지 사무치게 의심하라고 가르친다.

만일 조주스님에게 인간 “집단에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만 어떤 답변이 나왔을까? 조주선사의 답은 역시 “없다(無)”일 것이다. 19세기 이래 세계는 개인 대신에 국가, 민족, 계급 혹은 정당 등 집단이 사람들의 중요한 삶의 원리가 되었지만 집단에 불성이 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업을 짓고 받으며 또 깨닫는 것은 개인이지 집단이 아니다. 집단은 개인의 집합에 불과하며 그 자체 정신이 없기 때문에 불성도 없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집단의 결정에 맡기고자 한다. 그러나 정치가 집단의 일을 다루긴 하지만 진리냐 아니냐는 문제는 머릿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거짓 주장은 수천만의 지지자를 동원해도 한 개인이 밝히는 진리를 압도할 수는 없는 것이 진리의 세계이다. 불성이 있다면 개인에게 있는 것이지 집단에는 없기 때문이 아닐까?

마르크스는 계급을 주역으로 등장시켰고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이라는 집단을 전면에 내세웠으나 집단을 내세우는 정치철학은 인류를 불행으로 이끌었다. 19세기 이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집단주의적 생각이 유행하였다. 그러나 성불의 주체가 개인인 것처럼 정치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개인이다. 정치가 집단의 이름으로 일을 하고 서로 관점이 다른 여러 사람들의 의사를 결집하는 방법으로 다수결의 원칙이 채택되고 있지만 의사표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독립적인 개인이다. 집단도 집단을 대표하는 개인이 집단의 뜻을 모아 결정을 내린다. 개인이 무너지면 민주주의의 모든 기초가 무너진다. 민족주의운동과 전체주의운동 속에 매몰되었던 서구 지성사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철학적으로 확립한 것은 덴마크의 사상가 키엘케골(Soren Kierkegaard)을 시작으로 나타난 실존철학과 니체였다.

집단에 의존하면 개인은 익명으로 숨을 수 있고 집단적 이기주의 속에 매몰될 수 있으므로 집단은 진리와 거리가 멀다. 창의력과 도덕적 책임의 원천은 개인이다.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개인의 활력이 넘치는 사회는 발전하고 개인이 집단 속에 매몰된 국가에는 미래가 없다. 개인이 전체라는 이름 속에 매몰되었던 나치즘 치하의 독일, 군국주의 치하의 일본, 그리고 계급독재 치하의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국가들이 어떠했는가를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자기 마음을 스승으로 삼고 다른 사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는 법구경의 말씀이나 “자기 마음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는 열반경의 말씀은 정치의 세계에도 그대로 통용되어야 한다. 집단은 소중하고 존중되어야 하지만 집단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집단주의는 다른 사람과 집단을 자아로 삼는다는 점에서 금강경에서 경계한 인상, 중생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곧 아상의 변형이다.

5. 반야-정치적 판단력과 리더십

금강경은 최고의 지혜인 반야를 다루고 있다. 금강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네 가지 글귀로 된 게송, 즉 4구게는 이런 반야를 압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 4구게를 비롯한 금강경 구절을 남에게 설해주면 어떤 물질적 보시보다도 공덕이 크다고 누누이 설하고 있다. 앞에서 제5품의 4구게를 말했는데 이번에는 제10품 장엄정토분의 4구게를 보자.

경에서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라는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 존자가 “아닙니다. 세존님, 보살은 불국토를 장엄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어 부처님은 “보살 마하살이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 받을 것이니 색에도 마음을 머물지 말며 성, 향, 미, 촉, 법에도 머물지 말지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고 설하신다. 이 구절에서 육조 혜능 대사가 깨달았다고 육조단경은 기록하고 있다. 마음속이나 마음 밖이나 어디에도 마음을 머물거나 잡아두지 말고 마음을 내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은 판단력과 지도력에 관련된다.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판단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어디를 먼저 갈까. 누구와 언제 만날까.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할까 등등 일상생활은 매 순간마다 판단을 요구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다. 옛날에 사람의 됨됨이를 볼 때, 외모로 상을 보고(身), 말하는 것을 보며(言), 글쓰기를 보고(書), 마지막으로 여행 등을 함께하면서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판단력을 본다는 것이다. 더구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의 일을 맡은 사람은 자기의 판단이 수많은 생령들의 생명과 안위 그리고 행복에 관련됨으로 정확하고 바른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판단력의 요체를 말해주고 있다. 어디엔가 마음이 붙들려 있지 않고 마음을 비워야 전체적이고 종합적이며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판단력 비판을 쓴 칸트(Immanuel Kant)는 합법칙성을 원리로 삼는 현상계(現象界)와 자유를 원리로 삼는 예지계(睿智界)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매개 고리로서 판단력의 문제를 다루었다.

칸트는 우리가 맞닥뜨리는 현실의 특수한 상황에 보편적 원리를 연결시키는 능력을 판단력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교실에서 문제를 풀듯이 보편적 원칙이나 공식이 알려져 있는 경우에는 머리만 좋으면 공식을 잘 작용하여 문제를 풀지만 보편적 원리가 전혀 제공되지 않는 경우, 예를 들어 이 그림이 아름다운지 어떤지를 판단할 때는 보편적 원칙이 없는 곳에서 이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칸트는 이러한 판단을 반성적 판단이라고 불렀다. 그는 판단력 비판에서 취미판단을 다루었는데 취미판단의 기저에 놓여 있는 미감적 판단력은 바로 그러한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름다운에 관한 미적 판단은 어떤 관심과 욕구도 없으면서 느끼는 이름다움이며 인간의 보편적 미감을 감촉으로 느끼는 판단이다. 촉이 온다고 하는 것이다.

아랜트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정치적 판단에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정치적 판단은 보편이 아닌 개별적 상황을 다루는 것이고, 타자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기 때문에 소통이 중요하다. 정치적 판단은 자기 안에 있는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고 인간들의 공통감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면의 정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 판단은 연극에서 관객과 같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으나 적극적인 무관심성이 유지될 때 바른 판단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취미판단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연극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배우도 감독도 아니고 바로 관객이다. 따라서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판단은 연극을 볼 떼 관객의 입장처럼 어디에도 주하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금강경의 말씀과 같이 보시, 지계, 인욕 등 6바라밀을 행하고 마음을 무심한 상태에 놓아두어야 한다.

금강경을 통한 반야지혜를 닦는 것은 정치적 리더십을 위해서 특히 필요하다. 막스 베버는 정치가의 자질로서 정열, 책임감, 통찰력을 들었는데 여기서 통찰력은 반야의 지혜에 통한다. 그에 의하면 통찰력이란 내적 침착과 평정심으로 사물과 인간에 대하여 거리를 두는 습관이다. 정치에 대한 정열만 가지고 쉽게 흥분하여 일을 그르치는 무모하고 단순한 정치적 아마추어와 구별되는 것이 바로 통찰력이다. 정열적인 정치가를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통찰력이라고 본 것이다.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의 사구게를 터득하면 훌륭한 정치가의 자질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6. 맺음말

이상은 “금강경과 정치철학” 강의내용의 일부이다. 머리말에서 언급한대로 진리에는 두 가지, 즉 승의제와 세속제가 있다. 금강경은 최고의 진리, 즉 승의제로 인도하는 경전이고 정치철학은 세속의 진리에 관해 논한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서로 연관이 있다. 이 모두 우리의 한 마음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효성사는 일심을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두 문으로 나누고 두 문은 각자 자기만을 지키고 있으면 안 되고 서로 교섭하고 소통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일심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어 서로 교섭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여는 옳고 깨끗하다 하여 자기를 절대화 하지 않고 자기의 법상(法相)을 버림으로써 생멸문으로 나가 속세와 교섭할 수 있으며 심생멸문은 자기의 고향인 일심 속의 진여와 소통하여 일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최고의 진리를 설하는 금강경과 세속의 이치를 논하는 정치철학이 서로 소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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