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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이재오의 5.16 비판에 대하여

5·16 쿠데타는 반헌법적 발상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는 식으로 발제했다. 내가 흥분해 연단에

 
- 이 사진은 본내용과는 관계가 없음
오늘(2009.7.13) 조선닷컴 맨 위에는 "최보식이 만난 사람" 이재오의 인터뷰 기사가 크게 떠 있고, 100자평도 오전 11시 시각으로 130여개가 달렸다. 종이신문에는 1개면 전체가 이재오의 발언과 이재오의 사진들에 할애됐다. 인터뷰에는 박근혜에 쌓인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박정희에 대한 불만이 드러나 있다. 그 중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있다.

"당시 "과거사 문제"로 온 사회가 시끄럽던 시점이었다. 연찬회에서 여의도 연구소가 "친일은 시대적 불가피성이 있고, 5·16 쿠데타는 반헌법적 발상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는 식으로 발제했다. 내가 흥분해 연단에 섰다. "친일행위가 불가피했다면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한 분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5·16은 명백히 헌정을 유린한 쿠데타다. 그건 그것대로 인정하고 그 뒤 치적을 인정해야지 쿠데타를 합법화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재오는 끈질긴 국보법 위반행위로 감옥에서 10년 이상 살았다고 한다. 최대의 간첩사건인 남민전사건, 민통련사건, 전민련사건, 민중당사건 등에 모두 핵심인물로 간여한 골수 좌익이다. 그가 활동했던 것만큼 그가 당했던 고통고 컸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가슴에는 박정희에 대한 증오가 가득할 법도 하다. 좌익사건은 국가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식돼온 사건이다. 박정희에 대한 증오심이 국가에 대한 적개심으로 나타난 것이 간첩연루 사건이다. 이재오는 5.16을 헌정질서 파괴라 평했지만 이는 순전히 형식적 논리이지 그 시대를 반영한 다이나믹한 논리는 아니다.

이 승만 대통령 하야 후 정국은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고, 정치꾼들은 간첩들이 포섭한 학생들에 놀아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희망이 없었다. 국가는 혼란에 빠지고 우리보다 2배나 더 잘 사는 북한에 흡수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찰나에 있었다. 박정희는 권력이 탐나서 국가를 장악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섰다. 당시 그런 용단을 내릴 수 있는 위인은 대한민국에 없었다. 오직 그만이 죽음을 각오하고 권력을 쟁취했다. 그가 없었다면 국가는 사기꾼과 진배 없는 정치꾼들의 손에서 북으로 넘어갔을 것이라는 것이 많은 분들의 생각이다. 그의 업적이 곧 그의 애국심이다. 이재오는 그가 이룩해놓은 풍요속에서 호의호식하고 잘 살아왔다. 은혜를 증오로 배반하면 사람 축에 들지 못한다. 아무리 좌익이라 하지만 은혜만큼은 가늠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위해 박정희에 대한 업적을 정보파일로 생산하여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아래에 이제까지 다듬어 온 소장품을 이재오 같은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박정희는 역사적 인물이다. 인물-사물에 대한 평가는 관찰력의 함수다. 이재오의 학력을 보니 박정희에 대한 논문을 쓸만큼 실력이 없는 듯 하다. 2007년10월호 신동아를 보면 그는 1966.4.23-69.4.5 사이에 군 현역을 근무를 하면서 서울에 있는 현 국민대를 다녔고, 이와 아울러 경기도 이동에 있는 이동중학교 교사를 한 것으로 돼 있다. 군에 병사로 근무하면서 이동에서 중학교 교사도 했고 동시에 서울에 있는 대학도 나닌 것이다. 실로 도깨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1963년에 중앙대 농경제학과에 입학했고, 1964년 이명박과 함께 6.3학생운동을 주동했다가 65년8월30일에 제적됐다고 한다. 3학년 여름에 제적당한 것이다. 그는 군대 사병으로 있으면서 제적당한 다음 해인 1966년에 현 국민대학의 전신인 국민산업대에 입학하여 1970년 2월에 졸업했다. 국민산업대는 1971년에 국민대학이 됐다. 여기에 더해 그는 교사자격증도 없이 중학교 교사를 한 것이다. 누군가들이 그를 마음먹고 길러주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황당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는 누구인가?

외국에서는 박정희를 "한강의 기적"과 동일시한다. 필자는 197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 경제교과서에 “한강의 기적”이 가장 훌륭한 경제성장 모델로 예시돼 있었고, 경제학 교수가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때 필자는 한국인임에 대해 자부심을 크게 느꼈고 낯선 이국인들을 만날 때마다 자랑스럽게 “저는 한국인입니다” 하며 악수를 청했다. 5천년 역사가 흘렀지만 당시 120여 개 나라들 중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를 230여 개국 중에서 11위로 잘 사는 국가로 개조해 놓은 지도자는 박정희였고, 그가 만들어 놓은 기반 위에서 세계 최고의 고속 성장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던 지도자는 전두환이었다고 생각한다.

1974년만 해도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도 백인이 경영하는 식당에 흑인이 갈 수 없었다. 이것이 1970년대의 민주주의 현실이었다. 이런 시절에 한국사회에서 유독 민주화라는 말을 퍼트리고 다닌 세력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세력이 간첩과 연계된 좌익들이었다. “선생님, 민주화 하셔야지요.” 간첩들이 한국 사회의 불평-불만분자들을 포섭할 때 사용한 첫마디가 바로 이 말이었다. 5.18 이전에는 민주화가 지하에서만 통용되던 말이었지만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정당화됨에 따라 민주화는 공공연한 지상 용어가 되었고, 이에 따라 지하에서만 은밀히 이루어졌던 좌익활동이 보란 듯이 지상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다. 바로 이런 민주화 세력들이 퍼트린 말에 의해 독재자의 누명을 쓴 박정희, 그의 위업에 대해 우리는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혁명공간의 한국 경제

1960년 12월호 “한은 조사월보”에 따르면 1945년에서 1959년 사이(15년)에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26억9,000만 달러, 5.16혁명 전해인 1959년도의 원조액은 2억 달러였다. 이 중 78%는 소비재 원조였고 22%는 생산재 원조였다. 미국이 제공한 원조 물자 중에서 잉여 농산물과 석유 및 유연탄은 시장에 매각하여 세출 예산으로 사용했다. 이는 "대충자금"이라 불렸다. 기업이라고는 별반 없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환경이었으니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이 유입됨에 따라 농촌은 더욱 피폐해 졌고, 젊은이들은 너도 나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렸으며 이로 인해 수백만의 도시 실업자들이 양산됐다.

보잘 것 없긴 하지만 대기업들이 몇 개 있었다. 이때의 대기업은 위에다 정부예산을 부어넣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가는 돈 통에 불과했다. 밀수품이 범람했다. 정경유착으로 인해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 고관대작들은 축첩과 양주와 춤으로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대부분의 정치꾼들은 깡패들과 연결된 사기꾼들이었다. 1961년, 박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불, 군사원조가 2.2억불이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불과 무역적자 5천만 불을 합쳐 3.3억 불을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 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3.5%. 매년 30만 명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만 겨우 5,000명 정도만이 취직을 하는 지금의 실업률이 겨우 3.5%라 하니, 당시의 30% 실업률이 얼마나 살인적인 것이었겠는가! 5.16군사혁명! 미국은 박정희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래서 미국은 주던 원조를 대폭 삭감해 버렸다.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이 사회좌경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인 2003년 11월, 육사 교장 김충배 중장은 생도들에게 지금의 50-60대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하에서 어떻게 일했는지에 대해 교양강의를 했다. 그 중 일부를 축약하여 소개한다.

케네디로부터 박대를 받은 박대통령은 서독에 광부를 팔고, 간호원을 팔았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손이 고우면 떨어질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손을 거칠게 만들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코올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루 종일 닦았다.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캤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이들에 부쳐진 이름이 ‘코리안 엔젤’이었다. 이들을 방문한 박정희!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얼굴이 찌든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그는 이 말만 반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몰려나와 육 여사와 박대통령의 옷을 잡고 통곡했다. 광부들이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서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손수건을 주면서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서독 국민들이 도와주겠습니다.”

서독 국회에서도 연설을 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68 달러였다. 그것도 대부분 원조액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나 더 잘 살았다.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가 다녔다. “머리카락 파세요!” 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서울 간 아들놈 때문에 잘랐고, 쌀을 사기 위해 잘랐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수출을 했다. 곰 인형도 팔았다. 쥐잡기 운동! ‘코리안 밍크’도 만들어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내다 팔았다. 그 결과 1965년, 수출이 1억 달러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케네디에 돈을 꾸러 가고, 서독에 가서 광부 간호사와 함께 통곡을 하고 있을 때, 김대중-김영삼-문익환 등은 무얼 했는가? 고속도로를 놓을 때에는 “알통 같은 농지를 절단 낸다”며 욕을 했고, 국군을 월남에 보낼 때에는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악마”라며 욕을 해대면서 오직 개인들의 정치적 욕심만 채우고 있었다. 박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담당 군의관이었던 정규형 대위는 시신이 대통령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합수부에 증언했다.

“당시 박대통령이 차고 있던 시계는 평범한 제품이었고, 넥타이핀은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헤어져 있어 대통령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김정렴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 근무할 때 양주를 마신 적이 한 번도 없고 막걸리를 즐겨했다고 한다. 당시 현장을 검증한 장경삼 검찰관(판사를 지내고 현재 변호사)는 서거 당시 대통령이 마신 술이 시바스리갈이 아니었고 국산양주였는데 이를 주전자에 담아 마셨다고 한다. 아마도 현장접근이 금지됐던 기자들이 현장 사진에 나타난 술병의 모양만 보고 추측성 기사를 쓴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는 국산품 애용시대였고, 양주와 양담배는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배척됐던 시기였으며, 외화에 대한 통제가 각별했던 시대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박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양주를 마셨다는 것은 납득가지 않는 대목이다. 대통령 전속이발사는 대통령이 입은 러닝셔츠에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나 있었고 물을 아끼려고 화장실 물통에 벽돌을 넣었다고 밝혔다. 그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은 공돌이와 공순이였다. 그는 이들에게 야간학교를 다니도록 해달라며 고용주들에게 절을 하는 자세로 편지를 썼다. 서거한 다음, 그가 단돈 몇 푼이라도 감추어 놓았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혁명공간의 한국 안보

1961년7월, 중공과 북한 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 김일성이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1964년,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1965년4월, 김일성이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남한에 공여하던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미군을 월남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확산됐다. 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가고, 미국은 발을 빼려하고, 그야말로 한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고 월남마저 공산화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었다. 한국에 월남전은 제2의 전선이었다. 박정희는 미국 대통령도 생각하지 못한 한국군 파병을 생각해냈고, 미국을 설득시켜 한국군을 파병하여 경제와 안보의 큰 물고를 텄다.

전 거물간첩 김용규는 그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1999. 원민) 81쪽에서 4.19를 이렇게 회상했다. “4.19 때에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왁시글거리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습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본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1972년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이어서 김용규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 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 명확한 투쟁 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 그래서 1964년 3월15일,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서클을 두었고, 당 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의 6.3한일회담반대 투쟁, 1965년8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1969년의 험프리 미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반대-투쟁, 1969년 7월의 3선개헌반대-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년8월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에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4.19를 북한에서는 ‘4.19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있었다.

한일협정과 박정희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한 배상 자금은 얼마였나? 한일회담 14년, 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 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 타결 액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정부 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 매년 무상 3,000만 달러, 유상 2,000만 달러 총 5,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 유상 2억 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

박정희는 이 돈을 어디에 썼나? 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유상 2억 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사용됐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전체 자금의 18%를 투입했다.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161만 달러), 경부고속도로 건설(689만 달러), 상수도 확장(409만 달러), 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 영동화력발전소 건설(1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027만 달러) 등이 이때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 농림업에 7.8%, 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 이 중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만 무상자금 3,080만 달러와 유상자금 8,868만 달러 등 총 1억1,948만 달러를 몰아줬다. 전체 청구권 자금의 23.9%에 이른다. 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억3,282만 달러도 대부분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썼다. 원자재까지 합치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절반 이상을 포철에 투자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썼나? 일본 정부로부터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0년에 펴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상자금은 필리핀이 5억5,000만 달러로 제일 많았고, 한국이 3억 달러, 인도네시아 2억2,308만 달러, 미얀마 2억 달러, 베트남 3,900만 달러 순이었다. 일본이 차관 형태로 지원하는 유상자금과 민간이 자금을 지원하는 상업차관을 합칠 경우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제일 많았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개인별장이 있는 곳에 호텔을 짓고, 부유층을 위한 백화점을 지었다. 청구권 자금의 효율성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 필리핀은 항만 및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지만 당초 댐 건설 및 철도 연장 계획이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대지주와 대자본가 등이 필리핀 정치를 주도하면서 일본의 배상금이 이들의 이권을 채우는 데 활용됐다. 미얀마는 파괴됐던 철도 및 도로 복구 등에 주력하면서도 당시 총리의 ‘복지국가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회복지 부문에도 상당액의 자금을 투입했다. 베트남은 전체 자금의 50% 이상을 발전소 및 송전시설에 투입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유출에 대해 엄청난 단속을 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의 공병대 장교들이 대거 파견되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집단은 그래도 군인들이었다. 포항제철 공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았다면 자금의 수십%가 유출됐을 것이고, 중국의 등소평까지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오늘날의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씨에게 특별한 마패를 만들어 주었다. 세도가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이권과 청탁을 물리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씨는 그 마패를 보여주면서 모든 이권과 청탁을 차단했다. 박정희 집권 초기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국보다 3배 더 잘 살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이들보다 10-11배나 더 잘 산다. 북한보다는 36배 더 잘 산다. 이는 순전히 박정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때문이었다. 이 통계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였다. 아키오모리타와 마츠시타고노스케는 모범을 보인 훌륭한 기업인으로 일본 국민의 신앙이지만 한국의 박정희는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온갖 욕을 다 먹는다.

조선과 대한민국

세계의 유수 열강들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느냐에 국가의 프라이드로 여기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선만은 이러한 외부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대장금 문화에 빠져 오직 정적을 모함-모략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 약육강식 시대에 이러했으니 누구에겐들 먹히지 않았겠는가? 1905년7월29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H. 태프트 사이에 비밀협약이 맺어졌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개화시키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며, 이 밀약에 의해 1910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됐다. 러-일 전쟁이 발발 직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조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원자탄에 의해 한국이 해방됐을 당시에도 미국은 조선에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5,000년 역사! 9,000여회의 외침을 받아 오면서 지배계급은 언제나 외세에 영합하면서 부를 누렸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민초들이었다. 그 민초에서 우뚝 선 지도자들이 바로 이순신-안중근-유관순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역시 이런 민초들에서 피어난 꽃들이었다. 이순신, 안중근, 유관순은 민초에서 피어난 정신적 지도자들이었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현대적 민주국가의 틀을 세우고, 세계에서 꼴찌로 못 사는 거지의 나라를 경제 10위권 국가로 우뚝 세울 만큼의 지도능력을 갖춘 민초출신의 위대한 지도자들이었다. 당시 조선 인구의 80%는 농업인구, 85%가 한글마저 배우지 못한 문맹, 그야말로 한심한 국가였다. 이는 훌륭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편없던 한국축구가 히딩크라는 축구지도자를 만나 세계 4강으로 뛰어 올랐듯이 거지의 나라 한국도 박정희라는 지도자를 만나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월남 파병의 기적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credibility)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 사이의 외자 도입액은 32억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0년 만인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2,120 달러로 28.3배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거두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1965년 6월 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이런 건의를 올렸다. "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입니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1965년-73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76년에는 24억3,000만 달러, 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1960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한참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 모두가 우리보다 3배나 더 잘 살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필리핀은 1인당 국민소득 1,030달러, 우리의 11분의1이다. 인도네시아는 968달러, 태국은 1,940달러, 북한은 580달러, 한국은 20,000달러, 모두가 한국에 비해 새카맣게 뒤떨어졌다.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는 기적 그 자체였다.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

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6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 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공장장이 사장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대학가야 소용없다, 기술을 배워야 대우 받는다"라는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라 중간에서 공무원들이 장난질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조립을 많이 해서 팔면 그만큼의 부품과 소재들을 앉아서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외국기업에게 또 다른 매력이었다. 한국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리 고개"라는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에 어떻게 기능공을 양성해서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지금도 혀를 찰 만큼 감탄하고 있다.

그는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 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에 대한 기술도면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표기된 기술자료(TDP: Technical Data Package)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있는 과학기술자를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지도하게 했다. 생활필수품마저 고갈됐던 당시엔 한동안 물건이 없어서 못 팔 판이었다. 굶주린 배에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듯 만들기만 하면 모두가 팔렸다. 공장을 가진 기업들은 한동안 땅 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 부자가 됐다. 기업은 날로 번창하고 생산 설비는 더욱 팽창했다. 그만큼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당장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는 데에도 착안을 했다. 참고로 그가 얼마나 미래 지향적이었는지는 창원 공단에 나있는 광활한 도로 폭에 잘 나타나 있다. 주위의 의아심을 무릎 쓰고 그는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땅을 그때에 사두었다. 훗날 땅값이 오르면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래지향적 안목을 가지고 그는 빠듯한 나라 살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과학 단지를 만들어 냈다. 과학 단지야말로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그들 곁을 자주 찾았다. 대통령을 좋아한 나머지 과학자들 중에는 과로를 반복하다가 순직한 이들도 꽤 있었다. 과학촌 수장들이 박대통령을 만나기 원하면 대통령은 국무회의 중에도 만나주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하니까 장관들이나 공무원들이 과학자들을 지금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그가 며칠씩 머물던 방이 있었다. 그 방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일선 지휘소였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지금까지 그 방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가경영능력만을 보면 박대통령은 100년에 나올까 말까한, 사람이라는 걸 필자는 믿고 있다. 외국 지도자들은 그의 국가경영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등소평이 박정희를 숭상한 이래 중국은 지금 박정희를 경제선생님으로 모시고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베트남의 도이모이 역시 그의 성장모델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누가 뭐래도 박정희는 아시아 10대 인물 중 상석에 속해있다.

한일협정은 굴욕외교였나?

“청구자금이 적어도 50억 달러는 돼야 했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죽이기에 나섰다. 한일협정이 체결되던 1965년, 일본의 외화보유고는 겨우 14억 달러, 일본은 한국말고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4개국에 돈을 주었다. 모두 14억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청구권이라는 것은 일본이 지은 죄 값을 의미했다. 얼마를 받느냐는 상대방에 달려 있다. 청구자금에 대한 당시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은 한국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주장했다. 철로, 도로, 터널, 교량, 항만, 발전소, 비행장 등 산업 인프라를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의 능력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투자를 해놓았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거둔 자원만을 가지고 건설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유수한 기업들의 자본도 많이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이들 자산들의 가치가 모두 얼마일 것인가? 36년간 피해를 끼친 것은 인정하지만 투자한 것이 많아 배상금은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째서 한국에 배상금을 주었는가?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윽박질렀다. 당시의 8억 달러는 일본의 국력으로서는 상당한 거액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대학생과 지식층들이 "굴욕외교"라며 길거리에 나서 일본 정부를 성토했다.

박정희를 성토하고 싶은 사람들은 “일본에서 받은 돈이 적다, 더 받아내자”고 지금도 소리를 높이지만 우리 못지않게 피해를 보고 학살까지 당한 중국은 한때나마 일본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돈 달라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 중국은 앞으로도 배상금을 달라지 않을 것이다. 싱가포르 리콴유 수상도 치사하게 배상금을 달라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게 자존심이다. 우리가 받은 것은 정확히 얼마인가? 무상 3억 달러가 전부인가 아니면 8억 달러가 전부인가? 8억 달러 말고 더 있는가? 국교가 정상화되고, 박대통령의 일자리 불리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포항제철에 들어 간 기술 대부분이 일본 기술과 자재였다. 국가 전체에 유입된 일본과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비교해보면 7:3으로 일본이 앞섰다. 박정희를 비하하려는 사람들은 별로 배우질 못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본의 기술 및 자본 유입을 경제적 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박정희를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없었다면 1997년도에 이룩한 1만 달러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김대중과 노무현이 집권했을 때 이런 큰돈을 받았다면 어떻게 사용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김정일에 많이 퍼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1달러를 사용하면 수백 달러를 벌지만 김대중과 노무현이 1달러를 사용하면 국가가 수백 달러 어치 파괴된다고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이 국가를 파괴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몇 배 더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박정희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자고 시간을 끌며 떼를 썼다면 한국을 지지했던 미국의 마음이 식상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며, 경제부흥이 시급한 시점에서 시간을 허송한다는 것은 더 많은 수확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8억 달러의 가치는 8억 달러만이 아니었다.

당시 박정희의 선택

더러는 박정희가 청구권 자금을 유용했거나 편취했다고 근거 없는 비난을 하지만 다른 대통령에게 맡긴 세금은 상당부분 증발됐어도 박대통령에 맡긴 청구자금은 포항제철공장, 소양강 댐, 고속도로 등에 다 들어 차 있다. 그리고 그 투자가 오늘날의 한국을 일으켜 세웠다. 박정희 정부가 받은 청구권 자금에 대해 저들은 뭐라고 비방하는가? 청구권 자금을 103만 피해자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포항제철에 쏟아 부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피해자가 103만이라는 것은 일본에게 그냥 해보는 소리였다. 당시 전국을 조사했지만 모든 읍면동에서 나오는 자료는 허무맹랑한 자료이어서 신뢰성이 없었다. 불과 20년 전인 광주사태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불과 200명 수준, 가까운 역사, 매우 적은 숫자에 대한 증거 자료도 매우 부정확했다. 지금부터 불과 30년 전, 베트남에 참전했던 전우들에 대한 기록도 없다. 개인이 월남전에 참전했는지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정부에 없다. 개인이 보관했던 사진과 지휘관들의 증언 같은 것들을 이용해 본인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100년 전에 누가 피해를 보았는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

설사 모든 증거자료가 있는 피해자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에게 청구자금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야무진 투자와 경영관리의 덕택으로 대한민국이 잘 살고 있다. 피해를 봤던 사람들도 잘 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명예로운 보상이 아닌가? 생각할 게 또 있다. 지금 북한에서 김정일의 학정에 시달리는 동포들은 무슨 보상을 받았는가? 남한에서 살아온 일제 피해자들은 박정희의 덕을 보았지만, 북에 있는 동포들은 박정희의 혜택은커녕 김정일 학정 하에서 굶어죽고 맞아 죽고 짐승 같은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 일제 피해자들에 동정심을 표하는 사람들, 필자는 그들의 높은 체 하는 도덕심을 믿지 않는다. 남한에 사는 일제 피해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에서 고생하는 북한 인권에 대해 말이 없는 사람들, 아무런 죄 없이 북한에 끌려간 납북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에 대해 말이 없는 사람들, 나라를 지키려다 북에 억류돼 있는 국군포로에 대해는 침묵하는 사람들, 툭하면 도덕심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바로 이 나라를 북한에 흡수시키려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온갖 거짓말로 욕하는 좌익들인 것이다.

박정희의 율곡사업

1950년대에는 한국군의 봉급까지도 미국 원조에 의존했다. 1970년에 한국의 국방비는 2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1980년의 국방비는 38억 달러나 되었다. 1970년을 전후하여 한국에는 북한의 연속적인 도발 행위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1968년 1월 21일에 있었던 김신조 사건과 1월 23일에 있었던 미정보함 프에블로 호의 납치사건은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우리는 ‘영원한 혈맹’ 미국이 북한에 대해 상당한 경고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기는커녕 아시아에서 더 이상의 짐을 지지 않겠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우리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자 배신 행위였다. 이로부터 박 대통령은 ‘자주 국방’을 기치로 내걸고 전력 증강 사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제1차 전력 증강 사업이 1974~1981의 8개년 계획으로 시작됐다. 이때부터 전력 증강 사업은 강병론자의 상징인 율곡 선생의 이름을 따서 율곡 사업으로 명명됐다. 박 대통령은 국방비를 GNP의 4.5퍼센트 수준으로 올릴 것이라는 파격적인 결심을 했다. 이에 따라 8개년 간 총국방비는 88억 달러로 예상됐다. 이러한 국방비 증가는 누구의 눈에나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데! 경제 성장 속도는 그 자신도 예측하지 못할 만큼 빨랐다. 88억 달러로 예상했던 8년간의 총국방비가 실제로는 190억3천만 달러나 된 것이다. 경제가 그가 예측한 것보다 2.2배 더 성장한 것이다.

제1차 율곡 사업 기간인 74년에서 81년까지의 율곡사업비는 국방비의 17%에 해당하는 15.3억 달러로 계획됐었다. 그러나 이 역시 예상 외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60.3억 달러로 늘어났다. 4배인 것이다. 이는 국방비의 32%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군 간부들의 의식과 경영기법을 가지고는 이 큰돈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 많은 낭비가 있었지만 그 때까지 미군이 대주던 물자만 사용해 왔던 군에 갑자기 경영능력이 생길 리 없었다. 제2차 율곡 사업은 82년에서 85년까지의 4개년에 걸쳐 계획되었으며 사업비는 50.3억 달러였다. 그 후 미국 국방성의 새로운 경영기법인 PPBS가 도입되면서부터 율곡 사업 계획은 몇 차 몇 개년 계획 식으로 하지 않고, 소위 PPBS(기획-계획- 예산시스템)주기에 따라 연동제로 계획되어 왔다. 그래도 우리나라에 PPBS라는 최첨단 경영 기법을 도입한 곳은 당시 군뿐이었다. 율곡 사업 예산은 82년도에 10억 달러 규모에서 1985년에는 15억 달러 그리고 93년엔 37억 달러 규모로서 매년 경제 성장 속도만큼 확장돼 왔다.

1974년에는 1억 달러가 투자되어 소화기, 105밀리 곡사포, 고속정, 해공군 유도탄들이 구입됐다. 1975년에는 3억 달러가 투자되어 나이키, 호크, 대전차 유도탄, 발칸포, 팬텀기들이 구입됐다. 특히 1975년도에는 월남 패망, 김일성 북경 방문, 10월 위기설 등으로 긴장이 가장 고조된 시기였다. 1977년에는 7억 달러가 투자되어 155밀리 개량포, 전차, 방공 자동화 장비, 다연장로켓포들이 구입됐다. 그러나 1978년부터 1981년까지 4년간의 투자는 주로 부대 증창설을 위한 기지건설에 사용됐다. 제대로 된 70만 대군이 형성된 것이다. 1~2차 율곡 사업 기간인 74년부터 85년까지 12년 간 투자된 총 율곡 사업비는 경상가로 110.5억 달러였으며 이는 1985년도 불변가로 148억 달러에 해당했다. 이후 전력 증강비는 1980년대에 연간 평균 15억 달러 그리고 1990년대에 연간 30억 달러 규모로 투자돼 왔다. 1985년까지 12년 간 투자된 전력 증강비는 1985년 불변가로 쳐서 150억 달러였다. 이는 북한 전력비의 두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늘 확실한 지시를 했다. 그는 국방장관과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청와대에 불러 M-16소총과 81미리 박격포를 내놓고 “이들과 똑같은 것을 만들라” 고 지시했다. 소니의 초대회장 이부카는 미국에서 사온 포켓북을 책상에 내놓고 “바로 요만한 사이즈의 캠코더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확실한 목표를 주는 지도자는 흔치 않다. 그는 언제나 목표와 청사진을 가지고 국가를 이끌어 갔으며 모든 지시는 구체적으로 했다. 그러나 그의 발등에는 붉은 개미떼들이 집요하게 붙어 있었다.


2009.7.13. 지만원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