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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5.18광주에 북한군이 왔는가?

남한편 그리고 북한편

.18광주에 북한군이 왔는가?(북한 정보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8"(첨부26)을 읽고도 읽고도 광주에는 절대로 북한 특수군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1) 첨부 26의 33쪽에는 2회에 걸친 설문조사에 총 참여인원 115명. 그중 32명이 답변을 거부 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5.18 광주에 북한특수군이 개입하였다는 말을 5.18광주에 왔다 간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사람이 13명, 친척이나 친구로부터 들었다는 사람이 61명이라고 표시돼 있습니다. 전체 115명중 답변을 거부한 32명을 빼면 83명입니다. 이 83명중 74명, 즉 설문조사에 응했던 사람들의 89.1%가 북한 특수부대가 5.18광주에 왔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는 통계가 제시돼 있습니다.

2) 첨부 26의 53쪽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전직 북한 여교사 수기 중에서) “본인이 이 글을 쓰기 전에 한국에 탈북 하여 온 40대 이상 남녀 23명에게 북한에 있을 때 1980년 5.18광주사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냐고 일일이 물어보았더니 23명 중 농촌에 있던 여성한명을 제외한 22명이 북한군이 남한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북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고 꾸미지 않고 정확하게 대답 하였다. ‘광주사건이야 북한에서 치밀하게 작전하고 행동에 실현한 것 아닌가. 북한의 대남사업 중에 5.18만큼 크게 성공한 작전이 어디 있어. 김일성이도 아쉽다고 인정했잖아’”(59쪽 하7줄-60쪽 2줄)

3. 첨부 26의 주요 증언내용들을 요약합니다.

20명의 단문 증언자들의 증언 발췌

1) 각 특수전부대별 80년도 남한침투에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자가 40명이었다. 조별 부대별로 작성된 "전투기록장"을 보았다.(34쪽10-11줄)

2) 직접 광주에 갔다왔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남한 봉기자들이 무기고를 털어서 총(무기)을 주어도 잘 받지 않았다고 했다.(34쪽 하 3-6줄)

3) 당시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들이 중심이 돼서 광주인민봉기를 물밑에서 조종했다고 말했다. 또한 광주봉기를 성공시켜 가지고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는 말도 했다.(35쪽 5-8줄)

4) 당 기관에서 말하는데 의하면 북한군 특수부대들과 전문 공작부대가 남한에 침투하여 광주봉기를 비롯해서 주요 항쟁시위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했다.(35쪽 11-13줄)

5) 광주봉기에 참가해서 남조선인민들 세 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내 생각엔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들과 현장의 간첩들의 조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4.19 혁명 때도 부분적으로 간첩들의 조작이 있다는 것을 북한에서는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 .전쟁이 일어날 경우 남조선에 숨어서 활동하는 10만 명의 간첩들이 교란작전을 할 것이라고 하더라.(35쪽 하 3-36쪽 1-4줄)

6) 5.18 광주인민봉기 때 북한 중앙TV에서는 매일과 같이 끔찍한 영상물들을 상영하였는데 이때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사람들과 얼굴을 가린 사람들은 모두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6쪽 9-12줄)

7) 남조선 광주인민봉기에 나갔다가 온 친구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얼마나 가혹하고 잔인하게 굴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36쪽 하 3-6쪽)

8) 당시 중대한 방송으로 취급하며 하루 종일 광주봉기를 방영하였다. 광주시민들이 무장을 하고 화염병을 뿌리는 장면,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 등을...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라는 멘트로 시간마다 반복하여 보여줬다. 광주가 진압되자 사진들을 광범위하게 전시 하였는데, 임산부 배를 가르는 장면과 어린 여자대학생의 옷을 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을 비롯한 끔찍한 살인 장면이 있었다.(37쪽 1-5줄)

9) 테레비에서 보았다. 친구 한명이 텔레비에서 손에 기관총을 들고 발로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 나오자 그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 사람이라고 하였다.(37쪽 7-9줄)

10) 큰 언니 형부가 북에서 특별훈련을 받은 미인 아가씨들도 광주봉기에 개입했고 그들이 뒤에서 조정했다고 하였다.(37쪽 하 4-5줄)

11) 남조선에 숨어있는 지하조직들과 협동해서 무기고를 탈취하고, 또 사람들을 죽이면서 광주인민들을 자극했다고 하였다. 강원도 어느 탄광인지, 그곳에서 일어났던 봉기에도 참가했다고 하였다.(37쪽 하2-38쪽 1-2줄)

12) 남조선에 갔다가 부상을 당하고 온 공장 당 위원회 초급당 비서에게서 강연시간에 직접 들었다.(38쪽 4-7줄: 피고인 주: 경찰 15명을 인질로 하는 등의 공을 이룩하여 2억원을 보상받고 1991년에 월북한 윤기권을 의미하는 듯함 )

13) 대학을 마치고 3대혁명소조 기간에 남조선 광주인민봉기에 나가서 싸우고 온 사람한테서 들었다. 같이 나갔다가 죽은 사람을 불태워서 흔적을 없애 버렸다고 말하였다.(38쪽 하 5-7줄)

14) 광주봉기를 텔레비전에서 매일 방송하였고, 북한사람들은, 더구나 여자들은 무서워서 사람 죽이는 장면들을 볼 수가 없었다. 텔레비를 보면서 광주인민봉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장갑차를 몰고 총을 쏘는 사람들이 남조선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에서 내보낸 특수부대사람들이라고 하였다. 회의에 참가해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39쪽 1-6줄)

15)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80년도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나 다 알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사실이 알려지고 영웅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39쪽 하2-8줄)

16) 북한에는 1만 톤 프레스 외에도 5.18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대상과 구호들이 많다. ‘5.18무사고 정시견인차 운동’ ‘5.18소년 호 땅크(탱크)’ ‘5.18청년직장’ ‘5.18식품가공공장’ ‘5.18고치(누에)청년작업반’ 등 5.18광주사태를 기념하기 위한 목적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1980년 5.18이후 북한지역을 현지지도를 하고난 뒤에 붙여진 이름들이다. . .북한의 운수수송부분에서는 광주사태 이후로 ‘5.18무사고정시견인차운동’이 생겨났다. (91쪽)

제1수기 발췌(전직 함경도 고교 여교사)

1) 1981년 초부터 북한 군인들과 사회간부들의 입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북한의 특수부대사람들이 참가했었다는 구체적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북한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51쪽, 8-11줄)

2) 용감무쌍한 우리의 영웅적 인민군대가 목숨으로 지켜주는 사회주의 조국에서 사는 행복과 자부심이 저절로 넘쳐나게 해주는 소설과도 같은 5.18광주사건의 이야기였다. 광주사태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구수하게 전해졌으며 마치 자기들이 갔다 온 것처럼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들뜨게 만들었다. 공공장소나 모임장소에서 사람들은 희열에 넘쳐 광주사태의 이야기를 화제 거리로 주고받았다.(52쪽 8-14줄)

3) 더하고 뺄 필요도 없이 5.18광주사건은 북한정권과 군부에 의해서 계획되고 설계된 대남작전의 한 부분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지고 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이다.(56쪽 10-13줄)

4) 광주사건! 그거다 우리군대가 했어요. 장갑차 뺏어 몰고 총 쏘는 것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훈련 받은 우리사람들이 한 것이 맞아요. 평범한 시민들이 뭘 할 줄 알겠어요? 우리 쪽의 사람들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판이 그렇게 커질 수가 없지요” 어디에 가든 광주사건이라는 말만 나오게 되면 저저마다 입을 열고 말 나가는 대로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는 정도였다.(59쪽 4-10줄)

5) 고등학교졸업시절에 은인으로 나타나서 나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두 아이의 아빠가 바로 5.18광주사건 때 북한의 임무를 받고 남조선에 내려왔다가 부상당한 몸으로 북한으로 돌아가서 영웅칭호를 받은 당사자이다(70쪽 5-9줄)

22) (내 내연의 남편인 공화국 영웅은)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그들 일곱 사람은 이미 전에 북한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공작조)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산, 마산사태가 전국적인 인민봉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조기에 진압된 것은 폭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확대될 수 있는 명분이 취약했으며 부마사태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 민심의 합법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했다. . . 그들이 남조선전라도 지역에 침투하여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서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북한이 봉기시기를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인 3월로 택한 것은 폭동이 일어나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신속하게 번지려면 농사철과 같은 불필요한 계절요소들의 제한적인 방해를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1980년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1980년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밀접한 연관 때문이었다. 사북탄광에서의 폭동조짐을 첩보망을 통해서 사전부터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북한은 3월로 예정되었던 광주폭동을 4월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고 득보다 실이 많은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각지에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전국규모의 항쟁이 성격으로 보나 위력으로 보나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80년 5.18을 전후로 하여 북한이 남조선에서의 전 인민적인 항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인 작전을 세웠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단편적인 내용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쪽의 입장에서 사북탄광사태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고 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부득이하게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76쪽 하7줄-79쪽 10줄)

6)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내가 북한에서 이런 내용들을 들을 때는 신기할 정도로 희한했었지만 지금 남한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 .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80쪽 하5줄-81쪽 14줄)

7)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남조선의 교도소)에 죄 없이 감금되어 있는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들도 참가했었고 그중 한명이 심한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총탄이 복부중심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은 과다출혈로 치명상이었다고 했다.(83쪽 하1-5)

8) 안창식(나의 내연남)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대원 세 명에게 여자를 추격해서 그를 조용히 처리하고 시신을 소각하되 사진기는 무조건 회수해 올 것을 명령했다. 분명히 다른 냄새를 맡고 따라다니는 남조선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니면 정체를 숨기고 광주 시내를 뒤지면서 색다른 냄새를 맡고 있는 어느 특수기관의 스파이라고 짐작되었다. 그 여자는 북한요원들에 의해서 광주시내 모처로 납치되어갔고 저항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86쪽 5-12줄)

9)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초기에 임무를 받고 타격대에서 파견되었던 안창식을 포함한 10명의 요원들 중에서 한 명이 숨지고 안창식과 함께 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부상자중 1명은 북한으로 돌아가서 치료받다가 1년 뒤에 사망) 부산, 마산폭동에 참가하기위해서 먼저 남파되었다가 그들과 합류한 7명의 일행 중 3명은 행불이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87쪽 하2줄-88쪽 8줄)

제2수기 발췌(북한 제대군인)

1) (80:1의 패싸움과정) 누가 도끼를 던졌는지 “평양사람”(주: 5.18공화국영웅)이 주저앉아서 피범벅이 된 종아리를 두 손으로 조이고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도끼가 떨어져 있었다. 이때 3소대장이 달려들면서 숙이고 있던 그의 머리를 발로 내리 밟았다. 순간 “평양사람”의 입에서 괴성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그의 주먹이 3소대장의 턱 아래 목젖 부위에 강하게 들어가 박혔다. 부질없이 달려들어서 발길질 하던 3소대장은 끽 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목뼈가 부러져서 단번에 즉사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평양사자”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이성을 잃어버렸고 성난 한 마리의 사자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정없이 날뛰었다. 그의 발과 주먹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게 번개처럼 움직였고 그의 손발을 거쳐 간 사람들은 사방으로 나가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30명이 넘게 쓰러지자(주: 이들은 다 죽었음) 다급해진 대대장이 “더 달려들지 말고 피하라”고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성난 “평양의 사자”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의 시작과는 대조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게 순식간에 싸움판의 상황이 반전된 것이었다. 겁을 먹은 군인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자 “평양사람”은 소외양간 쪽으로 피해 달아나는 대대장에게 달려가서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대원들이 쓰러져 있는 마당 한가운데로 잡아다가 꿇어 앉혔다. (이후 잠시 방심한 공화국영웅은 뒤로부터 도끼 공격을 당해 죽었음)(123쪽 12줄-124쪽 10줄)

2) 선글라스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을 직접 받고 내려온 사람이야. 네놈들이 어제 도끼로 죽인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여기 있는 너희들 여단전체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수 십 번을 적후에 드나들면서도 머리털 한 오리 다치지 않던 사람이야. 남조선의 광주에서 적들과 힘들게 싸우면서도 조국이 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돌아온 영웅이란 말이야 이놈들아. 네놈들이 저지를 죄가 얼마나 크고 그 후과가 막대한지 너희부모들과 친척들이 평생 살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에 의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모두가 설마 했었는데 그는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단박에 권총을 꺼내 들더니 맨 우측에 차례로 서있는 대대장과 중대장을 향해서 분노를 폭발하듯 공격적으로 탄창하나를 다 발사하였다. 대대장과 중대장이 벌집이 돼서 그 자리에 쓰러지자 무장한 보위소대원들 20명이 나서서 나머지 열 명에게 귀가 멍하게 총탄세례를 퍼부어 댔다.(131쪽 하6줄-132쪽 11줄)

3)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가 위쪽에 안장되어 있었고 바로 그 아래쪽에 아들인 “평양사자”의 묘가 일반사람들의 묘지와는 완전히 구별되게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다. 어머님의 말에 의하면 “평양사자”의 장례식은 원래 평양으로 옮겨져서 치를 예정이었는데 어머니가 고향땅에 묻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하는 바람에 날자가 늦어져서 결국은 5일장으로 치러지게 됐고 중앙당에서 간부들이 직접 내려와서 엄숙하게 치렀다고 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포장한 묘지의 높이는 1.5미터가 넘어보였고 묘지의 앞에 서있는 비석에는 중앙당에서 직접 새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을 비롯해서 살아생전 당과 수령,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싸우다가 애석하게 전사하였다. 조국을 위해서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투철하고 고귀한 혁명업적은 조국의 미래와 더불어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애석하게 전사한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이 있으라!”(138쪽 하8줄-139쪽 8줄)

4) 자서전의 내용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그가 남조선에 내려와서 대남공작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친척들의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공작한 대상들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적혀있었고 특히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 속에 있던 죽은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었다. 1989년인가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과 만났을 때 나는 “평양사자”의 자서전에서 보았던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이 생각되는 내용이지만 “평양사자”가 남파되어 문익환을 만나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였다. 특히 1980년 5월 달에 있은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런 식의 내용으로 적혀 있었다.

“남조선의 전라남도 광주는 해방 전부터 인민들의 애국심과 혁명적인 열기가 다른 곳에 비해서 특별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5.18이 시작되기 전부터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잠재해 있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은 5.18사건이 시작될 수 있는 충분한 원천이었고 원동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남조선의 재야인사들은 이미 북조선의 지령을 충실히 집행할 수 있는 정신적인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고 그들의 주위에 결집되어 그들을 추종하고 있는 많은 친북한적인 세력들도 남조선에서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있는 집단으로 충분히 장성되어 있었다. 5.18광주인민봉기가 차질 없이 무장폭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전적인 배경은 북조선에서 파견된 대남공작원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먼저 있었고 남조선 지하조직들의 꾸준한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조선에 내 집처럼 수없이 드나들면서 정보, 정찰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광주인민항쟁처럼 남조선정권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준 대형사건에 공개적으로 참가해 보기는 처음 이였다”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평양사자”의 자서전과 같은 일기를 하나하나 생각해내서 사실대로 적는다면 끝도 없이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다. (142쪽 2줄-143쪽 9줄)

제3수기 발췌(여성고사포 중대장)

1) 다른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하나같이 나처럼 대답할 것이라고 믿지만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 때에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에 가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165쪽 10줄-166쪽 2줄)

2) 남한에 와서 확인해본데 의하면 이런 사실까지는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인민군 주력전투부대의 해당부서와 단위들은 광주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부터 상급지휘부로부터 광주라는 정확한 지역까지는 통보를 받지 못했지만 남조선에서 조만간 대규모의 사건이 터진다는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 받고 전투준비상태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우리 부대에서도 미그19 - 21전투기들에 대한 특별정비는 물론 훈련반경을 일상적인 훈련지역보다 남쪽방향으로 더 내려간 군사분계선 상공으로 확대했고 4대로 편성된 전투기 편대가 주야로 항상 관할지역에 대한 비행전투근무를 감당하게 조치했다.(166쪽 하2줄-167쪽 8줄)

3)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명령 제 ㅇㅇ 호

최근 남조선에 조성되는 긴장한 정세는 조국통일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남조선의 혁명적인 인민들과 애국적인 청년들에 의해서 탄광과 광산 및 그 밖의 대도시들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반정부투쟁은 우리의 공화국인민들과 더불어 그들의 통일열기가 얼마나 뜨겁고 최고의 시기에 도달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바야흐로 위대한 통일국면은 우리의 눈앞에 현실적으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조만간 남조선 전역에서 들고 일어날 영웅적인 남조선인민들의 대규모의 혁명적 항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은 사회주의조국을 사수하는 전초선의 보루이며 조국통일의 가장 위력한 전위부대이고 일당백의 강력한 무장력인 조선인민군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전투명령을 하달한다.

1. 인민군무력부 산하 각 군단, 사 여단 전투부대들은 만단의 전투동원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준전시 상태에 돌입할 것.

2. 교도지도국 산하 각 저격 및 경 보병 여단들은 남조선의 후방을 신속히 장악하고 배후를 교란하여 제2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작전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

3. 공군부대산하 전투비행단들은 적진에 구축되어 있는 중요군사시설물에 대한 선제타격과 함께 공중작전권을 장악하고 지상군의 작전이 원만히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의 전투준비태세에 임할 것.

4. 해군부대산하 전투 함대들은 선제타격으로 해상공격권을 장악하여 신속한 기동력으로 해상육전부대들의 남한침투를 보장하며 육해공군 전반무력이 입체작전으로 단시일에 남조선을 공략할 수 있도록 비상전투태세에 돌입할 것.

5.노동 적 위대, 붉은 청년근위대원들을 비롯한 영웅적인 전체 조선인민들은 조국통일의 대 사변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예비 전쟁연습에 성실히 참가하며 공화국을 내부적으로 파괴하려는 간첩 및 암해분자들의 준동에 경각성을 높이고 자기의 일터를 철옹성같이 지킬 것.

명령서의 전문이 당시에 우리부대에 내려왔던 것에 비해 내용과 형태는 비슷하지만 글자별로 좀 빠진 것도 있고 어떤 측면은 보태진 부분도 있다.(168쪽 5중-169쪽 하4줄)

4) 광주현장에서 죽은 것이 확인된 사람들은 일단 부대로 복귀하지 못했어도 영웅칭호를 내신하라는 당중앙위원회의 비서 국 지시가 새롭게 떨어져서 상등병의 아버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게 되었고 맏딸인 그가 대리인으로 수훈하게 되었던 것이다.(174쪽 9줄-13줄)

제4수기 발췌(연합기업소 사무원)

1) “내가 인민학교를 다닐 때 어릴 적 친구 한명 있었는데 그 친구의 아버지도 남조선 광주인민봉기에 참가 했었는데 북한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자기 어머니하구 평양에 올라가서 김정일이 한 테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고 내려왔어요. . . 북한의 평양시 만경대에 있는 만경대혁명학원이란 곳은 민족간부양성기지로서 일반사람의 자녀들이 함부로 갈 수 없는 특수한 곳이었고 혁명열사의 자녀들이나 조국을 위하여 훌륭한 일들을 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국가적인 조치에 의해서 뽑혀가는 학원입니다. 나도 북한에 있을 때 5.18광주사건에 참가하기 위해서 남조선에 파견되었다가 죽은 사람들의 자녀들이 당의 조치에 의해서 평양에 있는 만경대학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사실 5.18광주봉기에 북한특수부대군인들이 참가했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이 끝나고 얼마 후부터 북한에서 여러 가지 통로를 거쳐서 광범위하게 퍼진 사실입니다. (188쪽 10-189쪽 6줄)

2) 저는 올해 1월 달에 1980년 5월18일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지금 다시 남한에 내려와서 소문 없이 조용히 살고 있는 50대의 남성분을 만나 보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는 현재 신변상의 문제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많이 꺼리고 있지만 5.18광주사건이 국민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기회가 조성되면 자기가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증언을 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 . 2006년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합동조사반에서 조사를 받을 때 그는 자기가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 당시 북에서 임무를 받고 내려왔었다고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조사관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사관들의 입에서 앞으로 그런 쓸데없는 말을 두 번 다시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협박을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196쪽 하7줄-197쪽 13줄)

제5수기 발췌(전 북한군 하사관)

1) 광주봉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중대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광주 봉기참가자들이 장갑차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자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중대 군인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했다고 한다. 중대 군인들 중에서 성근이보다 몇 년 선배인 사관장이 텔레비전에다가 손짓을 하면서 고성을 질렀다고 하였다. “야, 저거 광수가 아니야? 광수가 어떻게 저기 나가있어. 저자식이 별을 달고 승진해서 어느 분계선 일대의 특수부대로 간다고 하더니 저기 나가있네. 세상일은 참 모르겠다.” 라고 소리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수의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 . 그때 광수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지만 그와 생활했던 중대의 구 대원들은 모두가 다 광수를 정확히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성근이를 비롯한 중대 사람들은 그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광주폭동이 가열되고 있는 장소에서 광수가 장갑차에 올라서 괴뢰군들의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남조선에서 벌어지는 인민항쟁에 어떻게 되어서 북한에 있을 사람들이 나가서 참가하고 있는지 참으로 희한안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부대에서 한가마 밥을 먹던 사람이 광주에 나가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을 본 성근이네 중대 사람들은 그때부터 광주사건이 남쪽에서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만든 것이 아니라 북쪽에서 특수부대사람들이 나가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였다.(204쪽 하8줄-205쪽 하7줄)

2) 저녁식사가 끝나면 어김없이 농장 작업반 실에 있는 텔레비전에 벌떼처럼 마주앉아 아침저녁으로 매일 같이 내보내는 광주사건을 관람하였다. 5.18봉기가 일어난 다음날부터 북한의 텔레비전에서는 다른 것은 방송하지 않고 매일 광주봉기에 대해서만 중대 방송을 하였다. 처음에는 5.18광주인민봉기에 대해서 남조선의 애국적인 청년학생들과 소위 혁명적인 인민들이 남조선의 민주화와 조국을 통일을 위하여 전 인민적으로 항쟁을 궐기했다고 선전했다. 텔레비전에서는 광주에 투입된 남한의 공수부대들이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머리를 해머로 까서 죽이는 장면을 비롯해서 보기에도 끔찍한 장면들만 골라서 연속적으로 방영하군 하였다. 어디가 출처가 되어 말이 나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사람들 속에서는 우리의 특수부대가 광주현장에 나가서 활동하고 있으며 조국통일은 곧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206쪽 하8줄-207쪽 6줄)

3) 북한 특수부대 요원으로써 광주사태에 참가하였다가 북한으로 돌아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 직접 발언한데 의하면 광주무장폭동은 그자체가 어떤 면에서도 전쟁 이상의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참으로 광주사태가 남한이 전복될 수 있는 위기의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광주사태 때 전쟁이 날 뻔 했다. 김일성의 지시로 본격적으로 밀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런 시점에서 광주사태는 중요했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인민군대는 광주와 남조선의 전역에서 신호가 오면 즉시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군부가 우리의 활동에 대해서는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공수부대들을 진압군으로 대거 투입하는 바람에 무장폭동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문제가 생각 외로 불가능해 졌다. 남조선으로 드나들 수 있는 루트는 해상뿐만이 아니라 육지 쪽으로도 정교하게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고가는 데서는 큰 지장이 없었다. 광주에서 대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쪽에서 남조선에 나가서 활동하는 특수부대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남조선에 침투하여 단기 소부대작전을 하던 사람들은 게릴라전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광주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남조선시민들이 아니라 다 우리가 한 일이었다”

또한 그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훨씬 전에 북한군 특수부대인 61저격 여단과 62저격 여단에서 상당수의 소부대들이 남조선에 파견되어 있었고 61저격여단의 소부대를 인솔한 사람은 대대장 이봉원이라고 까지 구체적으로 증언하였다. 북한의 강건 군관학교(평양시 순안구역에 있는 보병군관학교) 출신의 한 탈북자는 광주사건 당시 투입된 병력은 모두가 다 태천 군관학교(저격, 경보 병 지휘관들을 양성하는 특수군관학교) 출신들이었다고 말한다. 광주사건에 남파되었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비석은 강원도 김화(북한군 5군단 지역) 인근에 안치되어 있고 61저격여단의 소부대를 책임지고 남파되었던 대대장 이봉원은 광주사건 이후 북한으로 귀대하여 김일성으로 부터 공화국 영웅칭호와 함께 일당백이라는 별도의 칭호를 받았으며 태천 군관학교 소장으로 승진했다고 하였다. . . ,남조선에 와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만일 광주의 무장폭동이 성공하여 북한의 사주를 받는 김대중을 비롯한 친북좌파들의 손에 정권이 넘어갔으면 지금쯤 한반도는 어떤 식으로든 통일이 되었을 것이고 그 통일은 자유민주주의 통일과는 거리가 먼 북한체제가 지향하고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적화통일이었을 것이다. (208쪽 하4줄-210쪽 하1줄)

제6수기 발췌(공장지배인)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무장폭동이 전개되기 바로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그 책에는 광주라고 정확히 대상은 지명하지 않았지만 남조선의 전라도 지역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인민항쟁이 일어난다는 내용과 함께 전당, 전국, 전민이 여기에 동참할 수 있는 만단의 태세를 갖추며 공장 기업소들은 생산라인을 군사지휘체계로 긴장하게 운영할 데 대해서 지시하였습니다. . . 바로 이틀 뒤인 5월 19일 아침 노동신문을 비롯한 각종 신문에는 드디어 남조선에서 우리 공화국 북반부 인민들이 학수고대하던 전 인민적인 무장 항쟁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광주의 무장폭동 첫 시작부터 얼굴을 가린 광주의 계엄군들이 부녀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장면들을 반복해가면서 집중적으로 내보내었고 광주무장폭동이 남조선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지금이 바로 통일의 대 사변을 맞을 수 있는 기회라고 폭동 전 기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변을 토했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광주시내에서는 폭동참가자들을 싫은 장갑차와 트럭들이 위엄을 내 뿜으며 무질서하게 질주하였고 길거리에 나섰다가 괴뢰군들에게 붙잡힌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은 개처럼 질질 끌려서 차에 태워졌습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은 임신을 하여 만삭인 여인의 배를 총창으로 갈라서 태아를 꺼내는 모습과 벌거벗은 젊은 처녀의 팔을 도끼로 자르고 어떤 새파란 아가씨의 옷을 홀딱 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한 목소리로, “국제적인 식인종인 미국 놈들의 식민지로 있는 남조선 괴뢰도당들은 정말 인간의 가죽을 쓴 짐승들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지독한 살인백정이라고 해도 어떻게 백주 대낮에 여자들만 골라서 발가벗기고 도끼로 내리쳐서 죽이며, 살겠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처녀의 젖가슴까지 도려낼 수 있단 말인가” 라고 규탄하면서 남조선괴뢰군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정말로 이빨이 갈리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국적인 공장 기업소들에서 청년조직들은 매일과 같이 남조선 괴뢰도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주먹을 휘두르며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눈 뜨고 멀쩡한 정신으로는 차마 볼 수 없었던 그 때의 치 떨리는 장면들은 내가 땅속에 묻혀도 영원히 잊지 못 할 정도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5.18광주폭동에서 저질러진 살인 만행들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들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만들어진 내용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놀라움과 함께 경악을 금할 수 없었었습니다. 아무리 통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야만적인 살인 자작극까지 만들어서 남조선 인민들을 이간질 시키고 순진한 사람들을 죽게 만들 수가 있었는지, 한평생 북한체제에서 세뇌된 머리지만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 앞잡이들이 민족 앞에 또 하나의 역사적 비극을 만들었음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광주사건은 김일성이가 남조선에서 일어나는 평화적인 시위를 이용해서 친북좌파세력들과 짜고 인민군 특수부대들을 내려 보내서 만들어낸 사건입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무장폭동을 전후로 북한의 민간사회에서는 별의별 이상하고 흉한 소문들이 다 나돌았습니다. 남조선에 파견되었던 특수부대 전사들이 다 죽고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등 누구네 집 아들은 광주에 갔다가 죽었는데 당원증만 집으로 보내어 왔고 또 뉘 집 친척의 아들은 남조선에서 죽은 시체는 못 가져 오고 손목 하나만 잘려서 들어왔다는 식으로 참으로 광주사건과 관련된 하도 많은 이야기들이 항간에 많이 떠돌았습니다.

당중앙위원회에서 간부들에게 보내는 지침서에서도 광주무장폭동에 참가한 동지들은 조국통일을 위하여 크게 헌신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하는 것은 당에서 응당 해야 할 일이고 영웅 전사들의 모범을 따라 배우기 위한 운동을 강력히 전개해야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1만 톤 프레스와 같은 이름 있는 대형기계에 까지도 5.18광주무장폭동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5.18청년호 라는 명칭을 달아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희비극을 만들어 냈습니다.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221쪽 10줄-224쪽 12줄)

제7수기 발췌(전 북한군 서해안 방어부대 중위)

1) 직부지도원은 광주사건 당시 북한 해주시에 있는 대남연락소에서 근무하였으며 광주인민항쟁에는 소수의 대남연락소 관계자들만이 나가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그 목적이 광주라는 일방적인 지역을 노렸던 제한적인 작전이 아니라 남조선 정권 전복이라는 큰 그림이었던 것만큼 특수부대에서 잘 훈련된 사람들이 대거 투입되어 사건을 주도했다고 이야기 하였다. 북한 제3군단 승용차 관리소 정치부소장(남포시 연락소 초급당비서의 조카)은 동료와의 발언에서 광주사건에 개성시 연락소도 개입하였는데, 남조선 전역에서 인민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광주가 봉쇄되고 아군과 시민들의 대량적인 희생만 만들었을 뿐 최종적으로 실패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토로하였다. (231쪽 1-13줄)

2) 북한은 북한에 구축해 놓은 강력한 특수전부대들을 비밀리에 침투시켜서 남조선의 배후를 교란하는 한편 남한 인민들을 끌어당기기 위한 새로운 선전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북한은 그와 같은 대남전략 단계에서 만들어진 광주사태의 비극을 현장에서 별도로 촬영하여 실지 남조선 계엄군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건이라고 속여서 북한의 텔레비전에서 매일과 같이 보도하였다. 북한정권은 북한인민군과 인민들을 기만(남조선에 와서 북한에서 말하던 것과는 사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하기 위해서 전두환이 공수특전단에 환각제를 먹이고 광주봉기진압에 내몰았다고 선전하였다. 또한 국군이 선량한 봉기자들, 그것도 여자들만 골라서 배를 가르고 젖가슴을 도려내고 다리 난간에 처녀들을 나체로 매달아서 죽이는 장면을 집중적으로 내보내면서 북한인민들에게 남조선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켰다. 지금도 나는 어린 나이에 보았던 무시무시한 장면들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텔레비전에서는 중무장을 한 진압군들에게 병에 담긴 알지 못한 물약을 나눠주고 그것을 마신 진압군들이 미친 듯이 봉기 자들에게 달려드는 모습과 약물에 마취된 군인들의 얼굴을 확대하여 짐승처럼 보이게 하는 등,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장면을 보았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33쪽 4줄-하2줄)

3) 군단조직부지도원이 우리에게 들려준데 의하면 대한민국에 침투하여 광주사건에 직접 참가한 “북한전투원”은 자기들은 북한의 명령에 따라서 처음에 광주시에 들어가서 대학생들의 시위만 지켜볼 뿐 며칠 동안 전투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처음부터 주동적으로 나서서 과격하게 이끌어 가면 단번에 정체가 노출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 이유라고 한다. 광주시내가 해방되기 전까지는 뒤에서 조종을 하면서 광주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작전을 수행하였고 광주가 해방된 다음부터 복면을 하고 주동적으로 개입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국군의 장갑차며 중무기들을 노획하여 봉기군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으며 무기와 각종장비들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시가전에 맞게 주요전투들을 조직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광주의 일반적인 시위를 무장봉기로 확대하는데서 자신들이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당사자 본인의 설명이었다는 것이다. 능력적으로 대학생들과 함께 시민들이 완전무장한 정규군과는 절대로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항쟁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들이 국군복장을 하고 배후에서 시민군을 죽이고 시민군과 국군 사이를 철저하게 교란한 작전의 효과라는 것이었다.(235쪽 2줄-236쪽 4줄)

4) 북한시절에 제3자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 구역 남청진에 살고 있던 한 대남첩보요원 출신도 동료들에게 자신의 머리 뒷부분에 나있는 커다란 흉터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이것이 광주사태가 자기에게 선물한 표창이고 북한으로 돌아와서 김일성과 김정일로부터 받은 공화국영웅칭호의 징표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239쪽 하4-9줄)

5) 당시만 해도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243쪽 8-16줄)

제8수기 발췌(전 북한 가정부)

1) 김대중이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257쪽 하1줄-258쪽 11줄)

제9수기 발췌(전 문천제련소 노동자)

1) 구체적으로 말하면 1981년 초부터 북한에서는 5.18에 의미를 둔 운동들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제일 처음으로 북한사회에 등장한 것이 열차수송 부문에서 나온 ‘5.18무사고 견인초과 운동’이었다.(273쪽 3-6줄)

2) 그러나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이 끝나고 난 이후부터는 이전의 ‘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이 아니라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이라는 새로운 내용의 단어가 등장했고 운동의 성격이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북한정권이 5.18광주사건을 얼마나 대중적인 운동으로 기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른 부문에서도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다. 룡성기계연합소에서 만든 1만 톤 프레스를 ‘5.18청년호’로 부르는 것은 물론 땅크(남한의 탱크)에다가도 ‘5.18전진호’, 어느 일 잘하는 생산직장에다가는 ‘영예의 5.18청년직장’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부르게 하고 있다. 5.18광주사건이 북한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면 그들도 생각과 머리가 있는 이상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짓을 미련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있어서 청와대습격사건도 그랬지만 5.18광주사건에 대한 내용에 있어서도 조금도 비밀에 붙이는 것이 없다. 1980년대 초반에 북한에서 나왔던 당시의 간부용 강연 자료를 보면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과 관련해서 김일성이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 직접 발언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은 단순히 우리나라의 경제혁명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일어났던 영웅적인 인민항쟁의 정신을 끊임없이 이어가자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광주인민봉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우리 혁명 전사들의 넋을 기리고 위로하자는 것이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속에 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274쪽 11줄-275쪽 11줄)

제10수기 발췌(전 러시아 벌목공)

1) 머리가 긴 사람들 여러 명이 괴뢰군 복장에 소총을 들고 군인 한 명을 잡아다가 옷을 벗기고 무참하게 두들겨 패서 실신하게 만드는(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음) 장면이 나올 때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도 머리가 긴 부분은 정규부대 군인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군인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군인을 때려죽인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장검으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장면과 처녀의 옷을 발가벗긴 다음 자궁 안으로 장검을 깊숙이 박아 넣는 장면은 아무리 남자고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고 몸서리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죽일 일이 있어서 반드시 죽여야 된다면 깨끗하게 총으로 쏴야 죽는 사람도 죽이는 사람도 서로 편하면 되겠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잔인한 방법으로, 그것도 남자도 아닌 여자들만 골라서 무참하게 죽이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299쪽 9줄-300쪽 1줄)

2) ‘대내지휘관에 한함’이라는 등급 표제를 달아서 총정치국에서 지휘관용으로 내려 보내는 강연 자료에는 광주사건과 관련된 김일성, 김정일의 발언들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광주사건은 남조선을 통일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하고 좋은 기회였는데 남조선 인민들한테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 무리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민심을 움직일 수 있는 특수부대공작조들의 배후교란 작전이 기술적으로 부족하고 크게 효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광주사건이 남조선의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것이 기본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300쪽 하5줄-301쪽 4줄)

3) 창고장(공화국영웅) 일행이 서울을 떠나서 광주시내로 이동했을 때는 폭동이 시작 된지 이미 이틀정도가 지난 뒤였다고 하였다. 시내는 대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의 폭동으로 마구잡이 판으로 변해 있었고 각처에서는 전두환을 타도하라는 크고 작은 프랑 카드들을 들고 데모꾼들이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첫눈에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울에서의 모습과는 정 반대로 광주에서는 정권에 분노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사생결단으로 진압군에 저항하면서 국가기관을 습격하고 광주의 ‘해방군’으로 등장해 있었다고 하였다. 창고장의 일행은 광주인근지역에 있는 군수품공장을 습격해서 장갑차와 군용트럭들을 탈취할 때 북한에서 파견되어 나간 알 만한 사람들의 얼굴들을 적지 않게 보았으나 적후활동에서 지켜야 할 엄격한 준수사항이 있는 관계로 서로 침묵 속에 무언의 대화만 나누었다고 한다.

탈취한 장갑차는 시민군들이 기술부족으로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요원들의 몫이었고 군용트럭들도 일부는 북한요원들이 사용하면서 대부분은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기동성을 보장하게 하는 한편 항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319쪽 7줄-320쪽 2줄)

제11수기 발췌(전 조선작가동맹 작가)

1) 땅굴은 시멘트로 구축해서 영구화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고 규모는 탱크(북한말로 땅크)나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폭 정도는 안 되지만 순수 전투부대들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남한의 어느 지역까지 와서 갱도바깥으로 나왔는지는 한밤중이어서 지도상으로 계산해도 잘 알 수 없었다고 했고 밤중에 살펴봐도 주위가 한산한 농촌마을은 분명하였다고 하였다. 남쪽 갱도의 출입구에서 그들을 마중한 것은 두 늙은 내외라고 하였다. 소부대작전은 주로 대낮보다는 밤에 진행되는 것이 관례지만 23명이라는 인원이 밤길에 동시에 움직이면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분명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 개 조로 분산되어 전라북도지역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344쪽 하1줄-345쪽 10줄)

2) 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번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정도로 생각했다고 하였음)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쌍 간 나 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머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남조선 사람들과는 어떠한 대화도 주의해야 한다고 사전에 작전에 침투되기 전부터 상급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지만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괴뢰군”이라는 표현과 같은 북한말을 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앞에 있는 여성이 자기의 말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봐서는 무언가 다른 것을 눈치 채지 않았는지 불안한 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으니 그 여성은 그의 정체를 충분히 의심할 만도 한 일이었다. “나는 강원도 태생 이야요. 광주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야요” 그는 그 여성에게 자기가 강원도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다가 전라도 광주로 돈벌이를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여성은 그가 아무래도 수상해 보였던지 총을 받지 않고 이내 골목 쪽으로 줄행랑을 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냥 놔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는 무기를 나눠주는 일을 대원에게 눈짓하고 젊은 여성의 뒤를 다급히 쫒아 갔다고 한다. 개인 살림집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을 따라 여자의 뒤를 쫒던 그는 대문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발견하고 그리로 달려갔다. 여자가 들어간 대문밖에 도착해서 잠시 안의 동정을 살피는데 여자가 집안안의 누군가에게 벌써 자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복면을 한 이상한 사람들이 만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히 아니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 같아보였어요.” 순간 귀가 멍하고 가슴이 철렁 하였다. 적후에서 이런 순간에는 어떻게 행동하고 상황처리를 해야 하는지 그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환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좀 전에 만났던 젊은 여성과 그의 동료인 뜻한 남성이 마주서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성은 대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자기가 금방 말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남자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가 총을 꺼내드는 순간 위험을 눈치 챈 남자가 도망치려고 집안 담장으로 뛰어 올랐다. 그는 남자를 향해 총탄 한발을 쏘았다. 담장 밖으로 도망치던 남자가 총에 맞고 떨어지는지 소리가 쿵 하고 들렸다. 그는 파랗게 질려있는 여성의 가슴에 총탄 두발을 날리고 남자가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 쪽으로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피자국은 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핏자국이 향한 방향으로 따라가니 허벅지에 총을 맞은 남자가 몇 미터도 못가서 신음하면서 골목길에 쓰러져 있었다. 그가 총을 꺼내서 들이대자 남자는 절망에 휩싸여 어디 가서 절대로 말하지 않겠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고 한다. 그는 살려두면 절대로 안 되는 그 남자의 심장에다가 총탄 한발을 쏘아박고 그 자리를 신속히 피했다고 말하였다. (347쪽 5줄-349쪽 7줄)

제12수기 발췌(전 북한 김형직사범대학 학생)

1) 평범한 군인가족으로 살아오던 영호의 가족은 영호아버지가 광주에 내려와서 싸우다가 전사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영웅의 가족으로 과거급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평양으로 불려 올라간 영호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았고 집에서 부양가족으로, 가정주부로 살아오던 영호의 어머니가 함흥시 양복점 초급당비서로 발령을 받았었습니다. 그 당시 북한의 텔레비전에서도 광주봉기에 대해서 거의 매일같이 톱뉴스로 장시간을 중계하군 하였습니다. 몇 시, 몇 분에는 전라도 광주의 도청을 봉기군이 장악하였고, 또 어디 어디를 장악하였다고 하면서 시시각각으로 특종보도를 진행하였습니다. 남조선 국군이 광주의 봉기자들을 무참히 학살한다고 하면서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는 장면과 대학생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구타하는 장면 등, 끔찍한 장면들을 방영하면서 전두환 괴뢰도당이 애국적 시민들을 총칼로 진압한다고, 살인 만행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였습니다.(360쪽 2-16줄)

2) 광주봉기가 끝난 후 북한에는 어느 날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영웅들이 수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어 영웅이 되었냐고 물어보면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다 그곳에서 전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족들과 자녀들이 도당11과 대상이 되어 당과 수령이 돌봐주는 애국자로, 혁명의 핏줄을 이어나갈 세대로 지목되어 오늘도 김정일의 관심 속에 별로 근심걱정 없이 살고 있습니다. (361쪽 8-16줄)

제13수기 발췌(전 북한 3.13공장 지배인)

1) 중앙당에서 내려온 지도검열부장은 광주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확실한 계획에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남연락소가 아닌 조선인민군 정찰국과 특수부대들을 비롯한 전투무력들을 직접 광주에 파견하여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도울 데 대해서 특별히 지시하고 진두지휘까지 했다고 하였다. 광주인민봉기에 참가하였다가 살아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은 사람이 광주사건의 내막을 증명하는 것도 물론 놀라운 일이었지만 중앙당의 한다하는 위치가 있는 간부의 입에서 광주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소리가 나왔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375쪽 9-17줄)

2)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전국적으로 광주인민항쟁의 여파가 퍼져나가게 만드는 것이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임무였지만 생각처럼 사건이 번지지 않자 북한에서는 현장에 파견된 특수부대 요원들에게 될수록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고 주도적으로 폭동을 유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북한으로 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지면서 특수작전요원들은 시민군들 속에 위장 침투하여 본격적인 살인, 파괴활동을 조작하면서 광주시민들을 자극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광주인민봉기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 실제로 진압군에게 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요원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었다고 공화국영웅의 말을 빌어서 친구는 말했다.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원들의 정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눈치를 채거나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만 하면 그들은 두말없이 즉석에서 시체가 되어 처리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르지 않거나 그들의 요구에 불응해서 도망가면 그 사람들 역시도 절대로 살려두지 않았다는 것이다.(379쪽 9줄-380쪽 2줄)

제14수기 발췌(전 북한농촌관리위원회 부위원장)

1) 5.18광주사태 당시에는 북한군 전 부대가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우리부대도 진지에 나가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에우면서 신발도 못 벗고 대기상태에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2시간씩 진행하는 정치상학시간에는 방어사령부에서 나온 정치소조 원들이 남조선광주에서 일어난 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북한의 계획된 작전이며 많은 특수부대들이 침투해서 남조선괴뢰군들을 제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무장시켜 인민항쟁을 지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광주폭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때를 맞추어 대규모 특수부대가 남조선으로 침투해서 전면전을 피하면서 배후교란작전으로 주요시설물들을 파괴하면 사회혼란이 조성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남조선해방은 거의 확정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평양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알려주던 말대로라면 남북통일은 아무리 길어야 몇 개 월정도 안팎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5.18광주사태가 끝난 지 30년이 다된 지금에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생생한 것은 매일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던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고 잔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여자들을 살인하는 장면에 무게를 두고 반복적으로 방송해가면서 남조선괴뢰군들의 잔인성과 야만성은 짐승도 치를 떨 정도라고 저주를 퍼 붙던 방송원의 격앙된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396쪽 하1줄-397쪽 하4줄)

2) 북한에는 광주사태에 참가했다가 돌아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고 제가 살던 곳에는 광주에서 죽고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영웅묘지가 있습니다. 현재 북한 함경북도 소재 청진시 천마산 마루에는 대남작전에 참가하였다가 사망한 전투영웅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398쪽 11-15줄)

제15수기 발췌(전 남포시 농촌경영위원회 지도원)

1) 남조선괴뢰군들이 총탁(남한의 개머리판)으로 사람들을 내리치고 발로 짓뭉개면서 실신한 사람들을 질질 끌어다 차에다 싣고 장면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소름이 끼치고 끔찍한 일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내용은 시간이 갈수록 정상적인 사람들도 감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점차적으로 더 험악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화장실에 숨어 있는 대학생인지 사회직장에서 일하는 여자인지 젊은 여성의 머리를 가격해서 두개골을 박살내고 그 자리에서 옷을 홀딱 벗기고 젓 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이 한참동안 생생하게 그대로 나오다가 다음 장면에서는 중년여성으로 보이는 임산부의 머리채를 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서는 치마를 찢어 버리고 팬티를 장검으로 베버리더니 긴 칼로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끌어내는 등 예술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몸서리치는 장면들이 그대로 여과 없이 생생하게 나왔습니다.

2) 텔레비전화면에 나오는 장면들도 이전에 보던 것과는 전혀 양상이 다른 실지 죽이고 쫓기는 장면들이었습니다. 남조선괴뢰군들이 총탁(남한의 개머리판)으로 사람들을 내리치고 발로 짓뭉개면서 실신한 사람들을 질질 끌어다 차에다 싣고 장면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소름이 끼치고 끔찍한 일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내용은 시간이 갈수록 정상적인 사람들도 감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점차적으로 더 험악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화장실에 숨어 있는 대학생인지 사회직장에서 일하는 여자인지 젊은 여성의 머리를 가격해서 두개골을 박살내고 그 자리에서 옷을 홀딱 벗기고 젓 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이 한참동안 생생하게 그대로 나오다가 다음 장면에서는 중년여성으로 보이는 임산부의 머리채를 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서는 치마를 찢어 버리고 팬티를 장검으로 베버리더니 긴 칼로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끌어내는 등 예술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몸서리치는 장면들이 그대로 여과 없이 생생하게 나왔습니다.(415쪽 하4줄-11줄)

3) 신변상문제를 우려하는 본인의 거절로 구체적인 내용은 많이 들을 수 없었지만 그 특수부대출신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광주사건 때 비폭력시위가 무장폭동으로 바뀌게 된 것은 시위과정에서 진압군에 의한 자극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일이 아니라 북한의 계획적인 수순 속에서 국가전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광주학살을 대한민국 국군 쪽으로 돌리고 김정일을 감싸주고 있는 친북좌파 애들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고 비꼬았습니다.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김대중의 친북 조직과 북한정권이 남조선에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 그가 확실하게 장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421쪽 14줄-422쪽 1줄)

2009.10.7. 지만원


5.18광주에 북한군이 왔는가?(남한 정보편)



광주시민들의 행위로 볼 수 없는 것들

아래 상황들은 북이 저지른 조직적인 작전지휘였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1) 장갑차를 타고 교도소를 6차례 공격하면서 정규전 형태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5월 21일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습격이었습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습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습니다.(“5.18관련사건수사결과” 91-117) 교도소 습격은 광주시민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첨부9, 9쪽 첨부8, 29,30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5.18의 213-214쪽)

(2) 1985년 5월 국가안전기획부는 5.18광주 사망자 수를 164명에 대한 사망원인 분석자료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을 내놓았습니다.(첨부8) 민간 사망자 164명은 학생 33명, 신원이 확인된 일반민간인 119명, 신원불상자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학생 33명은 카빈 및 가타 총상(무기고 탈취)이 22명, M-16 총상이 10명, 미상이 1명입니다. 신원이 확인된 민간인 119명 중 M-16 총상은 26명, 카빈 및 기타 총상이 58명입니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과 민간인 152명 중 M-16으로 사망한 사람은 36명, 카빈 및 기타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80명입니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 및 민간인 사망자 152명 중 총상 사망자는 116명, 76.3%가 총상 사망자입니다, 총상 사망자 116명 중 36명이 M-16 총상이고, 80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입니다. 즉 총상 사망자 중 69%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인 것입니다. 계엄군은 오직 M-16소총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 총상은 계엄군에 의한 총상이 아니라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꺼내온 총들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5월21일, 4시간대에 17개 시군,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것은 간첩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첨부9, 100, 101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의 220-244쪽)

5.21일 아침 9시, 1시간 전인 오전 8시에 20사단으로부터 빼앗은 14대의 지휘차량 등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아시아자동차를 점거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습니다. 이 차량들은 누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낮 12시부터 오후 4시에 이르는 동안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무기고로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습니다. 이는 군사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닙니다.

시민들은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무기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사람들은 오직 간첩이라는 것이 필자의 상식입니다. 시민들이라면 한 두 개의 무기고 위치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에 좌표를 찍어가지고 이러 저리 방황할 시간조차 없는 4시간대에 쏜살같이 17개 시군에 널려 있는 38개의 무기고로 달려간다는 것은 간첩으로 이루어진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불과 4시간 내에 38개 무기고가 피탈되었다는 것은 38개 팀 한팀 한팀 모두가 위치를 정확히 알고 떠났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특히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한 후,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한 자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자들이었습니다. (첨부9,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91-108쪽)

(4) 광주시민을 잔인하게 죽인 것입니다. 전기톱으로 머리를 반으로 여인의 목을 잘라 나체로 방치한 사진들이 있습니다.(첨부11, 6,7쪽) 그리고 임신한 여성의 목을 대검으로 찔러 창자와 태아가 튀어나온 것을 청소차에 싣고 갔다는 내용을 “찢어진 깃발”이라는 제목으로 작문하여 한국 대학가로 들여와 1980년대의 대자보 내용이 되었습니다. 간첩사의 전문가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경향신문 및 중앙일보 본설위원, 작고)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이 찢어진 깃발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이를 남한 지하당의 소행으로 본다고 하였습니다.(첨부13, 5.6.7쪽) 1992년 일본 잡지사(현대주간) 사장인 니시오까(西岡 力) 저 [日本誤解의 深淵]의 31-43쪽에서도 이 찢어진 깃발을 아주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이를 지하당의 소행으로 본다 하였습니다.

(5) 유언비어입니다. “경상도 군인만 뽑아서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광주시민을 죽이러 왔다. 70%를 죽여도 좋다는 말이 떠돈다”는 등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수많은 유언비어들이 있습니다.(첨부17, 3쪽, 첨부8, 9, 첨부20) 시민이 작성할 수 없는 대량의 유언비어를 적시에 살포하였습니다. 5.18.에는 “화려한 휴가라는 암호 작전명령에 의해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주민의 70%를 죽이러 왔다, 벌써 수십 명이나 죽었다. 대검으로 여인의 유방을 도려내고, 머리 가죽을 벗겨 나무에 걸어 놓았다”는 등 경상도에 대한 증오감을 유발하는 유언비어로 광주시민들을 흥분시켰습니다. 이런 유언비어들은 광주시민이 만들어낼 수 없는 심리전 전문가들이나 만들어 내 룻 있는 작전의 일환이며 이런 유언비어 작전은 제주4.3사태에서나 10.1 대구 폭동 등 빨치산이 일으킨 소요사태에는 늘 있는 현상입니다. 유언비어들의 일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공수부대들은 [젊은 놈은 모조리 죽여라], [광주시민 70%는 죽어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첨부8,9,15 등)
5.18단체측은 이런 유언비어를 광주시민이 만들어 유포시켰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대다수 국민 역시 이를 광주시민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들 할 것입니다.

북한이 관련돼 있다고 의심하는 사실들

1. 거물간첩 김용규는 북한에서 영웅칭호까지 받은 사람으로 동료간첩 4명을 살해하고 귀순한 사람입니다. 그는 “대남공작 비화, 소리 없는 전쟁”(원민출판)을 1999.11.에 발간하였습니다.(첨부18) 이 책의 413 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돌이켜 볼 때, 1970 및 1980년대 전 기간에 걸쳐 나라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던 갖가지 극렬사태가 바로 북쪽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도, 재론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광주에만 북한의 공작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으며, 이는 일종의 정신적 도그마로 인식됩니다.

2. 1996.2.29. 조선일보에는 북한에서 귀순한 최주활 대령(상좌)의 증언이 실렸습니다. “광주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지 등의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 북한 정찰국 정찰대원 3개조를 광주에 파견했다”(첨부19)

3. 북한에서 망명한 최고의 거물 강명도씨는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책을 냈습니다.(첨부14) 이 책의 240쪽에는“광주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며 기대했다가 북이 예상한 것보다 남한 정부가 소요를 조기에 진압했기 때문에 김일성과 전두환 간의 싸움에서 김일성이 패배했다”는 글이 있습니다.

241쪽에는 “나의 친구 이화섭은 5.18이 터지자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다고 말해주었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240쪽 끝줄로부터 241쪽 4줄에는 "북한 최대의 대남 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명의 정예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 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서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김중린이 시기를 놓친 것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번 탈북자들의 수기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내용들과도 일치합니다.

4. 1980.5.23. 06:15분, 서울역에서 간첩 이창용(평양시, 중구역, 계림동 36번지)을 주민의 신고로 남대문 경찰서 경장 한규용이 검거했습니다. 이창용은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는 도중 잡혔습니다. 현금 1,935,000원, 난수표 3매, 무전기 1대, 독침 1개, 위장 주민등록증 2개, 환각제 등 22종 339점을 압수했습니다.(첨부4, 310쪽 )

5. "당시 정보기관에서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북괴가 9개조의 비정규전 부대를 투입함과 동시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광주사태가 악화일로에 있으니 더욱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다"(첨부17, 육군본부 1982.3. 발간 ‘계엄사’ 157쪽 6-8줄).

6. 위 첨부17의 계엄사 114p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1979년10월27일, 전군에 ‘전투태세강화’(폭풍5호)를 지시했고, 10월29일에는 동구를 방문 중인 오극렬 총참모장 일행이 급거 귀환하여 군사 회의를 소집했고, 12월18일에는 군-당 전원확대회의를 개최하면서 전군에 ‘통일에 대비한 무장’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980년 2월에는 해주, 세포, 곡산, 양덕 등에서 전쟁물자동원훈련을 실시했고, 철도역에 비상열차를 24시간 대기시켰다. 1980년 3월에는 남파돼 있는 간첩들에게 남한의 시위조직을 확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고, 시위군중이 폭도로 변질되도록 ‘점화 기폭조’를 시위 군중에 잠입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조총련에는 공작원을 침투시켜 시위대를 거리로 유도하고, 민중봉기의 계기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이 내용은 탈북자들의 5.18수기 내영들과도 일치합니다.

7. 김일성은 간첩들에게 남한에 ‘전민봉기’(전국민봉기)를 적극 유도하라는 지령을 이래와 같이 내렸습니다.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은 2004년 6월 22-27일에 걸쳐 “김일성 비밀교시”(1)-(5)까지를 연재했습니다. 이는 탈북한 북한 간부의 증언(거물간첩 김용규)과 각종 비밀자료에 의해서 엮은 것이라 합니다. 이중 당시 김일성이 무슨 일을 추진했는지에 대한 부분만 발췌합니다.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의 209-257)

“10·26사태는 결정적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

“12·12사태는 미제의 조종 하에 신 군부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입니다. 계엄사령관 관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남조선 정세가 그만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인민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1979년 12월 20일 중앙당 확대간부회의)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일어났습니다. 사북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청년학생, 도시 빈민 할 것 없이 전 민중들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빈민 등 각계각층 에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 1980년 5월 3호청사 부장회의)

8. 소준열 당시 상무대 계엄분소장과 시위대에 참여했던 이재춘시는 광주에 조직적인 간첩활동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1996.7.11. 5.18사건 제1심 21차 공판에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전남 도청 안에 적색분자가 섞여 있다. 그 근거로는 북괴의 개성 통혁당 방송에서 상무관하고 도청 사이에서 시위를 한 사실이 있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에 위와 같은 사실을 방송한 것을 정보참모로부터 들었다”고 진술했습니다.(첨부4, 377쪽)

위컴회고록(첨부21)에서도 “문형태(전남출신의 당시 함참의장)의 생각은 ‘공산당들이 시내에 들어와 있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과격분자들을 조종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 ”는 내용이 있습니다.(첨부21. 2쪽)

당시 광주에서는 KBS, MBC 방송국들이 불에 타서 방송을 하지 못했고, 시민들이나 군은 북한방송을 들었다고 합니다. 5.18 시위대에는 13명의 방위병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이재춘씨는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첨부22, 3쪽)

그 밖에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장군, 당시 특전사령관 정호용 장군 등 많은 이들이 광주작전의 실황이 북한 방송을 통해 중계됐기 때문에 광주에서의 상황전개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9.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이 12명 있습니다.(첨부7, 2005.1월호 조선일보 별책무록 “5.18사건 수사기록: 234쪽) 이들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고 식별도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0. 위 자유북한군인연합은 곧 탈북자 100여명의 서명이 들어간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집이 9월 내로 발간할 예정입니다.

11. 5.18에서 경찰관 15명을 인질로 잡는 등 혁혁한 공로를 이룩한 윤기권은 국가로부터 2억원을 보상받은 후 북한의 안내에 의해 북한으로 가서 광주의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북한이 안내하여 데리고 가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첨부23) 그는 북한에서 5.18에 대한 선전을 한다고 합니다. 북한이 5.18에 개입한 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 내용은 탈북자 수기집에도 들어 있습니다.

12. 북한은 해마다 5.18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고 있으며 돌마다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내려보내고 있습니다.(첨부24)

2009.10.7.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