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미망인 이희호 여사가 최근 인터넷 매체에 사실과 다른 글을 올려 김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지만원(68)씨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이 여사가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해 사건을 형사1부에 배당해 조사하고 있다”고 25일 밝혔다.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은 “지씨가 남북정상회담 때 김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차 안에서 터무니없는 밀담을 나눴다는 등 사실과 다른 내용의 글을 올려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고 고소 이유를 설명했다.
지씨는 지난해 11월6일 인터넷 매체인 ‘올인코리아’에 올린 ‘친일파 김대중의 목에 걸린 ‘독도, 가시’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 전 대통령이 1989년 1월9일 일본 대사관에 마련된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분향소에 참배한 사실을 지적하며 “일본에 약점이 많아 독도를 넘기려 했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지씨는 또 같은 글을 통해 “일본에서 발간된 책에 남북정상회담 때 김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차 안 밀담 내용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파악했는데, 김 전 대통령이 ‘(김일성) 수령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김 총서기님과 협력해 살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적혀 있다”고 적시했다.◇
(문화일보/기사 게재일자 2010년 2월 25일, 11시 55분/장석범기자)
김대중 목에 걸린 독도 가시
이승만1952.1.18.에 ‘리승만 라인’을 선포했고, 그 선 안에 독도가 있었습니다. 일본을 통치한 연합군최고사령부(SCAP)는 1946.1.29. 일본정부에 하달한 지시령(SCAPIN) 677호 3항에서 “일본 영토는 홋카이도, 혼슈, 큐슈, 시코구 등 4개 주 섬들과 약 1,000개의 주변 작은 섬들로 제한 한다”며 “‘웃즈로(울릉도)’, ‘리앙쿠트 락스(독도)’, ‘쿠엘파트(제주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시킨다”고 명시했습니다.
박정희: 1965.6.22. 소위 구-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여기에서도 독도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돈을 주는 대가로 일본이 또 독도를 거론했습니다. 1965. 5.17,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하면서 독도를 일본과 공유하라, 공동등대를 설치하라 종용했습니다. 박정희는 이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미국이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지만(1965.6.15, 국무부문건 364호) 박정희는 장관급 회담을 거절하겠다며 맞섰습니다. 미국대사는 ”박정희는 그 무엇으로도 독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밀어붙이기의 불가능성을 본국에 보고했습니다.
김대중: 1998.11.28. 독도를 포기하는 신-한일협정에 서명했습니다. 1999.1.6. 국회에서 토의도 하지 않고 여당의 날치기로 단숨에 통과시켰습니다. 1999.1.22.부터 발효됐습니다. 이 때 새로 그은 ‘배타적경제수역’(EEZ)에는 독도가 우리 땅이 아닌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로 인해 3,000여척의 쌍끌이 어선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선박 및 어구 류 제조업체들이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어민들은 통곡을 했지만 당시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그 어선들을 북한에 주자했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김대중은 이를 금지곡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이 독도를 방문하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도대체 김대중은 일본과 무슨 뒷일을 벌였을까요?
노무현: 그는 여당 부총재를 거쳐 2000.8.7.해양수산부 장관이 됐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냉엄한 국제 현실 속에서는 우리 주장만 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이에 당시 야당 의원들은 “장관은 한국 장관인가. 일본 장관인가” 이렇게 화를 낸 바 있었습니다. 반기문, 한덕수. 이정빈도 이들 편에 서서 일했습니다.
2004.7.21. 제주도에서 고이즈미 일본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케시마 문제에 관해서는 좀 적당하게 얘기하고 넘어가겠다. 이런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재론하지 않겠다 이런 정도로 말씀을 드리겠다" 일본 시사통신은 7.22일 "일본과 한국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토문제에서 한국대통령이 일본의 견해를 용인?"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일본이 무슨 생각 했겠습니까? “어수룩한 데가 있다, 잘하면 되겠다!” 이런 생각 안했을까요?
정동영: 1999년 당시 국민회의 대변인이었습니다. 그는 협정의 국회비준을 촉구하면서 이를 적극 찬성하는 논평을 연일 냈습니다. “한일어업협정은 독도 영유권 문제와 무관한 것인데 한나라당이 독도 수호를 끼워 넣어 장외투쟁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입체로 보는 김대중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김대중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재판부는 김대중을 민주화의 화신이고, 전두환은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를 범했다며 무기징역을 최종 선고했다. 재판부는 5.18 시위대가 헌법을 수호하려는 준헌법기관인데 전두환과 정호용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기 때문에 내란죄에 해당하고 그 과정에서 훌륭한 시위자들을 살해했기 때문에 내란목적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그리고 5.18을 조기에 진압한 것은 전국적으로 확대돼야 할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것이기 때문에 내란이라고 판결했다. 필자는 이런 판검사들이 과연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인지에 대해 의심한다. 과연 역사바로세우기의 판검사들이 옳은 판결을 했는가? 먼저 김대중이 북한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 사람인지를 탈북자들의 증언록을 통해 알아보자. 인용된 자료는 모두‘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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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에서 모심는 박정희 전 대통령. 김대중과 북한정권은 한통속이듯, 다투워 박정희를 공격했다. |
1)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80년도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나 다 알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사실이 알려지고 영웅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39쪽 하2-8줄)
2) 다른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하나같이 나처럼 대답할 것이라고 믿지만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 때에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에 가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165쪽 10줄-166쪽 2줄)
3)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습니다.(224쪽6-12줄)
4) 당시만 해도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243쪽 8-16줄)
5) 김대중이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257쪽 하1줄-258쪽 11줄)
6)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김대중의 친북 조직과 북한정권이 남조선에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 그가 확실하게 장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421쪽 하3줄-422쪽 1줄)
수기집에는 문익환에 대한 증언도 있다
“(공화국 영웅 평양사자) 자서전의 내용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그가 남조선에 내려와서 대남공작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친척들의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공작한 대상들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적혀있었고 특히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 속에 있던 죽은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었다. 1989년인가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과 만났을 때 나는 ‘평양사자’의 자서전에서 보았던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이 생각되는 내용이지만 ‘평양사자’가 남파되어 문익환을 만나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였다.(142쪽 2줄-15줄)
실제로 2006년 9월 8일 한국일보는 평양에서 발행되는 영자지 평양타임스를 인용하여 문익환의 초상이 북한 기념우표에 올라 있고, 우표에는 민족통일상 수상자로 표기돼 있다고 보도했다.
필자가 본 김대중
1)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서도 북한에 대해 이른바‘통 크게’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김정일은 1999년 김대중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선전선동기관인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은 1999년 7월 19일, 김대중역도의 부정부패행위를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먼저 포문을 열었다. A-4지 14쪽 분량으로 실려 있는 한민전의 고발내용을 요약한다.
1982년 김대중은 미국망명 때 전두환에게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그 대가로 30만 달러의 돈을 받았다. 92년 대선 직전 그는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 전 평민당 창당자금으로 3백억 원을 받았고 6공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문제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에게 그것을 유보한다는 대가로 5백억 원을 받았다. 노태우로부터 모두 1천2백 여억 원을 받았다.
60년대 말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코카콜라를 끌어들이게 하고는 그것이 문제시되자 재빨리 국회에서 업자를 비판해 이에 분격한 업자로부터 멱살을 잡히고 뺨을 얻어맞은 바 있다. 미국에 망명했을 때 김대중은 미국교포들이 광주학살희생자 유족들에게 전해달라고 기탁한 15만 달러와 한국민주화운동에 써달라고 모금해준 수백만 달러를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호화판생활을 해 교포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87년부터 청와대 권좌에 오르기 전까지 조성하여 친인척명의로 관리해온 비자금은 8천여억원에 달한다. 집권하자마자 개혁」의 구호를 들고 재벌들과 기업주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뜯어냈다. 「재벌구조조정」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서 재벌들은 살아남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저마다 돈뭉치를 들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H그룹회장은 1백50억 원을 청와대에 상납했다. 이렇게 기업주들로부터 챙긴 검은 돈이 5천억 원이다.
구조조정을 한다는 명분으로 기업체들과 은행을 외국투자가들에게 매각하면서 또한 큰 돈벌이를 하고 있다. 김대중은 미국의 에이에스회사가 한국화학의 발전 사업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5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았고 한국의 유망 기간산업의 주식을 헐값으로 팔아넘기기로 하고 사례금을 받았다. 소로스에게 단기채권시장을 내주고 서울증권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4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외국투자가들에게 온갖 이권을 보장해준 대가로 지금까지 받아먹은 돈이 2천억 원이다.
2)1998년 10월,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황금어장을 팔아넘기는 것을 골자로 한 한일 간의 어업협정을 발효시키기로 한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았다.
전두환, 노태우를 잘 보살펴주면서 그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뜯어내고 있다.비자금문제와 추징금징수를 무마시켜주기로 하고는 그들로부터 각각 2천억 원씩의 사례금을 받았다. 「전 대통령의 예우」를 받을 수 없게 된 전두환에게 외교관여권을 주어 방일행각을 하도록 한 대가로 5백억 원의 사례금을 받았다.
[금모금운동]이라는 것을 벌여놓고 막대한 돈을 착복하였다. 국민들로부터 수집한 금붙이들 가운데 일반적인 금붙이는 금괴로 만들어 팔고 값비싼 금패물들은 그대로 외국의 보석상들에게 넘겨 돈벌이를 했는데 그 금액은 대략 2억 달러에 이른다.
인사는 곧 돈줄이었다. 김대중의 인사를 통한 돈 사냥은 주로 장남 김홍일을 통해 벌어지고 있다. 김홍일은 애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정치권은 물론 군과 검찰, 경찰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여 돈벌이를 톡톡히 하고 있다. 장성별 한 개의 공정가격이 1억 원이라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다. 김대중 부자가 군과 경찰인사를 통해서만 착복한 돈이 6백억 원은 넘는다.
김대중의 여섯째 처남 이성호는 해외여행 알선업체인 「평화관광」을 경영하면서 김대중을 등대고 해외 특혜여행을 미끼로 여행자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걷어 들이는 한편 유학시절 미국 에리모 대학과 조지 워싱턴대학원에서 친교를 맺었던 인맥들과 짜고 미국현지에 진출한 한국재벌업체들에게 이권을 보장해 준다고 하면서 막대한 돈을 뜯어내 김대중의 금고를 채워주고 있다.
이형택과 이세작 등 처조카들까지 발동해 막대한 비자금을 긁어 들이고 있다. 김대중의 처조카인 동화은행 영업1본부장 이형택은 금융계에 손을 뻗쳐 신탁통치로 인해 생사기로에 놓여있는 은행들과 종금사들을 살려주겠다는 담보로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걷어 들였다.
김대중의 둘째 처남 이경호의 차남인 이세작은 변호사의 간판을 걸고 각종 비리에 걸려든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을 살려준 대가로 막대한 돈을 거두어 들였다.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소유한 재산이 9억4천만 원인 것으로 신고했고 대선 후의 재산공개 시에는 8억8천만 원으로 6천만 원이 줄어든 것으로 공개했지만 지금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알려진 것만 해도 1조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뜯어낸 돈을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비롯한 외국은행들에 있는 자기의 비밀구좌에 입금시켜 놓았는데 그 규모는 10여억 달러에 달한다.
1999년 12월 5일, 북한 부주석 김병식이 김대중에 쓴 편지를 폭로했다.
김대중 선생 귀하.
이번 대선의 큰 사업을 앞두고 분망하실 선생에게 따뜻한 인사를 보냅니다. 그 동안 어려운 길을 걸어온 선생의 오랜 소망과 뜻이 성공의 빛을 보게 된다고 생각 하니 선생과 협력해오던 지난 날이 회억 되면서 감개무량 함을 금할수 없습니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 하던 때가 엊 그제 같은데 벌써 26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요즘 텔레비죤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 플라쟈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 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 하였습니다.선생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딸라 밖에 보탬 해 드리지 못한 것 지금도 괴롭게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데 밑 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선생이 어느 회합에서 말씀 하셨지만 조국 통일의 앞길에는 의연히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지금에야 말로 이남에서 자주적인 민주 정권이 서야 북과 남이 민족 주체적 힘으로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때이라고 간주 합니다. 나는 선생이 대선에서 꼭 승리 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선생과의 상봉을 확약 하면서 옥체 만강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주체 86 (1997년)12월 5일 평양에서
조선 사회 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병식
3)이어서 1999년 12월호, 일본 문예춘추지에 김정일이 김대중을 압박하는 육성녹음이 소개됐다. 우리 아버지 수령으로부터 사랑과 배려와 도움을 받고도 배은망덕하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정권을 쥐고 있는 김대중은 야당 시절을 아득히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미제의 등에 업혀 반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돼있다".
"김일성 수령님은 김대중이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에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 오늘의 김대중은 배신으로 대답하고 있다".
"김대중은 야당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게 접근했으면서도 신뢰와 의리를 버리고 반사회주의·반통일 책동에 광분하고 있다".
"김대중을 두목으로 하는 남조선 당국자는 동포와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로 ‘태양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나 사실은 우리 공화국을 혼란시키려는 기만정책에 불과하다"
"그도 한때는 민족자주와 미군철수를 주장, 민족주의자임을 자칭했으나 민족의 존엄과 양심을 저버리고 악랄한 친미·친일의 사대매국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
4) 같은 시기에 구국전선이라는 노동당 기관잡지가 전단을 통해 김대중이 스위스 은행에 10억 달러를 보관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 책자와 전단은 한국의 휴전선과 해외교포들에게 뿌려졌다. 바라는 요지는 김대중이 김일성 주석의 은혜에 빨리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5) 이 연속적인 협박에 당황했을 김대중이 2000년 3월, 갑자기 베를린으로 날아가 접선을 요청했다. 김정일의 입을 빨리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이제까지 민간단체를 통해 북한을 도와주었지만 도와준 양이 변변치 못했다. 좀 넉넉하게 도와주려면 아무래도 정부가 앞장서야 할 것 같다.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하다. 정상회담을 열자”는 요지의 선언이었다. 김정일은 쾌히 그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차안에서 단둘이 55분간 접선을 했다. 색깔로 의심받아온 그가 대열을 이탈해 적장과 단둘이 1시간씩이나 밀담을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접선과정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소문과 추측만 무성하다.
하지만 그 접선 이후에 나타난 김대중의 행동은 결코 대한민국 대통령의 행동이 아니라 약점 잡힌 사나이의 허둥대는 행동이었다. 김정일이 앉아라하면 앉고 서라하면 서야 하는 사람으로 비쳤다. 그 후의 남북한간 거래는 거래가 아니라 한쪽 협박하고 다른 한 쪽은 그 협박에 못 이겨 허겁지겁 대국민 명분을 만들어가면서 퍼주기만 하는 약점 잡힌 전주에 불과했다. 이를 어떻게 정상회담이라 볼 수 있으며 대북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필자는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여 2002년 8월 16일, 동아일보와 문화일보에 의견광고로 나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5.18이 북한과 연계된 폭동이었다고 한 35자의 문자 하나만 걸어 필자를 광주구치소로 구속시켰다. 위 사실에 대해서는 고소를 하지 못한 것이다. 김대중과 김정일이 차내에서 무슨 내용을 주고 받았을까에 대해서는 소문과 추측만 난무했다.
일본에서 2004년 12월 4일 발간된 책 “김정일 파멸의 날”(출판사: 일신보도. 저자: 미도 히로미찌)은 교보문고에 들어와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혔다. 이 책의 188-189쪽에는 2000. 6.15일 남북정상회담 시, 갈 때에 45분, 올 때에 45분, 계 90분간에 걸쳐 김정일과 김대중 단 두 사람이 동승한 차내에서 있었다는 밀담내용이 소개돼 있다. 아래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들이다.
미 CIA는 양 김의 차내 밀담 90분간의 내용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포착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정일은 김대중의 남로당 서류와 1967년부터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30여 년간 김대중에게 제공한 자금원조에 관한 자료 등을 보여주면서 "이들 자금이 도움이 되었습니까?”이렇게 말했다. 이에 김대중은 잔뜩 주눅이 들어 아래와 같은 말을 하였다.
1) 생전의 김일성 수령님을 만나 뵙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2) [박통시절) 납치사건에 있어서 여러 모로 힘을 써 주셔서 오늘 날의 제가 있었습니다.
3) 광주사태로 인해서 사형판결을 받았을 때에도 생명을 구해 주셨습니다.
4) 수령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김 총서기님과 협력하며 살고 싶습니다.
5) 남북 평화협정을 조기에 체결하고 싶습니다.
6)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민족을 자주적으로 통일하는데 매진하고 싶습니다.
7) 북조선에 경제재건을 위해서 의욕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8) 클린턴 미 대통령과 일본 총리를 조속히 평양에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