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1일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4시간 동안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 위장돼 있는 38개 무기고가 털렸다. 38개 팀이 각 무기고로 가는 약도 한 장씩을 가지고 동시에 출발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반 국민은 무기고 옆을 지나면서도 그게 무기고인지를 알지 못한다. 무기고 위치는 비밀로 관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38개라는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얼마나 오랜 동안에 걸쳐 찾아낼 수 있을까? 숫자로는 제시할 수 없겠지만 상당한 재능이 있는 여러 사람들이 동원되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헤매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사람들에게 ‘무기고 어디 있는지 아느냐?’ 하고 물어보며 다닐 수도 없는 성격의 일을 성사시키려면 상당한 재간과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이 하나의 무기고 위치를 알아내려면 여러 날에 걸쳐 예리한 코를 가지고 냄새를 맡은 후, 그 곳을 여러 날에 걸쳐 관찰해야 겨우 하나의 무기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광주 시민들이 5월 18일 이후 불과 3일 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니다. 더구나 황석영과 북한당국이 쓴 5.18 역사책들을 보면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에서 시민들이 계엄군으로부터 무차별 사격을 당한 후 “총 총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해”하고 무기고들을 털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다. 마치 무기고 위치들이 누구의 눈에나 다 뜨이는 현저한 지형지물인 것처럼 묘사돼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기고 위치는 비밀로 관리되며 철저하게 위장돼 있다.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서 위장돼 있는 38개 무기고 위치를 찾아내려면 수많은 고정 간첩들이 동원되어 오랜 기간에 걸쳐 은밀히 지구력 있게 탐색활동을 해야 한다. 절대로 광주시민들이 즉흥적으로 며칠에 걸쳐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찾아내기 힘든 38개 무기고 위치를 5월 21일 이전에 찾아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5.18 이전 몇 개월에 걸쳐 전라남도 17개 군에 수많은 간첩들이 깔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광주사태가 즉흥적으로 발생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사전 계획 하에 준비되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1995년 7월 18일 검찰이 내놓은 ‘5.18관련사건수사결과’보고서를 보면 1980년 5월 21일, 12시부터 16시까지 4시간대에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증9, 5.18관련사건수사결과. 1995.7.18. 100, 101쪽) 같은 검찰 기록을 보면 시위대가 어떻게 알았는지 극비의 군사기밀사항을 알아냈다. 20사단 지휘부가 광주 톨게이트를 5월 21일 오전 8시 경에 통과할 것이라는 극비사항을 알아낸 것이다. 군에 간첩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300명의 시위대가 광주 톨게이트 부근에서 화염병 등을 가지고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그 지역을 통과하던 20사단 지휘부로부터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했다. 이는 시민들의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군사작전이었으며 이들은 빼앗은 14대의 지휘차량 등을 타고 방위산업업체인 아시아자동차로 갔다. 도착시각이 아침 9시였다.
이 300명과는 별도로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오전 9시 경에 역시 아시아자동차에 합류했다. 이들은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다. 이 차량들은 누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낮 12시부터 오후 4시에 이르는 동안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향해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다. 이는 군사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니었다.
시민들은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살아간다. 시민들이라면 잘해야 한 두 개의 무기고 위치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도에 좌표를 찍어가지고 이러 저리 방황할 시간조차 없이 4시간대에 쏜살같이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의 무기고로 달려간다는 것은 간첩으로 이루어진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특히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한 후,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한 자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자들이었다.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는 이들 300명으로 이루어진 두 그룹이 연고대생이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청문회에서 증언했지만 이들 연고대생 600명은 그 후 보상금을 받은 바 없다.(첨부9,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91-108쪽)
이에 대해 북한 당국이 발행한 5.18 역사책을 보자. 북한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1985년에 발행한 5.18역사책 ‘광주의 분노’에는 이런 표현들이 있다.(증38, 34-35쪽)
“5월 21일, 광주고등학교와 숭일고등학교 학생들이 ‘학도호국단’의 무기고를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것은 광주 인민봉기과정에 봉기군이 처음으로 벌린 무기탈취투쟁이었다. . . .이 때부터 봉기군들은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놈들의 무기고를 본격적으로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폭동군중들은 괴뢰들의 군용차량 공장인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들은 이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 . 이리하여 무기탈취 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빈총 2,240정, 엠-1 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만 6,400여발이었고 장갑차 4대, 군용차량이 400여대에 달하였으며 수백 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뢰관들도 획득하였다. . . 괴뢰군 제 179지원단의 무기고를 습격할 때의 일이었다. 폭동군중이 무기고를 향해 밀려들자 보초놈들은 사격을 가하면 완강히 저항하여 나섰다. . .정면으로 밀고 들어가면 막대한 희생을 낼 수 있다고 본 군중들은 정면에서 사격전을 벌리는 한편 몸이 빠른 청년들로 놈들의 배후를 기습하게 하였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돌격대’ ‘특공대’를 두었고 대학생들은 ‘전남지역학생총련맹’의 지휘에 따라 대학별로 전투대오를 조직하였다, . .”(증38, 37-38쪽)
"광주의 분노"(증38)의 36쪽에는 시민군이 탈취한 무기고의 이름들이 나열돼 있다. 안기부 자료 및 검찰보고서와 비교를 해보니 북한자료가 훨씬 더 자세했다. 예를 들어 안기부 자료(증8 57쪽) 및 검찰자료(증9 101쪽)에는 “화순군의 동면지소 등 4개지서의 무기고를 털었다”고 되어 있다. 북한자료에는 "전투경찰중대무기고" "동면지서" "통주지서" ‘향토예비군무기고"로 특정하고 있다.
라주군의 5개 경찰서에 대한 기록도 북한자료 증 38(36쪽 상단 3개줄)이 훨씬 더 상세하다. 북한 노동당 출판사가 1985년에 남한의 상활일지보다 더 자세한 상황자료를 정리했다면, 북한사람들이 5.18광주에 와서 계엄군 또는 경찰보다 더 자세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38개 무기고 위치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북한 간첩들이요, 무기고 이름을 남한 자료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할 수 있는 존재도 북한 간첩들이요, 무기를 터는 상황을 동영상처럼 기록할 수 있는 것도 북한 간첩들이다. 우리 군이나 경찰의 상황일지에는 동영상처럼 행동을 묘사한 자료가 일체 없다. 이를 모두 종합해 보면 5.18광주에 북한 사람들이 확실하게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무기고 위치를 누가 사전에 알아낸 존재는 오직 북한 고종 간첩들 밖에는 없고, 5,18광주상황을 현장에서 관찰하고 이를 동영상처럼 묘사한 집단이라면 이는 오직 북한집단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는 확실한 결론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탈북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증언하는가를 알아보자. 탈북군인들로 구성된 ‘자유북한군인연합’이 발간한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는 전직 북한 여교사의 증언이 있다. 이 여인은 5.18 광주에 왔다가 “5.18공화국영웅” 이라는 칭호를 받은 안창식과 2명의 아이를 낳은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증언한다면서 이런 증언을 했다.
“목포에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증언록 78쪽)
또 다른 탈북자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직접 광주에 갔다왔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남한 봉기자들이 무기고를 털어서 총(무기)을 주어도 잘 받지 않았다고 했다.”(증언록 34쪽) 또 다른 증언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남조선에 숨어있는 지하조직들과 협동해서 무기고를 탈취하고, 또 사람들을 죽이면서 광주인민들을 자극했다고 하였다. 강원도 어느 탄광인지, 그곳에서 일어났던 봉기에도 참가했다고 하였다.”(증언록 37쪽)
또 다른 탈북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 광주에서 대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쪽에서 남조선에 나가서 활동하는 특수부대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남조선에 침투하여 단기 소부대작전을 하던 사람들은 게릴라전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광주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남조선시민들이 아니라 다 우리가 한 일이었다.”(증언록 209쪽 11-16줄) 또 다른 탈북자의 증언이다.“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번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정도로 생각했다고 하였음)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증언록 347쪽)
무기고를 탈취의 지휘는 누가 했는가? 탈북자들은 한결같이 북한 특수군이 내려와 지휘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자료는 수사기록에도 없고, 북한 자료에도 없다. 단지 냄새만 날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고를 위치를 누가 알아냈는가?’에 대한 것이다.
탈북자들은 북한특수군의 지휘로 고정간첩들이 총동원되어 3개월 전남지역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다고 증언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논리적 판단과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 검찰 수사자료에는 분명히 5월 21일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17개 시군에 숨어있는 38개 무기고를 모두 털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사전에 무기고 위치를 정확히 알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이고, 위치들을 정확히 알아내려면 수많은 고도의 기술자들이 수개월에 걸쳐 온 지역을 이 잡듯이 뒤져야 찾아야만 찾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광주사태는 북한이 기획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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