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패망이 가까워 오자 조선총독부는 일본 항복 후에 초래될 한반도에서의 혼란상태와 그로 인한 한반도 거주 일본인들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인 정치 지도자에게 치안권을 이양할 것을 계획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1일 경기도지사 이쿠다를 통하여 동아일보 사장이자 민족주의 지도자인 송진우를 접촉하여 치안권을 인수할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했다. 여운형 역시 고하 송진우를 찾아와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는 해외에서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전개해 온 임시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다가 패퇴하는 일본으로부터 치안권을 인수받는다는 것은 민족적 대의에 반한다는 생각에서 총독부의 제의를 거절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4일 송진우와 가까운 김준연에게도 부탁했으나, 김준연은 송진우의 참여 없이는 응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것 역시 무산되었다. 이에 반해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은 총독부의 제의를 수락하고, 일본의 항복선언이 방송되기 불과 4시간 전인 15일 오전 8시경에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의 관저에서 엔도로부터 치안권을 인수받았다.
여운형을 비롯한 좌익세력은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인수한 권한을 임의로 ‘행정권’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을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던 것이다. 여운형은 당시 서울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인 정백, 이강국, 최용달등과 8월 15일 이전부터 건국준비위원회의 구성에 관해 긴밀히 협의해왔다. 때문에 그들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그날로 건국준비위원회 구성에 착수, 그 다음날인 16일에 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음을 발표하는 신속성을 보였다.
한편 송진우는 1945년 9월 16일에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만들었고, 송진우는 초대 수석 총무를 맡았다. 좌익들은 한국민주당이 친일파의 본산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당시 창당의 주역이었던 허정은 ‘한민당을 준비할 때 독립조국의 주류 형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인물 엄선의 확고한 원칙이 있었다. 친일파나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사람은 제외하기로 했던 것이다.(중략) 일제하에서 고급관리를 지냈거나 친일파로 지목받던 사람들이 몇사람 있었다 하더라도, 이들이 극악한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아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한민당 창당시 신문기자로 활동했던 이상돈도 그와 유사한 증언을 하고 있다. “또 한가지 특기할 것은 한국민주당 발기인을 선정할 때, 과거 일제 치하에서 본의든 타의든 간에 친일한 사람은 제외하였다는 것이다.” 요컨대 한민당은 사상적으로 우익성향을 가졌다 할지라도 명백한 친일 인사는 배제한다는 인선원칙을 채택한 것이다.
한편 임정의 구성원들은 중국에서 그들 자신이 좌우합작 정신에 의해 임시정부를 구성 유지해왔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서 좌우합작이 타당하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임정봉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이승만과 한민당이 국내좌익과 대결적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임정의 좌익 구성원들은 임정과 국내 좌익 간의 합작을 주장할 수 밖에 없고, 임정의 우익 구성원들도 임정의 단합을 유지해 나가려면 임정의 좌우합작 정신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정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이승만과 한민당에 대한 부정적 관점과 좌우합작에 대한 본질적 혹은 낭만적 애착은 그들의 귀국 직후의 정치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그후의 정치상황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유발하고 우익진영의 내분, 특히 국내 우익세력과 임정의 우익 구성원들간의 갈등을 야기시켜 전체 우익진영의 역량 약화를 초래하는 중대요인이 되었다. 임정은 자기들을 전폭 지지하는 이승만과 한민당이 인공의 해산을 촉구하는 가운데 인공 측과 합작을 추진했다. 임정-인공의 합작 추진은 인민공화국(이하 인공)측의 적극적 제안에 따른 것이며 비공개적으로 추진되었다.
인공측은 김구 등 임정 1진이 귀국한 직후부터 임정-인공합작을 추진했다. 인공을 구성한 좌익세력은 임정과 인공이 합작함으로써 강력한 국내 우익세력인 이승만과 한민당을 고립시키려 한 것이다. 임정-인공의 합작 협상이 임정의 고압적인 자세로 인해 전혀 진척을 보이지 않게 되자 공산당의 박헌영은 12월 12일 임정과 사실상 결별할 작정임을 나타내는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정은 또 다른 방법으로 좌우합작을 계속 추진했다. 임정측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임정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는 받아 들이면서도 그러한 지지에 보답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공작을 전개한 것이다. 만일 이러한 임정의 공작이 성공했더라면, 우익진영은 1945년 말부터 임정계와 이승만-한민당계로 완전히 분열되고 좌익 진영은 우익진영의 분열을 이용하여 정계의 주도권을 지속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정의 공작은 45년 말 모스크바협정이 체결되고 그 협정에 내포된 신탁통치에 대해 찬성할 것이냐 반대할 것이냐가 이 나라 정계의 최고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남한의 정치세력들은 모스크바 협정이 발표되기 전부터 신탁통치 실시에 대해 격렬한 반대를 표명해왔다.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남한 정체세력들의 반대는 좌우 중도를 가릴 것 없이 일치되었고 또한 격렬했다. 예를 들면, 45년 10월 20일 미국무성 극동국장 빈센트가 미국의 민간단체인 외교정책협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국에 공동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미국의 계획을 밝힌 것이 국내에 보도되었을 때, 좌 우 중도의 모든 정체세력이 하나같이 격렬한 어조로 신탁통치 반대입장을 천명했다.
이런 가운데 12월 26일 모스크바 협정문이 미국 영국 소련에서 동시에 발표되었고, 국내에는 12월 28일 워싱턴 합동통신을 통해 29일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12월 29일자 동아일보는 모스크바협정문과 동시에 이승만(이승만은 26일 서울중앙방송에서도 신탁통치 결사반대 입장을 표명)과 한국민주당 송진우 수석 총무의 “신탁통치 반대 결의문”을 보도했다. 또한 임정은 28일 오후 경교장에서 긴급회의를 열어 반탁을 결의하고, 임정의 결의에 따라 그날 밤 약 70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김구는 ‘반탁운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규정했고, 회의 참석자들은 ‘일대민족적 불합작운동’을 전개할 것, 민족적 반탁운동을 지도 추진하기 위한 각계 각층의 지도급 인사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할 것, 국민총동원위원회는 임정국무회의의 지도를 받을 것 등을 결정했다.
12월 29일에는 정당과 종교 사회단체 등의 대표 150 명이 회합하여 전날 밤 결정된 국민총동원위원회의 구성을 임정이 주도할 것, 임정이 즉시 주권을 행사하도록 임정에 건의할 것, 반탁국민운동은 국민총동원위원회에 복종ㄹ할 것, 12월 31일에 좌우정당과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총동원된 대규모의 반탁시민집회와 시위를 전개할 것등을 결의했다. 다음날 국민총동원 위원회는 9개항의 전국민 반탁행동강령을 결정 발표했다.이와 아울러 임정 내무부는 31일 임시정부포고령에 해당하는 ‘국자’ 1호와 2호를 발표했다.
國字 제 1호에는 “현재 전국 미군정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관 및 행정관청의 한국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의 지휘하에 예속케 함”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이러한 국민총동원위원회의 행동강령과 임정의 국자는 임정이 민족의 대표성을 나타내는 정부임을 나타내고 나아가서는 임정이 즉시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접수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군정을 축출하는 쿠테타를 실행하려는 움직임을 시사한 것이다.
그러나 반탁운동을 국민적 열기를 기반으로 김구와 임정 요인들이 미군정을 접수하려던 일은 46년 1월 1일 김구가 하지 앞에 소환되어 귀국전 서약에 관해 추궁받았고, 엄항섭이 김구를 대신하여 일반민중은 파업을 중지하고 군정청근무자는 직장으로 돌아가라고 방송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이것으로 임정 측은 정권접수 계획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여 위신이 추락되었고, 미군정은 임정에 대한 우호적이던 태도를 바꾸었으며 그 이후 임정과 미군정간의 관계는 다시는 좋아질 수 없었다.
한편 송진우는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에 암살당했다. 범인은 한현우, 유근배 등 6명이었고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 김학준의 『고하 송진우전』에 의하면 “한민당의 수석총무인 송진우는 한 때 우리 민족은 자치역량이 부족하므로 ‘일정기간의 훈정(訓正)이 필요하다’는 개인 의견을 피력하였지만, 당의 공식입장은 극히 강력한 반탁이었다. 한민당은 한번도 신탁통치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반대를 유보하는 성명을 발표해본 적이 없고 송진우도 신탁통치문제가 쟁점화된 후에는 단호한 반탁입장을 천명해왔다.”고 밝히고 있다.
범행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위키백과와 좌익은 송진우가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된 듯하다’ 또는 송진우가 찬탁론자였다고 왜곡선전하고 있다. 송진우의 ‘훈정(訓正)이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찬탁론자로 오해받고, 한민당이 미군정의 지시를 받아 신탁통치 실시에 긍정적인 것 처럼 왜곡 선전해온 것이다. 송진우가 신탁통치 문제에 있어 임정 측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는 임정측의 반탁운동에 대한 쿠테타적 발상과 송진우의 한민당 측의 온건한 입장 차이 때문에 서로 다툼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다음은 송진우가 피살되기 하루 전 동아일보에 보도된 한민당의 반탁결의 내용이다.
한국민주당 송진우 반탁(反託) 결의(決意)를 밝힘
(동아일보 1945.12.29)
우리가 가진 반만년 역사와 지난 반세기 동안 민족해방을 위한 혈투(血鬪)는 세계(世界)정국(政局)에 대하여 조선민족을 완전해방하여 자주독립시키지 않으면 동양에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교훈(敎訓)하였고 따라서 조선민족은 타민족의 지배(支配)나 탁치(託治) 우(又)는 국제(國際)공관(公館)을 받을 민중(民衆)이 아니라는 것도 천하(天下)가 주지(周知)하게 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카이로」「포츠담」국제회의에서도 조선독립을 선언케 된 것이다. 여사(如斯)한 국제신의를 무시하고 세계사적 발전을 저해(沮害)하는 조선의 탁치 운운은 단연코 배격치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3천만이 1인도 빠짐없이 일대 국민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위하여 이 강토 위에 있는 동지는 피 한 방울이 남지 않도록 결사적 용투(勇鬪)로서 우리가 당당히 가져야 할 민족주권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화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