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 한시 바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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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게 죽어가는 인질들을 보는 국민들의 일부는 인질구출과 무자비한 탈레반을 응징하기 위해 우리 특전대를 파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드높다. 대형함정에 태극기를 펄럭이며, 한국이 개발한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함재기(艦載機)와 중무장한 특전대를 가득 싣고 가서 무자비한 탈레반을 응징하고 인질을 구출해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울분의 속이 후련히 풀리는 상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성이 없는 상상과 훗날 제작될 영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일 뿐이다. 아프칸의 인질사태는 국제사회에 한국의 능력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현실이다. 노대통령은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인 백종천을 특사로 아프칸에 파견했다. 백특사는 아프칸 대통령 등을 만나 인질석방에 백방의 노력을 하는 것 같으나 별무효과(別無效果)이다. 백특사의 활약도중에도 심성민씨는 어처구니없이 죽어갔다.
인질들 문제의 해법을 찾는다면 백종천 특사가 아프칸 대통령 등을 만나는 것은 도로(徒勞)이다. 아프칸은 미군의 점령지이다. 아프칸 대통령은 미군이 내세운 ‘바지사장’과 같은 자일뿐이다. 아프칸 대통령의 바지라도 붙들고 탈레반이 원하는 수감자를 석방해주어 우리 인질들을 살게 해달라고 ‘달러’를 들고 애소를 해도 아프칸 대통령은 능력이 없다. 탈레반이 원하는 수감자를 석방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아프칸 점령군의 미군사령관의 밀명(密命)과 하교(下敎)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설사 백특사가 아프칸의 미군사령관에게 협조를 구해도 역부여시(亦復如是)일 뿐이다. 미군사령관은 미군통수권자인 부시 대통령의 지휘를 받기 때문이다.
인질문제의 해법은 탈레반이 원하는 수감자 석방이다.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부시 대통령이다. 그의 협조 없이는 탈레반이 원하는 수감자를 절대 석방할 수 없다. 노대통령이 진정 인질들을 구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제백사(諸百事)하고 진즉 비행기를 타고 백악관으로 날아갔어야 했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인질의 단 한 명이라도 죽게 하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백악관으로 날아가는 성의를 보였다면 국민은 박수와 함께 “우리 대통령!”을 연호했을 것이다. 노대통령은 백악관으로 날아가 인질무사귀환의 책임의 공(球)은 부시에게 있다는 것을 전세계에 광고해야 할 것이다.
예전의 좋은 임금님은 백성사랑을 실천했다. 예컨대 비가 오지 않아 농사를 망칠 것 같으면 임금은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하여 술과 고기와 여색을 멀리하고, 목욕제계하여 큰산(泰山)에 올라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늘에 울며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노대통령도 인질을 살리기 위해 무슨 방법이던지 빨리 취해야 한다. 인질을 구하는 마음에서는 개인의 자존심은 버려야 한다. 전국민이 눈을 또렷이 뜨고 노무현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 대통령은 어디 있으냐는 고성이 점고(漸高)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 기독교에서는 천당, 천국이 있다. 승려나 목사나 신부나 순박한 중생들에게 제일 많이 팔아먹는 것이 극락과 천당이다. 극락과 천당을 한 번도 가보지도 못한 승려나 목사, 신부들이 입만 열면 극락과 천당을 말한다. 그러나 막상 목전에 비명횡사를 하게 되면 하나같이 살려달라는 비명을 내지른다. 오매불망 찬양하던 극락과 천당에 가기를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필자는 극락을 운위하지 않지만 살아서 가볼 수 없는 극락에 빨리 왕생(往生)하려고 몸부림을 치지는 않는다. 왜? 세상이 고해이고 오탁악세(汚濁惡世)라도 몸 건강히 행복하게 오래살기를 희구하는 것이다. 전생과 금생, 내생을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이 순간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이 순간을 소중히 생각하여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 인생은 깨달음이 가장 소중하다. 신이 진짜 있다면 나치 독일에 의해 이스라엘인이 6백만명이나 억울하게 죽으며 살려달라 기도를 해도 모른척 할 수 있을까? 인질들도 여호와께 기도를 할 것이다. 그러나 탈레반은 알라에 기도를 하며 총을 난사하고 있다. 탈레반을 애초에 만나지 않는것이 깨달음이다.
회교와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이다. 그러나 회교와 기독교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처럼 서로 못죽여서 한(恨)을 삼기도 한다. 서로 죽이고 죽는 역사가 천년을 넘은지 오래이다. 차리리 종교가 없었다면 서로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탈레반은 기독교를 믿는 미군에 의해 조국을 점령당해 험준한 산악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조국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탈레반이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처단되어야 할 악(惡)인가, 는 아직 단죄의 논평은 이르다. 다못 죄없는 대한민국 국민을 인질로 잡아 무자비하게 죽이는 행위는 악마의 행위인 것은 틀림없다. 로켓포로 바미얀의 석불을 박살내고, 무고한 한국인의 인질을 죽이는 탈레반은 우주의 불변의 법칙인 인과응보의 저주를 반드시 받을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글자나 겨우 익혀 코란을 읽을만 하면 학교를 때려치우고 주야로 코란만을 암송하며, 기독교인들이 주적(主敵)이라고 세뇌받은 탈레반에게 샘물 교회인들이 기독교 선교를 위해 탈레반지역을 찾아간 것은 화약을 지고 불속에 걸어들어간 것과 무엇이 다를까? 순교자들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성자로 역사에 남고 그들의 순교의 이야기는 시인은 찬양의 시로 소설가는 찬양의 소설로 연극과 영화로도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사지(死地)인 줄 뻔히 알면서 보내 죽게 하고서 죽은 자들을 위해 애통히 울며 찬양하고 부활을 노래할 것이다.
남의 불행을 호기(好機)로 삼는자 들의 목소리가 초여름 개구리들의 합창처럼 시끄럽다. 그자들의 억지주장은 인질들의 불행의 원인은 미국에 있다는 것이다. 첫째, 미군이 아프칸을 점령하였기에 탈레반이 선교의 기독교인을 인질로 한다는 것이다. 둘째, 미군이 탈레반이 원하는 수감자를 석방하지 않기 때문에 인질이 죽는다는 것이다. 반미, 미군철수의 촛불집회와 합창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다. 차제에 노대통령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백악관으로 날아가서 부시에게 담판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반미의 촛불집회, 반미의 합창소리가 부시를 압박하여 인질문제를 풀것이라는 생각에 팔짱끼고 반미 운동만을 지켜볼 것인가? 인질들은 난사하는 총구에 더 허무하게 죽어갈 것이다. 여중생들의 교통사고를 가지고 반미운동을 일으킨 자들은 탈레반에게 죽은 사람들을 내세워 전국에 시위를 일으키려 할 것이다. 이러한 반미시위는 대선정국에까지 영향을 미치려 할 것이다.
끝으로, 노대통령은 아프칸에 특사를 보내는 일은 근본을 잊은 지엽외교(枝葉外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의 해법을 갖고 있는 부시를 자존심을 접고 한시 바삐 찾아가 담판을 지어야 할 것이다. 시간의 낭비는 소중한 인질의 목숨이 난사하는 총에 의해 죽어나갈 뿐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부시는 죄없는 선교인들인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죽는것을 지켜보며, 반미가 고조되는 한국에 미국의 은혜를 입히려는 때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며, 노대통령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동맹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직접 오는데, "테러와 협상은 없다" 고 고집할 수 있을까? 두 나라의 정상이 인질의 생명을 구하는데 동의한다면, 전세계적으로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군포로송환과 납북어부송환 등 납북자들의 송환을 회피하는 노 대통령의 정치관이 작용하여 탈레반의 인질들을 석방하기 위해 부시를 만나러 가지 않고, 부녀지인(婦女之仁)으로 입으로만 동정하고 안타까워하며, 속수무책으로 손바닥만 맞 비비고 있다면, 역시 오래전에 탄핵되어 마땅할 대한민국의 불행이요, 천하에 다시없는 우치(愚癡)한 자라는 지적을 면치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