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조갑제씨는 최근 검정을 통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중 천재교육 책을 살펴봤다고 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부가 '탄압(彈壓)'을 했다는 표현을 모두 10차례 쓴 반면, 북한 정권에 대한 서술에선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탄압'이라고 써야 할 곳에선 '숙청(肅淸)'이나 '축출(逐出)'이란 표현으로 대신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탄압'은 '권력이나 무력 따위로 억지로 눌러 꼼짝 못하게 함'이란 부정적인 표현이다. 반면 '숙청'의 원래 뜻은 '어지러운 상태를 바로잡음'이란 긍정적 의미고, '축출'은 '쫓아내거나 몰아냄'이라는 중립적 표현이다. 교과서 집필자의 기본적인 시각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본지가 내년부터 교육 현장에 배포될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을 분석한 결과, 모든 책이 오류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서술 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부가 들어서다'는 제목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이 동격(同格)으로 수립된 것처럼 쓰는가 하면, 북한 정부가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른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세워진 것처럼 기술했다.
몇몇 교과서는 최근 북한의 군사 도발에서 '미사일 발사, 핵실험, 연평도 포격 사건'을 언급하면서 유독 천안함 폭침 사건만은 빼놨다. 이런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들은 "천안함은 북한과는 무관한 사건이었구나"라고 인식할 수 있다. 심지어 북한이 '김일성의 빛나는 항일 투쟁'으로 과대 선전하는 보천보 전투를 별도 박스로 돋보이게 배치한 뒤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의 이름도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쓴 교과서도 있다. 이쯤 되면 교과서의 '국적'이 의심스러워진다.
지난 10년 동안 줄곧 '좌편향 교과서' 논란을 빚었던 주요 요소가 새 교과서에서도 여전히 수정되지 않고 남아있다. 하지만 이번엔 특정 교과서가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라는 맹공(猛攻)을 받았다. 보수 성향의 집필진이 참여한 첫 검정 교과서인 교학사 교과서는 내용이 알려지기 전부터 정치권과 학계 일부로부터 인민재판을 방불케 하는 공격을 당했다. "유관순을 깡패라 썼다더라"는 유언비어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사과 한마디 없이 이번에는 사관(史觀)과 지엽적인 오류 문제가 공격 대상이 됐다.
교학사 교과서가 여러 면에서 불완전한 책인 것은 사실이다. 원래 취지와는 달리 대한민국의 건국과 자유민주주의적 발전을 충분히 서술하지 못했고, 사실 관계가 잘못된 부분도 있다. 하지만 다른 7종 교과서의 문제점은 외면한 채 '보수 교과서의 싹이 트지 못하도록 밟아버려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현재 역사 교과서들이 지닌 문제점을 총체적이고 공정하게 볼 수 없게 한다. 교학사 교과서 비판에 가세한 나머지 교과서의 필자들은 교육부의 수정·보완 지시마저 거부하고 있다. 내년 고교 신입생들은 이런 책으로 공부해서 2017학년도 수능부터 필수가 되는 한국사 시험을 치러야 한다. 이러고도 어린 학생들에게 "내 책으로 공부하라"고 권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