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 허재승 옹, "이런 사회주의는 응당 망해야 한다" [북한 내 국군포로들의 실상을 담은 수기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 출간기념회가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됐다. 저자인 허재석(78)옹(翁)은 6.25때 국군포로로 붙잡혀 북한에서 살다가, 97년 탈북해 남한에서 지내왔다.] 허재승 옹이 전하는 북한 변방의 실상은 참혹하고, 끔찍했다. 그는 수기에서 자신이 살았던 아오지 탄광 인근의 식인(食人)과 매혈(賣血)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90년대~2000년 무렵 최악의 식량난 속에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을 죽여 피를 내다 판 일들이 비일비재했다는 증언이다. <차곡차곡 소금에 절여놓은 人肉> 허 옹은 수기에서 98년 초반 아오지 시장의 한 국수집 주인이 쇠고기라며 손님에게 내다 판 고기가 부랑하는 아이들을 잡아 죽인 인육(人肉)임이 드러났다고 적고 있다. 안전원이 집안을 수색했을 때, 사람의 살점을 떠 차곡차곡 소금에 절여 놓은 김칫독이 발견됐다고도 했다. 허 옹은 「오봉탄광 6갱」에서 발생한 식인(食人) 사건 등 북한 최하층이 거주하는 아오지 지역에서 이 같은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음을 증언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피를 뽑아 팔아먹는 자들』> 식인과 함께 벌어지는 만행(蠻行) 중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피를 뽑아 중국에 파는 매혈(賣血)이다. 허 옹의 수기는 2000년 1월 함북 온성군 창평리 지역에서 사람을 죽여 피를 내다 판 부자(父子)사건, 같은 해 두만강에서 중국 쪽으로 사람 피를 내다 팔다 적발된 사건 등을 전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피를 뽑아 팔아먹는 자들. 그것도 죽으면 피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살려둔 채로 피를 빼내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잔인한 인간들. 이런 사회주의는 응당 망해야 할 것』이라며 『그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고 역설했다. <감옥 안에 또 캄캄한 감옥> 허 옹은 또 『지금도 북한에는 국경천리에 넓이 5m, 깊이 3m의 도랑을 파고 그 앞에 또 철조망과 목책을 설치하고 있다』며 『북한전역이 하나의 감옥이 된 것이다. 감옥 안에 또 캄캄한 감옥이 있는 곳이 지금 북의 현실』이라고 말한 뒤 『저 거대한 감옥을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 연구를 거듭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적었다. ............................................................................................................................................ [참고. 국군포로 허재석 옹 수기 출간] 북한 내 국군포로들의 실상을 담은 수기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 출간기념회가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됐다. 저자인 허재석(78)옹(翁)은 6.25때 국군포로로 붙잡혀 북한에서 살다가, 97년 탈북해 남한에서 지내왔다. 허 옹은 피랍·탈북인권연대(대표 도희윤) 자금을 지원받아 수기를 냈으며, 같은 날 이 단체의 창립7주년 기념식도 열렸다. <『죽기 전에 북한 실상 알리자』는 일념으로> 허 옹을 비롯한 국군포로들은 6·25이후 북한에 억류된 이들이다. 戰後 포로교환 과정에서 1만3,469명(한국군 8,343명, 유엔군 5,126명)의 我軍포로가 돌아왔지만, 5만~8만 명에 달하는 국군포로는 북한에 계속 억류됐다. 허 옹 등 수 만 명에 달하는 국군포로들은 1956년까지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당해야했다. 이들은 이후 형식적 사회복귀가 이뤄졌지만, 여전히 철저한 감시와 통제 아래 인간 이하의 생활을 보내야 했다. 허 옹은 『내가 한국에 온 뒤 남은 가족은 모진 고통과 박해 속에 살아갈 것이고, 이 수기를 쓰면서도 가족들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할 때가 많았다』면서도 『그러나 죽기 전에 북한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책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개, 돼지보다 못한 인생을 살아왔다> 허 옹의 책제목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는 북한 내 국군포로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어이다. 그는 『수만에 달하는 국군포로들은 북한의 당 간부들에게 「똥 간나새끼」로 불리며 개, 돼지보다 못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증언했다. 이어 『1956년 이전 수용소 시절 아오지 탄광에 수용된 국군포로 숫자는 약 450명에 달했고, 온성·쌍하 탄광에는 약 4~5백 명, 고건원 탄광에는 장교 50여 명·사병 4백 명, 함경남도 오봉·통북·훈륭·풍인·온성 탄광 등등에 수만 명의 포로들이 수용됐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기에서 『1956년 이후 포로들에 대한 사회복귀가 이뤄졌지만, 사람은 탄광에 그대로 둔 채 이름만 사회로 보내는 조치였다』며 『이후에도 탄광에서 조그만 사고만 나면 제일 먼저 포로들을 몰아 부치고 없는 자백을 받아낸 후 「공개총살」이나 「정치범수용소」로 보내곤 했다』고 적었다. <『그 땅은 손톱만큼의 自由도 주지 않았다』> 또 『포로들은 몸이 아파도 아프다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고, 정신을 잃어야 병원에 갈 수 있지만 사회(일반)병원에는 가지 못하고 내무성 건설대 안에 있는 의무실에서 몇 시간 누웠다 오는 게 전부였다』고 적었다. 허 옹은 수기에서 『수만 명 국군포로들은 모두가 나처럼 일하는 기계로 취급됐을 뿐 인간으로서의 대접은 받아본 일이 없었다』며 『북한 땅에서 50년 긴 세월 동안 국군포로들이 흘린 눈물은 두만강을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절규했다. 이어 『포로로 잡혀 와 나이 70이 되도록 살아온 그 땅은 손톱만큼의 자유와 행복도 주지 않았다』며 『내가 북한에서 당한 수모와 천대는 나 혼자의 설움이 아니고 수만 명에 달하는 국군포로의 설움일 것』이라고 적었다. <『北의 진실, 못 미더우면 직접 가서 살아보라』> 허 옹은 수기에서 『나는 그곳에 가서도 50여 년간 단 하루도 조국을 잊은 적이 없고, 언젠가는 대한민국에 가서 잘살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며 『그러나 대한민국은 나를 영영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나뿐 아니라 수만 명 국군포로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고 개탄했다. 그는 『내가 말하는 북한의 진실이 못 미더우면 직접 가서 살아보라』며 『5만의 포로가 이젠 거의 다 죽고 몇 백 명에 불과하지만, 한국정부는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줘야 하며, 피맺힌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