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닷컴이 <정의화 의장, 내달 '남북 국회의장 회담' 공식 제안키로>라는 제목의 보도를 하자 비판 댓글이 쇄도하였다. 국회 관계자는 “정 의장은 오는 설(19일)까지 남북 관계에 진전이 없고 이산가족 상봉 등이 이뤄지지 않으면 국회 차원에서 남북 국회의장 회담을 제안할 예정”이라며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3월 안에는 제안을 해야 한다는 게 정 의장의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형규 씨는 <북한의 국회의장이 있는지? 있어도 권한은 있는지?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 의장끼리 만나서 농담따먹기하다 말실수라도 해서 북한쪽 인사들 일가 친척까지 몰살시킬 일 있는지?>라고 했다. 조민수 씨는 <김정은의 허수아비랑 앉아서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꼭두각시 노릇해주면서 국민세금을 김씨왕조 유지 비용으로 상납하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비판.
댓글 수준이 국회의장보다 낫다. 국회는 공정한 선거를 통하여 구성되어야 국회이다. 북한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지명식 선거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뽑는다. 국회가 아니라 북한노동당의 하수 기관이다. 이 꼭두각시를,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선거로 구성한 국회와 同格으로 대우하려는 국회의장의 발상은 헌법정신 위반일 뿐 아니라 국민과 국회를 모독하는 행위로서 탄핵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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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타살이라고!”
정의화 의원은 2012년 자신의 트위터에 “장준하 선생의 주검을 보면서 고인의 죽음을 슬프게 생각한다. 국회에 들어오기 전부터 국민 한 사람도 억울한 죽음은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鄭 의원은 “선생의 두개골이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게 외치고 있는 듯하다…타살이라고!”라고 했다.
그는 또 “장준하님 경우 타살이 아닌 것으로 규명된 게 아니라 실족 추락사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 자칭 목격자라는 사람의 거짓진술과 정보기관의 비협조로 1·2기 의문사진상조사위에서 규명 불능으로 판단한 겁니다”라고 트위터에 썼다.
<조갑제닷컴>은 지난 당시 정의화 의원과 전화통화를 했다. 鄭 의원은 “~하는 듯하다”라고 쓴 것을 예로 들며 “나는 타살이라고 단정한 것이 아니라 타살 가능성이 높다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張씨의) 두개골에 뒤에서 가격했을 가능성이 있는 골절이 나타났으니까 다시 타살여부를 규명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용환 씨 증언에 신빙성 없는 부분 있다”
목격자의 진술을 거짓이라고 한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1ㆍ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 결과를 보라. (나는) 그것을 참고해 인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記者는 사고 당시 張씨와 함께 등반에 나섰던 목격자 김용환 씨의 手記 내용(아래 <월간조선> 보도 참조)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는 “그 사실까지는 자세히 모른다. 의문사위 진상보고서를 보면 김용환 씨 증언에 신빙성이 없는 부분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사람은 목격자가 아니다. 처음에는 목격자라고 이야기했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2기 의문사위에서 그 사람을 더 이상 목격자로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냥 ‘동행인’으로 보고 있다.”
張씨의 유골을 검안했던 이윤성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는 <동아일보> 8월24일字 A12면 톱기사에서 세 가지 이유를 근거로 그의 죽음을 타살로 볼 수 없다고 했다. 李 교수는 1기 의문사위에서 비상임위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가 내세운 근거는 다음과 같다.
▲타원형 골절 바깥의 방사형 골절은 일반적으로 망치 加擊(가격)보다 훨씬 큰 충격에 의해 발생한다.
▲망치에 맞은 시신에는 여러 차례 내리친 상처 자국이 흔히 발견되는데 張선생의 경우 한 개 뿐이다.
▲시신 두피에 망치 가장자리 모양으로 찢어진 상처가 남아야 하는데 故 조철구 박사가 1993년 민주당 진상조사위에 낸 檢案(검안) 소견에는 이 같은 내용이 없다.
이 내용을 설명하자 鄭 의원은 “그건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신경외과 전문의인 내가 볼 때 그게 망치인지 자갈인지 알 길이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의문사위에서 나온 이야기를 인용한 것 뿐”
“유골을 보았을 때 타살 가능성이 크다. 실족사했을 때 나타나기 어려운 것이다… 둥근 것으로 타박했을 때 생길 수 있다고 본다. 그 동안 1·2기(注: 의문사위)에서 ‘규명불능’으로 나온 이유가 김용환 씨 진술하고, 국가 정보기관에서 제대로 증거를 제출을 하지 않아서 생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제3의 증거가 나왔으면, 교수 한 사람 말만 들을 게 아니라 그걸 가지고 다시 검토해야 한다. 얼마든지 연구ㆍ조사가 가능하다. 조사를 하라는 뜻에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느냐’고 묻자 그는 “朴 후보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타살이냐, 실족사이냐 여부다. 朴 후보와 선거하고 결부시키지 말라”고 했다.
또 ‘추락사가 아닌 게 분명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神이 아닌 이상 그걸 어떻게 알겠나. 내가 트위터에 ‘말하고 있는 듯하다’고 쓴 것 아니냐. 조사를 해서 규명을 하자는 취지로 말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鄭 의원에게 ‘트위터에는 ‘실족 추락사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라고 썼다’고 묻자 재차 “제2기 의문사위에서 나온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용환 씨는 <월간조선> 1993년 5월호에 당시 사고 정황을 기록한 手記를 공개했었다. 그는 “선생님(注: 장준하)은 일행이 기다릴테니 식사 준비하던 곳으로 직선으로 하산하자고 하셨다”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는 올라왔던 길로 등성이를 따라 내려가서 일행과 같이 오던 계곡을 따라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일행이 기다리니 빨리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뜻이 그러한데 더 반대할 수도 없어서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후에 생각하니 ‘왜 선생님의 뜻을 더 막지 못했나’하고 후회가 된다…(중략)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다. 평평한 능선 두 개를 넘은 것으로 기억된다. 능선을 돌아가니, 급경사를 이루는 계곡이 시작되는 제일 윗부분에 서게 됐다. “선생님, 더 못가겠습니다. 되돌아 가시지요”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그곳에 좀 서 계시더니 건너편으로 뛰어 넘으시면서 나더러 건너오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뛰어 넘으셔서 나도 그곳을 뛰어 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곳을 뛰어 넘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계곡, 아찔함을 느꼈다…(중략) 얼마를 내려오니 병풍같이 펼쳐진 斷崖(단애)가 있었다. 단애 밑에는 소나무가 나 있어서 나는 그 나무를 잡고 단애를 뛰어 내렸다. 그 단애의 높이는 1.5m 정도 된다고 생각된다. 단애의 밑은 평평한 지형이었다. 게속 내려가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 뒤를 돌아보니 선생님께서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鄭 의원이 인용했다고 주장한 '의문사위'는 어떤 곳?
金씨는 이후 <월간조선>(2004년 8월호)과의 인터뷰에서도 장준하 사건의 진실과 의문사위의 횡포에 대해 폭로한다.
金씨는 인터뷰에서 “장준하 사건은 복잡한 것이 아니고 단 1분, 아니 몇 초만 이야기하면 끝나는 것”이라며 張씨가 실족사 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 사건과 관련해 1기·2기 의문사위의 조사를 받았는데 그 횟수가 서른 번에 달했다고 했다. 조사를 맡았던 한 의문사위 조사관은 그에게 ‘이전의 조사관들은 잘 몰라서 봐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통한다’, ‘뱃속에 있는 창자까지 꺼내서 밝히겠다’고 하는 등의 극단적인 말까지 했다고 한다. 金씨는 또 “당시 언론이 소설을 썼다. 소설이 소설을 낳는 식으로 의문을 만들었다”며 당시 언론보도에 대해서도 비판했었다.
의문사위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발생한 이른바 ‘의문사’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한시적 조직으로, 2000년 10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裁可(재가)를 받아 설립됐다. 2000년 10월부터 2003년 3월까지 제1기가 활동했다. 2기는 노무현 정권 때인 2003년 7월부터 2004년 12월31일까지 활동했으며, 이후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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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俊河 추락사 담당 검사 徐燉洋(서돈양)씨, '외압도 의문도 없었다'타살 가능성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문을 갖고 그를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타살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趙甲濟
정치 선동꾼들과 선동적 언론이 합세, 1975년의 張俊河 추락사를 타살로 몰아, 박근혜 후보를 해치려는 캠페인이 또 다시 벌어지고 있으나 성공 가능성은 제로이다.
그들이 새로 들고 나온 장준하 유골 사진은 그가 추락사하였다는 당시의 검사 판단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선동꾼들은 두개골의 함몰골절과 골반 골절이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사건 당시 이미 확인된 것이다.
선동꾼들 앞엔 넘을 수 없는 진실의 장벽이 두 겹 있다. 장준하와 함께 하산하다가 그가 추락하는 장면을 본 金龍煥 씨(교감 퇴직자), 현장 조사와 屍身 검안을 통하여 '추락사'라고 결론 내린 담당 검사가 있다.
국가기관은 과거 세 차례 재조사를 하였지만 두 사람의 주장을 뒤엎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이번 선동꾼들은 5審(최초 조사 포함)을 해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셈이다. 1993년 5월호 月刊朝鮮에 실린 담당 검사 徐燉洋(서돈양) 변호사의 인터뷰 내용을 읽어보자.
<여기까지 취재가 되자 당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에서 이 사건을 담당한 徐燉洋 변호사의 증언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러나 徐변호사는 계속 취재팀과 만나기를 거부했다. 완강한 그의 모습에서 '혹시 이 사람이 뭔가 비밀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서울방송이 '당시 실족사라고 주장했던 검찰과 경찰 및 목격자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몇 차례의 접촉 끝에 4월12일 오전 안계신다며 출입을 막는 사무원을 밀치고 어렵게 徐변호사를 만날 수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 앉아 기자를 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기자를 피하면 의혹만 증폭되는 것 아닙니까. 徐변호사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만 줄 뿐인데요.
'증거도 없이 타살이라고 우기는 시대상황이라면 더 이상 말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지난번 서울방송에서 張俊河씨 일에 대해 묻길래 추락사로 기억한다고 말해줬지요. 그런데 전혀 내 말을 믿지 않더군요. 처음부터 타살이라고 전제하고 묻는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사고 당일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지요.
'그날 내가 당직 검사였습니다. 저녁 때 잠시 서울 녹번동 집에 와 있는데 연락이 왔더군요. 경찰보고가 '張俊河씨가 등반 도중 사고를 당했고 추락사인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변사사건은 흔한 것이기 때문에 가지 않고 경찰 조사를 토대로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숨진 사람이 張俊河씨라는 얘기를 듣고 현장에 갔습니다'
-현장에 도착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아마 새벽 1시쯤 도착했을 겁니다. 포천 지역 의사회장이던 심구복씨(사망)와 함께 산에 갔지요. 이미 시신은 옆으로 치워져 있었고 피가 꽤 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구복씨가 시신을 살펴보는 동안 플래시로 떨어졌다는 지점을 비췄더니 절벽에 비스듬히 나 있는 소나무가 아래쪽으로 휘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높이가 12m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옆에는 기자들도 많이 와 있었는데 저마다 그 소나무를 가리키면서 '저 소나무를 잡으려다가 떨어졌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분명히 소나무가 휘어져 있었습니까.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그랬습니다. 가족들도 그분이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몸이 쇠약해졌는데 아마 현기증이 일어서 추락한 모양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시신도 그렇게 깨끗하지 않았었다고 기억됩니다. 18년 전의 일이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시신을 살폈던 심구복씨가 후두부와 다리에 골절이 있다고 말한 기억도 나고요. 별로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목격자인 金龍煥씨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때 金龍煥씨가 저에게 호되게 닦달을 당했습니다. 저는 타살 가능성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문을 갖고 그를 추궁했습니다. 하지만 타살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사진도 수십 장 찍었는데 그것도 없어졌고 기록도 없으니 저도 답답합니다'
-기록이 없는 이유가 뭡니까.
'모든 기록은 보관 기관이 있는 겁니다. 아주 중요한 기록이야 정부기록보존소로 가지만 단순 변사 사건기록이 정부기록보존소로 갈 리도 없고…. 내가 검사 생활하는 동안 변사사건만 1천여 건을 넘게 했어요. 그 사건도 그중의 하나일 뿐입니다ꡓ
-왜 날이 밝은 뒤에 현장검증을 하지 않았습니까.
'뭔가 의혹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의문날 만한 것이 없었어요.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지금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혹시 외압은 없었습니까.
'외압이 있을 일이 뭐가 있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니까 단 사흘만에 허겁지겁 종결했다고 말하던데 아무런 물증도 없이 뭔가 흑막이 있는 듯한 암시적인 표현으로 마치 검찰이 숱한 궁금증을 억지로 덮은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은 경찰의 1차 조사 서류에다가 제가 金龍煥씨를 조사한 기록 등을 첨부해서 그걸로 끝난 겁니다'
-당시 張俊河씨 변사 사건에 대한 의문 제기로 동아일보 기자가 구속되고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사흘만에 단순 변사라고 굳이 발표까지 한 것은 오히려 의혹을 더 깊게 해 주는데요.
'그건 검찰의 사고조사와 다른 내용을 보도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이 마치 의문사인 것처럼 재야에서 증폭시킬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겠지요'
-그럼 정말 의혹은 없는 겁니까. 당시 법무관이라는 사람의 증언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사람 뭐하는 사람입니까. 지금도 법무관입니까. 저는 당시 최선을 다해 조사했다고 생각합니다. 검사들은 단순 변사체의 경우 대부분 현장에 잘 가지 않고 경찰조사만으로 처리하는데 저는 목격자를 마치 피의자 다루듯 꼬치꼬치 조사했습니다. 열심히 조사를 한 것도 의문이라고 한다면, 아마 일반적인 변사사건처럼 경찰조서만으로 처리했을 때는 또 그렇게 했다고 의문을 제기할 겁니다'>
서돈양 변호사의 증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조사에 외압이 없었다.
*통상적 변사사건보다 더 자세하게 조사하였다. 특히 목격자를 필요 이상으로 세게 조사하였다.
*가족들도 수사결과를 받아들였다. 부검 요구도 없었다.
*현장 조사와 시신 검안을 통해서도 추락사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후두부 함몰골절과 다리 골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