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한 / 한림대 교수·정치학
저널 ‘포린 폴리시’는 지난 2009년 세계 5대 ‘동물국회’를 발표한 바 있다. 한국, 대만, 우크라이나, 영국, 호주였다. 거친 몸싸움을 벌이는 한국 여성 의원들 모습이 그 기사의 첫 번째 사진이었다. 2년 뒤인 2011년 같은 저널은 세계 6대 ‘식물국회’도 발표했다. 미국, 벨기에, 이라크, 일본, 아프가니스탄, 대만이었다.
그러면 동물국회와 식물국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나쁠까? ‘세계 가치관 조사’ 등의 자료를 보면, 식물국회가 동물국회보다 더 높은 불신을 받는다. 즉, 국민은 폭력이 난무하는 국회보다, 물리적 충돌 없이 교착된 국회를 더 불신한다. 과격하더라도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원하는 국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국회 내 폭력 사태가 없어진다면 국회가 국민 신뢰를 받을 것으로 4년 전 판단한 정치인들이 놓친 부분이다.
불신뿐 아니라 게임 규칙의 맥락에서도 국회선진화법을 봐야 한다. 단순 과반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옳은지, 반대로 소수가 다수와 동등한 권력을 갖는 것이 옳은지, 그리고 규칙을 변경할 때에는 어느 정도의 합의를 해야 하는지 등이다.
흔히 웨스트민스터 방식으로 불리는 민주주의 모델은 단순 과반수가 전권을 행사하고, 다음 선거 때 국민의 심판을 받는 방식이다. 그런데 인종·종교·언어 등 개인이 그 선택을 바꾸기 어려운 기준으로 다수와 소수가 구분되는 사회에서는 이 방식이 정치를 불안정하게 한다. 계속 다수인 집단과 소수인 집단이 정해져 있을 때 소수는 차별받기 쉽고 체제를 흔들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는 비례대표제 등의 합의제 방식이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두 차례 여야 정권 교체가 보여주듯 ‘영원한 정치적 소수’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국회에서 53%의 의석을 가진 새누리당은 자신이나 야당이 현행 국회법의 의사결정 권한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하고, 야당은 새누리당이 의사결정을 단독으로 행사하려 한다고 본다. 53%의 의석이 100% 권한을 갖는 것, 그리고 소수가 다수와 똑같은 권한을 갖는 것 모두 합의제 방식에 위배된다. 전자가 소수에 대한 차별이라면 후자는 다수에 대한 역차별이다.
갈등과 분열이 지속적인 우리 사회에서 53%와 47%는 각각 그만큼씩의 권한을 갖는 방식이 옳은 방향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국회와 정치 문화 수준에선 그런 방식이 아직 작동하지 않고 있다. 사안에 따라 ‘51% 룰’(단순 과반수제) 또는 ‘60% 룰’(국회선진화법)을 적절히 선택해야 하는데, 거의 모든 사안에 새누리당은 51% 룰을, 야당은 60% 룰을 적용하려 한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국회선진화법 도입에 긍정적이었던 것은 당시 정당들이 모두 의석 과반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야 모두 서로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할 상황을 염두에 두고 동의했던 것이다. 지금 새누리당이 국회선진화법을 폐기하려 하고, 야당은 유지하려는 것 또한 제20대 국회에서 새누리당이 단순 과반의 의석을 차지하고 야당은 소수에 그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여야의 입장은 각자가 단순 과반 정당이냐 아니냐에 따라 다를 뿐이다.
성숙한 민주국가에서는 다수당이 무리한 법안을 강행해도 국민 다수는 소수당이 폭력으로 표결 저지에 나서기를 원치 않는다. 다음 선거에서 다수당을 바꿀 뿐이다. 이렇게 해서 다수제 민주주의가 정착됐다. 또 소수당이 합의제적 규칙을 악용해 국회 내에서 사사건건 다수당 발목을 잡더라도 다수당은 크게 반발하지 않는다. 다음 선거에서 국민이 더 큰 의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선진화법은 4년 전 새누리당의 선거 공약이었다. 새누리당은 오는 4월 총선에서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60% 의석이 필요하다고 국민에게 호소할 자신은 없는가? 야당은 새누리당이 국회선진화법을 폐기하더라도 물리적 저항 대신 이를 선거 이슈로 삼아 다수 의석을 얻을 자신은 없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지키고 일하는 국회를 만드는 것이다.
국회선진화법 개정 여부를 의원들이 당론과 관계없는 무기명 투표로 결정하는 것은 어떨까? 지난 4년 간 축적된 불신을 선거 직전 성숙한 의정 모습으로 불식한다면 그 자체가 효과적인 선거운동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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