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卒婚(졸혼)은 진정 ‘부부’의 해방인가
김재숙 기자
웬지 어머니의 금간 항아리같은 느낌
간디는 ‘해혼’, 싸르트르는 ‘계약결혼’
장수 도시화 연금생활이 가져온 새풍속?
요즘 일본에서 卒婚(졸혼)이 유행이라고 떠들썩하다.
실제 일본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인데 우리나라에서 소문이 더 요란한 것 같다.
남의 나라 일이라서일까? 은근히 바라던 일이라서 공감하는 이들이 많은 탓일까?
결혼이란 무엇인가?
일부일처제를 이상으로 규정짓고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물처럼 짝짓기를 해서 종족을 낳고 번식시키는 일이 다일까?
나이가 먹어 아이들이 성장하고 떠나갔다고 해서 부모로 살아온 한 쌍의 부부가 헤어져
이제는 저하고 싶은대로 살아보겠다고 한다.
얼마전부터 황혼이혼이 성행하더니 5년 전부터 서울은 황혼이혼율이 27%로
신혼이혼율 25%를 앞지르고 있다고한다. (2016.5.1.12 조선일보 만물상 인용)
그런데 일본에서는 ‘졸혼’이라는 새로운 황혼의 부부생활 풍속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문자 그대로 결혼을 졸업한다는 말이다.
졸혼이란 이혼은 하지 않으면서도 각자 떨어저 살면서 ‘부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만나 안부를 묻고 식사를 한다는 것.
‘부부’에서 해방되면서 자유인이 되는 게 목적이란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고 생활이 도시화,
연금화 되면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라 볼 수 있지만,
남 여 두사람 노년의 참 자유가 이런 졸혼의 행태에서 진정으로 이루어 질 수 있을지는 글쎄다.
일찌기 인도의 성웅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풍습에 따라 조혼(早婚)을 하였으나 37세에 이르러 부인과 解婚式(해혼식)을 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다.
물론 결혼은 사랑을 전제로 하였더라도 파경을 맞는 수가 많다.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인간인 이상 한 번의 선택에 무한한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이 세상 만물이 변하지 않는게 없음에랴!
.결혼은 의무인가? 사랑인가?
사랑하기에 지는 의무라는 것이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백세시대를 지향하는 이 시점에서 은퇴를 맞는 부모는 의무에서 벗어나면서
사랑의 굴레에서도 벗어나려는 것은 아닐까?
1929년 프랑스의 실존주의자 싸르트르와 보봐리부인은
‘계약결혼’이라는 새로운 결혼제도를 제창하고 실현하였다.
그들은 이미 뛰어난 안목으로 결혼제도의 모순을 간파하였을 것이다.
계약결혼의 문서에는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지 말 것이며
둘 사이에 어떤 비밀도 존재해서는 안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되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허용한다고 하였다.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개인의 자유와 성의 자유를 억압당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으려는
비상한 노력이 없이는 안되는 계약결혼이다.
그럼에도 두 지성은 51년간이라는 세월을 이를 실천하고 자유롭게 살다 갔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소유하고자 하며
빼앗기지 않으려하고 열정적 집착과 탐익에 젖는다.
어떻게 상대가 다른 이성과 성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허락하고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무섭게 그들의 이해 못할 사랑의 행각은 많은 이들의 논단의 재료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성해방의 어머니인 보봐르는 싸르트르와 신뢰와 사랑으로 연인관계를 유지하였고 사상의 동반자로 50여 년을 살다가 그의 곁에 묻혔다.
법적 이혼에 따르는 무거운 짐을 지지 않고도 가볍게 헤어질 수 있는 해혼이나 졸혼이 좋다면 그렇게 하라!
아마도 이미 실행하고 있는 부부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꺾어지기 전에 구부려주는 것이라고 유연성있는 해결책에 손뼉을 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졸혼’을 생각하면 웬지 어머니의 금간 항아리가 생각난다.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고 결혼을 하여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도공이 빚어낸 보기좋은 항아리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 의무에서 벗어나 서로의 취미생활이나 식어버린 사랑을
어떤 다른 말로 바꾸어 가며 헤어져 살기를 원한다면
이는 이미 금이 간 항아리일 것이다.
금이 간 그 항아리를 바라보는 자녀의 심정은 어떨까?
그들도 아무도 모르게 살짝 금을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실버타임즈. 2016.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