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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5·18의 진짜 목표는 정부 전복(顚覆)

[정밀추적]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5·18(上)

정재욱 기자  jujung19@futurekorea.co.kr

5월 21일 13시 30분경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 발생. 이날 발포 전 공수부대원 1명이 시위대의 

장갑차에 깔려 사망. 첫 집단 발포도 이 사망 사고 이후 또 다시 돌진하는 장갑차를 상대로 한 것 

[편집자 주]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와 전남 일대에서 발생한 중요 사건이다.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 전국 확대와 주요 정치인 검거 구속, 대학 휴교령 등에 항의한 광주의 대학생들과 계엄업무 수행을 위해 출동한 공수부대원 간의 충돌로 점화된 5·18은 계엄군의 과잉 진압으로 시위가 격화되면서 이후 10일간 관공서 방화·파괴, 무기 탈취 및 무장 저항이라는 최악의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이 글은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로 불거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주요 정황과 쟁점사항들을 <5·18관련사건 수사결과>(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검찰부, 1995년 7월 18일), 그리고 기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쟁점별로 정리한 내용이다. 관련 내용을 두 번에 걸쳐 연재한다. 

정재욱  미래한국 기자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에 대해 내란목적의 살인죄를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김영상 정부 시절인 1995년 12월 ‘5·18 특별법’이 제정됐고, 이보다 한 달 앞선 그해 11월부터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한 검찰이 5·18 관련 재수사를 진행해 기소한 결과였다. 1997년엔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이렇게 마무리된 듯했던 5·18이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서고 있다. 올해 5·18 기념식에서 민중운동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이유로 참석자들이 행사 주무부처 책임자인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입장을 봉쇄한 것이 그런 예다. 또 ‘5·18 북한 군인 개입설’을 제기하고 있는 지만원 박사가 최근 법원에서 나오던 중 5·18 관련 단체 회원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19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계엄령 확대를 반대하는 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가 있었고, 계엄군의 진압과 이로 인해 시민과 군경의 인명 피해가 있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당시 수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는 민간인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모두 193명이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이 갖고 있는 5·18에 대한 인식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5·18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처럼 공수부대원들이 민간인 시위대를 향해 헬기 기총 소사를 포함한 무차별적 집단 사격을 가해 무수한 인명을 학살했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5·18이다. 

그런데 이런 5·18 관련 상식들이 많은 부분 과장됐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영화나 관련 책자에서 보여주고 주장하는 것처럼 무차별 살상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당시 광주의 상황이 계엄군이 시위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공세 상황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만원 박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대규모 북한군이 잠입해 무장시위를 기획, 조종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문제는 5·18이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일종의 성역(聖域)처럼 되어 피해자 측의 주장 외에는 다른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발생한 5·18의 진실은 무엇인가. 시위를 진압한 당시 계엄군, 공수부대원들은 처음부터 잔인한 폭력으로 일관했고, 무차별 발포를 서슴지 않은 학살자들이었을까? 

1995년 신군부를 내란죄로 기소하고, 5·18을 민주화 운동의 영역으로 이끈 검찰의 수사기록과 수사결과 보고서는 피해자 측과 가해자인 계엄군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통해 총 14만 페이지, 117권에 달하는 방대한 수사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최소한의 객관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당시의 수사기록을 통해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한 직후부터 5월 27일 전남도청을 확보한 시기의 상황을 재구성해 초기 진압 상황, 발포 과정, 시위대의 무기고 탈취 및 무장, 그리고 시위대 내부의 강온 대립 등의 전말을 알아본다. 

▲ 5·18은 민간인 166명, 군경 27명이 사망한 참사였지만, 계엄군의 발포 이전에 대형 트럭 돌진 등 계엄군을 향한 시위대와 살인적 위협이 존재했다.

5월 18일, 계엄군의 시위대 퇴로 차단과 과격 진압 

# 5월 18일의 강경 대치 : 시위대 무차별 투석(投石) vs 계엄군 곤봉 진압 

계엄군의 진압부대는 전국 대학에 대한 계엄군 배치 계획에 따라 5월 18일 새벽 1시경 7공수여단 33대대가 전남대, 35대대가 조선대에 각각 배치됐다. 이날 저녁 6시에 11공수여단의 3개 대대가 투입됐다.

이후 3공수여단 5개 대대가 추가 투입되면서 5월 20일까지 광주지역에는 공수부대 3개 여단 10개 대대 3000여 명이 투입 완료됐다. 계엄군은 기존 31사단 병력까지 합치면 4000여 명밖에 안 되는 숫자였다. 

이들 광주 투입 공수부대원들에게는 기본적 개인화기인 소총 외에 진압봉만 추가 지급됐다.  어차피 소총은 위협 수단만 될 뿐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시위 진압 수단으로 따지면 방패와 방석모, 방석복으로 무장한 전투경찰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방패와 방석모, 방석복 없이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애초부터 시위대의 투석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5·18 발생 최초 단계, 즉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앞에서 학생들과의 충돌 과정에서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이 있었다는 증언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검찰 수사결과에 따르면 5월 19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이 개최한 기관장회의에서 지역기관장들은 “군의 진압 행동이 너무 과격하다”고 항의했다. 

시위대의 투석(投石)으로 계엄군이 부상을 당한 흥분된 상황에서 발생한 대응이긴 했지만, 계엄군이 시위 진압 과정에 곤봉으로 가격, 체포자의 상하의 탈의 및 바닥에 머리 박기(이른바 원산폭격), 다수 학생 연행 등은, 당시가 계엄 상황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정상적인 진압 과정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대목이다. 5월 18일 첫날에만 시위대는 모두 273명이 체포됐다. 

진압 작전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나온다.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5월 18일 새벽 최초로 광주에 투입된 권승만 당시 7공수 33대대 대대장은 “(당시) 시위진압 방식이 시위군중들의 퇴로를 전면 차단하여 오히려 충돌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예상이 된다”는 검찰의 질문에 ”퇴로가 차단되어 충돌 가능성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면서 ”정웅 사단장(31사단, 향토사단)이 강경한 시위진압을 지시했다기보다는 공수부대 운용에 있어 미숙한 점이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결과에 따르면 시위대가 던진 돌에 임무 수행 중인 계엄군이 부상을 당한 것도 시위진압을 강경화하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다음 사례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5월 18일 오전) 학교 출입을 제지당한 학생들은 계엄 확대와 휴교 조치에 항의하면서 돌을 던지고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여 해산을 시도하였는데,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이 던진 돌에 다친 데 분개하여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머리 등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 7명과 일부 학생들이 부상하였음.>(<5·18관련사건 수사결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검찰부, 1995년 7월 18일, p.57) 

<공수부대원들은 M16 소총을 등 뒤로 메고, 손에는 진압봉을 든 상태에서 진압대형을 유지하여 도청 방향으로 진군, … 시위대의 투석으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흥분한 공수부대원들은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추격하여 시위대를 체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와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도주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나 하의, 혁대를 벗기거나 머리를 땅에 쳐박게 하는 등 기합을 주기도 하였음.>(<5·18관련사건 수사결과>, p.62) 

5·18재단이 정리한 소책자 <5·18 민주화 운동>은 “5월 18일의 7여단 33대대와 35대대의 시위진압 행위는 광주시민을 상대로 한 학살극이라 불러야 할 만큼 무자비하고 광폭했다“면서 계엄군의 과잉 진압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검찰 수사결과와는 달리 학생·시민들의 입장만을 강조한 시각이다. 

<당시 전남대 정문 앞에는 완전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가 교문을 통제하고 있었다. … 남아 있던 100여 명의 학생들이 정문 앞 다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수가 200~300여 명으로 불어나자 자연스럽게 노래와 구호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 진압을 개시하였다. 특수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의 진압에 맨손인 학생들의 저항은 무기력하였다. 진압봉으로 가차 없이 머리를 갈기는 공수부대원들에게 학생들은 부상자 십여 명을 남긴 채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5·18민주화운동>, p.80) 

박종규 대대장, “폭도의 총을 확인한 순간…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 5월 19일~20일 과격화된 시위, 수세(守勢)에 몰린 계엄군 

5·18 둘째 날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광주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계속하는 가운데, 시위는 횟수나 규모, 강도, 모든 면에서 전날에 비해 악화됐다. 

검찰 수사기록에 있는 진술조서에서 최 모 씨는 5월 19일 시위에 가담한 동기에 대해 “공수부대원들이 데모를 진압하는 방법이 종전의 경찰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면서 “데모대를 향하여 돌진하여 시위 군중을 잡게 되면 진압봉으로 머리건 어깨건 가리지 않고 마구 때리고 군화로 짓밟아 아예 피범벅이 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계엄군의 과격한 진압을 목격한 일반 시민들이 그 전까지 학생들이 주도했던 시위에 참가함으로써 시위가 확대된 것이다. 

시위 확대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광주시를 넘어 전라남도 전역으로 확산된 유언비어였다. 방위병 신분으로 시위에 적극 가담했던 이 모 씨는 시위 참여 동기에 대한 진술에서 “광주에서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을 다 죽인다 하기에 군중심리로 대항하기 위해 데모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당시 광주 전역에는 시위 발생 초기부터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내용 이외에도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 길에 뿌렸다” 같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유언비어로 시위대가 크게 자극을 받은 탓인지 이날부터 시위 양상은 차량 및 파출소 방화 등 극렬 시위로 과격화돼 광주 시내의 치안 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또 계엄군과 시위대의 공수(攻守) 상황도 역전됐다. 수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에 의해 수적으로 10분의 1도 안 되는 4000여 명의 계엄군이 포위, 고립돼 진압은커녕 부대 대형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5월 19일 오후 1시 30분경 금남로에 있던 일부 시위대가 제일교회 신축공사장에 있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보내 폭발시켰고, 15시 15분경 가톨릭센터 차고에 있던 승용차 4대를 불태웠다. 

15시 27분경 문화방송국 건물에 돌을 던지고 언론사 취재차량 1대와 인근 전자제품점에도 방화했다. 또 17시경에는 시위대들이 정지한 공수부대의 장갑차 출입문을 열고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속에 던져 넣으려 시도했다. 

▲ 5·18 셋째 날인 5월 20일 이후 계엄군은 이미 수만 명 규모의 시위대에 비해 수적 열세로 몰려 진압은 커녕 대형 유지에 급급했다.

절정으로 치닫는 시위, 경찰서·방송국·세무서 방화, 살인적 트럭 돌진 

5·18 셋째 날인 5월 20일. 광주 전역의 시위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 전 지역이 사실상 시위대에 장악돼 방송국·경찰서·관공서에 대한 방화가 잇따랐다. 특히 계엄군에 돌진하는 시위대의 차량 공격은 거의 살상 무기나 다름없었다. 경찰 4명이 돌진하는 시위대 버스에 깔려 사망, 공수부대원 1명이 트럭에 치여 사망한 것도 이날이다. 

시위대는 이날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17정을 탈취해 처음으로 개인화기를 소지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상업은행 앞에서 200여 명, 충장로 지역에서 200~300여 명, 전남도청 앞에서 200여 명, 계림동에서 2000여 명, 금남로 2~3가에 5000여 명, 금남로 4가에 3000여 명이 모여 동시다발적으로 시위를 벌이며 군경과 격렬하게 대치했다. 

오후 4시경 전남도청 인근 지역에 집결한 시위대는 2만~3만 명에 달했다. 이후 100여 대의 택시와 5~6대의 버스와 트럭이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했고, 주유소를 점거한 시위대가 기름을 차량에 부어 불을 붙인 후 경찰 쪽으로 밀어 붙였다. 이때 버스 1대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버스에 깔려 사망했다. 

이날 저녁 8시경 시위대는 파출소 점거에 이어 광주소방서·광주시청·광주경찰서·서부경찰서 등 관공서를 점거하고, MBC와 광주세무서를 불태웠다. 

한편 광주역 앞에서는 20시 시위대가 휘발유가 가득 든 드럼통에 불을 붙인 다음 계엄군을 향해 굴려 보내고, 트럭, 버스 등 차량 돌진 공격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돌진하는 시위대의 트럭에 하사관 3명이 깔려 중상을 입었고, 22시경 전남대 부근에선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던 11톤 트럭 1대가 갑자기 방향을 틀다가 전복돼 공수부대 하사관 1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했다. 

계엄군 대대장, “극도의 공포감, 차량 돌격 시위대의 환각제 복용 확인” 

이날 광주역에 배치되었던 박종규 3공수 15대대장은 5월 20일 밤 상황에 대해 “악몽의 밤이었다”고 회고했다(육군본부 자료집). 박 대대장은 “나를 죽이기 위해 정면으로 달리는 적(트럭)에게 실탄과 총이 있음에도 사격을 하지 않았다”면서, 시위대가 총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이제 막느냐 못 막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가 됐다”고 증언했다. 

박종규 대대장의 증언을 보면 트럭과 장갑차를 몰고 계엄군 저지선으로 돌진하는 대규모 무장 시위대와 맞섰던 수적 열세의 공수부대원들의 공포감과 분노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헐적 무인 차량 공격과 더불어 각 방면에서 폭도의 몽둥이 공격, 투석 공격은 파상적으로 계속되었다. 적은 우리를 제압하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전진했고, 우리는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 부대 건재를 파괴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의 대항을 지속했다. … ‘머리를 때리지 말라’, ‘과격한 진압을 삼가라’는 말은 폭도의 돌멩이에 맞아 죽으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 … 마치 소총 앞에 탱크가 출현한 미아리 전투와도 같았다.” 

“차량 돌격조의 출발지를 공격해서 수색해보니, 진짜 조정자는 구멍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며 지휘하고 있더라는 얘기도 들었다. 환각제 비슷한 약을 뺏어서 그 당시 군의관에게 확인시켰더니 ‘환각작용을 하는 약이 맞다’고 했다.” 

전쟁터와 다를 바 없었던 5월 20일 심야의 시위 상황과 계엄군의 대응을 정리한 검찰 수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중대장급 장교들에게 경계용 실탄이 지급된 것도 이때였다. 

<차량 돌진 등 시위대의 강력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 지급 등 지원을 요청하자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22:30경 위협용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 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 주도록 지시하여…>(<5·18관련사건 수사결과>, p.88) 

<(5월 20일 밤 12시경)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으로 노동청 앞과 전남대 앞에서 경찰관과 공수부대원 수명이 사망한 사실이 전파되는 등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낀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실탄 지급을 요청하자, 11공수여단 61대대장과 62대대장은 62대대장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실탄 15발 정도가 든 탄창 1개씩 중대장들에게 분배하고 위급 시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사용할 것을 지시하였음.>(<5·18관련사건 수사결과>, p.85) 

검찰,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에서 발포” 

# 5월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상황이 악화되면서 결국 5월 21일 낮 1시 30분경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가 발생했다. 이날도 발포 전 공수부대원 1명이 시위대의 장갑차에 깔려 사망했다. 첫 집단 발포도 이 사망 사고 이후 또 다시 돌진하는 장갑차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 계엄군의 발포는 5·18의 핵심 장면 가운데 하나다. 시위에 참여한 피해자나 목격자와 진압에 참여한 군경의 진술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계엄군은 발포가 있은 후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오후 5시경부터 순차적으로 전남도청에서 철수했다. 이렇게 해서 전남도청은 오후 8시경 시민군에게 접수됐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벌어진 긴박했던 총격전 상황을 기록한 검찰 수사결과를 보자. 

<(5월 21일 오전)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불어나면서 카빈 총을 들고 있는 사람도 눈에 띄고, 장갑차를 비롯한 트럭, 버스 등 수십 대의 차량이 시위대 전면에서 공수부대를 압박해 오자, 위기의식을 느낀 11공수여단 61대대장은 여단 본부에 상황을 보고하고 필요한 대책 강구를 건의하였으나 … 11:00경 63대대장은 대대장 지프차에 보관하고 있던 대대 경계용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1인당 10발씩 지급하고,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 시에만 사용할 것을 지시하였음.>(<5·18관련사건 수사결과>, p.98) 

<12:00경 시위대는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 백여 대의 차량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압박하여, 서로 10미터 정도까지 접근, 긴장된 분위기가 지속되던 중, …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하자, 공수부대의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하였고, … 

애국가를 방송하며 해산을 호소하는 가운데, 계속하여 시위대의 버스와 트럭이 도청 쪽으로 돌진해 오자 뒤쪽에 있던 일부 공수부대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를 하여 버스 1대는 운전자가 사망하면서 도청 좌측 건물과 충돌하여 정지하고>(<5·18관련사건 수사결과>, p.99) 

<13:30경 시위대 쪽으로부터 장갑차 1대가 빠른 속력으로 도청 쪽으로 또 돌진하자, 그 순간 경계 중이던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하여 일제히 발포하여 장갑차 위에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피격되었으며, 공수부대 발포로 후퇴하였던 시위대가 다시 가톨릭센터, 한국은행 광주지점 부근에 모이고, 그 중 5~6명이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나오자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향해 발포를 하였음.>(<5·18관련사건 수사결과>, p.100) 

집단 발포는 있었지만 5·18 관련 단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시위대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의도적인 집단 발포나 무차별 사격이 아니라, 돌진하는 차량과 장갑차에 대한 자위권적 발포, 혹은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나온 발포로 보이는 정황이다. 이날 발포와 관련 검찰은 “자위권적 발포였다”는 다음과 같은 별도의 결론을 내렸다. 

<고소·고발인들의 주장과 같이 위와 같은 발포가 대대장이나 여단장 이상의 상급 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것이거나, 또는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행하여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 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5·18관련사건 수사결과>, p.201) 

<(5월 21일) 13:00경부터 시위대가 장갑차 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 공격해오고 병사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대응하여 첫 발포가 있었고, 다시 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 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하였으며, 그 경 7공수여단 35대대도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장교들에게 분배하였고,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인도와 인근 건물로 산개하였던 공수부대원들 중 일부가 도청 및 주변 건물 옥상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하야하여 발포한 사실이 확인되었음.>(<5·18관련사건 수사결과>, p.200)(계속) 

출처 미래한국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