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칼럼>
광복71, 다시 보는 해방사
-38선이 아니면 남한도 공산화-
송 재 운(실버타임즈 편집인)
우리의 광복은 누구의 힘에의한 것인가?
대한민국의 건국은 대한민국 국민의 노력만으로 이루어 낸 것인가?
국토분단의 원인은 무엇이며 누가 고착화의 원흉인가?
우리는 누구를 우방으로 선택할 것인가?
를 명쾌하게 정리 하고 있습니다
-뉴스 관리자-
대한민국의 건국과 미국
올해 8월 15일은 광복 71주년을 맞는 날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1948년 8월 15일 새 헌법에 의한 나라의 ‘건국’을 포괄하여 ‘광복절’이라 부르고 기념한다. 해방은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여 35년간의 저들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것을 뜻하고, 건국은 UN의 결의로 38선 이남 남한만의 단독국가 수립을 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새로운 국가는 UN감시 하에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을 거쳐, 동년 7월 17일 최초의 건국 헌법이 제정되고, 이어서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새 정부를 탄생시킴으로써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은 이 건국 헌법으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모든 문명국들이 추구하고 있는 자유와 평등, 정의 이념에 따른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고 지금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탄생하면서 오늘까지 적지 않은 세력들에 의해 그 정체성을 훼손당해 오고 있다. 그중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것 중의 하나가 38선의 문제다.
38선은 한반도의 남북을 둘로 갈라놓았고,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일어나게 만들었으며 민족이산의 아픔 등 우리 민족에게 비극을 겪게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38선으로 반도를 갈라놓은 주범은 오직 미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러한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켜 준 고마운 나라에 대해 너무나 몰염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민족(韓民族)이 일본에게 주권을 잃은 채 식민지로 살아 온 것은 1910년부터 45년 8월 15일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을 때까지 만 35년이다.
이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은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항일 투쟁을 하였지만 그것으로 일본을 우리 반도에서 쫓아내고 다시 자주독립을 쟁취하진 못했다.
남에게 빼앗긴 내 나라를 내 힘으로 다시 찾아 독립을 이뤘는데, 미국이란 초강대국이 우리를 또 침략하여 남북으로 분할하고 식민 지배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미국에 맞서 싸우고 저들을 내쫓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45년 8월 15일 해방과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미국을 은국(恩國)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때문에 남한의 국민들이 오늘날 자유를 만끽하며 살면서 분단의 모든 죄를 미국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미국이 해방 당시 38선이라도 그엇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소련이 남한까지 진주하여 남한도 꼼짝없이 공산화 되었을 것이고, 오늘 날은 김정은 정권하에서 질곡(桎梏)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당시 미국으로 하여금 38선을 긋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소련의 대일(對日)참전이고, 이 대일 참전은 최종적으로 독일 항복(45년 5월 7일)을 석 달 앞두고 45년 2월 8일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열린 미-영-소 3거두(루즈벨트 처칠 스탈린) 회담에서 결정되었다.
해방, 만주-사할린-38이북은 소련이 점령
그런데 김종필 전국무총리는 모일간지에 연재하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 우리들에게 상당한 의아심을 갖게 한다.
1962년 11월 미국에서 로버트 법무부 장관을 만났을 때다. 나는 다소 건 방진 태도를 보인 케네디 장관을 향해
“당신네 나라가 우리 한반도를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분단의 아픔을 안 게한 원인을 만들었소”
라고 따졌다. 그가
“그 원인이 무엇이요?”
라고 묻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38선을 누가 그었소. 딘 러스크 육군대령이 긋지 않았소. 왜 아무 죄없 는 한국을 반으로 갈라 놓았느냐 말이오. 우리를 분단 시켜 싸우게 만 든 것이 바로 미국이오”
JP의 말대로라면 미국은 38선을 긋지 말고 한반도를 그냥 두었어야 했다.
45년 8.15때 소련군이 끝까지 남진하여 부산까지 점령했어도 좋다는 말인가!
미국은 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원폭을 투하했고, 이어 8월 9일 나가사키(長崎)에 두 번째로 투하했다. 스탈린의 소련군은 마치 미국의 원폭투하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듯, 대일 선전포고를 8월 8일(모스코바 시간)에 하고, 157만의 대군으로 70만의 일본 관동군이 지키고 있는 만주로 진격, 이미 8월 10일에는 일본 괴뢰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을 함락 시키고 푸이(溥儀) 황제를 잡아 갔다(중국에 넘겨줌).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소련군은 이미 8월 26일 평양에 입성하여 총사령부를 설치할 만큼 8월 15일 막상 일본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던 날 즈음에는 벌써 함경도를 넘어 북한 깊숙이 점령해 들어오고 있었다. 물밀듯 진격해오는 소련군을 제재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한데 미국의 사정은 어떤가.
일본이 항복하던 날 미군의 최선봉부대는 한반도에서 일 천 키로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주둔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병력으로 소련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 했다(미군의 인천 상륙은 9월 8일). 그래서 해리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미국이 소련과 중국에 동의를 구한 ‘일반명령 제1호’ 초안을 일본이 항복하는 8월 15일 스탈린에게 제안한다.
이 제안 속에 북위 38도선 이북은 소련이, 그 이남은 미국이 진주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38선은 JP의 말대로 딘 러스크 육군 대령이 그은 게 틀림없다.
하지만 러스크의 독단적 행동은 아니고 국무-국방 두 기관의 합의를 거친 결정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한 육군 대령의 행위가 아니라 미국의 국가 정책이었던 것이다. 당시 소련이 만일 트루만의 이 제안을 비토 했다면 지금쯤 한반도의 형태는 또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다.. 스탈린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트루만의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김종필 전 총리가 62년 마국을 방문 했을 때, 딘 러스크는 로버트의 형 존 케네디 대통령의 정부에서 국무장괸을 맡고 있었다.)
39년 독일이 폴랜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41년 12월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이 두 전쟁을 무리 없이 승리의 길로 이끌어 오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45년 4월 12일 서거하면서 대통령을 계승한 트루만(Harry S. Truman)은 전임 대통령 보다는 소련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이었다.
트루만 미대통령의 ‘일반명령 제1호’를 본다.
제 1호는 일본군의 항복 접수와 관련하여 ‘중국 타이완 및 북위 16도 이북의 인도차이나에서는 일본군이 중국의 장제스(蔣介石)에게 투항하며, 만주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및 사할린에서는 소련군 사령관이 항복을 받고, 일본 필리핀 및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에서는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항복을 받는다’(네이버 지식백과, 소련군은 왜 북한에 진주 했을까?)로 되어 있다.
이 제안에 스탈린은 바로 다음 날인 16일 ‘(1). 3개국(미 영 소) 얄타회담 결정에 의거, 소련이 영위하기로된 쿠릴 열도를 일본군의 대소련군 항복지구에 포함시킬 것. (2). 사할린과 홋가이도(北海道) 사이의 소야해협 북방에 접한 홋가이도 북부를 일본군의 대소련군 항복 지구에 포함 시킬 것’ 등 2개 항목의 수정안을 내놓는다.
미국은 8월 18일 쿠릴 열도를 소련군 지구에 포함시키도록 한 스탈린의 수정안 1은 받아 드리는 반면, 일본 본토 일부, 곧 홋가이도 북부에 대한 소련군의 진주를 허락해 달라는 수정안 2는 단호히 거부한다. 소련은 수정안으로 이처럼 쿠릴 열도 하나는 얻고, 일본 본토 일부에 대한 점령은 달성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소련의 한반도 주둔에 대한 애착은 한층 더 강할 수 밖에 없었으나, 미국의 강력한 저지에 38도 이북의 한반도 점령으로 만족 할 수밖에 없었다.
루즈벨트와 소련의 대일참전
소련은 41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발발된 태평양 전쟁에서 45년 8월 8일 대일 참전 때까지 대부분의 기간을 일본과 불가침 조약(1941년 4월 13일 일-소 중립 조약)을 맺고 전혀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 태평양 전쟁이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의 전쟁이라고 말하지만, 이 전쟁은 4년 동안 일본과 미국 1대 1의 싸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소련이 미-일 전쟁에서 연합국의 동지대우를 받은 것은 전적으로 미국이 대일 참전을 권유해온 데서 비롯된다.
일본은 1910년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32년 중국에서 만주국을 세우며, 37년 7월엔 노구교사건을 일으키고, 11월엔 항주만 상륙, 12월엔 난징(南京)에 처들어가 무고한 양민에 대한 무자비한 대학살을 벌인다.
그리고 41년엔 미국을 치는 것이다.
또 일본은 ‘아시아의 독립을 지키고 일본을 중심으로하는 경제권을 만든다’는 명분을 만들어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양 열강의 식민지 이권이 얽힌 동남아까지로도 진출한다. 일본이 필리핀을 쳐 미국 맥아더 장군을 내쫓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일 것이다.
태평양 전쟁도 2차대전에 속한다지만 전선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지 않았는가. 유럽과 아시아의 전선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 두 개의 전선에서 전적으로 주력군의 위치에 있었다. 루즈벨트 미 대통령은 독일과 일본이라는 두 거대 제국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두 곳의 거대 전선은 막대한 병력과 무기, 그리고 군수물자를 필요로 했다. 미국도 크게 힘겨웠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쌓이고 또 겹치면서 미국은 일본의 군세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장차 일본 본토를 점령하여 일본의 항복을 받아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당시 일본의 7천만 국민이 모두 전쟁의 화신으로 보였을 것이다.
미군은 일본군의 가미가제(神風)를 이미 경험했고 덴노(天皇)를 위하는 것이라면 목숨을 초개같이 바치는 일본군의 독한 공격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미군이 본토에 들어가려 하면 전국만이 옥쇄(玉碎)로 맞설 것이란 예측도 가능했다. 도대체 일본의 본토 공략은 얼마만큼의 미군 목숨을 바쳐야할지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본토 점령에 또 하나의 두려운 존재는 일본의 배후 군사력으로 건재하고 있는 막대한 병력의 관동군이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과 45년 2월 8일 가진 얄타회담에서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소련의 극동참전(대일참전)을 강력히 권유하여 최종적으로 결정 지은 것은 일반 평자들이 흔히 말하는 일본군에 대한 단순 과대평가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루즈벨트는 대일전을 승리로 끝내기 위해서 오히려 위에 든것과 같은 일본 점령에 관한 치밀한 계산을 끝내고서 소련의 참전을 요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소련군이 만주의 관동군이라도 궤멸시키고 그 지역을 평정해 준다면 미군의 짐을 크게 덜어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 때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의 계획이 있었는진 모르지만, 설혹 있었다 하더라도 그 성공 여부는 미리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루즈벨트의 소련 참전 결정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합리적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분단의 주범은 일본
이상과 같이 본다면 미국은 한반도를 딘 러스크라는 한 육군 장교에게 지도에 북위 38도선을 긋게하여 소련과 분할 점령하기 위해서 소련의 참전을 끌어 들인 것이 아님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한반도 분할은 미국의 대일전 승리를 위한 계획의 하나임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속 좁은 감상적 민족주의에 빠져 미국을 덮어 놓고 한반도 분할의 주범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다. 다시 언급하건대 38선은 일본군을 항복받기 위한 임시적인 군사경계선이었지 한반도의 정치적 분단선은 아니었다. 군사적 분할 선을 민족분할 선으로 고착화시킨 것은 소련과 김일성 공산집단의 한반도 공산화 전략 때문이었다. 소련은 북한 진주 후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에 사실상의 공산정권을 세우고 한반도에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로 몰아갔으며 48년 5월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북한지역에서 못하게 함으로써 남한만의 선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적 분단선인 38선이 정치적 분단선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일찍이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의 허락과 지원 약속을 배경으로 6.25 남침 전쟁을 벌임으로써 38선을 민족적 분단선으로 고착화시키고 말았다.
한반도 분할의 근원적 주범은 일본이다. 일본이 1910년 한일합방의 야욕을 품지 않았다면 우리나라가 미-소에 의해 분할되어야 할 까닭이 없다. 또 빼앗겼더라도 우리 민족의 자력으로 나라를 되찾았다면 남북으로 갈라설 이유가 없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모두가 내 탓이고, 내 잘못이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김종필 전 총리가 미국을 방문하여 로버트 케네디 당시 법무장관에게 “우리를 분단시켜 싸우게 만든 것이 바로 미국이오” 라고 외쳤을 때가 1962년이라면,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바로 다음해가 아닌가. 5,16 당시 그는 군사혁명을 주도한 혈기왕성한 젊은 장교로서, 민족주의자적 기질을 가졌음직하다. 그래서 그는 작심하고 로버트 케네디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정부와 김대중 정부에서 총리를 두 번씩이나 지낸 우리나라 최고의 원로 정치인이다. 그의 말이나 글은 전 국민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도 이러한 자신의 입지나 무계를 인식하고 있을 터인데, 왜 몇십 년 전 그 때 그 발언을 회고록이란 핑게로 가감없이 썼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의 미국에 대한 지금 재발언은 누가 보아도 미국을 분단의 주범으로 모는 주장이다. 김 전 총리는 남한만이라도 미군의 점령하에 들어가 미군정 불과 3년 만에 자유민주의 체제의 새로운 국가로 태어 날 수 있었음을 몸소 체험한 분인데, 그런 사연을 모른단 말인가?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거지로 떼를 써 본 것이거나, 이 나라 친북 죄파들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쓴 글밖에 더 되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만일 45년 8월 15일 트루만 미국 대통령이 ‘일반명령 제1호’ 초안을 스탈린에게 보내지 않고 미적댔다면 남한까지 소련의 수중에 들어가 공산화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반도는 전적으로 미국의 대일전 승리로 해방을 맞았다. 불행히도 38이북은 공산화 되었지만 남한은 미국의 덕으로 자유를 누리며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자주독립 지키려면 중국 보다는 미국편에
올해는 조국 광복 71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우리는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 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우리 민족을 일본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리고 다음은 전술한 바와 같이 한반도에 38선을 그어 소련의 남하를 저지, 남한에서나마 시장경제체제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또한 50년, 6.25 남침 때에는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북한의 김일성 등의 남한 공산화 야욕을 분쇄하여 대한민국이 오늘의 번영을 이루게 하였다.
북한에서는 8.15 광복절을 ‘김일성 동지께서 혈전만리를 헤치시며 찾아주신 조국광복의 날’이라고 선전을 한다. 우리 국민은 이런 새빨간 거짓 선동에 현혹될 것이 아니라,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은 우리 ‘해방사의 진실’을 인식하고 미국을 비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 북한은 다량의 핵무기를 개발하여 우리 한국을 위협하고 있고, 중국은 이 틈을 노려 한국을 미국의 축(軸)에서 떼어내어 자기네 진영으로 흡수하려는 전략을 쓰고 있다. 옛날 왕조시대의 중화주의 꿈에 젖어 주변국들을 예속국으로 만들려는 원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이런 전략의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그리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하여 중국은 한손엔 무력, 또 한손엔 경제력을 들고 주변국들에 협박과 회유 양면작전을 쓰고 있다.
전국시대의 맹자(孟子)는 ‘이소사대(以小事大)’를 주장했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서 생존의 길을 찾아라” 이런 주장인 것이다.
맹자 이후 중국은 이런 대국정신을 그대로 계승, 주변 소국들에게 ‘이소사대’를 강요했던 것이다. 오늘 날 시진핑(習近平)의 <중국의 꿈(中國夢)>도 이런 중화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닌지, 잘보아야 한다. 한반도에 사드 배치문제를 두고 중국은 벌써 자기들의 야심을 드러내고 있고, 거기에 일부 한국 정치인들이 중국편에 서서 그쪽을 두둔하고 있다. 한심한 작태다. 중국은 인권과 자유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다. 그리고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국민이 공산주의 편을 든다면 그들은 추방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이소사대’를 논할 중화 패권주의 시대가 아니다. 독립국가로서 한국은 국력이 모자라면 세력균형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편에 서야 우리의 독립을 지킬 수 있다. 미국은 이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있게 한 참다운 우방이 아닌가.
북한의 핵을 분쇄하고 중국과 대등한 국가 관계의 새로운 정립을 위해서도 우리에겐 미국의 적극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금은 무엇 보다도 안보와 자주를 위해서 미국과의 유대를 한층 더 강화해야 할 때다.
해방 71주년에 새겨 본 ‘해방사의 진실’ 그 결론이다.
(한맥문학 2016. 9 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