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나의 호 彌山미산에 대하여
송재운(동국대 명예교수)
須彌山과 미산
나는 號호를 彌山미산이라 부른다.
미산은 불교의 상상적 聖山성산 須彌山수미산에서 따왔다. 즉 ‘수미산’의 ‘미산’이다.
그러니 ‘미산’이 상징하는 것은 자연 ‘수미산’일 수 밖에 없다.
수미산은 불교 우주관의 핵심이다.
수미산은 九山八海구산팔해, 곧 아홉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로 구성되어 33天천을 이루고 있다.
한 개의 산이 각각 네개의 하늘(우주)을 가지고 있음으로 여덟 산을 곱하면 32천이 되고,
여기에 수미산 忉利天도리천을 더해 33천이 된다. 이른바 불교의 33천설이다.
도리천은 수미산 정상에 있고, 그 도리천궁에 帝釋天제석천이 상주한다.
그리고 불교의 33천은 곧 서른 세개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수미산 아래쪽 남쪽의 섬(南贍部洲남섬부주)이고,
佛法불법을 호지하고 佛子들을 보호하는 四天王사천왕은 수미산의 중턱 동서남북에 살고 있다.
우리의 태양계도 33천의 하나이다.
만일 미산이 수미산을 상징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무명의 일개 居士거사의 호로서는 너무 크고 감당하기 어려운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로서도 많은 고민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호를 지어주신 분이 三藏法師삼장법사 智冠지관(1932-2012) 大宗師대종사 이시고,
또 미산이란 그 의미를 일반화 한다면 독실한 佛子불자를 뜻한다는 점에서 큰 부담없이 지금은 쓰고 있다.
號호는 自作자작도 많고, 또 부모 스승, 그리고 절친한 친구 친지 등이 지어 주는 예도 적지않다고 한다.
호를 지음에 있어서는
처소로 호를 삼거나(所處以號)
이루고자 하는 뜻으로 짓거나(所志以號)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가지고 호를 쓰거나(所遇以號)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호를 삼는 것(所好以號)
등 이라고 한다(申用浩).
추사 김정희 선생은 아호가 무려 503개나 되었다 한다.
그때 그때 처소나 자기의 뜻이나 여건, 그리고 즐겨하는 바에 따라서 스스로 자작한 게 많았던 것 같다.
나의 미산은 위의 네가지 요소 가운데 어디에 속할까?
아마도 굳게 뜻하는바(所知)와 매우 좋아하는바(所好)에 있을 것이다.
佛智불지를 이룸에 뜻이 있고, 살아 있는 일체 생명에 대한 사랑, 그 것일 것이다.
在雲-구름의 존재란 내 이름
나의 이름은 있을 在, 구름 雲 - 在雲재운이다.
하아버지가 지어주신 거라는데, 한자 풀이를 하면 ‘구름에 있다’는 뜻이겠다.
여기서 불교의 無常偈무상게를 본다.
生也一片 浮雲起 생야일편 부운기
死也一片 浮雲滅 사야일편 부운멸
浮雲自體 本無實 부운자체 본무실
生死去來 亦如然 생사거래 역여연
세상에 태어남은 한쪼각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쪼각 뜬 구름이 소멸해 없어지는 것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이 없으니
나고 죽고 가고 옴이 또한 이와 같도다.
인생의 무상을 저 뜬 구름에 비유해 읊은 것이다.
이 무상게의 말대로 모든 구름은(언제나 떠있다) 덧 없다.
實실이 없는 것이다. 우주의 무한한 창공을 흘러 흘러 떠돌 뿐이다.
내가 대학을 나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를 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在雲재운이란 이름이 허망해서 앞으로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니,
개명을 하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어느 작명소를 찾아가서 돈을 주고
내 이름을 있을 在, 상서로울 祥 - 在祥재상으로 지어오기도 했다.
그 친구의 성의가 너무 고맙고 또 구름의 존재라는 재운 보다는
장차 인생에 상서로움이 있다는 재상이 좋기도 하여 명함을 새기고, 몇 달 사용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나는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재운이 무어가 나쁜가.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라- 세상만사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구름처럼 걸림없이 날아 다니니 얼마나 자유롭고 유쾌한가!
마치 觀自在菩薩관자재보살 할 때의 그 自在자재로움 속에 사는 그런 느낌으로
나는 일상을 즐기며 30-40대를 살았다. 구름 속의 존재로서 잘 살은 편이다.
그런데 知天命지천명이 가까워 오던 어느 해 가을 날,
한국동양철학회 학술대회에서 만난 고려대 金忠烈김충렬 교수께서 자기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내게 주신다.
받아 펴보니 그 유명한 달필로 <宋在雲 雅號 須巖> 이렇게 적은 것이다.
그리고 내게 하시는 말씀이
“송선생은 동대에 교수로 재직 중이고, 또 이름에 구름 雲자가 있으니
호를 모름 지기 須를 앞에 써서 불교의 수미산을 상징하고, 뒤에 큰 바위 巖자를 써서 구름 雲자의 허함을
補보하여 須巖수암으로 하는 게 좋아요.
뜻은 ‘수미산 큰 바위’지.” 이러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떠서 中天중천(김충렬 선생의 아호)선생의 글씨를 다시 보고 또 그의 말씀을 마음 속에 깊이 새겼다.
須巖수암으로해서 불교를 모태로하는 동대를 뜻하고,
큰 바위 巖자로 구름 雲운 자의 無實무실함을 비보하여,
내 이름 在雲재운의 뜬 구름을 큰 바위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불교 우주관의 중심 <수미산 큰 바위> 그 뜻도 좋고, ‘수암’이란 음도 더 없이 좋았다.
역시 중천 선생도 나의 구름 雲운자가 마음에 영 걸렸던 모양이다.
내가 오늘 날 쓰는 ‘미산’도 이 ‘수암’과 결코 무관치 않다.
彌天과 彌山
나는 앞서 나의 호를 미산이라고 지어준 분은 삼장법사 지관 대종사라고 했다.
이제 그 緣起연기를 말해야 겠다.
伽山가산 智冠지관 스님은 86년부터 90년까지 만 4년동안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셨다.
그리고 이때 스님을 보필하여 비서실장을 맡은 사람은 불교학과 목정배(睦貞培) 교수다.
나 또한 이해 2월 지관스님 총장 취임후 바로 3월에 인천대학교에서 동대 문과대 윤리문화학과 조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나는 위 두분들과 오랜 교분이 있는 사이였다.
나는 68년부터 72년까지
당시 동대 총장 金東益김동익 박사 재임 기간동안 총장 부속실장(비서실장)을 지냈다.
헌데 이 기간동안 지관 스님(해인사)은 재단 감사를 하시어 스님과 자주는 아니더라도 뵈올 기회가 적지 않았다.
지관 스님은 해인강원 강사를 오래하신 유명한 강백이고, 禪선-敎교를 회통한 禪僧선승으로도 유명했다.
그리고 나는 이 60년대 말에 스님으로부터 <韓國佛敎所依經傳 硏究>라는 저서를 기증받아
전공은 아니더라도 많은 공부를 하고 스님과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목정배 교수와는 대학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인데다 65년부터 몇해동안 <불교신문> 기자로 같이 활동했다.
나 보다 여러해 선배인 그는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인 靑潭청담스님 유발상좌로서 총무원과 도선사 출입도 잦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유명한 불교학자일 뿐 아니라 禪詩선시-禪畵선화에도 능한 才士재사였다.
불교신문 때에 그는 나를 龍潭용담이라 불렀고,
80년대 후반 동대 교수 시절에는 彌山미산이라 호칭했으며 자기 스스로는 彌天미천이라 썼다.
지관 스님이 동대 총장으로 재임하시던 80년대 후반기는 노태우 대통령 때로 정치 사회적으로 격변기였다.
87년 6/10 항쟁 이후 대학가는
이른바 주사파와 민중민주파들이 주도하는 좌경이념의 민족해방운동으로 일종의 혁명적 소용돌이를 겪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학자투’(학원자주화투쟁)로 인하여 많은 대학들은 학생들에 의해총장실이 점거되고,
무능교수 추방이라는 교내 대자보로 적지않은 교수들이 곤욕을 치렀다.
너나 없이 그저 좌경 학생들에게 밉게 보이면 무능교수로 낚인 찍혀 괴롭힘을 당하던 시기다.
東大동대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특히 동대는 학원자주화 투쟁이 극심하였다.
학생대표, 교수 대표가 대학 경영에 직접 참여해야한다고 장기간 투쟁하여 이른바 총장과 함께하는 ‘3자회의’를 구성하기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런 와중에 나는 학생처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대학에서 교수의 보직인 학생처장은 학생들의 대내외 활동을 지도하는 자리다.
그런데 하도 소요가 심하니 그 자리를 몇 달 배겨나는 교수가 없었다.
내가 가벼운 기관지염으로 미아리 성가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지관 총장님께서 찾아 오셔서 어렵겠지만 학생처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시다.
이 때가 88년 7월이다. 88올림픽이 있었던 해이니 어언 30년전의 일이다.
바로 학생처장을 맡고 보니 당시 총학생회장은 지금 더불어 민주당 4선의원인 최재성군이었다.
그는 전체 재학생들을 단결시켜 대내외 투쟁에 동원하는데 뛰어난 리더싶을 가지고 있었고,
또 대중들 앞에서 즉흥 연설을 하는데도 순발력이 대단하였다.
나는 이런 학생대표들과 맞부딪치면서 지관스님이 임기를 마칠 때까지 뼈아픈 고통을 같이 하였고,
彌山미산이란 아호도 이때 받았다.
학생처장 재임 2년 가까이 나는 畏友외우 이기도한 학생부처장 金鍾玉김종옥 선생과 비서실장 목정배 교수와 거의 매일 거짓말 좀 보태 24시간을 같이 지내다시피 하였다. 그만큼 학생들의 학자투가 드세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고생을 같이 하던중 어느 날 목정배 교수는
앞으로 있을 교직원 수계법회에 대비하여 내가 총장님으로부터 法名법명을 받았는데
“송교수는 수미산의 미산이고,
나는 그 미산 위에 彌天미천 이야” 이렇게 말하며 웃는 것이었다. 89년 봄이다.
그래서 彌天 - 彌山의 형제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형은 저멀리 가득한 하늘 彌天미천으로 벌서 가시고 미산은 아직 살아 있다.
수미산 중턱에 사는 四天王사천왕이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리라.
그때 미천 목정배 형은 이 법명은 아호로 써도 좋다고 큰 스님이 말씀하셨으니 우리 앞으로 호로 부르자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한동안 이 미산을 호로 쓰지 않았다.
미산이 나오기 얼마전 中天중천 선생이 지어준 須巖수암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택해야할지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서로 의논한 것도 아닌데 두 어른이 똑 같이 在雲재운인 나를 두고 호를 짓는데
須彌山수미산을 택한 것이다.
中天중천 선생은 현대 중국에서도 높이 평가하는 동양철학의 대석학이요,
지관 스님은 經경 律율 論론을 회통한 三藏法師삼장법사이시다.
두분 다 학문의 정점에 겨셨다.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인가.
중천선생의 ‘수암’은 ‘수미산 큰 바위’, 삼장법사의 ‘미산’은 ‘수미산’-.
‘수미산 큰 바위’도 따지고 보면 ‘수미산’ 이다. 그러고보면 須巖이나 彌山은 다같이 須彌山을 상징한다.
그런데 오늘 날 내가 彌山을 쓰는 것은
彌山이 須巖보다 우선 한자로 쓰기에 편하고 부르기가 좀 부드럽게 느껴지기 때문일 뿐 다른 의도는 없다.
그리고 또 언젠가는 죽기 전에 須巖이라고 쓸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호에 대한 이 글을 마치면서
智冠 三藏法師 지관 삼장법사
中天 金忠烈 先生 중천 김충렬 선생
彌天 睦貞培 兄 미천 목정배 형
세 어른을 끝없이 기리며 극락왕생을 빈다.
<한맥문학> 7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