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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활불活佛-백성욱 박사





시대의 활불活佛-백성욱 박사




                                          

프롤로그


내가 백성욱白性郁 박사를 알게된 것은 60년 동국대학교 학생이 되면서부터다.

나는 고등학교를 경기도 용인에서 58년에 나왔지만 6,25를 겪은 뒤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바로 대학 진학을 못하고 한해를 집에서 책이나 보고 영어 단어를 외면서 보낸 뒤 이듬해(60년) 4월에 동국대 불교대학 철학과에 입학 하였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불교대학을 간다고 하니까 “허구 많은 대학을 두고 왜 하필 목탁대학 이냐”며 빈정 대기도 하였지만, 고3 담임이셨던 윤용성 선생님이 “송군 ! 철학을 하려면 동국대 불교대학 철학과를 가게. 동양 철학이던 서양 철학이던 불교사상과 인도철학을 모르고는 모두 헛것이야. 그러니까 불교대학에 있는 철학과가 적격이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머리속에 밖혀 있어서 누가 뭐래도 불교대 철학과에 간다는 생각은 요지부동 이었다.

당시만 해도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관념이 일반인들에게 아직도 남아서인지 스님네를 보면 아이들이 “중중 까까 중”하며 뒤에서 하대하고 업신여기는 풍조가 적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친구들이 ‘목탁대학’ 간다고 놀릴만 하였던 것이다.

훗날 동대를 다니면서 안 일이지만 당시 백성욱 총장은 스님 학생들에게 대학문에 들어와 학교생활을 할 때에는 승복 대신 교복을 입고 삭발한 머리에는 베레모를 쓰도록 지도 하였다. 삭발 머리에 회색 장삼을 입은 것이 일반 학생들에게 이질감-위화감을 주어 캠퍼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학생 모집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였다.

더구나 50년대 중반부터 62년 박정희 혁명정부가 비구 대처 통합종단을 출범시키기 전까지 불교 승단은 비구-대처의 피나는 싸움으로 한국사회에 엄청난 물의를 일으켜 일반 국민들의 불신이 극도에 달하고 있을 때이니 백성욱 총장의 이러한 조치들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당시 동국대를 선택한 데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60년대에는 입학기가 되면 각 대학에서 입학 광고를 여러 신문에 5단 통으로 크게 내었다. 나는 고1 때부터 한국일보 조선일보를 번갈아 보며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익히고 연재소설도 빼지 않고 읽었다. 홍성유의 <비극은 없다>도 이때 한국일보를 통해 읽었다.

그런데 하루는 동국대 입학 광고를 보니 고등학교 3년 내내 우등(1등) 성적의 소유자에겐 1년간 학비 전액을 면제해 주고 입학 후 재학 중에도 학과 우등이면 계속해서 학비 면제의 혜택을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광고를 보고 환희작약 했다.

우리 집 형편으론 도저히 갈 수 없는 대학 진학의 꿈이 이루어 질 수 있겠다는 희망에서다.

당시에 시골 농촌 학생들이 대학을 가려면 학비 즉 등록금을 대기 위해 집에서 기르던 큰 황소를 팔거나 농사짓는 땅을 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농촌에서 돈 될 만한 부업이라곤 없고 또 토지에서 수확되는 곡식도 한 가족 식구들의 1년 양식을 대기에도 부족해 봄이면 보리 고개를 넘기기 위해 장리쌀을 얻어먹어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자식 학비를 위해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수단은 소나 땅에 손을 대는 일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우리 집에서 팔아 줄 소나 땅은 없었지만 고등학교 3년 내내 학년마다 우등한 성적표는 있었다. 그래서 동대에 입학원서를 내고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불교대학 철학과 학생이 되고 1년 두 학기 등록금 전액을 면제 받았다. 이것이 동국대를 가게 된 또 하나 이유이고 크나 큰 은혜였다.

그 때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한 많은 농촌 학생들은 대개 소나 땅을 팔아 학비를 대고, 대학에 다니면서는 가정교사나 고학으로 자신의 숙식을 해결 하였던 것이다. 당시 시골 대학생들의 등록금 대는 형편을 잘 알았던 서울의 일간지들은 사립대학들을 두고 우골탑牛骨塔이라 비꼬기도 했었다. 소판 돈으로 세운 상아탑이란 뜻이다.

그래도 그때 우리들은 희망과 용기로 향학열에 불타며 살았지 요새 젊은이들처럼 자기의 나라를 ‘헬 조선’, 즉 ‘지옥 같은 나라’라고 매도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11번째 가는 경제대국이 되었다. 이것은 모두가 50년대 중반이후 60년대까지 향학열에 불탔던 젊은이들이 대학 공부를 마치면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명운을 걸고 주도 했던 국가재건, 조국 근대화, 수출입국에 있어 이들이 든든한 인적자원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성욱 박사도 당시 동국대학교 총장을 두 임기 연임하면서 이러한 영재들을 길러내는데 크게 공헌한 분으로 손꼽힌다. 고등학교 3년 내리 우등한 졸업생에게 1년간 학비면제의 장학제도를 실시한 것은 내가 입학한 60년과 다음해인 61년까지였다. 이 두해 동안에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한 준재들이 동대에 많이 몰려왔다. 더불어 이들은 대학의 질적 수준을 끌어 올리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고 졸업 후 사회 진출에 있어서도 동대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나와 입학 동기들인 64년도 동대 졸업생들 중에서는 대학 교수만 각 분야에서 40명 가까이 배출되었고 법조인들도 적지 않게 나왔으며 문단에 등단한 문인들은 손으로 세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백성욱 박사가 만일 61년 8월 총장직을 사임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러한 장학제도는 좀 더 지속되었을 것이고 보다 출중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을 것이다.

61년 7월 박정희 혁명정부는 돌연 ‘교수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공표 한다. 교원의 정년을 60세로 한정 시켰다. 이 때 백성욱 총장은 64세(1897년생)였다. 정해진 법에 따라 교수로서 총장직을 수행 할 수 없어 퇴임하고 학교를 떠났다. 이때 많은 유명 교수들도 총장과 함께 학교를 퇴임 하였다.

동국대가 53년 종합대학교로 승격한 이후 피란지 부산에서 아주 짧은 기간 초대 총장에 재직했던 권상노 박사에 이어 제2대 총장에 취임한 이래 8년 동안 서울 중구 필동의 일본 절터였던 남산의 한 가닥 줄기에다 대학을 크게 세우고 동국대를 굴지의 사학으로 키워낸 백성욱 총장의 퇴임은 학교는 물론 한국 불교계에도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시대의 활불

백성욱 박사는 ‘시대의 활불活佛’로 불려진 인물이다. 그는 일찌기 불계佛戒를 받은 승려로서 동국대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을 1919년에 졸업, 그해 3.1운동과 상해임시 정부에도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며, 22년엔 독일 뷔르쯔부르크(Wirzburg)대학에서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 즉 ‘불교형이상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불교철학자다. 독일에서 25년 귀국한 후 26년부터 28년까지는 모교 불교중앙학림 교수를 지내고 30년 금강산으로 입산, 안양암 지장암 등에서 10년간 수도, 도인이 되어 40년에 하산한다.

해방 후는 6.25가 나던 50년 2월부터 동 7월까지 내무부장관을 지냈고, 51년 광업진흥공사 사장, 51년 동국대 총동창회 회장, 53년 동국대 총장, 55년 동국학원 이사장(동대 재단), 55년 대광유지주식회사 사장, 57년 고려대쟝경 보존회 회장(이때부터 동국대에서 고려대장경 영인본 간행 시작), 57년 재단법인 경기학원 이사장(경기대) 등을 역임했다.

백성욱 박사는 총장 재임시에도 동국대 대학원에서 여러 해 동안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승조의 <조론肇論>, 혜심의 <염송拈頌>, 승조의 <보장론寶藏論> 그리고 화엄경 등을 강의하며 많은 불교학자들을 길러 냈다. 그리고 젊은 시절엔 학술논문, 시, 수필 등을 당시 <불교>지를 비롯한 잡지들에 발표하였다. 위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로도 백성욱 박사의 이력이 다양하고 화려함을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體(본체)는 어디까지나 佛(불교)이다. 그러므로 그가 담당했던 모든 직책, 모든 일들은 그 체의 용用일 뿐이다. 백성욱 박사가 무엇을 하던 그의 본심에는 항상 부처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 불계를 받은 이후 한번도 부처를 놓은 적이 없다.

불교중앙학림을 나온 것이나 독일에서의 박사학위 과정 연구와 논문이 그렇고, 금강산 수도에서는 대방광불화엄경을 염하면서 비로자나 법신과 그 화신인 부처를 체로 삼은 것이 또한 그러하며 생애 후반에 금강경을 독송하고 미륵존여래불을 념하며 받들도록 많은 제자-대중들에게 가르친 것도 또한 같다.

백 박사에겐 따라 붙는 명칭이 많다. 승려, 독립운동가, 불교학자, 시인, 교육가(교수, 대학 총장), 정치가(내무부장관, 52, 56년 부통령 출마) CEO, 도인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분은 역시 佛이다. 그러므로 그를 ‘살아있는 부처’같다 하여 사람들은 ‘활불’이라 칭하였던 것이다.

백 박사가 수도도 많이 했지만 여러 직책을 맡아 일을 수행하면서 한번도 큰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았던 것은 심체가 佛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전술한대로 이 심체 불의 用이니 무슨 오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백성욱 박사는 말한다.

“한 생각이 부처님을 향해 있으면 모두가 출가자”라고.

활불活佛의 상징 백호白毫

백성욱 박사에겐 또 하나의 상징적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얼굴 양미간 위 이마에 솟은 백호이다. 백호(urna 白毫)란 원래 부처님과 보살의 양미간 위 이마에 난 흰털이 오른 쪽으로 돌돌 말려서 모양이 동그란 혹같이 생긴 것을 말한다. 이 백호는 수정같이 희고 부드러우며 끝없이 퍼져 나아가는 빛을 발한다. 이것을 백호광이 이라 하고 이런 상相을 백호상이라 한다. 그래서 법화경에는 “그 때 부처님께서 백호에서 한 줄기 빛을 놓으시니 바로 동방의 오백만억 나유타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여러 부처님들을 볼 수 있었다”고 설한다. 중생은 이 백호광을 봄으로써 한량없는 복덕을 짓는다고도 한다.

이런 백호상은 부처님, 보살이 갖추고 있는 32가지의 뛰어난 모습중의 하나이다. 부처님 열반 이후 불상에서는 이 백호를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어 불상의 양미간 위 이마에 박아 놓는다. 경주의 석굴암 대불도 양미간 위 이마에 이 백호 보석을 박았던 자욱이 역력 하다. 그래서인지 백성욱 박사도 부처님처럼 백호가 나 있다. 흰털인지는 직접 만져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육안으론 혹 같아 보이고 빛이 났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백호라고 하였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부처님의 백호처럼 양미간 위 이마에 동그랗게 검은 점을 만들거나 또는 그 자리에 보석을 붙여 얼굴 치장을 한다. 그리고 이와같은 치레를 ‘티카’라 부른다고 하는데 BC 1세기경의 그림과 조각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하는 점을 보아 부처님의 백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인도인들은 사람의 얼굴에 두 눈 말고도 제3의 눈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3의 눈은 바로 두 눈 사이 양미간 위 이마에 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이 3의 눈을 신통안神通眼이 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얼굴에 치장하고 있는 ‘티카’가 이 3의 눈이지도 모르겠다.

백성욱 박사는 얼굴에 백호가 있지만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그와 조화를 잘 이루어 전형적인 부처님 상과 닮은 미남이다. 키나 체구도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알맞았다. 나는 지금까지 80평생을 살면서 백 박사처럼 품위 있고 멋지며 위엄있게 잘나고 매력적인 남자를 국내외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참으로 뛰어난 인물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주간으로 발간되는 대학보 동대신문(당시는 東大時報) 기자가 되었다. 그것도 공채로 근 10대 1의 경쟁에서 합격한 것이다. 대학을 들어오고 보니 등록금은 1년간 면제가 되었다 하더라도 막상 먹고 자며 학교 다닐 길이 막연했다. 서울에서 나는 어디 기댈 친척도 지인도 없는 그야말로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신세 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언가 부업을 가져야겠는데 그때 마침 학교 게시판에 동대신문 기자모집 공고가 난 것을 보았다. 바로 입학한 4월 초다. 그리고 2-3일 후 동대신문 기자를 지냈던 송석구 선배를 찾아가 만나 대학신문 기자가 어떤 어떤 일을 하는지 물었다.

송 선배는 나 보다 같은 불교대 철학과 2년 선배였는데 인물이 잘나고 구변도 좋았다. (그는 훗날 90년대 중반부터 80년대중반까지 동국대 제 13-14대 총장을 8년간 역임 했다) 이 선배의 말에 따르면 대학신문 기자는 학내에서 주로 학사행정, 학교행사 같은 것을 취재하여 기사로 쓰고 또 교수나 혹은 대학원생들의 좋은 학술 논문들을 수집하여 신문에 싣도록 활동하는 것이 주 업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자 활동은 강의 시간 외에 하는 것이라 말하고 매월 월급도 나온 다고 일러 주며 한번 공채에 임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공채에 응하여 기자가 되고 졸업 할 때가지 무려 4년 동안 동대신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돈으로 하숙비를 충당하였다. 이때 나는 나의 학창생활에 큰 보람과 즐거움을 느꼈다.

주간 동대시보를 역시 주간 동대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소전 손재형孫在馨 선생의 글씨를 동대신문 제자로 만든 것도 이 4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나는 기자가 되자마자 며칠 후 4.19 학생혁명을 겪으며 수습기자인 내가 쓴 첫 4.19 기사가 당시 동대신문 1면 톱으로 게재되는 영광도 맛보았다. 그리고 1년 후에는 5.16 박정희 군사혁명을 맞는 등 격동기를 보냈던 것이다.

4.19날 우리 동국대 학생들은 빨간 바탕의 명주천에 흰글씨로 ‘동국대학교’라고 쓴 프랭카트를 선두로하여 통의동 경무대 입구까지 시내 여러대학 데모대의 선두에 섰다. 이 때 총학생회장은 훗날 민주당 국회의원을 오래 지낸 장춘준 선배였다.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며 교정을 돌아 시내로 향하는 것을 본관 2층 총장실에서 창밖으로 한참 내려다 본 백성욱 총장께서는 옆에서 학생들을 염려하는 주위 몇 사람들에게 “놔둬라. 불의를 보고도 항거할 줄 모른다면 어디 젊은 피가 살아 있다 하겠는가!”라고 일갈 했다고 한다.

백성욱 박사는 그 때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통해 동지적 인간애도 깊었던 사이였다. 그럼에도 정 부통령 3.15 선거가 부정이었다는 것에 대해선 묵인할 수 없다는 신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인기 절정의 월요특강

백성욱 박사는 총장 재임시절 매주 월요일 마다 ‘인류문화사’ 특강을 열었다,

이 특강은 매우 재미있고 그 때 학생들이 좀체로 접해 볼 수 없는 세계사와 다양한 인류문화에 관한 것들이어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강의 장소는 8백석이 넘는 대학 중강당인데 매번 자리가 꽉 채워졌다. 학점을 요하는 강의도 아닌데 학생들이 많이 참석하고 교수 직원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명강으로 소문이 나서 심지어는 당시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학생들도 이 특강을 들으러 많이 왔다고 한다.

매주는 아니지만 나도 가끔 이 월요 총장 특강을 들은 편이다. 학교 방송실에서 녹음을 하면서 미이크로 크게 확성되어 진행되는 이 총장 특강을 나는 처음에 학생기자로서 채록하여 글로 만들어 동대신문에 실어볼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포기 했다. 말씀하는 형식이나 그 내용들이 대학 1학년생으로서는 도저히 받아쓰기도 어렵고 얼핏 이해가 안가는 대목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재미로 청강만 했다.

근데 하루는 총장께서 자기 자신의 백호에 대하여 숨은 일화를 얘기했다.

내용인즉 이렇다. 언젠가 시베리아 철도 열차를 타고 유럽을 가는데 맞은 편에 아주 아름다답고 젊은 로서아(러시아)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런데 열차가 달리는 동안 이 여자가 오랫동안 자기(백 박사)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여자가 웬일로 이렇게 나를 쳐다보나 생각하다가 겸연쩍어 얼굴을 차창으로 돌리는 순간 이 여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기의 무릎에 올라 앉아 뿌리칠 틈도 주지 않고 이마의 백호를 만지더라는 것이다. 그리곤 놓지 않고 마치 어린 애기가 어머니 젖꼭지 만지듯 조물조물 주물러 대더란다. 그러면서 이 여자는 러시아어로 당신 같은 미남은 처음 보는데 이 이마의 혹은 떼어서 자기가 갖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께선 이건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드물게 아주 큰 인물들에나 생기는 것이니 탐내지 말라고 웃으며 타일러 떼어 놓았다고 한다. 그렇지! 부처가 아닌 사람의 백호를 그 여자가 어디서 보았겠는가. 이렇게 호기심을 갖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6.25때 부산 피난지에서 있었던 일이라 한다. 하루는 백 박사가 부산 어느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거리에서 놀던 몇 명 아이들 중에서 한 녀석이 호주머니에서 종이 쪼각을 꺼내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더니 바로 꺼내 가지고 손으로 똘똘 뭉쳐 제 이마에 붙이고 나서 “야! 이 놈들아 내가 백성욱이다”하고 큰 소리를 치더라는 것이다. 백 박사는 그 날 이렇게만 말하고 그 아이의 말에 주석을 붙이진 않았다. 6,25를 가운데 두고 백 박사는 5개월간 내무장관을 엮임 했는데 전시중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마에 백호가 있는 그의 얼굴과 이름은 꽤나 많이 알려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백호는 아주 귀중한 활불의 상징이며 또한 그 이미지였다.


날더러 연극을 하란 말이냐!

나는 학생기자였기 때문에 일반 학생들과는 달리 백성욱 총장님을 집무실인 총장실에서 몇 번 직접 뵈올 기회가 있었다. 독대하여 대담한 적은 없고 총장실에서 가끔있는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61년 1월인가로 기억 된다, 어느 날 총장실에서 세계 스키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우리 동대팀의 우승기 전달식이 있다고 하여 나는 취재차 신문사 사진부장과 같이 그 자리에 참석했다. 60년대 동대에서는 강원도 깊숙한 산골에서 자라며 스키를 잘 타던 고졸 학생들을 데려다 입학을 시키고 학업과 병행하여 스키선수들로 키웠다. 그 결과 동대 스키팀은 국내외 어느 선수권대회에 출전하던 우승을 많이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우승을 하면 반드시 그 우승기를 총장에게 전달하여 총장실에 게양, 보관 하였다.

그래서 그 때 총장실에 들어가면 황금색 수실이 빛나는 각종 운동의 여러 우승기들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 장관이었다.

이날도 바로 이런 우승기 전달식이다. 우승기 전달은 선수 대표가 우승기를 두 손으로 들어 총장께 약간 허리를 굽히면서 바치면 총장은 그것을 받아서 옆에 서있는 직원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날 전달식에서는 뜻하지 않게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행사의 신문 취재는 선수가 우승기를 전달하고 총장이 받는 바로 그 찰라의 장면을 기자의 카메라에 담기만 하면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그 찰라에 사진부장이 가지고 있던 스피드그래픽 보도용 카메라의 플래쉬가 불발되어 전달 장면을 찍지 못했다. 카메라의 플래쉬가 펑 소리를 내며 터져야 뻔쩍하는 빛과 동시에 사진이 찍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전달식 장면은 다음 주 동대신문 1면 톱 사진으로 쓰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진을 못 찍었으니 난감할 노릇이었다.

이때 사진 부장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살짝 귀에다 입을 대고 “총장님 더러 우승기 받는 장면을 한번만 더해 달라”고 말씀 드려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 나도 그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서슴없이 백 총장님께 다가가 “총장님 죄송하지만 사진을 못 찍어서 그러니 우승기를 한번만 다시 받아 주시죠” 이렇게 말씀 드렸다. 그랬더니 총장님께서는 바로 “날 더러 연극을 하란 말이냐!”하며 벽력같이 호통을 치신다. 불벼락이다.

그때 이 행사에 참석한 적잖은 교직원들은 모두 숨을 죽이며 우리 두 사람과 총장님을 슬금슬금 곁눈질 할 뿐 모두 입을 다물고 긴장해 있었다. 총장님은 그렇게 우리를 혼내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태연하게 자기 집무 책상으로 돌아가신다.

이 자리에서 제일 겁을 먹은 사람은 물론 사진 부장이다. 그는 당시 30대 중반으로 모 일간지 사진 기자를 하다가 동대로 자리를 옮겨 교무과에서 의뢰하는 졸업생 또는 재학생들의 학적부나 성적표를 사진으로 촬영, 암실에서 인화하여 보내는 업무를 맡은 학교 직원으로서 신문사 사진 부장도 겸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날의 사진 실수가 총장에게서 문제가 된다면 자칫 학교에서 쫓겨날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뚱뚱한 몸매여서 그런지 얼굴이 창백해져서 땀을 비오듯 흘리며 내게 근심어린 표정으로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면서 송 기자가 어떻게 문제를 잘 풀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이런 말에 백성욱 총장님은 크신 어른이니 고만한 일로 직원을 문책하진 않을 것이라고 위로 하면서, 만일 문책이 있다면 내가 나서서 해결하겠다고 큰 소릴 쳤다. 4.19 학생혁명이 성공을 거둔 뒤라 그때 각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정당한 주장은 잘 먹혀 들어가던 터라, 나도 자신감을 갖고 인사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사진기 즉 기계의 잘못이지 사람의 고의적 실수는 아니니 용서해 달라고 빌면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우승기 전달식 이후 한 달이 넘도록 학교 당국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사진 부장은 정년때까지 학교에 재직하며 잘 살았다. 백성욱 총장님은 역시 대인이고 보살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늘 다음 두 가지 점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오고 있다. 인생은 일장춘몽도 연극도 아닌 실존(existance)일 뿐, 그래서 두 번 다시 연극을 벌일 수 없으며 한번 주어진 기회는 영원히 다시 올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날더러 연극을 하란 말이냐!”고 일갈한 백성욱 박사의 말씀에서 터득한 인생훈이다.


명진학교에서 동국대학교까지

동국대학교는 서울의 안산案山인 남산 줄기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 대학본부와 명진관이 있는 캠퍼스 중심에 서면 청와대가 정면으로 마주 보이면서 전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밤에 보면 서울의 야경이 더욱 장관이다. 시내 대학들 중에 이런 명당을 차지한 대학이 어디 또 있겠는가! 주소로 말하면 서울 중구 필동로 1길 30(구 중구 필동 3가 26번지)이다. 이 대학 터는 설립자인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해방 후 1946년 국유화된 일본 적산을 정부로부터 인수함으로써 생긴 것이고, 여기에 오늘 날 아담하면서도 거대한 대학을 건설한 것은 백성욱 박사다.

그 자초지종을 살펴본다.

동국대학교는 1906년 불교교육, 불교인재 육성을 위하여 동대문구 창신동 원흥사元興寺(지금의 창신초등학교 자리)에서 개교한다. 그 후 1930년대까지 불교사범학교 불교고등의숙 중앙학림 불교전수학교로 교명이 바뀌면서 비록 일제치하이긴 했지만 교세를 신장하며 발전을 보게된다. 그리고 1930년부터 1946까지는 중앙불교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 시대가 된다. 이 기간 동안 동국대는 세 번의 폐교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14년 불교고등의숙의 젊은 승려 학생들이 당시 30본사 주지를 비롯한 기득권 승려들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불교정책에 순응만하면서, 우리 불교의 자주권을 빼앗기고 있다는데 대한 항의로 ‘조선불교회’를 조직한데 대하여 당시 종단의 기득권 세력들이 주동이 되어 학교를 자진 폐교 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폐교 사건은 오히려 다음 해인 1915년에 중앙학림을 세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화위복인 셈이다.

그리고 다음 두 번째는 1922년 일제에 의한 2년간의 강제 폐교다. 폐교 이유는 3.1독립운동 때 중앙학림 학생 교수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것이었다.

역시 세 번째도 혜화전문학교 학생들 중에 이른바 불온사상(일제에 항거)자가 많다고 하여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혜화전문은 다시 문을 열고, 46년 5월에 ‘조계학원(재단인 동국학원 전신)’에서는 사찰토지 2백만평을 증자하여 동년 9월에 정부로부터 불교학부 문학부 경제학부 전문부 등을 두는 4년제 대학 ’동국대학‘의 인가를 받는다.

그리고 47년 조계학원은 ‘동국학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초대 이사장에 김법린金法麟 박사가 취임한다. 동시에 11월 종단 중앙교무회의에서는 전국 사원 소유림 일부를 농림학부의 경영에 충당하고 재단과 함께 종합 대학승격을 추진, 53년 2월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의에서 통과 되어 종합대학인 ‘동국대학교’ 로 승격되고 초대 총장에 권상노 교수가 취임한다. 종합대학 인가 당시 문교부장관은 동국학원 초대 이사장을 지낸 김법린 박사였다.

이어 7월엔 동국학원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한국광업진흥공사 사장 백성욱 박사를 2대총장으로 추대키로 만장일치 결의하고, 당시 한원 이사장 이종욱李種郁 전 제헌의원에게 교섭을 일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학교 일들은 모두 부산 피난지에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성욱 박사는 전술한바 있드시 8월 1일부터 총장 집무에 착수했다. 6.25 전쟁 휴전 협정은 백성욱 박사가 동국대학교 제 2대 총장직을 맡은 53년 7월에 있었다. 백성욱 총장은 부산 피난지에서 서둘러 대학을 서울로 환도 시키고, 이해(53년) 11월 현 필동 교지 가설 식장에서 총장 취임식을 가졌다.


대학의 건설

위에서 동국대의 연혁을 아주 간단히 살펴 보았다. 좀 더 밝혀 보면 불교전수학교와 중앙학림은 1925년부터 명륜동 1번지와 혜화동 1,2번지에 조선총독부로부터 북관묘터를 빌리거나 혹은 사유지를 매입하여 부지 2.716평, 밭 3.600여평, 벽돌 건물 251평을 포함 모두 601평의 건물을 1927년까지 확보하여 교사校舍로 사용하였고, 1940년 혜화전문학교로 승격 되면서부터도 해방뒤 50년 6.25가 터지기 전까지 이 건물들은 여전히 혜화전문의 교사였다.

그러니까 1.906년 원흥사의 명진학교로부터 1,945년 혜화전문학교까지 동국대학교의 전신들은 39년동안 창신동과 혜화-명륜동에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남산 필동의 캠커스는 명실 공히 동국대학교의 새 터전이었고, 이것은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생겼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상아탑을 쌓은 것은 백성욱 총장이다.

앞서도 현 남산 동국대 자리는 일본 절터라고 말한바 있다. 그리고 이 절터는 해방 후 국유화 되어 46년 조계종에서 정부로부터 이양받은 것이라고 밝힌 바 있지만, 정확히 말해 이곳에는 일제 시대에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 서본원사西本願寺 경성별원京城別院이 있었다.

정토진종은 1.321년에 창종된 서본원사를 말하는데, 1.602년 분리되어 나간 동본원사와 구분하기 위하여 서본원사라 칭하였다. 이 서본원사는 19세기말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조선 각지에 별원을 두었다고 한다. 경성 별원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연대가 확실치 않지만 현재 동국대 법당 정각원正覺院으로 쓰이고 있는 경희궁 정전인 숭전전崇正殿이 1926년 조계사에 매입되었다가 다시 서본원사 별원으로 옮겨겼다는 기록(나무위키)을 참조 하면 대략 20년대 중반으로 보인다.

동국대학교에는 서본원사의 유물로 일본식으로 지어진 법당과 여러 사우寺宇들(지금은 다 없어졌음) 말고도 조선 왕실의 귀중한 유물이 두 개나 있었다. 하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경희궁 숭전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0호)이요, 또 하나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평양에 지은 궁궐 풍경궁豊慶宮의 정문 황건문皇建門 이다.

숭정전은 서본원사 시절 부처님을 모신 법당으로 쓰였다.

황건문은 규모가 크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보기에 매우 품격이 있고 아름다웠다.

60년대 우리가 재학하던 시절에는 대학 정문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로 헐려 갔는지 행방을 알길이 없어 아쉽기 그지 없다. 그 당시 재학생들은 이 황건문과 지금의 명진관인 석조관을 대학의 상징처럼 여겼다.

경희궁(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서울 고등학교 터, 현 서울 역사박물관 자리)은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 1623년 완공된 이궁이다. 창덕궁에 이은 제 2의 궁궐로서 많은 왕들이 적지 않은 시간 이곳에 거처하였다고 한다. 창덕궁을 동궐東闕, 경희궁을 서굴西闕로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경희궁은 100% 일제에 의해 헐려졌다고 알고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기록(나무위키)에 의하면 흥선대원군 시절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쓰기 위해 이 궁이 해체 되었으며, 숭정전을 위시한 일부 남은 전각 5채만 일제에 의해 매각되었다고 한다. 현재 동대에 있는 숭정전(정각원)도 당시 조계종 조계사에서 매입한 것이라 한다. 숭정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건물로서 현재 동대의 엄격한 보호를 받고 있다.

백성욱 총장은 취임 다음 해인 54년 4월 당시 한국 건축계의 거장 고故 송민구宋旼求 설계사를 초빙, 대학 건축본부 소장으로 앉히고 교사의 신축에 일로 매진한다. 불교 종단과 재단에서는 46년 동국대학 인가를 받고 혜화동 전문학교 시설로서는 새로 입학하는 대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어 이 필동의 서본원사 자리를 동대 교지로 정하고, 임시 교사를 꾸려가며 수업을 진행한 바 있다. 이 때는 아직 그대로 보존된 서본원사 건물들과 숭정전 등 목조 기와지붕 7동 617평, 그리고 판자 건물 2동 80평이 시설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53년 이후는 6.25 전쟁을 겪은 후라 백성욱 박사 취임 당시는 그 마져도 황폐화된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것이고, 더구나 이제는 여러 단과 대학을 거느리는 종합대학교가 되어서 엄청난 규모의 건물과 교육 시설을 필요로 했었다.

이러한 불모지에 백성욱 박사는 ‘황야의 거인’으로 등장 했던 것이다. 하나 다행이었던 것은 서본원사 터에 학교를 지을 수 있는 대지가 23.987평 확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건축본부를 둔 백성욱 총장은 대학 후원회(회장 李潤鎔)를 구성하여 후원금도 만들고 또 미 8군의 원조도 받는 등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 대학본부로부터 강의 동 과학 실험실 등을 착착 건설해 나아갔다. 이러한 대학 건설 과정에 있어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년도는 미상이지만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현재 청와대 자리)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을 바라보니 여기에 큰 공사판이 벌어져 있는 것이다.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직방으로 마주한 자리에 감히 남산을 까고 건물을 세우다니-대통령은 격노하여 비서에게 “저 짓을 하는자가 누구냐?”고 물었단다. 그러니까 “백성욱 박사가 동국대학교를 짓는 중이랍니다”하고 비서가 대답 했더니, 대통령께서 이내 얼굴에서 노기를 풀며 “응 그러냐! 그럼 놔둬라” 이렇게 말씀 했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백성욱 박사였기에 망정이지, 만일 다른 사람이 총장 이었다면 이 학교 건설 공사는 당장 중단되고, 이어 취소되었을 것이다.

동대로서는 천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또 한 번 이런 일이 더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아리 고개를 차타고 넘으시다 남산 동대 건설 현장을 멀리서 보시고, 경무대로 드시기전 여기에 들러 격려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시 동대는 사기충천할 밖에.

백성욱 박사는 비상한 능력과 힘을 가진 지도자였다. 거기다 사람을 제압하고 복속 시키는 일종의 마술?같은 매력도 있었다. 좀 크게 표현한다면 영웅적 카리스마(Charisma)다.

그가 6.25 전란 직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불과 몇해 만에 동국대를 명문 사학으로 자리 매김 할 수 있었었던 것은 그의 이러한 카리스마 덕이었다.

대학이 건물만 짓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건물과 시설이 하드웨어라면 여기에 들어 갈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수준 높은 교수진을 짜는 것이고, 우수한 학생을 뽑는 것이며, 엄정한 학사 관리와 효율적 재무관리다. 이 모든 것이 하모니를 이루며 잘 진행 될때만 대학은 올바르고 실력 있는 젊은 지성들을 길러 낼수 있다.

그런데 백 카리스마는 하드-소프트웨어 이 두가지에 다 능했다. 50-60년대 동대 교수진은 참으로 쟁쟁했다. 백성욱 총장 당시에 젊은 나이로서 동대 교무과장을 지낸 장한기張漢基 교수(연극영화과)는 당시 백성욱 총장과 동대 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 하고 있다.

백성욱 선생께서는 낡은 절간 건물과 임시 바로크 목조 건물들을 헐고 제대로의 본관 석조관과 지금의 대학 본부 건물을 짓느라고 바쁘셨지만 나는 대학원 졸업 때까지 한번도 그의 사무실을 찾지 않았다.(중략)

남들은 그를 독재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겸직했던 광진(광업진흥공사)사장 자리를 내 놓으면서 동국대학교 총장, 동창회장, 그리고 재단 이사장 까지도 함께 겸직하고 계셨다.

뿐만 아니라 6.25 전쟁통에 학교 기강이 말이 아닌데다가 학적부 조차 잘 정비되지 않은 터라 학사 행정조차 엉망이었다. 게다가 입학과 졸업장이 팔려 나가는 비리조차 없지 않았기에 도시 사무직 직원들과 일부 보직 교수들까지도 믿지 못하였다.

그래서 선생께서는 일벌백계주의로 조그마한 부정과 비리가 엿보여도 마구 잘라 나갔다. 그리고 학교 신축 건설 현장을 다니시며 독려 하였고, 느리거나 못마땅한 구석이 있으면 담당자를 불러 현장에서 호통을 치시곤 하였다.

어쨋거나 선생은 허름한 반코트에 캡을 눌러 쓰시곤 해질 녘 종로 네거리를 활보 하셨고 때로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그를 뵈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혹은 변장 차림으로 이른 새벽 학교 후문으로 들어오셔서 수위들 몰래 학교 신축장을 돌아 보시고 가는 예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사무실은 복도에서 전부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게 투명 유리로 채웠으며, 총장께서는 아침 일찍 출근하셔서 복도를 한바퀴 돌므로써 일하는 직원들은 긴장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총장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누가 담배를 피우고 신문을 보며 커피를 드는 것까지도 훤하게 알고 계셨다. 이만큼 철저 하였기에 낡아 허물어진 절간 대신 석조관이 들어서고 도서관이지어지고 대학 행정 기구인 각종 사무실이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교수들만은 극진히 위하였다. 어느 날 모 교수가 강의를 마치고 교수실에 들어와 손을 씻으려고 수도 꼭지를 틀었다. 그런데 물이 안 나오니 불평 섞인 목소리로 학교 욕을 마구 해댔다. 이때 마침 복도를 지나다 이를 목격하신 총장께서는 들어와 우선 그 교수에게 깊은 사과를 하고 당장에 처과장을 불러 호통을 쳐 물을 떠오게하여 그 교수의 노여움을 풀게한 때도 있었다.

다분히 독재성 계급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일 같기도 하지만, 해이한 기강을 세우고 책임을 묻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학을 앞둔 12월 보너스, 1월 2월 3월 3개월 보너스를 합치면 6개월치 월급을 한꺼번에 주시며 교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곤 하였다.

“아직 강의실 밖에 짓지 못해 교수 연구실을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니 그리 양해하시고, 추운 겨울 방학 월급 타러 나오시라 할수도 없으니 한몫에 타가시어 여행도 하고 ,연구 시간도 절약하시라”

당시 6개월간의 월급이면 시중 이자가 높은 때라 보통 10%에서 20%까지 받을 수가 있었다. 이 6개월 월급을 믿을 만한 곳에 주게 되면 그 이자만으로도 단촐한 식구의 식생활은 가능했다. 그러니 총장께서는 모름지기 학교에서는 왕이요, 구세주처럼 받들어졌고 총장 이사장 동창회장 등 삼권을 쥐신 그야말로 대단한 실력자였으며 그 만큼 권위도 컸었던 것이다.

<장한기 자전적 에세이 ‘나는 하늘을 날았다’에서. 2018년 9월 발행>

장한기 교수의 위와 같은 회고담에서 우리는 6.25 후 동대 건설 당시 백성욱 총창의 적나라한 모습과 당시 이 대학 학사 행정의 어두웠던 일면도 여실히 볼 수 있다. 전후 이러한 일은 비단 동대에 한해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바로 잡는데 총장의 노고가 얼마나 컸던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위 글에서 보건대 백 카리스마는 큰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을 뿐만아니라 사물을 섬세하게 관찰하는 자상함, 그리고 사람들을 보듬는 포용력에다 석양에 도심을 걸으며 사색하는 낭만도 듬뿍 가지고 있었다. 하기야 그 분은 젊은 시절 시인이 아니던가.

장한기 교수의 위 자전적 에세이를 읽으면서 나는 인연이 닿지 않아 내가 직접 체험하지 못했던 ‘활불 백성욱’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중 진수를 뽑아 여기에 소개한 것이다.


에필로그

내가 60년 4월 동대 철학과에 입학했을 때, 학교는 대학으로서의 손색 없는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다만 처음 들어가면 교정이 다소 협소해 보이는 것이 약간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입학 후 한동안 지나서 깨달은 것이지만 캠퍼스 중심을 남산 줄기 산 등성이에다 잡고 학교 메인 건물들을 세우고 나머지 시설물들은 능선 양옆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들어서면 다소 협소한 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지금도 마찬 가지다. 만일 현재 동대 시설물들을 수평적인 평지에 늘어놓는다면 어마 어마하게 커 보일 것이 분명하다.

60년 4.19 혁명 때 동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대학본부와 강의동인 석조관(현 명진관), 그리고 석조관 뒤 과학관, 그 옆에 거대한 온실을 갖추고 있었다. 그 뿐만아니라 아직 사용전인 도서관과 교수 연구실을 겸한 거대한 건물이 동편에 완공되어 있기도 했다. 대학 본부는 8백석의 큰 강당과 총장실 이사장실, 각 학처장실 그리고 각종 행정사무실, 연영과 실험극장, 강의실 보건소 동대신문사, 학생 직원 식당 등 대학의 핵심은 물론 온갖 부대시설을 다 갖추고 있었다. 모두가 백성욱 총장의 마음과 혼이 어린 시설물들 이었다. 내가 입학하여 동대신문 기자를 할 때에도 대학 건설본부장 송민구 설계사는 본관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중이었다.

하나 특기할 것은 건축가 송민구씨가 설계하여 58년에 완공한 석조관(현 명진관)이 2015년에 서울시 문화재로 등록되었다는 사실이다. 3층의 이 석조 건물은 건축학적으로 50-6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육안으로 보기에도 한국에도 이런 건축물이 있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기 한량없다.

그래서 나는 이 석조관을 가리켜 동대를 건설한 ‘활불 백성욱’의 사리舍利라고 한다.

불사리가 꼭 스님의 법체를 불로 태워야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전에 부처님 수행이 철저하고 그의 피와 땀, 혼으로 만들어 남긴 업적이나 유물들이 불심佛心을 상징하는 하는 불멸의 것이라면 그 것이 바로 그 수행자의 사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맞다, 동대는 백성욱 총장의 사리와 다름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장차 언젠가는 동대 교정에 이 대학의 중흥조 활불 백성욱 총장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야 한다.

불교는 인과因果고 또한 공空이다.

인과를 모른 척 한량 없이 세월을 허송한다면 우리들 세계에 남을 게 무엇이겠는가! 동국대학교는 올해로 창립 113주년을 맞았다

오늘 날 동국대학교는 서울 캠퍼스 외에 경주에 제2갬퍼스인 경주 동대가 있다. 여기에는 여러 단과대학은 물론 양방 의과대학과 그 부속 병원, 그리고 또한 한의과 대학과 그 부속 한방병원이 있다. 경주 캠퍼스는 서울 분교가 아니라 지금은 독립 채산제인 또 다른 대학으로서 총장을 따로 두고 있는 큰 대학이다.

다음으론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또한 제 3캠퍼스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8백병상 이상의 초현대적 양-한방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있고 약학대학도 있다. 이상 3개 캠퍼스의 재학생만도 아마 약 1만명에 가까울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미국 LA에는 한의과 대학과 소규모지만 병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날 동국대학교는 미국까지 합쳐 모두 4개의 캠펴스를 갖춘 그야말로 매마드급의 국제적인 대학이다. 1906년 동대문구 창신동 한 사찰에서 출발한 불교 교육기관인 명진학교가 금세기들어 이만큼 국제적인 큰 대학교로 성장하기 까지는 불교종단의 설립자들은 물론 그 외에 수많은 교수 학장 총장 등 인재들이 피와 땀을 쏟은 결과일 것이다. 불교 종단 학교라고 해도 현실 사회에서 불사를 행하고 교육 사업 등 각종 일을 이루어 내는 것은 부처님이 하시는 게 아니라 분명 중생, 즉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1백여년 동안 대학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도 분명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동대에는 승속을 막론하고 한 사람도 기리는 인물이 없다. 어디에도 흉상 하나 없으며 대학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도 없다. 불행의 불행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동대에는 학문적으로 우뚝한 교수들도 많고 학교발전에 물심 양면으로 도운 사람들도 많으며, 백성욱 박사처럼 학교 흥융興隆을 위해 금자탑을 쌓은 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분도 추앙하는 인물이 없다. 동국맨들이 인과를 모르고 살아온데 원인이 있고 크게는 대학에 뚜렷한 주인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설립자측인 불교 종단은 종권의 실세들이 수시로 바뀌고 종단에서 파견되는 법인 이사들도 잠시 스쳐가는 자리이니 누가 이 동대에 대하여 주인 의식을 가지고 전통을 세워 갈 수 있겠는가.

백성욱 총장만 보더라도 그를 총장으로 추대한 재단 이사회는 이른바 대처승측 종단이었고 지금은 비구승측 종단이 주인이다. 그러므로 백성욱 총장이 아무리 동대 발전의 중흥조라 해도 오늘 날 조계종 종단에서 그를 크게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결론으로 말하면 동국대학교 총동회가 나서서 대학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역대 대학의 인물들을 기리는 사업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역대 교수 학장 총장 이사장 동창 등에서 동국의 사표가 될만한 인물들을 가려내고 받드는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첫 번째 사업으로서 가장 업적이 뚜렸한 백성욱 총장의 동상을 세우고 그의 사상과 정신을 계발, 후대에 전승하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白日 天下에

性ㅡ佛性

郁郁하며

그 白毫光明

우주를 감싼다

아 ! 님이시여

그리운 님이시여

이 사바에 다시 오시어

法輪을 굴리시고

제도 중생 하소서 !


(2019. 6. 7)제자 彌山 송재운 合掌  / 동국대 명예교수


<참고문헌>

東國大學校 90年誌(동국대학교 1998. 5

伽山 佛敎大辭林(가산 불교문화연구원 2006. 6

(시대의 활불 백성욱 박사 탄신 123주년 기념문집

<금강경 독송과 마음 바치는 법> 게재. 2020.10. 백성욱연구원 발행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