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영웅이신
고 백선엽 장군님의 약력
고 백선엽 대장님을 명예원수로 추대하는 오늘은 자유 대한민국이 영웅을 탄생시키는 초석을 쌓고 있는 순간입니다.
영웅을 갖게 되는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존경하는 의미로 영웅의 발자취를 같이 걸어보겠습니다.
명예원수께서는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출생하셨습니다.
▸1940년 3월에 관서지역 최고의 수재들이 다녔던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신 후
당시 망국의 청년에게는 최고의 직장인 선생 직을 포기하고
장차 조국이 독립할 때 국가방위의 동량이 되기 위하여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입학 하셨습니다.
▸1941년 12월에 졸업하고 장교로서 기량 배양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1945년 해방과 동시 고향으로 귀국하여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서 조국봉사의 길을 찾았으나 북한은 소련군에 의해
공산화되어가는 상황을 인식하고 남한으로 탈출하셨습니다.
▸1946년 2월 26일, 남한에 도착 직후 오랫동안 꿈꿔왔던 신생조국
국군의 간성이 되기위해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국군 중위로 임관하셔서 창군의 성업에 동참하셨습니다.
부산에 5연대를 중대부터 대대를 거처 연대까지 조기에 진급 을 거듭하며 창설하였습니다.
▸1948년 4월에는 중령으로서 서울에 있는 국방부 전신인 통위부의
정보국장으로서 국군 내 남로당 대숙군을 주도하여 국군의
내부 안정을 찾아 장차국난에 대비할 수 있는 태세를 구축
하셨습니다.
이 때 중형을 선고 받은 박정희 소령을 구출하셨고 재임 중 대령으로 진급되셨습니다.
▸1949년 7월 22일에는 전남광주지역에 주둔한 5사단장으로 영전하여
여순반란사건의 반군 패잔병과 지역 남로당 유격대 등으로
후방을 교란하는 빨지산을 소탕하여 신생대한민국의 안정에
공헌하셨습니다.
▸1950년 4월 23일, 수색에 사령부가 위치했던 1사단장으로 부임한 지
2개월 만에 6.25전쟁의 기습남침을 받아 조직적으로 지연 작 전 전개하였고, 낙동강 방어선인 다부동에서 북한군3개 사단 의 필사적인 공격을 악전고투 끝에 격퇴하여 대한민국을 구출 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지연작전 중인 7월 27일 상주부근에서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북진 중에는 최강의 미군사단에 앞서 평양을 선점한 쾌거를 이룩한 바 있습니다. 1.4후퇴 뒤 재 반격 시는 서울을 선봉으 로 탈환하셨습니다.
▸1951년 4월 7일, 국군제1군단장 이던 김백일 장군의 항공기 추락사 고로 순국하시는 바람에 소장진급과 동시 강릉 제1군단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이때 우리 군에서 2년 가까이 사단장을 한 분 은 장군님이 유일하셨습니다.
4월12일 이승만 대통령께 진급 및 보직 신고차 부산에 가서
전쟁 발발 후 헤어졌던 가족과 처음 재회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때 1군단은 3군단이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대패 후
해체되어 한국군의 유일한 전투군단 이였습니다.
▸1951년 7월 10일, 1군단장으로 작전 수행 중 미군 측 요청에 따라
이승만대통령의의 승인 하에 휴전 회담에 한국 측 대표로
참가하셨습니다.
미군들은 열흘 정도면 휴전회담이 끝날 것 이라는 낙관적 전 망을 갖고 개성 선죽교 부근 99간짜리 한옥 저택에서 첫 회담을 갖게 된 것 이였습니다.
8월 25일 동부전선 펀치 볼 진격작전 지휘차 긴급 복귀하여 휴전회담 대표는 이형근 장군이 맡게 되었습니다.
▸1951년 11월 16일, 국회결의와 이승만 대통령의 간곡한 요구에 따라
밴프리트 8군사령관의 건의로 백야전전투사령부를 긴급 편성 하게 되었습니다. 이 군단급 특수부대는 낙동강전선 패잔병 과 남로당 지역당 조직 및 여순 반란군 잔존 공비들이 후방 치안을 유린하는 것을 소탕하기 위하여 남원에 사령부를 설치 하고, 12월 2일부터 1월 말까지 빨치산 사살 5천8백 명 포로 5천7백 명의 전과를 거두셨고 작전 중인 1월 12일 한국군 두 번째 중장으로 진급하셨습니다.
▸1952년 4월 5일, 미9군단에서 창설교육을 받고 제2군단을 창설하여 예하에 한국군 최초로 포병단을 편성하고 3개 사단을 지휘 하며 두 번째 군단장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제대로 된 2개의 한국군 군단을 보유하게 되어 감격하셨던 부대 이었습니다.
▸1952년 7월 23일,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부산 정치파동으로 해임 후 32세에 육군참모총장으로 보임되셨습니다.
총장 재임 중 무엇보다 우리국군에 결정적으로 기여 하신 것 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방문 시 한국군 20개 사단 편성 안을 건의하여 즉석 동의를 받아냈던 일 이 였습니다. 또 한국군의 숙원이던 사단 마다 포병사령부를
편성하여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1953년 1월 31일, 대한민국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하셨습니다.
▸1953년 5월 미육군참모총장 초청으로 방미하여 계획에 없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예방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제안 함으로서 경이적인 한국방위 초석을 굳건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하셨습니다.
▸1954년 2월 14일, 휴전 후 전방 방어지역을 미군으로부터
한국군이 인수하기 위하여 4개 군단, 16개 사단으로 편성 된 세계최대 야전군을 창설하여 최초의 사령관 직을 맡게 되셨습니다.
재임 간 이승만 대통령 3선 시 문제가 된 내무부 장관을 맡아 달라는 대통령의 제안을 “군인으로서 일생을 마치고 싶습니다”라며 어렵게 거절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1957년 5월18일, 39개월간 제1야전군 사령부의 기틀을 닦아 놓은 후 두 번째 육군참모총장으로 다시 보임되셨습니다. 미 육군 참모총장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국군 현대화계획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신형전차 도입, 포병화력 증강, 공수부대 창설, F-86 전투기도입, 구축함 도입,
방공유도탄부대 편성 등 약속을 받아내셨습니다.
이 때 박정희 준장의 소장 진급 시 탈락위기를 구제하시기 도 하셨습니다.
▸1959년 2월 23일, 연합참모본부 총장으로 임명되셔서 1년 3개월 간 최후의 군보직을 마치시고
▸1960년 5월 31일, 국가의 거목이자 구국의 영웅으로서 군 후배들과
국민들에게 영원히 각인되며 만 40세로 전역하셨습니다.
▸1960년 7월부터 1969년 12월까지 중화민국, 프랑스, 카나다 주재 대 사를 하시고
▸1969년 12월 교통부 장관으로 약 1년 반 재임하신 후
1971년 6월 공직에서 은퇴하시였습니다.
▸이후 충주비료,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80년 3월까지 역임하신 후
국가와 군 후배들을 위해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초대회장, 6.25전쟁50주년기념사업회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
육군협회 초대회장 등 타계 하실 때까지 봉사활동을 펼치셨습 니다.
▸특히 2013년 8월. 미군들은 대한민국장군 중 유일하게 장군님을 존경 하는 의미에서 서거하실 때 까지 8군 명예사령관으로
추대하였으며, 역대 주한민국미군 사령관 및 8군사령관
이.취임 할 때 찾아뵙는 전통이 수립되기도 하였 습니다.
▸장군님께서 남기신 저서는
군과 나, 실록지리산. 나를 쏴라. 징비록.
길고긴 여름날 1950년 6월 25일. 노병은 죽지 않는다.
From Pusan to Panmunjom을 영문으로
미국 육군협회 추천도서로 발간되기도 하였습니다.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한, 미, 일본)
일본에서 한국전쟁, 대게릴라전 등 5권을 발간하신바 있습니다.
▸수여 받은 주요 훈장
태극무공훈장 2회, 을지무공훈장 2회, 충무무공훈장, 금탑산업훈장
대한민국1등수교훈장, 미 은성무공훈장 등 8개, 기타 7개국외국훈장
을 받으셨습니다.
▸가족사항
명예원수님께서는 가족으로 부인 노인숙 여사와 큰 딸 남희,
큰 아들 남혁, 작은아들 남흥, 작은 딸 남순 2남2녀를 두셨습니다.
▸끝으로 한마디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조선에 성웅 이순신 장군이 계셨고
대한민국에는 구국의 영웅 백선엽 명예원수님이 계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