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明博(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大選과 總選에서 크게 승리하고도 좌익의 도전을 허용하여 內亂사태를 부른 과정을 정리하면 이렇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노무현 정부에 대한 在庫(재고)조사를 하지 않고 점령군처럼 행동하면서 인기영합성 정책들을 쏟아내었다. 盧武鉉 세력의 반역혐의와 부패를 수사하고, 좌경적 선동방송 KBS와 MBC를 해체수준으로 개혁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다. 취임사 등에서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은 ‘이념을 버린 실용 노선’을 강조했다. 친북좌익들과 대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여 만만하게 보이고, 행동파 보수세력을 멀리하겠다는 생각을 드러냄으로써 지지층을 화 나게 만들었다. 교수중심의 아마추어들을 비서진과 내각에 많이 등용했다. 좌익과 싸울 줄 모르는 富者(부자)들을 重用(중용)하고, 盧武鉉 정권 요직자들을 安保(안보)부서 사령탑에 배치하여 정권교체의 의미를 희석시켰다. 左右로부터 다 비난 받는 인사를 한 셈이다. 총선 직전엔 하향식 밀실 공천으로 親朴槿惠 세력의 반발과 이탈을 불렀다. 총선에서 보수세력이 大勝(대승)하고 친북세력이 大敗(대패)했으나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은 ‘親衛세력의 패배’로서만 인식했다. 그는 總選(총선)의 역사적 의미를 무시하고, 親北(친북)청산을 요구하는 民心(민심)을 외면했다. 대통령은,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총선에서 당선된 親朴(친박) 의원 26명의 복당을 거부하고 李會昌(이회창)의 자유선진당과 적대적인 관계를 설정했다. 보수대연합이 아닌 보수분열 구도를 형성했다. 李 대통령이 행동파 보수층도 외면하고, 親朴(친박)세력도 배척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배신감을 느낀 보수층이 이탈하기 시작하여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졌다. 지지층의 이탈이 본격화된 바로 그때 狂牛난동사태가 시작되었다. 지난 4월말 MBC는 미국산 쇠고기가 인간광우병 위험물질인 것처럼 과장보도했다. 이것이 인터넷을 통하여 확산되고, 친북좌익들이 이를 국민선동에 이용했다. 정부가 신속하고도 엄정한 법적 제재조치와 홍보전을 벌이지 못한 사이 거짓말이 반박되지 않고 유포되기 시작했다. 李 대통령의 對국민사과와 정부의 거듭된 정책변경이 이어지고 선동방송에 대한 명쾌한 반박이 없으니 보통사람들까지 미국산 쇠고기는 위험하다고 믿게 되었다. 李明博(이명박) 정부는 5월 들어 不法인 야간집회를 ‘촛불문화제’라고 치부하여 허용함으로써 광우병 선동세력의 기세를 높여주었다. 좌익이 주동한 촛불집회는 곧 거리 점거 폭력 시위로 변질했다. 이들이 청와대로 몰려들고, 보수언론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검찰과 경찰은 폭력시위 진압을 사실상 포기했다. 보수언론도 겁을 먹고 선동세력에 영합하기 시작했다. 언론이 경찰의 물대포 사용을 강경진압이라고 비판하는 식의 기사를 쏟아내니 경찰도 사기를 잃고 시위대에 밀리기 시작했다. 李會昌의 자유선진당까지 촛불 세력에 가세하고, 朴槿惠 의원의 팬 클럽인 박사모는 촛불시위에 가담했다. 한나라당은 경찰의 물렁한 진압까지도 제동을 걸고 선동세력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수정치 地形이 폐허화되었다. 청와대 대변인과 관계 장관들은, 재산공개 이후 재산형성과정의 문제점에 대해서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았었는데, 이들은 집단적으로 약점 잡힌 심리가 되어 폭력시위를 응원하는 언론과 정면 대결하려 하지 않았다. 시위는 極左(극좌)세력이 주도했으나, 李明博 대통령에게 불만을 품은 여러 세력이 가담했다. 특히 인터넷 怪談에 속아넘어간 어린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난 10년간 좌파정권이 키운 조직들(民勞總, 全敎組, 韓總聯, 방송, 인터넷 등)이 총궐기했다. 대한민국 심장부인 광화문 지역이 5월부터 밤마다 폭도들에게 점거되어 일종의 좌익 해방구로 변했다. 공권력이 무력화되니 李明博 대통령에 대한 보수층의 불신이 확산되어 지지율은 10%대로 急落(급락)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李 대통령은 직접 나서서 국민들을 설득하지 않았다. 지난 6월10일부터 불안해진 애국행동세력이 거리로 나와 좌익과 대결하고 선동방송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방관적인 국민들도 폭도화한 시위대를 반대하기 시작하면서 민심이 돌기 시작했다. 정부도 미국과 추가협상을 벌여 30개월 이상 쇠고기는 수입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지난 6월19일 李明博 대통령은 또 對국민 사과 회견을 했다. 며칠 뒤 그는 과격시위를 엄단하겠다고 했으나 야간시위는 폭동화하기 시작했다. 순수한 시민들은 시위대에서 이탈하고 골수 좌익세력이 조직적으로 경찰을 폭행, 납치하고 호텔로 亂入했다. 민노총, 전교조, 한총련 등 좌파조직에 민주당과 민노당도 합세하고 사회불만 세력이 가세했다. 촛불폭력시위는 6월 하순을 계기로 "反정부좌익폭동"으로 변했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음에도 폭동세력은 李明博 정권 타도를 획책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좌파정권이 物心 양면의 집중적 지원으로 키워놓은 좌경세력이 막강한 자금력과 동원력과 선동력을 바탕으로 민주정부에 도전하고 있다. 李明博 정부는 초장에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을 폭동 수준으로 키웠다. 경찰의 진압이 불가능해지면 위수령이나 계엄령을 펴야 한다. 동원된 군대가 폭도들에게 발포할 수 있어야 진압이 된다. 1980년 광주사태를 강경진압했던 군의 지휘관들이 내란죄로 처벌을 받은 것을 기억하는 장교들이 무장폭도들에게 과연 발포 명령을 내릴 것일지는 알 수 없다. 군대가 나와도 좌익폭동이 수습되지 않고, 북한정권이 개입한다면 內亂 내지 內戰사태로 갈지도 모른다. 진실과 法治를 포기한 대통령은 자유마저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 거짓을 퍼뜨리고, 폭동을 선동하는 방송이 있는 한 한국은 南美式의 만성적 갈등구조로 빠져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