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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천혼부(薦魂賦)

-‘12,12 사건’ 28주년을 맞아 忠義將兵에 대해 생각해본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군웅(群雄)같은 후보들간에 상호 지적하여 맹비난하고, 각 후보를 지지하는 선남선녀들이 쟁투(爭鬪)하듯 다투는 역사적인 순간에 무상한 세월은 ‘12,12 사건’ 28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군교전의 총성이 울리는 진천동지(震天動地)할 ‘12,12사건’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 많다. 그러나 그 날 그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세연(世緣)이 다해 하나 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그 날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책자나 드라마에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흥미위주의 책자나 드라마는 ´12,12사건´을 왜곡시키고 있다. 나는 나름대로 ‘12,12 사건’ 의 격변 와중에서 비명에 간 충의장병에 대하여 천혼축원(薦魂祝願)을 하며 그날을 생각해본다.

12,12사건에 대해 찬반(贊反)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있다. 찬성을 하는 사람들은 국부(國父)요 국가원수인 박대통령이 시해당한 사건에 대해 격분하고, 진상규명을 주장하던 사람들이다. 반대자는 대통령병(病)이 골수에 사무친 영호남(嶺湖南)의 정치인들이 앞장서 ‘12,12사건’을 매도하고 평가절하에 나섰다. 그들의 감정서린 주창(主唱)은 마치 한마리의 개가 짖어대면 동네 개가 일제히 짖어대듯이 많은 사람들이 매도에 동참했다. 작금의 세상 정서는 대다수 ‘12,12사건,에 대해 무조건 혐오하고 매도하는 풍조가 만연되고 말았다. 영호남의 정치인들은 왜 ’12,12사건‘을 증오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민주화를 운위(云謂)하지만, 자신들이 대통령이 되는 길에 차질이 왔기 때문이다. ´12,12사건’으로 대통령의 꿈이 실현되기 난망해진 당시 영호남 정치인들은 이를 갈며 미친듯이 ‘신군부’라는 조어를 만들어 맹비난하고, 각기 정치기반의 지역에서 부단히 선전선동을 일삼았다.

´12,12사건´의 원인은 ´10,26, 박대통령의 시해´ 주범과 관련자들을 조사하기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김재규 정보부장이 박대통령을 시해할 때, 지척지간의 옆동(棟) 방에서는 정승화 육참총장이 김재규의 부하 김정섭차장에게 대접을 받으면서 김재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승화의 귀에 수십발의 총성이 울린 직후 와이셔츠에 피투성이가 되어 피비린내를 풍기며, 복부 허리 벨트에 권총을 찔러넣고 신발도 신지 않은 모습으로 김재규가 나타나 허겁지겁 “큰일났다”고 말하며 오른 엄지를 아래로 찍으며 박대통령이 시해되었다고 말했다. 정승화 총장은 대통령이 시해된 국가적 변란사건이 발생한 것을 알았다면 적 또는 불순분자에 의한 경우에 대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피격경위(被擊經緯)를 확인하는 것인 기본적인 책무인데, 육본에 도착하기까지 김재규에게 “박대통령의 시해가 내부의 짓이냐, 외부의 짓이냐”고 단 한번 질문했을 뿐이다. 정승화가 시해현장의 옆동에서 주육(酒肉)을 대접받은 것이 우연이면 운수가 나쁘다고 동정할 수 있지만,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필연이라면 군심(軍心), 민심(民心)이 한목소리로 “조사대상”이라고 지탄은 받을지언정 존경은 받을 수는 없다.

김재규는 누구인가? 박대통령의 육사동기로서 박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친구요, 부하였다. 가장 신임하는 부하의 총탄에 의해 박대통령은 죽어갔다. 로마의 황제 시저가 신임하는 양자에게 칼을 맞고 죽어간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정승화는 김재규의 3군단장 후임의 인연이었고, 김재규의 두둑한 봉투촌지(寸志)로 다져진 맹우(盟友)였다. 김재규는 박대통령을 시해하기 전에 정승화를 부른 뜻은 박대통령 시해후 정승화의 군대가 자신을 옹위(擁衛)해줄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장중(掌中)에 놓고 박대통령 유고 이후 권력시대를 자신이 열어볼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재규의 꿈은 백일몽이 되고 말았고, 오히려 "12,12사건" 직전의 항설(巷說)에는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지칭하는 정씨득국(鄭氏得國)의 소리가 충천했다.

박대통령을 국부(國父)로 모시는 충의장병들은 국가원수를 시해한 자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오열을 터뜨리던 충의장병들은 마침내 시해현장 옆동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정승화에 대해 조사를 하라는 열화같은 여론, 군심(軍心)과 민심(民心)을 봉대하여 정승화를 연행, 조사에 나섰다. 그 때 군(軍)은 양분되었다.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따르는 군과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진상규명을 하려는 군으로 양분된 것이다. 그러나 ‘12,12사건’의 승자는 최규하 대통령을 모시고 있는 장병들이었다. 국군통수권자가 어느 진영에 있느냐가 정통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과 김진기 헌병감은 헌병을 동원하여 대통령공관을 습격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수경사로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대통령납치는 공관의 경비의 강화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 세상은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으려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박대통령의 통탄스러운 서거로 대다수 국민과 충의장병들이 주먹으로 땅을 치며 오열할 때, 오매불망 대통령병에 든 영호남, 충청출신의 정치인들은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는 듯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맹렬히 대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본 서울시내는 혼란의 극치에 접어들고 있었다. 각 대학의 학생들은 봇물이 터진듯이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의 깃발을 들고 떼지어 시내로 쏟아져 나와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도 뒤질세라 깃발을 들고 쏟아져 나왔다. 서울 시가의 교통질서는 무법천지로 변해갔다. 영호남의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기반에 궐기의 불을 붙이고, 선전선동의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권은 자신에게 온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영호남과 충청출신의 정치인들이 다투어 갈망하는 11대 대통령직은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뜻밖에 대통령이 된 사람은 백제 온조(溫祖) 때의 개국공신인 시조 환성군(歡城君)의 52세손이며, 이태조를 도와 홍건적을 물리친 완산군(完山君; 諡號 忠貞) 집(潗)의 23세 손이며, 또, 임난 때, 영산현감으로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장군과 함께 혁혁한 무공을 세운 전제(全霽)장군13대 손인 전두환 장군이다. 전두환장군은 충의무장(忠義武將)가문에서 무장으로 입신하여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만사는 정해졌는데(萬事皆有定)중생이 헛되이 바쁘도다(浮生空自忙)는 공자의 말을 의해 해석한다면 당시 국운은 11대는 전두환 대통령으로 정해졌을 것이다. 상상해보시라. 충의에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군인들이 충의를 바칠 박대통령이 배신자들에게 무참히 죽고, 배신자들이 권력을 잡을 것을 뻔히 알면서 손발 놓고 보신책(保身策)으로 눈치만 보아서야 되겠는가? 충의장병들은 목숨을 걸고 박대통령의 유고를 일으킨 역도요, 배신자들을 법정에 세웠다. 충의를 존중하는 세계에서는 역사에 남을 귀감이요, 사나이들 세계에서는 의리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전두환 대통령은 박대통령에게 생전이나 사후나 목숨을 걸고 충의를 바쳤다.그러나 한국사회는 전두환대통령에 대한 공과(功過)를 평등히 해야 하는데, 공(功)을 생각하는데 인색했다. 전두환대통령이 88올림픽을 유치하고, 물가안정을 시키고, 사회정화를 통해 밝은 세상을 구현했으며, 사상 최대의 외환보유를 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룬 공덕이 분명한데, 과(過)만 논죄했다. 영호남의 정치인들의 선전선동이 먹혀든 결과이다. 무엇보다 믿었던 친구요, 권력의 후계자인 노태우 대통령은 과(過)의 여론 논죄만 받아들여 전두환 대통령을 백담사로 현대판 귀양길을 떠나게 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난 후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 44명을 체포 구금하여 조상께 제사를 지낼 사람조차 없다시피 만드는 배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친구의 배신으로 절망했지만, "내탓이다"며, 자책하고, 햇수로 3년째 이순자 여사와 함께 새벽 4시면 법당에 나가 ‘12,12 사건’때와 재임기간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에 대해 사과하고, 영혼천도의 기도를 했다 한다. 그러나 영호남의 정치인들은 차례로 대통령이 되면서 정치를 잊고 오직 불심(佛心)에 사는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보복의 칼을 뽑아들어 무차별 휘둘렀다. 영남의 정치인은 위헌으로 특별법을 만들어 체포하여 투옥시켰고, 호남의 정치인은 전두환대통령을 만고의 죄인으로 각색, 각본하여 홍보하는데 광분하였다. 호남정치인의 보복의 각본, 각색의 홍보는 전두환 대통령의 태생지인 합천의 황강(黃江)까지 뒤흔들었다.

누가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충성하였는가? 전두환대통령이 “조국을 위해 몸바치자”는 각오를 다진것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한국전의 전선이 대구 근교에까지 밀리어 내려와 국군은 낙동간 전선, 다부동(多富洞), 유학산(遊鶴山) 등지에서 대구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혈전을 하던 무렵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대구공고를 휴학하고, 1951년 12월 31일, 화차에 몸을 싣고 진해 육군사관학교로 향했다. 반면에 비슷한 시기에 호남의 정치인은 무엇을 했을까? 그는 대한민국 수호의 전선에 서지 않고, 공산주의 남로당의 목포시 조직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영남의 정치인은 한국전의 정규군 군적(軍籍)에 없는 자이다. 전두환 대통령을 탄압한 영호남의 정치인은 한국전 때 대한민국 수호의 전선에는 무관한 자들이다.

목포시 남로당 조직부장으로 활약했던 호남의 정치인은 대통령이 되자 본모습을 약여하게 드러내었다. 친북좌파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재임기간 부정부패의 냄새를 국민의 코를 가득 찌르고, 주술(呪術)같은 통일사기극으로 대한민국을 실종시키기 직전에 이르렀다. 영남의 정치인은 중학생때부터 대통령병에 걸린 자로써 재임기간 IMF를 일으키고, 저 일본인이 명산에 혈맥 자르기로 쇠말뚝을 박아대듯이, 영남의 군맥(軍脈)자르기에 광분했던 자이다. 영호남의 정치인들은 안보와 경제성장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대통령이 빨리 되지 못한 한풀이요, 자식들의 부정부패를 눈감아주는 부정(父情)으로 재임기간을 보낸 우치(愚癡)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제 국민의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 한다. 그날의 호남의 정치인이 호남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듯이, 영남의 정치인이 부산에서 영웅으로 대접받듯이, 전두환대통령도 모교 대구공고가 있는 대구에서, 황강이 있는 합천에서 영웅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억겁의 시간에서 본다면 영호남의 정치인, 전두환 대통령, 모두 과객(過客)이다. 이제 그들은 수명우천(壽命于天)이지만, 해가 석양에 걸려 있듯이 내세를 향해 준비를 해야 할 싯점에 와 있다. 젊은 날 권력의 용좌(龍座)를 놓고 진검승부를 하던 때의 은원(恩怨)의 감정은 이제 장강의 물거품처럼 잊어야 할 것이다.
노승이 임종를 앞두고, 임종게(臨終偈)를 손보듯이, 그들은 후생을 위해 경세(警世)요, 교훈적인 회고록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끝으로 ‘12,12사건’의 역사의 현장에서 대결하다 비명에 간 영혼들을 위해 다시한번 천혼한다. “오, 충의장병 영혼들이시여, 요령을 흔들며 그대들을 부릅니다(以此振鈴伸召請), 내 염불소리가 아득한 명도의 귀신의 세계에까지 들리기를 바랍니다(冥途鬼界普聞知)… 천수일편으로 고혼께 위로를 드립니다(千手一片爲孤魂)” 살아있는 사람은 생활이 욕(辱)되고 고달프더라도 살아있는 자체에 행복한 것이다. 죽은 자만 불쌍한 것이다. 눈비속에 해골이 되어 흐느끼는 충의장병들이 불쌍한 것이다. 나는 천혼염불을 하면서, 영호남의 정치인들과 전두환 대통령이 해원상생(解寃相生)하여 대한민국 수호에 하나가 되기를 기도한다.◇

[이법철 스님 ] http://jabg.net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