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주간 행사참여 미국방문기 (2) 한 승 조 (대불총 상임고문, 고려대 명예교수) ●제4일/4월 29일(수) 필라델피아 시가지로의 나들이 오늘은 그동안 유숙하고 있었던 Crown Plaza Tysons Corner에서 나와 필라델피아로 이동하였다. 날씨는 우중충 하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어두컴컴하고 비에 완전히 젖어있는 고속도로를 타고 거의 3시간 정도 달리다가 들어선 곳이 필라델피아였다. 필라델피아의 시가는 워싱턴 D.C.처럼 여유로운 공원도시가 아니었다. 크고 높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상공업의 중심도시처럼 보였다. 고속도로에서 나와 먼저 들어선 곳이 유명한 펜실바니아대학가였다. 대학과 시가가 섞여 있어서 어디서 어디까지가 캠퍼스이고 어디부터가 도시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게 된 것은 대학이 팽창해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대학내의 한국음식점으로 갔다. 그런데 눈에 보인 것은 한국인 식당주인과 종업원이었다. 식당 안의 손님들은 많지가 않았지만 거의 모두가 중년의 백인들이었다. 그들이 먹는 것은 비빔밥・육개장, 된장・김치찌개 등이었으니 한식(韓食)이 미국사람들에게도 어지간히 건강식으로 알려진 모양이다. 점심을 먹은 다음 우리가 간 곳은 필라델피아의 시청건물과 그 주변의 거리였다. 시청건물이 고풍스러운 면은 있으나 크게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 건물이 세계의 시청(市廳)건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평판과 명성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시청주변의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시청부근 도로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시가구경보다도 사람구경을 하게 되었는데 워싱턴에서는 이렇게 많은 거리의 통행인들을 본 일이 없어서 새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남녀노소 여러 계층의 통행인을 보면서 공통된 것은 사람들이 매우 뚱뚱하다는 점이었다. 남자건 여자이건 날씬한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미국사람들은 대부분이 영양과다인 것 같다. 그들은 좀 덜 먹고 식량을 가난한 나라에 보내주어야 하겠다. 하기는 지구인구가 많이 불어나는 것도 문제이니만큼 식량생산도 너무 많이 생산할 것이 아니다. 요즘 비만은 요구불만이 심한 사람들일수록 달래기 위하여 필요이상 많이 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만정도는 그 당사자의 욕구불만에 비례하며, 그들의 상당부분은 정신치료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말도 들린다. 미국에서는 못사는 사람들일수록 욕구불만이 많고 그 때문에 비만인구가 늘어났으니 미국상회가 적지 않게 병들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이것은 고도의 물질문명 그늘에서 정신문화가 그 만큼 위축되어 있다는 말이 되고 따라서 정신질환도 늘어나는 것으로 보아진다. 오바마가 미국대통령으로 선출된 것도 이러난 정신문화와 무관한 것이 아닐 것이다. 오바마는 미국을 새로 만들겠다고 공약하면서 Re-making of America라는 표어를 내세워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렇다면 먼저 미국사회와 미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기독교국가인 미국에서는 기독교도와 교회들이 이 때문에 무진장 애를 쓰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들리는 말로는 미국에 불교적인 명상(瞑想, meditation)을 하는 인구가 일천만이 넘었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서 번지는 불교는 한국의 불교와 다르며 대체로 인도나 티베트 내지 미얌마 같은 남방불교이다. 그들이 비파사나의 전통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대승불교나 간화선(看和禪)과는 차별화 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 우리로서도 좀 더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만 가능하다면 이런 문제에서도 한국이 미국이나 서양사람들에게 어떻게 도와줄 수가 있는지 깊이 연구되어야 할 것 같다. 당신 코가 석자이니 우선적으로 당신 나라일이나 잘 챙기세요, 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하기는 중도 자기 머리를 깎지 못하는 법이니 한국과 미국이 서로 상대방을 도우려고 힘써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야 할 새 시대에 와 있다는 것은 우리로서 신나는 일이요, 보람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서로는 새롭게 만들도록 도와야 한다. 하긴 이 때문에 우리가 미국에 온 것이고 민간외교사절로 자처하면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리도 보고 사람들도 보면서 우리는 미국의 초기 역사의 산실이라고 할 독립관 (Independence Hall)을 찾아 갔다. 지금 보면 보잘 것 없는 작은 삼층집인데 여기서 미국 각지역 대표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독립선언서를 쓰고 채택하고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또 미국헌법이 기초된 것도 이곳이었다고 하니 미국의 역사는 이 작은 집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 같으면 이런 역사의 산실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을 터인데 특별히 지키는 사람이나 수위도 없이 외래 관람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다. 자기 집이 헐리고 보상금이 적다고 남대문과 같은 국보 1호의 유물에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 지르는 인간을 예상 못하는 것이 미국인 것을 보면 미국의 국민수준이 그 만큼 높다고 보아야 하나?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자유의 종(鐘)’이 안치된 곳을 가 보았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미국이 독립국임을 선포한 감격의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한 종은 몇 번 치지 않았음에도 깨져 버렸다. 요즘 말로 말한다면 불량품인 셈이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당시에 미국사회에 크게 울려 퍼진 실물이라고 받들어서 지금도 그 깨어진 종을 소중하게 받들어 모셔놓고 있다. 한국인들 같으면 벌써 다른 종으로 교체한 다음에 일찌감치 폐기처분 해버리지 않았을까? 우리는 거기서 다시 버스를 2-3시간동안 타고 뉴욕으로 왔으며 허드슨강을 건너 뉴저지에 있는 Crown Plaza Englewood 호텔에서 여장(旅裝)을 풀었다. ●제5일/4월 30일(목) 호텔서 아침식사후 나와서 제일 먼저 간 곳이 유엔빌딩안의 한국 UN대사인 박인국 대사의 집무실이었다. 한국대사관에서 한번 시련을 겪었던 터라 어떤 대접을 받을지 궁금했는데 박인국 UN대사는 베테랑급 외교관이어서 그런지 우리에 대한 대접이 매우 순조로웠다. 넓은 원탁이 있는 방에 안내되어서 박인국대사는 거리낌 없고 상냥한 인사와 아울러 UN외교의 현황과 과제를 소상히 브리핑 하듯이 설명해주었다. 박대사의 브리핑은 사실상 강의였다고 말할 수가 있을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였으므로 우리 일행은 그의 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했다. 박대사는 UN이 무엇을 하는 기구이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한국이 1992년에 UN에 가입된 후 현재까지 어떤 위치에 있어 왔는지 잘 설명해 주었다. 한국은 현재 UN회원국 중 10번째로 많은 출연금을 내고 있는 중요한 회원국이 되어 있다. UN에서 하는 많은 일들 중에서 현재 중요시 되는 것 중의 하나가 평화유지활동 곧 PKO(peace keeping operation)이다. 이것은 UN의 회원국이 세계의 평화유지기능을 직접 담당하는 과업이다. 현재는 각 나라에서 12만명이 여기에 참가하도록 되어 있는데 실제로 9만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다. 한국은 UN에 내는 많은 액수의 출연금에 비해 PKO활동에는 400명만 참가하고 있어서 한국의 국가적 위상에는 걸맞지 않게 매우 인색한 참여를 해왔다. 2년전 텔레반의 한국인 납치사건으로 인하여 아프간에 활동하던 200명 남짓의 의료진마저 철수해버린 것은 국제사회에서 욕을 먹는 행위였다. 이렇게 국제적인 관례를 어기게 되면 한국은 국제적 신인도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앞으로는 한국도 적어도 1000명이상 보내야만 한국의 국제적인 위치도 발언권도 유지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자면 최소한으로 2개 대대 정도는 나가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속의 한국의 위상은 높아질 수가 없다. 현재 아프칸에서도 10여개국이 평화유지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이며 한국경제의 70%이상이 대외수출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국제사회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해야만 한다. 세계속에서는 한국의 역할 여하에 따라서 한국의 국가적인 이미지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 현재 한국의 대외부채는 1700억달러에 달하는데 그 중 10년 이하의 단기 부채가 1000억달러 정도이다. 만일 유럽도 부채상환을 요구하면 한국은 다시 외환이 제로상태가 되고 만다. 과거에 한국이 언제 왜 망했나. 과거 400여년동안 유럽각국이 서로 경쟁하는 동안에 한국의 지배층은 무엇을 하면서 성장 발전하지 못하고 반대로 멸망속으로 들어갔는지? 이에 대한 반성이 없으며 또 시정노력도 안 하는 것이 한국사람들의 병폐이다. UN결의 1918호. 제재(制裁)가 따르는 국제기구의 결의에 신속한 대응 조치가 요구되는 상황인데도 아무련 대처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권이 국제사회의 변화에 잘 적응을 할 필요가 있다. 대체로 이러한 강연을 40분동안 편안하게 또 재미있게 들으면서 우리 일행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던 것 같다. 박인국대사도 청중들의 좋은 반응에 자신도 매우 흐뭇해하는 것 같았다. 토론시간에서 류기남 회장은 한국에서의 유엔사령부해체와 전시작전권회수의 문제를 들면서 오늘과 같은 북한의 핵위협하에서 이러한 한미간의 환수 합의가 중단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했다. 나도 오늘의 국제정세하에서 한국이 안전보장이나 경제난 극복 그리고 국제적인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공동체운동을 선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꺼냈다가는 시간이 많이 지연될 것 같아서 메모해 놓은 문서요약을 한번 읽어 보시라고 말하고 자리에 놓고 왔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뉴욕 현지의 라디오 TV에 출연한다고 방송국에 갔다. 무엇인가 여의치 못한 일이 있었는지 시간만 끌고 그 프로그램은 계획을 바꾸어서 내일로 연기된 모양이었다. 우리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여행가이드를 따라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으로 갔다. 이 빌딩도 오래 전에 한두 번 와 본 적이 있었기에 대단한 흥미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따로 떨어져서 혼자 할 일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10년 전에 올라가 본 빌딩을 다시 따라 올라갔다. 역시 뉴욕 일대의 경관이 새롭고 감회도 새로웠다. 맨하탄에는 왜 그렇게 괴물스러울 정도로 높고 큰 고층빌딩이 많이 솟아오르는가? 여기서 우리는 미국자본주의의 기백과 정력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미국의 국력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올라선 102층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전망대에서는 멀리 바다가 보이고 자유의 여신상도 어렴풋하게 보였다. 또 이 맨하탄이라는 긴 섬을 흐르는 허드슨강과 미국대륙을 연결하는 여러 개의 다리들을 볼 수가 있었다. 이 뉴욕은 처음 네덜란드인들이 개발하여 뉴암스텔담이라는 이름으로 부쳐졌다. 1664년에는 영국인들의 차지가 되었고 당시 영국의 해군사령관 요크공의 이름을 따서 뉴요크라는 이름이 부쳐졌다고 한다. 이 뉴요크가 1785년부터 1790년에는 미합중국의 수도구실을 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에서 구경하고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그 빌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서 즉석에서 현상해 주고는 20달러씩 받는 것이었다. 이것이 미국인들의 상혼(商魂)인데 나는 사진을 찍지 않았지만 찍은 사람들의 사진을 보니 손해될 것이 없는 좋은 기념사진이었다. 20불이라는 돈이 비싸기는 하지만 그 값이 아깝지 않을 기념물이었다. 내려와 버스에 올라 앉아 일행을 기다리다가 모자가게에 간다는 여행가이드의 말을 듣고 따라 나섰다. 그리고 남들을 따라 즉흥적으로 중절모를 사서 머리에 쓰고 나왔다. 가격이 95달러라 싼 편은 아니지만 좋은 품질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모자를 산 이유는 내가 쓰고 다니던 작은 모자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모두 한마디씩 했다. 하기는 나도 연로(年老)한 사람으로서 모자를 하나 더 가져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날 저녁에 식사를 하러 들어간 음식점에서 내가 어제 저녁에 놓고 간 모자를 보관했다가 우리가 들어오자 내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의 기쁨은 두 배로 컸다. ●제6일/5월 1일(금) 오늘 스케줄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예방하고 간담회를 한다는 것과 그 후는 자유의 여신상을 비롯한 뉴욕 시내관광으로 잡혀 있었다. 그런데 버스로 호텔을 나서기 전에 반기문 사무총장에 대한 예방과 간담회는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이유는 UN사무총장이 UN빌딩 안에서 여느 단체와 만나거나 사진찍는 관례가 없다는 것이다. 또 UN사무총장의 자리는 그만한 시간을 낼 수 있을 만큼 한가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회장 혼자서 반기문총장을 만나고 올 것이니 나한테도 반총장에게 전달할 메시지나 문의사항을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회장이 사무총장을 만나러 간 후 우리는 유엔빌딩 지하에 있는 각 나라의 민속품을 파는 매장 등을 구경하며 쇼핑하고 기다려야 했다. 나는 가벼운 쇼핑을 했고 또 읽을 만한 책도 샀다. 그와 같은 책이 서점에서 나의 눈에 띄었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UN건물 밖으로 나와 버스에 앉아 있으니까 반기문총장을 만나고 온 김현욱회장이 와서 면담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선물을 하나씩 받았는데 반기문총장의 이름이 새겨진 손목시계였다. 이런 것도 사무총장의 만만치 않은 지출이었을 것이다. 나는 장차 UN기구에서 일하고 싶다는 손녀딸에게 줄 선물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점심은 어떻게 뉴요크에 거주하는 한국재향군인회의 간부들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재향군인회장이 된 박세직장군이 알려줘 김현욱회장이 연락을 취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두개의 방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뉴욕의 재향군인회 간부들은 몸은 비록 미국에서 살고 있으나 마음은 아직도 한국을 떠나지 못하고 있으며 모국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즉시 돌아와 싸울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점심식사를 한 다음 우리는 부둣가에 나가서 유람선을 탔다. 그 유람선은 빗속에서 맨하탄 남쪽의 바다를 유람하여 자유의 여신상을 포함하여 마천루 빌딩을 어제와는 반대로 바다 쪽에서 구경했다. ●마지막날, 제7일/5월 2일(토) 이제는 미국여행을 끝내고 귀국의 길로 올라서는 날이다. 아침8시10분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타기 위하여 우리는 새벽 다섯 시에 호텔을 나와야 했다. 역시 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케네디공항으로 가서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탔다. 대여섯 시간 날아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비행기를 바꿔 타고 태평양을 건너서 다음날인 5월 3일 우리 일행 모두는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