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평생 자신이 대통령 되는 것, 호남이 득세하는 것을 “민주화”라고 포장하였고, 서민을 위한다는 구실로 우민화를 획책하여 ‘좀비’민주주의를 추구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이 오래 몸담았던 곳이 국회였을 뿐, 국회일정과 의회주의 원칙에 충실하였던 것도 아니다. 그런 김대중이 사망하니까 “평생 의회주의를 신봉하였다”라고 추켜세우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국장을 치르는 모양이다. 의회주의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다수결이요, 의회는 그 다수결을 대의적으로 실천하는 장이다. 국민에 의하여 1차적(직접) 다수결에 의하여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대신하여 2차적(간접)으로 다수결을 실천하는 곳이 국회다. 즉, 국회는 국민을 대신하여 다수결을 실천하는 곳이므로, 의회주의란 대의민주정치라고 말한다. 김대중이 의회주의자라는 데, 과연 그가 살아있을 때 정말 의회주의를 신봉하였나? 걸핏하면 원내를 벗어나 끝없는 장외투쟁으로 의사일정을 거부하였다. 원내에 들어오면, 갖은 비신사적인 방법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였다. 그리고, 군중 앞에선 정부와 상대방에 대한 흑색선전으로 국회를 오염시켰다. 그가 어째서 ‘의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나? 민주주의의 기본인 다수결조차 인정 안하고, 민주절차의 기본인 표결조차 거부하였는데 말이다. 여기에다 그의 친북적 이적행위와 부정부패를 더하면, 그에게 국회는 반역과 탐욕의 보호막으로 이용된 데 지나지 않았다. 또한 서민주의를 빙자한 좀비화를 통하여 지역세력의 대부로 군림하여, 특정지역을 피해의식으로 무장시켜 이적행위와 부정부패의 보호막 삼았다. 한마디로 떼법에 의한 “행동하는 욕심”이었는데, 어째서 그가 의회주의를 신봉하였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죽은 자를 비난하면 귀신에게 화를 입을까봐 원수일지라도 죽은 자에게 관대한 우리의 샤머니즘 탓일까? 엊그제까지 사회갈등을 부추기고 혼란을 선동하던 자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호국영령’ 대접을 받나? 김대중 귀신이 무서운지 몰라도 죽은 자에 대한 아부치고는 도가 지나치다. 김대중이 ‘의회주의자’라면, 치와와는 맹수이고 파리는 새라고 봐야 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