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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사상, 패권주의 그리고 동북공정

中華思想, 패권주의 그리고 동북공정
한승조


中華(중화)란 말은 중국을 美化(미화)하는 대명사이다. ‘중국은 꽃다워’ ‘아름다운 중국’ 이런 말은 중국인들의 긍지를 높이는 말로 남녀노소 상하 누구를 막론하고 즐겨 사용하는 명칭이 되어 있다. 1912년 孫文을 비롯한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새 정부를 세우면서 국호를 中華民國(중화민국)이라고 공포하였다. 오늘의 대만도 그 國號(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국호에 관한한 아무런 異意(이의)도 불만도 제기하는 이가 없다. 1949년 공산주의자들도 국호를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으로 명명한지 60년이 지났다. 北京정부는 대만에 대해서 계속 대륙 본토 품안에 들어오라고 위협하며 달래며 설득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만이 세계의 중심이 아닌데

중국인들은 ‘가운데’ ‘中’이란 말을 너무 좋아한다. 그들은 중국이 아시아 대륙의 한 가운데 위치하며 또 그것이 세계의 중심임을 확신한다. 그들은 세계를 중심과 변방으로 구분한다. 중심은 君臨(군림)과 지휘의 위치이기 때문에 존귀한 자리이다. 반면에 변방은 중앙에 의하여 통제 지배받아야 하며 따라서 중앙에 순종하고 복종해야한다. 그래야만 세계의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언제나 이러한 중국중심의 세계관과 사고방법을 지니며 살아왔다. 이것이 바로 중화사상의 핵심이며 그들이 자랑스럽게 세계에 내놓는 중국의 문화와 권위의 사상이다.

중국인들은 황하강과 양자강의 중심지역 및 그 주변을 中原이라고 부른다. 중원을 누가 지배하느냐하는 覇權(패권)싸움이 바로 중국의 역사였다. 그 중원을 지키는데 늘 신경을 써야했던 것이 변경의 북방민족이었다. 중국은 群雄(군웅)이 할거했던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秦始皇(진시황)에 의하여 처음으로 통일되었다. 통일은 이루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여 다시 분열 대립하다가 마지막 항우와 유방의 결승전을 거쳐서 漢(한)나라 왕조가 들어섰다. 중국의 정체성의 기초는 이때 확립되었으며 中華思想(중화사상)도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된다.

당시에 정립된 중국의 국가관과 세계관은 넓고 비옥한 中原(중원)을 차지하여 중화민족이 세계문명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었다. 그 밖에는 광활한 변방들이었는데 동쪽에는 東夷(동이), 서쪽에는 西戎(서융), 남부에는 南蠻(남만), 북쪽에는 北狄(북적)의 족속들이 集居(집거)한다.

중국의 변경에 사는 무리들은 문명에서 벗어난 미개인들로 간주되어 혐오스러운 동물들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 중에도 東夷(동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대하는 편이었다. 夷도 동물 이름이기는 하나 大人란 말의 合字이기도 하며 또 활을 잘 쏜다는 弓人(궁인)의 합자라는 등 변방 오랑캐들 중에서는 가장 양호한 이름으로 대접해 준 셈이다.

어찌했던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주장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이라는 옛날의 사고방식이다. 지구가 둥글다면 중앙은 중국대륙만이 아니므로 옛날 사고방식으로 현실을 설명하려고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中原을 차지해 온 漢族(한족)의 수난과 시련

그런 중국이 17세기 중엽에 와서는 만주의 여진족, 거란족 등이 세웠던 청(淸)나라에 의하여 혹독한 지배를 받는다. 만주족이 1644년 수도를 北京(북경)으로 옮기고 중국대륙을 지배하다가 차츰 중국화되어가자 고유의 활기를 상실해 갔다. 그러다가 中原(중원)과 변방까지도 지배해 오던 淸(청)나라가 19세기에 와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 앞에 無力을 들어내고 서구열강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외세(外勢)에 계속 밀리다가 차츰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청나라 왕조는 1911년 孫文(손문)과 蔣介石의 국민당정부에 의해서 밀려나 버린 것이다.

그러나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도 중국의 민족주의 감정을 충족시켜 줄 역량(力量)을 갖지 못하였다.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중국공산당은 國府軍(국부군)을 제압하고 1949년 공산당이 지배하는 거대 공산국가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모택동은 l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변질하기 시작한 소련공산당의 지도부를 불신하여 이념논쟁을 벌리며 세계공산주의의 주도권을 잡고자 시도했다.

소련공산주의는 미국과 세계패권을 겨루다가 이기지 못하여 소련체제가 무너지자 동유럽의 공산체제도 함께 붕괴 몰락하였다. 중국공산주의도 그 발전이 여의롭지 못하여 문화혁명의 홍역을 치루며 광란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모택동이 죽은 후에는 다행히 鄧小平(등소평)이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그후 모택동의 혁명노선을 역전시켜서 개혁 개방의 방향으로 큰 전환을 이룩하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의 주변으로부터 중앙으로 回歸하려는 중국의 야망과 대전략

등소평은 중국이 공산화혁명으로 달려오던 국가적 전략을 멈추게 하면서 자본주의제도를 되살리며 외국의 자본을 도입하는 방법으로 중국의 경제부흥과 국력배양의 빠른 길로 유도하였다. 중국은 불가사의의 武術(무술)기교를 보여주듯 이런 방법으로 엄청나게 빠른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가속화를 이룩하는 기적을 이룩할 수가 있었다. 미국과는 세계 제일의 초강대국의 자리를 따라잡기 위하여 마구 달리는 한편 경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협력의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분야에서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를 따라잡으며 세계 최강의 자리, 곧 세계중앙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중국인들의 집념과 결심을 엿볼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의 공산화과정이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 특히 중국공산주의의 방향전환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 수가 있는 것 같다. 중국의 漢族이 공산주의혁명을 통하여 이룩하고자 한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이런 투쟁과 노력들이 모두 세계의 중앙이며 중심으로 회귀하려는 민족적인 숙원과 집념을 담은 것이며 한 거름 더 나아가서 세계의 覇權(패권)을 미국으로부터 탈환하려는 전력질주(全力疾走)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보면 중국의 공산주의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한족(漢族)이 세계의 중앙 자리를 되차지함으로써 세계의 패권국가(覇權國家)가 되어야겠다는 집념과 중국민족주의 숙원을 표현이며 그의 효과적인 수단을 찾아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정신적으로 안도할 수 있는 근거도 생겨남을 느낄 수 있다. 과거에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일컬어졌던 현대공산주의는 결코 올바른 사상도 아니며 현대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이 받들고 신봉하는 경제・사회사상도 아니다. ‘한때 유행했던 흘러간 옛 노래’와도 같은 옛 사상에 불과한 것인데 한국은 공산주의사상으로 인하여 6・25전쟁을 치렀다. 또 북한의 김일성・김정일정권으로 인하여 오래고 끈덕진 남북갈등의 값비싼 대가(代價)를 지불해 왔다.

한국의 이웃인 거대한 강대국인 중국이 공산주의사상을 신봉하고 기필코 달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한국은 너무나 다루기 힘든 안보상의 위험부담을 안게 된다. 그러나 중국의 목표가 덜 이념적이며 세속적인 요소가 많아짐이 우리로서는 다소 안심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은 세계의 공산화보다도 자국의 헤게모니 확립을 추구하는 나라인 듯이 보인다는 것, 중국공산주의도 공산주의의 목표달성보다는 중화사상이나 국위선양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우리들로서는 중국과 상호공존하면서 또 상호협력을 강화해 나갈 수가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중국이 체제의 개혁 개방을 표방하면서 중국공산주의의 팽창이나 세계정복이 아니라 아시아 전 지역에서의 국가적 위상과 영향력 강화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되었던 것이 미국을 비롯한 구미의 선진국 여러 나라나 일본과 한국이 중국의 개혁 개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하게 만들었던 요인이었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훑어져 살고 있는 화교(華僑)들이 중국의 개혁개방과 산업화를 적극 지지하고 중국의 빠른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하게 만든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가 외국인 거주자로써 자신들의 모국이 강대함을 원했을 것이고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을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를 싫어했을 것이다.

중국공산주의의 패권주의적 성향

중국공산주의의 개혁개방 정책이 앞으로 나라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게 될 것인가? 중국공산당이 당의 강령과 규약을 근본적으로 폐기한 것이 아닌 점을 보아서는 앞으로 세계의 다른 선진국가들과 같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체제를 만들어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혼합비율을 조정해 나갈 것으로 보아지는 이유는 중국이 현재와 같은 겅제성장의 여세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웃 나라나 다른 강대국. 선진국들과 협조하며 유무상통하면서 지구(地球)의 자연(自然) 및 환경재해에 공동대처해 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알게 된 것이다.

금년 미국발 세계적인 금융위기에도 중국은 공동대처하며 미국의 경제난을 대폭 지원하였다. 중국은 미국의 경제위기가 세계의 경제위기를 촉발할 것이라는 공동 인식아래 세계의 어느 나라 못지않게 미국의 경제위기 수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였다. 현재 중국은 미국에게 긴요한 금융지원을 비롯한 많은 협력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것은 중국이 미국을 돕는 것이 자국의 이익(利益)임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성숙하였다.

그러나 美中양국의 패권주의적 행태양상이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보기 어려우며 두 나라가 세계의 최강대국이면서 패권국가의 행태를 자제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이 상대적으로 더 성숙되어 있으므로 중국보다 패권국가의 태를 덜 내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도처에 적지 않은 반미주의 정서와 그 세력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중국 역시 언제나 평화 5원칙을 준수하므로 패권국가와 같이 포악하게 거동하지 않음을 강조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패권주의적인 정책이나 행동 때문에 주변국가의 반감과 의혹을 떨치지 못하는 행동을 보게 됨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소수민족을 억압수탈하는 중국의 패권주의와 東北工程

중국문명은 인류역사가 만들어낸 3대 고대문명 중의 하나이며 세계문명사상 우수한 문명을 창조한 인종의 후예로써 중국이 그에 대하여 높은 긍지를 느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세계의 최강대국이면서 우수한 인류문명을 만들어낸 인종의 위엄과 품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인권적인 잔학성과 만행을 시시때때로 보임은 매우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허점이나 추태는 중국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크게 손상하는 것인데 필자가 생각하는 근래의 오점은 (1) 법륜공(法輪功) 수련자들에 대한 탄압 (2)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주민들에 대한 반인권적인 억압과 박해 (3) 동북공정이다. 위의 문제에 관하여 중국측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며 필자가 아는 지식도 피상적이므로 위의 문제 중 동북공정에 문제에 국한하여 필자의 소견을 말하고자 한다.

중국정부가 오래 전부터 추진해온 東北工程(동북공정)은 만주를 무대로 국가를 세우고 강토를 크게 넓혔던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의도적인 역사조작 내지 왜곡기도를 말함이다. 한민족의 조상이 만주와 중국의 화북지역에서 터를 잡고 오랜 세월동안 삶을 영위하다가 중국에 저항하여 나라를 세운지 700년 이상 국가를 경영하였다가 기원 668년에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제압당하여 멸망하였다. 그후 698년 고구려의 유민들이 대조영을 앞세워서 발해를 건국하였고 그 왕조는 근 150동안 유지되었다가 거란에 의하여 멸망당하였다. 그럼에도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며 중국의 지방민이었을 뿐 한민족과는 무관함으로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한국사의 말살과 좋은 대조가 되는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이 추진했던 조선인의 창시개명 정책이었다. 조선인들의 일본인화를 통하여 일한합방을 내실화할 목적으로 조선인들의 3자성명을 일본인의 4자성명으로 개명하도록 강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여 완전 일본인화 하려는 정책이었는데 이것이 미래지향적인 조선인 소멸정책이었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은 과거 조선역사 지워없애기 위한 정책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측에서는 미래한국인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보다는 과거의 역사를 없애버리는 쪽이 훨씬 더 無害(무해)함으로 감내할 만하다고 변명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문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미래가 언제나 과거속에 함장(含藏)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고 싶으면 과거를 자세히 들여다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과거는 생명체의 뿌리와 줄기이다. 가지를 잘라서 다른 토양에 심었거나 그 열매를 새로 땅에 묻어 시었다면 그것은 다른 나무이지 종전의 그 나무가 아니다.

과거에 고구려가 만주에 있었는데 고구려의 후손들이 다시 그 지역에 살며 활동하게 된다면 그 지역은 한국인과 인연과 관련이 있는 지역 내지 고장이 된다. 역사는 쉽게 반복되는 것이다. 장차 한국인들이 만주나 중국땅에 에 들어가서 활동하면 그것이 중국의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중국측이 큰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였다면 그런 낡은 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중국의 국가경영에서 탈락시킴이 현명하다. 그렇게 꽉 막힌 머리로는 나라를 오도하기 꼭 알맞기 때문이다.

설사 자기네 조상들이 만주에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게 만주에 들어가서 산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이 중국, 특히 만주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나는 이러한 외국인들, 곧 한국인들의 거주와 활동이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같은 수의 중국인들 보다는 어쩌면 몇 십배 이상의 이익을 창출해 줄 가능성이 있다. 애초 종래의 모택동식 공산주의로부터 등소평의 개혁개방노선으로 전환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준 것이 한국의 경제적인 성공이었음을 모르는 것인가?

고구려는 중국의 漢四郡(한사군)과 그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夫餘(부여)의 지배에 반발 봉기하여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웠던 한민족의 조상이었다. 중국 漢族(한족)의 지배에 만족하거나 순종했더라면 고구려라는 나라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漢나라의 점령지구 안에 있었다는 이유로 중국역사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語不成(어불성)의 사실이다.

만주와 몽고는 본래 중국의 漢族(한족)들이 살았던 땅이 아니었다. 동이를 포함한 北方民族(북방민족)의 생활공간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대륙의 동북부도 적어도 한때는 고구려의 강토였던 것이다.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가 멸망함으로써 당나라의 영토로 일시 포함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어째서 처음부터 중국의 일부였으며 그 지방정부였으므로 그 역사가 또 중국사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중국은 고구려사를 왜 기필코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것일까?

중국측이 고구려가 처음부터 중국의 일부였으며 고구려사를 기필코 중국사 속에 편입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고구려연구재단은 중국의 동북공정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경제가 성장하면 정부의 국민통제력이 헐거워진다. 그때 가서 여론의 반항으로 나라의 정치안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미리 일찍부터 나라의 주장을 공론화해야 한다. (2) 중국의 동북지역(만주 등)을 장악하기 위한 역사적 명분을 축적해야 한다. (3) 조선족은 단결력이 강하며 대한민국을 동경하는 자들이 많으므로 한민족 의식을 제거해야 한다. (4) 소수민족의 분열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 동북공정이 추진되어야 한다.

또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에서 발간한 <동북공정과 고대사 왜곡의 대응방안>이라는 책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서안부근과 만주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유적과 유물의 주인이 漢族(한족)의 先祖(선조)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연구결과에 따라 이를 어거지로나마 중국의 역사로 끌어들이기 위한 역사조작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 중국측은 무엇이라고 주장하는지 그 말을 들어보자. (1) 고구려가 조선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게 한다. 고구려가 망한 후 고려는 그 영토의 3분의 1밖에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그 영토의 3분의 2를 차지한 것은 중국이었다. 인민의 4분의 3을 차지한 것도 중국이었다. (2) 역사의 귀속과 현실의 계승은 다른 것이다. 고구려영토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이 중국인데도 한국은 고구려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는 것 이상 문제이다. (3) 고구려의 민족과 문화는 한국보다도 중국에 더 가깝다.

(4) 고구려는 오랫동안 중국의 지방정부였다는 증거가 너무나 많다. ① 기자조선은 중국의 殷(은)과 商(상) 왕조의 후예들이 한반도에 건립한 지방정권으로 周(주)의 신하였다가 나중에는 秦(진)의 신하가 된 해외속국이다. 기자조선이 있었기에 위만조선이 있었고 고구려와 발해도 있었다. ② BC 3-5세기 燕(연)나라 영토는 한반도 유역까지 확대되었다 ③ 唐(당)이 고구려를 정벌한 것은 통일전쟁이었다. ④ 발해는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가 아니라 당에 귀속된 일개 지방정권이다. 그것은 말갈을 정식국호로 사용한 말갈족의 국가였다. ⑤ 1713년 조선이 국경경계비석(백두산정계비)을 세울 때 멋대로 장소를 변경하는 국제적 사기를 저질렀다. (위에 적은 책. p.25)

한민족의 단군신화까지 중국문화의 아류로 비하하려는 중국

조선일보 09년 9월16일자는 A20면에 “中. 이젠 단군신화까지 노리나-‘대표적 신화학자 중국 황제족의 곰 토템신화에서 유래’ 주장”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였으니 여기서 인용해 보겠다.

2007년 중국의 대표적 신화학자 예수셴(葉舒憲)이 “한민족의 기원을 담은 단군신화는 중국 황제족(黃帝族)의 곰 토템신화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담은 저서 <곰 토템―중화조선신화탐원(中華祖先神話探源)>을 펴냈다.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우긴 것도 모자라 단군신화까지 중국 황제신화의 영향을 받아 나왔다고 주장한 것이다.

동북공정을 주도한 중국 사회과학원의 비교문학연구실 주임을 맡고 있는 예수셴의 주장은 국내 학계에서도 주목을 끌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최근 <동북아 곰 신화와 중화주의신화론 비판>을 펴내, 중국학자들의 곰 토템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특히 중국신화 연구자인 김선자 박사는 예수셴의 ‘황제 곰 토템설’의 허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중국의 황제, 한국의 단군은 같은 ‘곰 토템’ 친족
예수셴은 먼저 내몽골 츠펑(赤峰)을 중심으로 한 홍산(紅山)문화 유적지에서 출토된 옥기(玉器)를 ‘옥웅룡’(玉熊龍)이라고 명명한 궈다순(郭大順)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예수셴은 이 ‘옥웅룡’을 곰과 용이 합쳐진, 중국인을 대표할 수 있는 도상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이 옥기는 황제족이 만든 것이라며, ‘황제 유웅(有熊)’씨라는 이름, 황제의 후손이라는 곤(坤)과 우(禹)가 곰으로 변신한 것 등을 들면서 황제에서 곤우로 곰 토템이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황제족의 곰 토템은 한국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와 같은 것으로, 중국의 황제와 한국의 단군은 같은 ‘곰 토템’을 지닌 친족이 되어 버린다.

황제족이 곰을 보호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없다
김선자 박사는 궈다순・예수셴이 홍산문화의 상징처럼 이름을 붙인 ‘옥웅룡’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구부러진 형태의 옥기를 용으로 볼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라는 것이다. 궈다순은 처음에 이 옥기를 ‘옥저룡’(玉猪龍)으로 불렀다가 ‘옥웅룡’으로 바꿨다. 돼지가 곰으로 바뀐 것이다.

김 박사는 “황제가 곰 토템을 갖고 있었다고 하려면, 황제를 대표로 하는 소위 ‘화하족’(華夏族)이 곰과 혈연관계가 있거나 또는 곰을 자신들의 보호신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고 반박한다. 김 박사는 황제의 계보에 속하는 곤과 우가 곰으로 변신했다는 것도 그들이 곰 토템을 지녔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황제=유웅(有熊)’ 기록은 후대에 나와
중국학자 쑨줘윈(孫作雲)은 1957년 황제족이 곰을 토템으로 삼았으며, 주나라도 곰 토템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예수셴도 이 설을 따르고 있다. 쑨줘윈은 <사기> 오제본기에 “그래서 황제는 유웅이 되었다”는 구절과 “황제가 웅(熊), 비, 비휴, 추, 호(虎)를 이끌고 전쟁을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황제의 토템은 곰이라고 주장했다. 김선자 박사는 <죽서기년통전>에는 황제가 호랑이, 표범, 곰, 큰곰을 이끌고 싸웠다고 나와 있는데, 그러면 황제의 토템은 호랑이와 표범이냐고 반박한다. 무엇보다 ‘황제 유웅씨’라는 기록은 훨씬 후대에 나오거나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받는 <제왕세기>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기>에 ‘황제 유웅씨’라는 기록이 나오지만, 그 유래는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곰 토템과의 연관성은 알 수 없다는 지적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소견과 평가

중국정부의 동북공정은 1990년대에 한중관계가 정상화되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20년여년 동안 정책적으로 연구하며 전국의 역사학자들을 모두 동원하여 그 동북공정의 내용과 논리를 치밀하게 개발하며 준비해왔던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그러기에 한국국민이 그들 주장에 배신감을 느끼며 흥분하여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언성을 높인다고 중국이 쉽게 물러설 수 있는 쟁점사항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그러니 이를 둘러싼 韓中양국간의 대립이나 갈등도 쉽게 해결될 문제일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인지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동북공정은 중국측의 역사인식과 그에 기초된 중국정부의 의지이며 정책인데 그에 대한 한국측의 소견과 평가를 여기에 피력해 보겠다. 우선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인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중국정부의 동북공정을 밑받침하는 역사인식을 (1) 理智的(이지적) 측면 (2) 情緖的(정서적) 측면 (3) 민족정신과 의지란 측면에서 고찰하며 반론을 제기해 보고자 한다.

理智的(이지적)인 측면
우선 이지적인 측면에서 분별하고 평가해 보겠다. 과거 한 때, 만주와 중국 화북의 상당 부분이 고구려가 지배했던 영토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당나라 군대에 의하여 패망하면서 그 지역은 당나라의 영토로 흡수되었다가 그후 여진 말갈 거란족들의 영토가 되었고 그것이 몽고의 지배를 받았다가 나중에는 淸(청)에 의하여 통합되었다. 청나라 왕조는 국민당정부에 의하여 멸망당했으며 국민당정부도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중국공산당정권에 의하여 축출 당하였다.

중국대륙이 공산당정권에 의하여 평정되니까 그동안 중국대륙과 만주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며 중원의 漢族과 죽느냐 사느냐 생사를 걸고 싸웠던 여러 북방민족들도 중국 본토박이 漢族의 지배하에 통합흡수되었으며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간주되며 모두가 중국역사의 소부분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기는 공산주의자들은 본래 계급만 가리지 인종, 민족, 부족을 가리지 않는다. 현재 중국이 중국공산당에 의하여 지배되므로 중국대륙에 살았던 모든 인종, 종족, 혈연 및 사회집단은 중화민족이요 모두 漢族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용납할 수 없는 억지 주장이 아닌가?

이런 논리로 나가다가는 과거 漢四郡이 한때 한강유역까지 다스렸다는 이유로 북한이 김정일의 사후에 중국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갔을 때 다시 모두 중국의 지배아래 편입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 같다. 과거에 고구려족도 너무나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다가 보니 그 안에 여러 부족이나 종족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족속들이 당나라에 의해 정복되었으니까 곧바로 중국민족 곧 漢族(한족)속에 포함시키려고 드는 것, 더구나 그들의 역사까지 말살하여 중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은 눈 뜬 사람 코 베가는 짓이나 다름이 없다.

여진, 거란, 말갈, 예맥 기타의 북방민족들은 비록 멸망했더라도 그들의 삶의 흔적은 기록하며 또 최대한으로 남겨두는 것이 올바른 원칙이며 처사이다. 그들이 명망한 후 그 지역에 살게 된 주민들이 중국민족에 포함됨은 용납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지역에 살았던 부족들의 이름과 역사까지 말살하면서 그들을 중국의 漢族(한족)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과 정의에 어긋나는 소행이며 역사왜곡이다. 고구려가 만주일대의 넓은 지역에 800년 이상 살다가 당나라 군대에 의하여 멸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이름과 역사는 있던 그대로 보존되고 기록됨이 올바른 처사이다. 이들의 빛나는 삶의 흔적을 중국사속에 포함시키겠다는 것은 문명인답지 않은 야만행동이며 그런 짓을 감행하는 그들의 의도나 머리가 매우 의심스럽다.

고대 북방민족의 역사도 사실은 중국의 사료에 기록된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 역사기록은 북방민족의 여러 부족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역사적인 사실이 많이 누락되고 서술도 너무 부실하게 기록된 것이 우리의 불만이었다. 그런데 그 부족들의 이름마저 없애면서 중국사의 틀 안에서만 기록 서술된다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더 부실해지고 또 부정확해질 것인가? 이것이 고구려를 포함한 북방민족들의 생존권에 대한 얼마나 끔찍한 무례이며 만행인가.

역사인식의 정서적인 측면
다음은 역사인식의 정서적인 측면에 대하여 검토해 보자. 한국 사람들의 고구려의 역사나 그 유적에 대한 사랑과 긍지는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고구려는 고대 삼국의 맏형 격으로 제일 먼저 생겨난 국가이며 백제가 그 줄기에서 갈라져 나왔다. 고대 삼국사의 맏이라는 뜻에서도 고구려가 중요하지만 단군조선의 시원(始原)지에 가까이 위치하였다는 면도 무시할 수가 없다. 특히 만주지역에서 그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며 중국도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한 제국을 오랫동안 유지했던 용기와 기백이 얼마나 멋있으며 자랑스러운 일이었던가. 그래서 고구려사는 한민족의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고구려 멸망후 근 300년 후 한반도에서 건립된 王建(왕건)의 새 왕조가 고구려와 비슷한 고려라는 국호를 지었겠는가? 그런데 고구려라는 이름을 없애고 중국사속에 포함시키려고 드는 것은 한민족 말살정책이나 다름이 없는 만행이며 한국인들의 반중감정을 자극할 것이 틀림없다.

삼국시대 이후 한민족은 한반도 안으로 오그라들어 갇혀 살아 온 것이 사실이나 한민족의 기상과 고구려의 고토(故土)사랑은 각별한 것이었다. 중국대륙의 동북지역, 특히 滿洲(만주)지역은 우리 조상들이 몇 천년 동안 살고 활동하던 정든 故土였다. 그래서 정신적 고향으로 섬기며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백두산은 우리 민족이 모두 우러러 보는 영산(靈山)이며 단군조선의 시원지로 숭앙되며 우리의 祖上神(조상신)을 모시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우리 한민족의 정신과 氣像(기상)을 상징하는 聖地(성지)로 숭앙 오던 땅과 그 역사를 중국 땅과 그 역사라고 만들었다고 한국인들이 중국을 조상처럼 섬기며 각별한 정을 느낄 것으로 믿는 것인가?

8・15해방 이후에 한반도가 분단되고 산세가 험하고 가파른 편인 백두산의 남측은 북한공산주의자들이 차지하여 출입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반면에 훨씬 넓고 완만한 산세를 가진 북쪽부분을 중국인들은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이라고 부르면서 그곳을 드나드는 한국인을 상대로 돈을 벌어들이는데 이용하는 상업지역처럼 이용되어 왔다. 한국인들이 편리하지도 쾌적하지도 않은 지역을 드나드는 불편함과 이질감과 더불어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 그것이 중국에 대한 불만요인이 되는 우려는 없는 것인가?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대처방안과 해결의 전망

동북공정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마지막으로 민족정신과 의지와의 관련에서도 다루어 볼 일이다. 이 문제는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대처방안과 그 해결책과 결부하여 논해야 할 것 같다. 위에서 동북공정이 이지적 측면에서 납득되기도 정당화되기가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정서적으로도 한국인의 민족감정이나 서민정서로 보아서 중국의 역사왜곡 및 고구려사 박탈행위가 묵인 좌시될 일이 아님을 논하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첫째는 한국의 고대사연구를 더욱 활성화하여 동북공정의 논거를 하나하나 검토하고 그 진실성과 공정성을 부정하는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 한국은 세계의 200여개의 국가 중에서 매우 경제수준이 높고 문명이라는 차원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적인 위상에 비해서는 역사의식이 매우 낮은 편이며 특히 고대사는 거의 많은 사람들의 관심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보아서 틀린 말이 아니다. 한국사람들의 역사의식이 깊으며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많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하면 중국이 동북공정 같은 도발행위는 하려고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거론과 연구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반응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동북공정이 현재 수준으로 진전되었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역사학계, 언론계 그리고 한국정부의 무대응 무대책은 깊이 반성되고 시정되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측의 관심과 반응이 거의 없다는 것은 중국의 위정자들에 그리고 중국의 역사학계가 10여년 동안 마음 놓고 기획, 연구, 추진하고 홍보 교육하는 행동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앞으로는 한국의 관심과 여론을 크게 일으키는 한편에 중국의 위정자들 그리고 지성인들에게 동북공정의 프로젝트가 얼마나 한국인들의 민족감정을 손상하고 있으며 또 그것이 중국의 국가이익에도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득하는 작업이 추진되어야 할 일이다.

셋째는 위에서 말한 취지와 밀접하게 연관된 일이긴 하나 동북공정의 기도가 중국과 중국국민이 전 세계에 자랑해온 中華思想의 이상과 내용에 얼마나 배치되는 것인가? 그것이 중국의 국가적인 위엄과 도덕성에도 배치되며 또 훼손하고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 해도 좋은 아니 하지 말아야 할 역사인식의 왜곡이 중국의 위엄과 품위를 얼마나 훼손하는 일이며 또 중국의 대외적 위신이나 명예를 얼마나 떨어뜨리는 것인지 모두가 알아들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런 어리석은 대국주의 또는 치사스러운 패권주의적인 기도는 하루 속히 폐기하지 않으면 중국에 대한 반패권주의적인 정서가 외부세계에 일게 됨을 알려주는 노력이 꾸준하게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설득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중화사상의 본질은 유교의 철학사상과 윤리이다. 유교사상과 도덕은 인류역사상 가장 이성적이면서 고상한 윤리사상으로써 仁義禮智信(인의예지신)의 윤리로 구체화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런 五常(오상)의 윤리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불인(不仁) 불의(不義) 무례(無禮) 우치(愚癡) 불신(不信) 태도이며 실천행위였다. 동북공정은 中華思想을 훼손하고 오염시키는데 그치지 아니하며 중화사상과 중국의 권위를 떨어뜨린다. 중국은 세계 200여개 나라중의 한 나라가 아니라 21세기의 지도국가의 반열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중국이 왜 숭고한 유교사상이나 윤리도덕에 부합되지 않는 행동을 자행하느냐고 설득을 하라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엄격하게 가린다. 왕도는 백성을 덕(德)으로 다스리고 패도(覇道)는 백성을 힘(강제력)으로 다스린다. 힘을 가졌다고 남들에게 강제력을 마구 행사하는 일이나 억압하거나 협박으로 강제하거나 굴복시키는 것은 왕도(王道)를 떠나서 패도(覇道)주의의 길로 들어선 행위이다. 중국공산주의는 진시황(秦始皇)의 패도주의를 계승하였으며 그들 통치술의 교본(敎本)이 되었던 법가(法家)사상을 계승 실천해 왔다. 그러면서 내세우기는 한(漢)나라 대에 와서 천명되었던 왕도정치(王道政治)와 덕치주의(德治主義)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을 천명하고 있다. 조선조의 선비들도 유가의 왕도정치나 중화사상(中華思想)을 찬양 존경하면서 그 실천에 앞장서 왔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정부가 표면으로는 中華思想을 높이며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패도정치를 추구한다면 신뢰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닌지? 중국은 명실이 상부하고 언행이 일치하는 국민이 됨으로써 신뢰성을 잃지 않아야 체면과 명예가 유지될 수 있다며 우정 있는 설득을 계속하는 것이다.

중국의 大國主義, 패권주의를 자제하는 지혜를 키워야

다음은 현세적인 지혜와 세계경영의 원리를 가지고 중국의 당국자들을 설득하는 방법이다. 민족국가의 시대, 산업화의 시대에는 사람들은 무엇이나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들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중국대륙이 세계에서 가장 넓고 크다는 것, 인구가 15억이나 된다는 것이 중국의 힘의 근거이며 자랑거리이다. 그러나 세계 최강, 최대의 군대를 보유한다는 것이 중국 국력의 크기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오늘 날 가족이 크며 아들딸의 수가 많다는 것을 자랑하며 큰 저택과 정원을 가졌다는 것을 가지고 위세를 부릴 수가 있는 것인가? 과거에는 물론 그런 것이 모두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으니 사고방법이나 가치관도 달라져 있다. 이런 것을 두통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아들딸이 많다는 것은 생산력이 많고 효자 효도 하는 사람의 수가 많으며 재산이 많으면 머슴이나 시종들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요즘은 자녀들이 효도하는데 관심이 없다. 직장인들도 직장에 대한 기여보다는 자신들이 받는 대우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 그러니 이런 일 들이 일거리, 두통거리, 돌보아야 하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짐을 의미할 뿐이다. 재산이 많고 종업원이 많으면 세금이 많고 지출도 많아지므로 크거나 양적증가도 달가워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 있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중국도 그 많은 인구와 넓은 영토가 국력의 기초라고는 생각하지만 통치권자들의 일거리, 걱정거리와 부담이 많아졌다는 걱정이 앞서가는 형세이다. 소득은 늘지만 지출은 더 늘어 날 것이고 경제가 좋아져도 다수국민의 요구와 부담은 더욱 커져서 감당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아무리 세계일위를 자랑하며 국민 총생산이 미국이나 EU를 능가할 지라도 중국이 15억 이상의 인구를 유지하는 한 중국은 영원한 후진국이지 질적으로 미국이나 EU와는 경쟁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통치권자들의 과로와 근심거리가 더 늘어나고 더 어려워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중국도 이제 영토나 인구, 그리고 경제적인 富(부)를 더 늘리는데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대국주의나 패권주의의 야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라와 인구 그리고 소득을 어떻게 더 적정화하느냐 하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도 중국의 통치권자들도 동북공정을 추진하거나 소수정부의 자치를 빼앗으려는 발상을 하루 속히 버리는 것이 중화사상을 살리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차라리 중국을 몇 나라로 분할하여 중심국가가 4-5억의 인구를 차지하며 나머지 부분은 각자가 잘 사는 길을 찾아보라고 놓아주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그러면 그 중심국가는 미국이나 EU에 못지않을 수준으로 선진화될 것이니 말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일깨워 주어도 중국인들은 욕심을 버리지 못할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중국인들을 설득할 일은 지역공동체의 창설에 관심을 가지고 주도하라는 권유이다. 만주지역은 한족(漢族)도 좋아하고 한민족도 깊이 사랑하는 곳이다. 중국은 장백산(長伯山)을 차지함으로써 돈벌이가 될 것이지만 한족(韓族)은 경제적 이익보다도 조상의 시원지이며 영산(靈山)이기 때문에 영혼의 위안처로 모시고 싶어하는 고장이다. 이런 곳을 배타적으로 차지하려고 흥분하며 싸우느라고 핏대를 올릴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어떠할까?

아시아태평양지역공동체(동아시아공동체)를 창건하여 운영하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쉽게 해결될 것이므로 공동소유 공동관리를 위한 한중협력은 더욱 밀접해질 수가 있다. 이런 방향으로 발상을 전환하도록 중국인들을 설득하면 중국의 태도나 정책도 바뀔 수가 있지 않을까? 이런 방향으로 더 연구하고 실천해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