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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차우셰스쿠와 김정일, 운명적 同行

김정일과 측근들이 재판과 처형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구경하였다면 차우셰스쿠 부부에 대한 검사의 기소사실이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反인류 범죄와 흡사한 데 놀랐을 것이다.

김정일은 민중봉기를 맞아 도망가다가 붙들려 총살된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 부부의 末路(말로)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2006년 말 런던의 선데이 타임스는 김정일이 간부층에 대하여 차우셰스쿠가 재판을 받고 처형되는 비디오를 보게 한다고 보도하였다. 이 신문은 <중국이 루마니아 反共혁명의 主役인 일리에스쿠 전 대통령에게 자문을 구하였다>고 썼다. 이 보도에 이어서 루마니아 신문들은 차우셰스쿠와 김정일을 비교하는 특집 기사들을 내보냈다. 주르날룰 나시오날紙는 <김정일이 차우셰스쿠의 운명을 따를지 모른다>고 전하였다.

1989년 12월 루마니아 혁명은 反共(반공)과는 관계없는 素材(소재)로 시작되었다. 티미소아라에서 인종적 갈등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헝가리系(계) 목사를 품고 있던 대학생들이 가담, 反共시위로 성격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에서 공산정권이 잇따라 넘어가는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난 사소한 소요사태가 혁명으로 확대된 것이다. 12월17일 보안경찰이 진압을 제대로 못하자 군대가 출동하여 시위대에 발포하였다. 차우셰스쿠는 진압전문 부대를 두지 않았다. 과대망상가가 되어버린 그는 존경받는 자신에게 도전할 세력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군대는 원래 시위진압에 서툴러 평화적 시위대를 향하여서도 발포를 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티미소아라에 투입된 군대는 탱크, 장갑차까지 동원, 수십 명을 사살하고 상황을 장악하였다. 18일 이 도시에 계엄령이 내렸으나 30명의 대학생들이 성당에서 공산당 紋章(문장)을 떼어내고 舊국가를 부르면서 저항하다가 집중사격을 받고 전멸하였다. 20일 주변도시에서 노동자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 순식간에 10만 명이 시위대로 변하였다. 21일엔 정부가 동원한 노동자들이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왔다가 합세하였다. 이들은 이제 "차우셰스쿠 하야"를 요구하였다.

차우셰스쿠는 2박3일의 일정으로 이란을 방문한 뒤 돌아왔다. 그 사이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국내 언론통제하의 루마니아 사람들은 이 소요사태를 ‘미국의 소리’ 와 ‘자유유럽방송’(RFE)을 통하여 알았다.

12월20일 차우셰스쿠는 운명적인 결정을 했다. 6일 前 지방에서 시작된 시위가 수도 부카레스트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그는 다음 날 거대한 기념물인 인민궁전(사무실 용도의 건물로는 세계 제2위-延면적 기준) 앞 광장에서 관제 親정부 데모를 열기로 한 것이다. 공장에선 열성분자들을 선발하여 아침 일찍 광장으로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집회가 취소되었으니 공장으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노동자들이 돌아가는데 이번엔 다시 정오까지 집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열성분자들은 거의 다 퇴근해 버려 공장들에서는 黨性(당성)이 약한 노동자들을 뽑아 보낼 수밖에 없었다. 21일 12시30분 차우셰스쿠가 인민궁전 발코니에 나와 10만 군중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 내용은 급박한 현실과 동떨어진 自畵自讚(자화자찬)이었다.

한 구역쯤 떨어진 곳에 모여 있던 젊은 시위대가 야유를 시작했다. 官製(관제) 집회장에 모여 있던 군중들도 웅성대더니 야유에 가담했다. 차우셰스쿠가 당황하는 표정이 텔레비전에 그대로 방영되었다. 독재자가 "여러분들, 그 자리에서 조용히 있어요"라고 호소하는 장면도 잡혔다. 7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한 생중계에서 지도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연설은 중단되고 관제시위를 하러 왔던 군중은 진짜 시위대로 변해버렸다. 차우셰스쿠는 인민궁전에 갇혀버렸다.
부카레스트 시내는 시위대와 군대의 전투장으로 변하였다. 시위대는 일단 귀가하였으나 22일 아침이 되자 주변 공업단지에서 노동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날 오전 11시30분, 부카레스트 라디오 방송은「반역자」밀리아 장군이 자살했으며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고 발표했다. 밀리아 장군은 국방장관이었는데 시위대에 발포를 거부했다고 하여 차우셰스쿠가 자살을 시킨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수년 전의 조사에서 그는 권총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시위대는 인민궁전으로 몰려갔다. 차우셰스쿠는 다시 발코니에 나타나 연설을 하려고 했으나 시위대가 건물 안으로 돌입하면서 물건을 던지자 황급히 사라졌다.

후임 국방장관 빅토르 스탠쿠레스쿠는 차우셰스쿠와 상의도 없이 출동하였던 부대에 兵營에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실상 진압을 거부한 것이다. 동원된 계엄 부대가 발포나 진압을 포기하면 정권이 무너진다는 것은, 4.19 의거 때, 이란 혁명 때, 필리핀 혁명 때, 소련 쿠데타 때 등 여러 번 실증되었다. 김정일 정권이 민중봉기로 붕괴된다면 비슷한 경로를 밟을 것이다.

정오쯤 屋上(옥상)에서 차우셰스쿠 부부가 헬리콥터를 타고 달아나는 것이 목격되었다. 국방장관이 권한 것이다. 차우셰스쿠가 임명한 국방장관이 결정적 순간에서 그를 버린 것이다. 나중에 스탠쿠레스쿠는 "나는 그때 두 사형집행자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차추셰스쿠 편과 혁명군 편 사이에"라고 고백하였다.

다음날 救國(구국)전선이란 조직이 갑자기 등장하여 이온 일리에스쿠 위원장이 임시 정부를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일리에스쿠는 한때 차우셰스쿠의 후계자로 지목될 정도로 잘 나가던 간부였으나 견제를 많이 받아 당시에는 인쇄소 소장이었다. 루마니아 공산당 내의 불평분자, 중견간부층이 권력의 진공상태 속으로 먼저 들어가 권력을 선전한 것이다. 북한에서 민중봉기나 쿠데타로 김정일이 타도되더라도 권력을 잡는 것은 한때 김정일의 신임을 받았던 사람들이나 중견간부층일 것이다.

25일 크리스마스 날, 비밀재판에서 차우셰스쿠 부처를 총살형에 처했다는 발표와 함께 시체가 텔레비전을 통해서 공개되었다. 이 발표 이후에도 부카레스트 공항을 중심으로 內戰상태가 계속되었다. 지휘계통이 혼돈에 빠진 사이에 여러 군 부대가 출동하여 서로 싸웠다. 루마니아 혁명으로 약1000명이 죽었는데, 약80%는 차우셰스쿠가 처형된 이후 일어났다. 북한에서 만약 김정일이 차우셰스쿠의 운명을 맞는다면 지휘계통이 무너진 북한군이 비슷한 內戰상태를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차우셰스쿠 재판과 김정일 재판


차우셰스쿠가 탄 헬기는 군에 의하여 강제착륙당하여 탈고비스테란 곳에서 군사재판을 받았다.


김정일과 측근들이 재판과 처형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구경하였다면 차우셰스쿠 부부에 대한 검사의 기소사실이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反인류 범죄와 흡사한 데 놀랐을 것이다. 차우셰스쿠는 急造된 법정에 끌려 나와 검사들의 신문을 받는데 진술을 거부한다. “나는 오직 국회에서만 증언하겠다”고 버틴다. 검사들은 일방적으로 범죄사실을 읽어간다.
<인민들은 1인당 200g의 식량만 받았다. 당신들 두 사람은 反인민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학살을 했으며 인민들에게 무장공격을 가하였다. 두 사람은 경제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하여 국가경제를 망치고 국가기구를 파괴하였다. 열심히 일한 노동자들은 의약품이 없고, 먹을 것도, 난방도, 전기도 없다. 당신들은 어린이들을 죽였으며, 지식층이 國外로 달아나게 만들었다>

차우셰스쿠는 “나는 무슨 질문에 대하여도 대답하겠지만 오직 국회에서만 하겠다. 나는 국회와 노동자 계급만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버틴다.
검사는 “우리는 救國前線(구국전선)을 지도기관으로 받든다”고 반박한다. 차우셰스쿠는 “나는 이 법정을 인정할 수 없다. 당신도 외국인의 조종을 받아 루마니아를 파괴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검사는 계속 질문한다.
“왜 당신은 이렇게 나라를 망쳤는가? 왜 농민들을 굶겼는가? 왜 농민들이 재배한 것들을 모두 수출해버렸는가? 농민들은 당신이 시키는대로 耕作(경작)을 했는데도 먹을 것이 없다. 왜 인민을 굶겼는가?”

지금 북한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 김정일을 법정에 세운다면 이와 똑 같은 질문이 쏟아질 것이다. 차우셰스쿠는 이 대목에선 침묵을 깨고 반박한다. 현실과 거리가 먼 대답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 수많은 건설을 하였고, 지방에 수많은 투자를 하였다. 모든 마을에는 학교, 병원, 의사가 있다. 나는 세계 어느 나라도 하지 못한 일을 인민들을 위하여 했다. 그들이 수준 높고 풍요한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검사가 “드디어 우리는 당신의 별장에 있는 황금 그릇들을 텔레비전을 통하여 볼 수 있었다. 당신들은 수입한 것들을 먹었다. 호화판 잔치들의 사진들을 보았다.”
惡名(악명) 높았던 부인 엘레나도 끼어들었다.
“믿을 수 없다. 우리는 보통 아파트에서 산다.”
검사가 “궁전도 많잖아?”라고 반박하였다.
차우셰스쿠는 “우리는 궁전이 없어. 있는 건 인민들 것이야”라고 변명하였다. 그는 “우리는 스위스에 계좌도 없어”라고 하자 검사는 “그렇다면 앞으로 스위스에서 발견되는 돈은 모두 루마니아 국가로 보내달라는 성명서에 서명할 수 있는가?”라고 다그쳤다. 차우셰스쿠는 “이 문제는 국회에서 논의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검사는 독재자와 인민의 疏通(소통) 부족에 대하여 이렇게 불평하였다.
“당신은 인민들과 제대로 대화해본 적도 없잖아? 당신이 일방적으로 독백하면 인민들은 박수를 쳐야 했어. 여기서도 당신은 과대망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어.”
변호인이 등장하여 권력을 잃은 독재자를 오히려 몰아세운다.
“당신은 이미 대통령이 아니야. 舊(구)정권은 해산되었단 말이야. 그러니 당신은 국회에서 증언할 자격이 없는 거야. 당신은 정신감정을 받자는 제의도 거절하였다. 두 사람은 지난 며칠 사이에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서만 재판을 받는 게 아니다. 지난 25년간 벌어진 범죄에 대하여도 책임을 져야 한다. 증거는 충분하다. 모든 사람은 그가 범한 죄값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함으로 본 변호인은 선고를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

검사는 求刑(구형)을 위한 論告文(논고문)을 읽는다.
<당신들은 어린이, 젊은이, 어른들을 죽였다. 보안경찰에게 군복을 입게 하여 마치 군대가 인민들을 敵對(적대)한다는 인상을 심으려 하였다. 인민과 군인을 이간질시키려 하였다. 보안경찰은, 고아와 외국인을 납치해 와서 특수 시설에서 훈련을 시켜 우리 인민들의 암살자로 키웠다. 당신은 병원에서 산소호흡기를 끊었고, 病床(병상)의 환자들을 사살하였다. 나는 법률가로서 死刑에 반대하지만 루마니아 사람들이 당한 고통이 이토록 크기 때문에 두 사람에 死刑을 선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死刑선고를 받은 독재자 부부는 손이 뒤로 묶인 채 바깥으로 끌려 나갔다. 정예 공수부대원들이 사형을 집행하였다. 총을 서로 쏘려고 자원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차우셰스쿠가 비참하게 살해되는 것을 보고는 기존의 중국식 개혁 개방 정책 거부 자세를 더욱 굳혔다. 김정일의 운명과 차우셰스쿠의 운명은 운명적으로 엮이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차우셰스쿠를 망친 것은 김일성의 영향이었고, 김정일의 退路(퇴로)를 끊은 것은 그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차우셰스쿠가 죽은 지 7년이 지난 1996년 6월26일 기자는 차우셰스쿠가 운명적인 연설을 했던 인민궁전의 그 발코니에 서 보았다. 눈 아래로는 파리 개선문에서 내려다보는 샹제리제 거리처럼 일직선으로 4km쯤 뻗은 大路(대로)와 말라버린 분수가 독재자의 기념물임을 증언하고 있었다. 여대생으로서 이 건물의 안내를 맡고 있다는 한 美女 아가씨의 설명에 의하면 인민궁전은 루마니아産 대리석으로만 지었는데 연면적이 33만㎡, 건평은 6만㎡라는 것이었다. 미국 국방부 청사 펜타곤 다음으로 크다고 했다. 관광명소가 된 이 건물을 짓는 데는 매일 2만 명의 노동자와 4백 명의 건축기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길이 150m, 높이 18m나 되는 두 개의 대강당은 연회장이나 음악당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차우셰스쿠는 1960년대에 反蘇 독자 외교노선을 추구하여 서방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문제는 경제에까지도 그런 민족·자주·폐쇄적 정책을 썼다는 점이다.
外債를 갚는다고 농산물을 무리하게 수출하다가 국내에서 식량부족 사태를 야기하기도 했다. 1989년 3월엔 외채 100억 달러 상환기념 대축제를 열기도 했다. 부카레스트市의 중심부를 거대한 기념물로 개조하기 위해 살던 시민들을 내쫓아 원성을 샀다. 이런 차우셰스쿠의 행태는 金日成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주체」란 말까지도 수입하여 써 많은 루마니아 사람들이 그 단어를 알고 있었다.

1971년 차우셰스쿠는 중국, 북한, 월남을 방문하였다. 그는 毛澤東(모택동)의 문화혁명과 金日成(김일성)의 소위 주체사상에 큰 감명을 받았다. 독재자들은 자신보다 더한 독재를 하는 인간을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히틀러는 宿敵(숙적) 스탈린을 동경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인간평가 기준은 절대적 권력을 누가 더 휘두르는가이다. 차우셰스쿠는 귀국하자 말자 주체사상 관련 서적을 번역, 널리 배포하였다. 1971년 7월6일 그는 루마니아 공산당 집행위원회에서 ‘7월 테제’라고 알려지게 되는 정책 제안 연설을 하였다. 당의 지도적 위치 강화, 청소년층에 대한 사상교육 강화, 예술 문화 공작 등 북한식 통치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그는 루마니아판 문화혁명을 시작하였다. 루마니아는, 인간의 사생활까지 철저하게 통제하는 스탈린식 공산專制국가로 변하였다.

1996년 필자가 부카레스트에 갔을 당시 舊東歐 공산권 국가 중 체제전환이 잘 되고 있던 헝가리, 체코, 폴란드와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한 가지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에서는 1인 장기지배 체제로 그 내부에서 개혁세력이 성장하지 못한 데 반해 헝거리 등 3개국에선 공산당 안에서 오랫동안 개혁의 시도와 모색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루마니아 국회의사당 하원의장실에서 아드리안 나스타세 의장을 인터뷰했다. 그때 46세이던 나스타세 의장은 부카레스트 法大 출신이며 법학박사 학위도 갖고 있다. 공산당 시절에는 부카레스트의 법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했고, 1990년부터 2년간 외무장관으로 있다가 92년에 하원의장으로 뽑혔다. 여당內의 2인자로 불리고 있었다. 그의 이력서에는 많은 논문 및 강연 제목이 쓰여 있어 학자의 이력서를 연상시켰다. 키가 훤칠하고 귀공자처럼 구김살 없이 생긴 나스타세 의장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차우셰스쿠가 金日成의 1인 전제정치 행태에 영향을 받고 그와 비슷한 통치를 했다는 說은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1970년인가 71년인가 그는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1971년은 그런 점에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북한 방문 직후 그 전과 다른 통치이념을 내걸었으니까요. 그것은 차우셰스쿠 통치의 후반기를 알리는 분수령이었습니다.”
-1989년의 流血(유혈) 혁명으로써 차우셰스쿠 정권을 타도한 뒤에도 그 정권에서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재판에 넘겨 처벌하는 일종의 역사적 정리와 단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도 과거로 돌아가서 처벌을 하자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Truth)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증명되고 표현되며 단정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면을 갖고 있습니다. 차우셰스쿠 시절에는 공산당원이 약 400만, 청년단원이 수백만이나 되었으니 全인구의 반이 직·간접으로 공산당과 연결돼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50년간의 공산주의 통치 시절에 여러 세대가 살았는데 소련 공산당의 압력에 협력한 사람, 차우셰스쿠를 지지한 사람을 골라내어 벌을 준다면 실제로는 그 체제의 피해자가 벌을 받는 꼴이 될 것입니다. 1989년 이후 우리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고민했습니다. 우리는 소수의 공산당 핵심간부들을 감옥으로 보냈습니다만 더 이상의 역사청산 작업은 국민이 통합과 단결·화해를 해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귀하의 나라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시고 계시지만 역사를 斷罪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잡한 일입니다.”
-왜 루마니아에서는 헝가리와 체코에서처럼 공산당 내부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1968년에 소련군대가 프라하에 침입했을 때 루마니아만이 지원군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루마니아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1950년대 말 이후엔 소련군대의 주둔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루마니아는 그런 점에서 동구의 어떤 공산주의 국가보다도 덜 공산주의적이었습니다. 지난 20∼30년간 루마니아의 문화생활 수준은 굉장했습니다. 한때 루마니아에는 유럽에서 인구당 가장 많은 VTR이 있었습니다. 영화상영이 공개된 장소에선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독특한 환경 속에서 개혁그룹이 조직화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