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점령당한 금산을 탈환하기 위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옥쇄한 의병장 조헌과 수하의병 700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40번지에 모셔진 곳이나, 함께 참전하고 함께 전사한 승병800명이 포함된 1500의총으로 개칭할 것이 제기되고 있다 |
이 모습을 갖추기 까지에는 민족사와 같은 수난을 격은 모습이라 한다. 최초 전투 후 3일만에 유생들에 의하여 시신이 수습되어 이곳에 모셔지고, 전쟁 후 선조로 부터 조헌의 묘비와 전각등이 세워졌으나, 한일합방 후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것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하여 1970~1976에 현재의 모습으로 경역이 조성되였다 . |
경내에 시설들은 묘소와 "종용사"란 사당, 기념관 "칠백의사 순의 탑 등이 잘 단장되어 있다. |
◆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508년 동안 역사의 반쪽만 담고 있다는 것이다. 1. 영규대사가 승군800명을 이끌고 금산전투에 참전은 역사적 사실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이 2009년과 금년 8월27일 2회에 걸처 실시한 세미나에서 주제발표한 김덕수 박사 자료에 의하면 당시 전투에는 조헌의 의병 700명과 영규대사의 승병800명이 동시에 전투에 참가하고 함께 옥쇄를 하였으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승병 800명은 빠진채 700의총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한다. 김덕수 박사는 이 원인에 대하여 당시 억불숭유의 정책으로 승려들의 신분이 최하급으로 낮추어져있는 상태에서 권력계층의 유생들이 "유생들이 지휘했던 의병"만 고려한 잘못된 역사의 일면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김박사는 임진난시 승군의 활동이 지방 관료들의 장계에 의하여 보고된 기록들이 이조실록 등 임진난관련 기록들에서 찾아 볼수 있다고 한다 <참조 http://www.aquicknews.com/news/section.html?sec_no=51> |
(1). 700의총 안내문 700의총을 설명한 700의총 안내문과 "문화재청 700의총관리소 홈페이지" 소개의 설명 첫머리에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헌선생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병이 왜군과의 싸움에서 순절한 700의사의 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분석하면 승군의 참전은 포함하면서 승군 800명의 숫자는 빠진것이다 (2) "문화재청 700의총관리소 홈페이지" - 기념관"기록화"의 설명에도 명기 |
전라관군에게 금산성 공격의 전기(戰期)를 알리고 같이 협공하자고 한 후, 15일 유성에 진출해 영규대사가 이끄는 수백명의 승군과 다시 합세 하여 진군하게 되었다. ~중략~ 영규대사는 장창과 낫으로 무장된 승병을 독려하면서「생사(生死)의 명(命)은 재천(在天)이다. 다만 의를 좇아 순(殉)할 뿐이다」라고 외치면서 구름같이 밀려오는 왜적을 무수히 무찔렀다. 금산700의총은 1500의총을로 바로잡아 국민모두의 가슴속에 호국의 얼을 심어야한다 ! |
총제적으로 문화재청도 영규대사와 승병의 참전을 인정하면서 800명의 승병이 제외된 700의총으로 운영되고 있음은 과거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지 1500의총 으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