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살아 있을 때에는 하도 친근하게 ‘김정일 국방위원장’ 칭호를 자주 써서 그가 마치 남한의 국방위원장인 것처럼 착각 할 때가 있을 정도 였고, 김정은도 아직 애숭이지만 하도 깍듯하게 예우하니까, 어떤 때는 북한이 우리의 상전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런데 북한은 어떤가. 그들은 방송이건, 신문이건, 정부의 공식 발표이건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우리 대한민국을 욕으로 먹칠하고 있다. 언필칭 “이명박 역적 패당”이며 “서울 불 바다”는 가장 많이 쓰는 공갈이다. 우리 방송에서 들려 주는 저들의 방송을 듣노라면 실로 모골이 송연하다. 그리고 근자엔 휴전선 근처에서 우리의 국가 원수를 표적으로 그려놓고 거기다 마구 총질하는 장면도 자주 눈에 띄었다. 북한의 이러한 방송을 보면 저들은 분명 우리의 적이다.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건을 훨씬 능가하는 남침 전쟁이 곧 있을 것같은 위기감이 든다. 비교해 보면 우리 언론 매체와 북한의 그것들은 서로 상반된 길을 걷고 있다. 전자는 친밀감 있는 우호적 표현, 후자는 악의에 찬 적대적 태도,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런데 우리 방송 매체들은 저들의 이러한 적대적 행위들을 가감 없이 국민들에게 보여주면서, 저들을 지칭 할 때는 적개심이 전혀 없는 우호적 표현을 쓰고 있다. 도대체 왜 일까? 우리 실버세대들에게 염려되고 걱정스러운 것은 남한 언론 매체들의 이러한 정향(定向)들이 우리 국민들을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어물 어물 하는사이 친북좌파 주의자들로 세뇌(洗腦)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북한의 엄포와 공갈들을 국민들에게 방송하여 공포감을 주고, 그리고 우리 매체들은 저들에게 호감을 나타내 국민들의 대북심리를 묘하게 북으로 기울게 하는 것은 아닌지--. 물론 이러한 것들이 기우일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실버들은 남한 언론들의 이러한 대북관에 대하여 문자 그대로 노파심을 저버리기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남한 어론들이 중국의 고사(故事) “송양의 인 「宋襄之仁」”과 같은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송양(宋襄)은 춘추시대 오패(五覇)의 한 사람으로 송(宋)나라 제후인 양공(襄公)을 이르는 말이다. 「송양의 인」은 양(襄)공이 내세우는 인(仁)이란 뜻인데 덮어 놓고 어질기만 할 뿐, 실리(實利)가 없는 대의명분을 가리켜 회자되는 말이다. 송양공은 중원을 넘보는 초(楚) 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양공이 인솔하는 송나라 군사는 홍수(泓水)에서 초군과 마주쳤다. 이 때 송의 한 장수가 “적이 강을 반쯤 건널 때를 틈타 공격을 하면 소수 병력으로 초의 많은 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권하였다. 그러나 양공은 “그것은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다”라고 하며 초군이 강을 다 건널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강을 건너 온 초군은 송나라 군 진영 맞은 편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이 때도 한 장수가 “적이 진을 다 처버리기 전에 이를 치면 이길 수 있습니다”고 권했으나 양공은 “군자는 사람이 어려울 때 괴롭히지 않는다”고 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대오를 정비한 초군은 송나라 군대를 크게 이겼다. 송양공은 군자의 인을 지키다 대패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일을 일러 「송양의 인」이라 비웃었다. 군자의 명분을 지키다 실리를 잃었다는 뜻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말이다. 대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언론들이 이런 「송양의 인」과 같은 우를 범한다면 큰 일이다. 송양공은 군자의 도를 지켰는지는 몰라도 내용을 들여다 보면 초와의 전쟁에서 졌을 뿐이다. 남한의 언론들이 한 없는 자유를 누리며 송양공처럼 신사도를 지킨다 해도 북한의 매체들이 그와 동등하게 행동하리란 기대는 할 수 없다. 북한의 매체들은 우리와는 달리 철저한 이념투쟁의 도구이지 자유가 보장된 언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과 대치한 상태에서 힘겨루기 하는 기(氣) 싸움을 벌인다고 할 때, 남한 언론들의「송양의 인」은 패배주의에 불과 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남,북한의 대조되는 언론 보도, 특히 방송은 은연중에 국민들을 이념적으로 오도 할 염려가 크다. 한국의 언론들이여, 스스로 반성하고 대한민국의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지키는데 횃불이 되어 주시라. (2012. 3.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