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완의 난동: 무조건 사살하라, 민간인 피해는 생각말라 이어서 장태완은 자기의 지휘선상에 있지도 않은 26사단장(배정도)와 수도기계화사단장(손길남)에 전화하여 전 병력을 서울운동장과 장충공원에 출동하라는 월권적 명령을 내렸다. 한편 육본작전참모 하소곤 소장은 1공수여단이 이미 출동한 것으로 오해하고 장태완에게 한강 1,2교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태완은 이미 1공수여단의 출동정보가 오보인줄 알면서도 “이 때다”싶어 한강교에 퇴근중인 시민 차량을 강제로 세워 이들 시민차량을 빼앗아 바리케이트를 치게 했다. 수도권 일대의 헌병초소에 "검문에 불응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하라"는 기막힌 지시를 내렸다. 이어서 수경사 전 참모를 상황실로 소집하여, 모든 전차를 동원하여 30경비단을 때려잡고 거기에서 반란을 모의하고 있는 유학성, 황영시, 장세동 등을 무조건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2:30분경 육군본부 상황실에 있던 육군 지휘부가 몽땅 수경사로 이동했다. 수경사는 자체방어능력이 있는데다 목소리가 큰 장태완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윤성민 참모차장, 천주원 인사참모부장, 하소곤 작전참모부장, 황의철 정보참모부장, 최항석 교육참모부장, 안종훈 군수참모부장, 정형택 예비군참모부장, 김시봉 관리참모부장, 이정량 통신감, 신정수 민사군정감, 김진기 헌병감 등 정승화계열의 강경파 참모들이 모두 수경사로 옮겨갔다. 수경사에 도착한 윤성민은 장태완이 시키는 대로 변규수 육본보안대장, 수경사 보안대원 전원을 즉시 체포 감금했다. 이어서 장태완은 문홍구 합참본부장, 김진기 헌병감, 황원탁 총장 수석부관과 함께 합수부 수사분실을 전차로 공격하여 정승화를 구출할 것을 모의했지만 전차장들은 장태완의 무모하고 불법적인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장태완과 김진기는 헌병 1개 소대를 동원하여 최규하 대통령을 수경사로 납치하려는 계획도 세웠다. 이를 위해 김진기가 삼청동 대통령 공관부근에 나가 상황을 살피기까지 했지만 공관 경비가 강화된 것을 보고 계획을 포기했다. 한편 정승화 군벌의 움직임을 파악한 김종환 합참의장과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수경사에 가 있는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전화를 걸어 정승화의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한 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개인적인 것이니 병력 동원을 금지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 연합사 상황실에 피신 중에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도 김용휴 차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23:00시경에 수경사에 가 있는 문홍구에게 병력동원 금지 지시를 내렸다.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정승화 측과 판검사들은 정승화-윤성민-장태완-정병주-이건영 등 당시 육군본부 지휘계통에 서 있는 장군들을 정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합수부 쪽 편을 든 장군들 소위 신군부 장군들을 반란군으로 못 박았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다. 당시 정승화에 대한 의혹은 전군적으로 확산돼 있었고 전사회적으로도 확산돼 있었다. 이런 의혹을 합수부가 조사하지 않는데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비단 장군-장교들뿐만 아니었다. 비상계엄이라 해도 군에는 지휘계통이 살아 있다. 군의 서열도 있다. 노재현 국방장관, 김용휴 국방차관, 김종환 합참의장, 이희성 중앙정부부장 서리, 문홍구 합참본부장 등이 합수부의 연행 조치를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정승화 계열의 반발에 쐐기를 박았다. 정승화 측이나 판검사들은 정승화를 체포하기 전에 노재현 장관의 사전 허락을 받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옳은 주장이 아니다. 전두환은 그 이전에 노재현 장관에게 정승화에 대한 조사를 해야 한다는 뜻을 넌지시 던졌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필자는 전두환이 12.12. 오후 6시30분에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으러 가기로 하고, 30분 만인 7시에 곧바로 총장을 체포하라고 한 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를 한다. 재가를 받은 다음 많은 시간이 지나면 자칫 기밀이 누출되어 재가 사실이 정승화에게 전달되고, 그렇게 되면 정승화가 자체 방어는 물론 전두환을 체포하기 위한 병력을 동원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는 매우 위험한 사태를 유발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재가를 얻자마자 체포함으로써 정승화에게 손쓸 틈을 주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등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장태완은 수경사 소집된 전 장교들에게 “30경비단장, 33경비단장, 헌병단장 등을 발견 즉시 체포-사살하라. 현재 30경비단에서 반란을 모의하는 자들의 명단을 발표하니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사살하라. 방송국 및 각 검문소에 병력을 증강하라. 모든 전차 및 대전차 유도탄(TOW), 3.5인치 로케트 등 모든 화포는 탄약상자를 개방하여 차량에 탑재하고 출동에 대기하라. 모든 야포는 경복궁을 조준하라”고 명령했다. 이런 장태완의 행위는 그야말로 이성을 잃은 난동이었다. 더구나 장태완은 이것이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그의 자서전 “12.12쿠데타와 나”에 기술하고 있다. 장태완 자서전 175쪽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경복궁 포격명령을 받은 구정희 야포단장은 사령관의 명령이니까 모든 포를 경복궁에 조준해 두겠지만 포격은 어렵다. 야포는 피아가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은 시가전에서는 무용지물이 아니냐, 더구나 30경비단을 목표로 사격을 하려면 관측사격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에는 광화문 일대가 쑥대밭이 되는 것은 물론 민간인 피해가 말도 못할 정도로 클 텐데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장태완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30경비단과 합수부에 대한 공격명령을 고집했다. 23:00 경, 윤성민 차장과 황영시 사이에는 앞으로 상호간 병력출동을 하지 말자는 데 합의했었다. 또한 노재현 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 이희성 중앙정부부장 서리로부터 병력동원금지령을 받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윤성민은 장태완 등 정승화계열의 군벌에 굴복했다. 23:10분에 수도기계화사단장과 26사단장에 전화를 걸어 출동대기명령을 내렸다. 3군사령관 이건영 역시 거듭되는 장태완의 요청을 받아들여 23:30분에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 두 사단은 명령만 내리면 불과 한 시간 이내에 서울에 올 수 있었다. 정승화 군벌의 병력 출동 12.12. 24:00, 드디어 정승화 계열의 군벌이 30경비단과 합수부를 향해 병력을 출동했다. 정병주의 지시를 받은 제9공수 여단장 윤흥기 준장이 제5대대를 이끌고 서울로 출동했다. 그러나 26사단과 기계화사단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조급증이 난 장태완은 윤성민에게 가서 이렇게 항의했다. “육군 지휘부가 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한 짓이 무어냐? 반란군과 대화하여 얻은 게 무어냐? 이제 수경사만으로 공격을 하겠다.” 이어서 수경사 전 장병에 명령을 내렸다. “전차를 비롯하여 전장병은 전투조로 편성하라. 목표는 30경비단과 보안사령부다. 공격개시선은 아스토리아 호텔, 지금 즉시 공격개시선으로 전개하라. 출발은 내가 선도한다. 중앙청 부근에 진지를 편성하여 모든 포를 총동원하여 양개 목표에 대해 집중사격을 가한다. 역모자들을 포획 또는 사살하고 반란을 진압하라.” 이때가 되어서야 윤성민 차장이 장태완의 무모함을 깨닫고 만류하기 시작했고, 이희성 중정부장 서리도 적극 나서서 만류했다. 이에 대해 장태완은 이렇게 반응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란 말이냐, 이제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 나는 돌격한다.” 그리고 모든 병력을 아스토리아 호텔 앞으로 전지배치시켰다.(장태완 자서전 186-8, 1993.9.9. ‘12.12사건국정조사국방위원회 회의록 49쪽). 12.12 마감의 순간 노재현 국방장관은 최규하 대통령의 출두명령을 거부한 채 새벽 4시까지 계속 도망만 다녔다. 국방장관의 직무를 스스로 포기한 상태였다. 육군총장 직을 대리하는 윤성민 참모차장은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육군본부 지휘부를 수경사로 옮겨 장태완 등 정승하-김재규 군벌과 한 편이 되었다.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병력을 동원했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가 아니었고, 오직 정승화 계열의 군벌만 있었다. 국가의 지휘체계 전체가 마비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윤성민 차장은 계엄군을 지휘해야 한다는 본분을 일탈해 한 사람의 정승화 군벌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최규하 대통령은 사태수습을 위해 명령을 내리려 해도 명령을 받을 사람이 없었고, 보좌해줄 할 사람도 없는 외톨이가 됐다. 이런 사태가 계속 진행되면 국가는 정승화 계열의 군벌이 완전히 장악하게 돼 있었다. 정승화 군벌이 국가를 장악하면 김재규가 일으킨 반역이 성공하게 되고, 국가는 악의적 동기에서 일으킨 또 다른 군사혁명이 지배하게 돼 있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다시 말해 정승화-김재규 계열의 군벌이 출동시킨 병력으로 합수부와 33경비단을 점령하고, 거기에 있던 수사관들은 물론 멋모르고 초대되어 온 유학성 등 장군들을 보는 대로 총살시키라며 공격개시 명령을 내린 이 사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역사바로세우기에서 윤성민은 참고인으로 법정에 나와 스스로를 적법한 지휘 선상에 있었다 했고, 전두환 등을 반란세력이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당시 윤성민의 행적을 보면 그의 법정진술에 진실성을 의심케 한다. 12월13일 새벽 3시 40분, 수경사령관실에 있던 장군들이 수경사 소속의 신윤희 헌병중령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후 서빙고 분실로 연행되어 갔다. 그리고 새벽 5시경, 윤성민은 보안사령관실로 안내되었다. 그 곳에는 전두환,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노태우가 있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윤성민에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군사령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윤성민은 이 부탁을 받아들여 12월24일 1군사령관이 되었고, 1980년5월20일에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다. 81년5월초에 합참의장, 1982년 5월부터 86년 초까지 최장수 국방장관을 했다. 그 이후에도 석유개발공사 이사장, 대한방직협회회장, 현대정공 고문을 했다. 이는 그가 12.12의 정당성을 후에라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5공 시절에 이렇게 출세의 가도를 달려놓고 세월이 지나 언론들이 인민재판식으로 전두환에게 돌을 던지자, 그는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그의 행적과 어울리지 않는 진술을 했다. 세태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모습이 씁쓸함을 갖게 한다. 그만큼 역사바로세우기의 재판은 세태에 영합하는 사람들이 진술한 바에 따라, 세태에 영합하는 판검사들에 의해 왜곡되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 시점까지의 상황을 분석하여 결산해 보면, 윤성민-장태완-정병주-이건영-윤성민-김진기-육군본부 참모들은 정승화와의 사적인 인간관계에 의해 움직인 사람들이었다. 박대통령을 살해한 죄인 김재규와, 범인인줄 알면서도 김재규의 명령을 받들어 국방장관이나 대통령의 허가 없이 병력을 동원한 공범, 정승화 편에 서서, 대통령을 제치고 병력을 출동시켜 합수부를 점령하고, 심지어는 최규하 대통령까지 납치해다가 자기들 마음대로 조종하려 했던 군벌이었던 것이다. 대전복작전의 큰 일각을 맡고 있는 합수부로서는 이를 막아야 할 임무가 있다. 대한민국의 장군이라면 지휘공백 사태에 직면하여 국가를 보위할 꾀와 용기를 발휘했어야 했다. 합수부는 무정부 상태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 혼란을 막기 위해 그날 24:00경 특전사 1여단장(박희도), 3여단장(최세창), 5여단장(장기오) 들에게 저항세력을 잡제우기 위해 나서 줄 것을 긴급 요청했고, 이는 합수부가 동원한 첫 번째 병력 동원이었다. 박희도는 1공수여단 4개 대대를 12.13일 00:20분에 출동시켜 01:30분경에 육군본부로 이상 없이 진출했다. 그러나 국방부를 점령하려던 박덕화 중령이 이끄는 제5대대는 국방부 청사 옥상에 배치된 방공포단 소속의 발칸포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았다. 이는 장태완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공수단원들이 산개하여 사격이 멈추기를 기다렸지만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에 공수대원들이 청사로 진입하여 옥상으로 올라가 발칸포를 진압했다. 12.13일 02:00 경이었다. 이 때 합수부장의 요청에 의해 공수단은 국방부 청사를 수색하여 계단 밑, 어두운 곳에 은신하고 있던 국방장관을 새벽 4:00경에야 찾아낼 수 있었다. 전두환은 9공수여단을 출동시킨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라고 3공수 여단장 최세창에 지시했다. 30경비단에 모였을 때부터 사태를 잘 파악하고 있던 최세창은 특전사령관이 정승화와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의해 병력을 출동시킨 사실을 감지하고 제5대대장 박종규 중령에게 정병주를 현행범으로 체포하라고 명했다. 박종규 중령은 체포조 10명을 대동하고 사령관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안에서 총을 쏘아 박종규 등 여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에 체포조가 응사하면서 정병주가 부상을 입고, 김오랑 비서실장이 사망했으며, 결국 정병주는 부하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최세창이 이끄는 3개 대대 병력은 13일 03:30분경에 중앙청에 도달했다. 장기오 역시 5공수 여단 2개 대대 병력을 인솔하고 효창운동장에 도착했다. 사태의 진상을 정확히 알고 있던 황영시 및 노태우도 움직였다. 황영시 1군단장은 자기 휘하의 박희모 30사단장 및 이상규 제2기갑여단에, 9사단장 노태우는 29연대(연대장 이필섭)에 출동명령을 내려 당시의 저항군 진압에 나섰다. 이상규 여단장은 휘하의 제16 전차대대(대대장 김호경 중령)를 중앙청으로 출동시켰다. 중앙청 도착시간은 12.13일.03:30분이었다, 이필섭 대령이 이끄는 29연대는 02:30에 부대를 출발하여 04:30분 경에 중앙청에 도착했다. 제30사단은 부대가 이리 저리 흩어져 있어 즉각 행동을 하지 못해 04:00분에야 제90연대장인 송응섭 연대장이 겨우 2개 대대를 인솔하여 06:30분에야 고려대에 도착했다. 장태완은 신윤희 수경사 헌병 부단장에게 “정승화총장의 진급에 불만을 품은 우경윤과 권정달 대령 등이 정승화를 불법납치했다”며 총장공관 지역으로 출동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헌병단장 조흥과 부단장 신윤희는 사태를 파악하여 장태완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고, 이에 합수부장의 연행 지시에 따라 장태완을 체포했다. 당시 수경사에 모인 장교들의 대부분이 장태완의 정신 나간 행동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장교들은 신윤희에게 장태완에 대한 조치를 취하라고 종용하기까지 했다. 신윤희가 이끄는 체포조가 사령관실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20여명의 무장병력이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신윤희는 이들을 무장해제시키고 4명의 체포조를 데리고 사령관실로 갔다. 이 때 하소곤 소장이 권총을 빼들고 대항하려다 체포조가 발사한 총탄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정작 장태완은 아무런 반항 없이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03:30분이었다. 이로써 김재규-정승화의 반란은 종말을 고하게 됐다. 2008.2.2. 지만원 /시스템클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