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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하는가? - <한나라당> 공천 파동 有感

1987년12월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는 이 나라 政治史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건이었다. 이 선거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1987년 체제’의 첫 단추였다. 그 동안 ‘權威主義’ 시대의 긴 터널을 지나 온 대한민국의 憲政은 이 해 憲法改正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함으로써 ‘民主化’를 開花시키는 轉換點에 서 있었다. 그 첫 번째 ‘직선제’ 대통령선거인 제13대 大選은 4派戰이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 盧泰愚 후보에 맞서서 3명의 야당 후보들이 出師表를 던졌다. <평화민주당(평민당)> 金大中 후보ㆍ<통일민주당(민주당)> 金泳三 후보ㆍ<신민주공화당(공화당)> 金鍾泌 후보가 그들이었다.

이 大選의 ‘키 워드’도 ‘정권교체’였다. 국민 대다수의 요구는 <평민당> 金大中 후보와 <민주당> 金泳三 후보가 후보를 단일화하여 ‘정권교체’를 이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후보는 이 같은 여론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完走를 고수했다. 투표 결과는 <민정당> 盧泰愚 후보의 승리였다. 후보별 득표 결과가 흥미로운 것이었다. 盧泰愚 후보는 828만표를 얻었다. 세 야당 후보들의 득표 결과는 金泳三 후보가 633만표, 金大中 후보가 611만표, 金鍾泌 후보가 180만표였다. 金泳三ㆍ金大中 두 후보의 득표 합계는 1,245만표로 이것은 만약 두 후보가 후보를 단일화했었다면 4백만표 이상의 표차로 盧泰愚 후보를 누를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더구나 야당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졌다면 그 시너지 효과 때문에 그 표차는 더욱 커졌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金泳三ㆍ金大中 후보는 모두 양보를 거부한 채 完走를 고수함으로써 共倒同亡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갈망했던 ‘정권교체’도 물거품이 되었다. 이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평민당>과 <민주당>은 한 동안 罵倒와 咀呪의 대상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지금은 <통합 공직선거법> 제34조2항에 의거하여 국회의원 총선거일이 4월16일(국회의원 임기만료일전 50일 이후 첫 번째 수요일)로 고정되어 있지만 당시는 2월부터 4월까지 사이에 정부가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제13대 大選에서 辛勝한 <민정당>의 당초 생각은 <평민당>과 <민주당>에 대한 국민적 분노에 편승하기 위하여 1988년2월 중에 제13대 총선거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했다면 <민정당>은 제13대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원내 과반수를 확보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민정당> 안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退任하는 全斗煥 대통령과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된 盧泰愚 당선자 사이에 누가 과연 국회의원 공천권을 행사할 것이냐는 문제를 놓고 ‘밥그릇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민정당>은 2월 총선을 포기하고 총선 시기를 全斗煥 대통령의 退任 후인 4월26일로 늦추어 실시했다.

<민정당> 국회의원 공천권은 이렇게 하여 2월25일 취임한 盧泰愚 대통령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2월부터 4월까지 2개월 사이에 政局에는 회오리바람과 같은 변화가 휩쓸고 지나갔다. ‘새마을 非理’를 필두로 全斗煥 대통령의 동생인 全敬煥 씨가 관련된 스캔들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신문 紙面과 TV 畵面을 장식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스캔들의 불똥은 全斗煥 전 대통령 자신에게 飛火하여 그는 총선 기간 중 미국으로 避身을 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全斗煥-盧泰愚 두 사람 사이의 공천 싸움은 결국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정당>에 災難을 안겨주었다.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는 ‘與小野大’였다. 299명의 당선자 가운데 <민정당>은 겨우 125석(지역 87명ㆍ비례 38명)을 건지는 데 그쳤다. 과반수에 25석이 모자라는 의석이었다. 반면, <평민당>은 70석(지역 54명ㆍ비례 16명), <민주당>은 59석(지역 46명ㆍ비례 13명), <공화당>은 35석(지역 27명ㆍ비례 8명)을 각기 차지했다. 세 야당이 차지한 의석이 164석으로 과반수를 14석이나 넘기는 것이었다. ‘與小野大’ 국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金在淳 의원이 의장 취임사에서 이를 가리켜 ‘黃金分割’이라고 美化(?)했지만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與小野大’ 국회의 탄생은 그 뒤 이 나라 정치의 ‘갈짓자 걸음’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이제 오는 4월16일의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안에서 불붙고 있는 ‘공천 샅바 싸움’을 보면서 필자는 1988년 초 이 나라 정국을 휩쓸고 갔던 亡靈의 再現을 實感한다. 지난 12월19일의 제17대 大選을 통해 이 나라 국민들은 그들이 갈망하던 ‘정권교체’를 이룩해 놓았다. 이 나라 유권자들은 530만표라는 그 동안 실시된 열 차례의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통해 全無했던 엄청난 표차로 <한나라당>의 李明博 후보를 당선시켰다. 530만표라는 엄청난 표차에는 李明博 대통령이 이끄는 새 정부가 ‘變化’를 주도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요구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 같은 ‘變化’는 국회에서 또다시 ‘與小野大’가 재현되거나 안정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에는 물거품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지금 <한나라당> 안에서 폭발하고 있는 ‘공천 싸움’을 보면서 필자는 1988년의 惡夢이 다시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88년 초 우리는 불과 두 달 사이에 진행된 거대한 票心의 이동을 목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같은 票心의 이동이 이번에 再演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만약 앞으로 두 달 사이에 그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서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통해 ‘與小野大’ 현상이 재현되기라도 한다면 어찌 되는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당사자는 李明博 당선인이다. 지금 입을 벌이고 있는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공천 싸움’을 현명하게 適時에 수습하지 못할 경우 그 최대의 피해자는 李明博 당선인이고 그로 인한 피해는 전 국민의 몫이 되지 않을 수 없다. 1988년 <민정당>에서 생겨났던 일이 이번에는 <한나라당>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인가? 역사는 반드시 反復하는 것인가?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다. <한나라당> 사람들에게 溫故知新의 지혜가 살아 役事하기를 기대한다. [끝]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