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차 아태공포럼 발표내용
주제: 韓中수교와 관련된 나의 역할
강사: 李世基 한중친선협회 회장
(4선 국회의원, 통일부・문화체육부 장관 역임)
일시: 2012. 10. 24. (수) 오후6시
나는 일찍이 중국문제를 공부했지만 본격적으로 중국의 지도자들을 만나며 중국문제에 접근한 것은 1985년 제30회 반둥회의(비동맹국회의, 인도네시아 4월 24~26일)에 참석하면서 부터이다. 나는 통일부 장관으로서 마침 이원경 외교통상부 장관이 전두환 대통령의 訪美일정을 수행하였기에 그 대신 반둥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반둥회의는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등이 주도하는 비동맹회의기구였다. 제10회 회의에는 김일성이 직접 참석하였던 회의체로, 한국대표는 옵서버 같은 위치였고 북한이 오히려 주요 참가국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南北관계의 접촉 가능성을 타진해 본 것이다.
이 회의에 중국의 우쉐첸(吳學謙 2008년 사망) 외교부장이 대표로 참석하여 나와 친교 할 수가 있었다. 인도네시아 모르타르 외무부 장관은 나와 우쉐첸, 그리고 북의 손성필과 나란히 앉도록 배려해 주어서 서먹한 가운데 중국・북한측 대표와의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가 있었다.
당시 韓中관계는 냉전체제하에서 공식적으로 꽉 막혀 있는 사이였다. 1983년 중국 민항기가 춘천에 불시착한 사건에서 우리가 원만하게 처리해준바 있었다. 또 1984년에는 중국의 어뢰정(토피도)의 선상반란으로 군산항에 들어온 사건도 적절하게 잘 처리해준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을 배경으로 한중관계는 조그마한 호전의 계기가 되었기에 우쉐첸과는 우호적인 대화를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86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있는 시기라 나는 중국의 외교부장에게 지금까지는 아시아에서 일본 스포츠가 제일 강했지만 서울아시안게임에서는 중-일 경기에 한국이 심판을 맡게 된다.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며 스포츠로써 한중간의 대화를 우호적으로 풀어나갈 수가 있었다(결과는 종래의 순위가 뒤집혀 중국-한국-일본 순이었다).
우쉐첸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중국 민항기 불시착사건이나 어뢰정사건을 원만하게 처리했다는 등 분위기 속에서 진행될 수가 있었다. 또한 고려대학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30만 단어의 중국어대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는 말을 하자 중국의 외교부장은 크게 감동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삼국지>나 <수호지>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삼국지는 물론 수호지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많이 읽힌다고 말하니 그는 아주 흐뭇한 표정이었다.
반둥회의에서 돌아와 그런 만남과 대화내용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매우 기뻐하였으며 한중관계에 긍정적인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북한의 손성필과도 만나서 남북관계의 문을 열 수 있는 얘기를 나누었다는 말을 하자 대통령은 즉시 장세동 안기부장에게 “대북 막후 대화를 시도해 보라”는 지시를 했다.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 비밀협상이 진행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얼마 후에 노신영 총리로부터 통일부 장관을 그만두라는 얘기를 듣고 장관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의 배려로 당의 원내총무 일을 맡게 되었다. 한중수교는 노태우 대통령 때 이루어졌지만 사실은 앞서 전두환 대통령의 민항기・어뢰정사건 등의 원만한 처리가 중국과 수교에 물꼬를 텄다고 생각한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장팅옌(張庭延)이 한국대사로 부임을 했는데, 그는 부임하자마자 나를 찾아와 우쉐첸 부총리가 나를 베이징으로 초청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여 베이징에 가서 우 부총리를 만났는데, 우 부총리는 나를 ‘조어대’라는 국빈관에 초청하여 최고의 예우로 나를 대해주었다.
후진타오-시진핑과 나와의 우정
현 주석 후진타오(胡錦濤)와는 한중수교 이후인 1994년부터 우쉐첸의 배려로 알게 되었다.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지금의 새누리당인 민자당 정책위 부의장 자리에 있었다. 그는 당시 권력서열 5위로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다. 한중수교 이후 한중관계는 북한을 의식해서 경제협력에만 치중하고 있지만 나는 앞으로 정치외교 협력에서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제의했었다. 그후 후진타오와는 1996년 국회 문공위원장으로서 베이징에서 다시 만났는데, 이때 나에게 충칭(重慶)의 임시정부 유적관리에 관하여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1997년 대선정국에서도 한나라당 대표단과 함께 회합을 하는 등 여러 차례 만나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1998년 후진타오가 부주석으로 서울에 왔을 때 나는 야당 국회의원이 되어 조찬회동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이때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송환문제를 제의하였다. 그리고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게 말하여 남북공동으로 유해발굴작업을 하기도 했다. 여순 현지에서 일본연구가 최서면 선생 전하는 당시 여순감옥소 소장 가족들의 증언을 근거로 발굴작업을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후진타오도 “안중근 의사는 한민족의 영웅이자, 중국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고 하면서 안 의사의 이토저격을 격찬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평화를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삼정론(三鼎論)’으로 보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이 주장하는 자국중심(주종관계)의 동양평화론과는 다르다. 앞으로 동북아의 세력균형과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평화정책에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2005년 후진타오가 국가 주석이 되어 서울에 왔을 때도 중국측의 배려로 신라호텔 조찬에서 만나 옛정을 나누면서 한중관계에서의 민간외교 역할을 했다. 나의 중국연구와 인적 교류는 동북공정(東北工程) 문제로 한중간 외교마찰이 생겼을 때 민간외교사절로서 중국에 가서 관계자들을 만나 이 문제를 완화시키는데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다음 달에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시진핑(習近平)과는 2005년 그가 저장성 당서기로 있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 반갑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가 상하이 서기를 거쳐 중앙무대에서 활동하는 동안 우리는 우호적인 관계를 변함없이 유지해 왔다. 시진핑은 체구도 크고 호탕하고 활달한 성격의 지도자이다. 후진타오가 차분하면서도 이념적 성향이라면 시진핑은 통이 큰 개방적 지도자형이므로 앞으로 한중관계와 북한을 보는 시각도 달라질 것으로 생각이 된다.
제주도 서복공원과 한중관계
중국의 지도층이 특별히 제주도를 방문하는 이유는 고대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기 위해 서복(徐福)이란 사람이 제주도에 왔었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복이란 인물이 동남동녀 500인을 거느리고 제주도에 와서 불로초를 찾다가 돌아갔다는 전설이 유래되어서 오늘날 서귀포(西歸浦)란 지명도 생겼다고도 한다. 서복은 불로초를 찾다 일단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많은 사람을 대동하고 다시 제주도로 왔다. 또한 그는 일본 규슈지방에서 살다가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그 후손들이 일본에 살고 있으며 그 족속에서 일본의 총리가 나왔다는 말도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거하여 제주에 서복공원을 만들었는데 내가 국회 문화체육공보위원장으로서 예산지원을 하도록 조치하였다. 그곳에 서복의 석상과 표지석(원자바오의 휘호)을 세우는 일에 관여한 덕분에 나는 제주도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이곳은 후진타오와 시진핑 등 중국의 주요 인사들에게 서복의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한중관계를 정서적으로 엮는데 소중한 장소가 되었다. 제주도의 서복공원과 기념물은 한중관계의 깊은 유래를 실감케 함으로써 중국의 고위층까지 스토리가 있는 관광지로 제주도를 찾게 하고 있으며, 많은 중국 관광객들을 유치하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정리 : 임광수 前 한국자유총연맹 매체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