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4 (일)

  • 맑음동두천 22.5℃
  • 맑음강릉 13.1℃
  • 맑음서울 22.7℃
  • 구름많음대전 18.3℃
  • 흐림대구 11.6℃
  • 흐림울산 10.9℃
  • 광주 13.1℃
  • 부산 12.2℃
  • 흐림고창 14.8℃
  • 흐림제주 14.6℃
  • 맑음강화 21.3℃
  • 구름많음보은 16.4℃
  • 흐림금산 16.3℃
  • 흐림강진군 11.0℃
  • 흐림경주시 10.2℃
  • 흐림거제 13.4℃
기상청 제공

나라가 잘못 되는 7가지 요인

나라가 잘못 되는 7가지 요인

 

 

1. 원칙 없는 정치 - 목표가 있어야 원칙이 있다.

2. 노동 없는 부(富) - 노동은 종교이고 철학이다.

3. 도덕 없는 경제 - 투명성과 상생경영이 도덕경제다

4. 인격 없는 교육 - 인격은 함양이다.

5. 인간성 없는 과학 - 생명은 조작할 수 없다.

6.희생 없는 종교 - 살신(殺身)이 성인(成仁)이다.

7. 양심 없는 쾌락 - 진정한 쾌락은 마음의 쾌락

 

원칙 없는 정치, 노동(노력) 없는 부, 도덕 없는 경제(상거래), 인격 없는 교육(학문),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 양심 없는 쾌락, 이 일곱가지는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에서 나온 말이다. 간디는 이 일곱가지의 사례를 이른바「7대 사회악」이라고 지칭하면서 인도의 후배 정치지도자들에게 하나의 경책으로 들려 주었던 것이다.

간디는 1948년 저격범의 흉탄에 맞아 79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근대 인도의 건국자임을 오늘날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간디의 이 말은 1940년대 인도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말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일면 새롭고도 일면 절실한 정치적, 사회적 관심을 집중시키는 격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간디가 살다간 시대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이 7대악의 침해를 더욱 심각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간디는 단순하게 「사회악」이라고 표현했지만, 지금 우리들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이 일곱가지 일은 일반적 사회악을 넘어서 나라를 아주 잘못되게 하는 「7대 요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간디의 이 7가지의 요인을 들어 역(逆)으로 나라가 잘 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무엇인가를 천착, 음미해보고져 한다.

1. 원칙 없는 정치 - 목표가 있어야 원칙이 있다.

첫째로 먼저 원칙 없는 정치이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나, 집단이나 조직에 있어서나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이다. 원칙이 없으면 명분이 살 수 없고 명분이 살지 못하면 어떠한 일이든 성사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 정치에 있어서랴. 나라의 정치에 원칙이 없다면 그 사회, 그 국가는 혼란과 정체를 면할 수 없는 것이 필연이다. 그리고 원칙은 아무렇게나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확고 부동한 목표가 확립되어질 때 비로소 세울 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지나간 이야기 이지만 2003년에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란 명칭 외에 무엇이 국정의 목표인지 국민들은 그때 당시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수도이전, 과거사 청산, 기업도시 혁신도시 건설, 북한 봐주기, 반미․반일감정, 강남집값 때려잡기, 대개 이러한 것들이 얼핏 떠오르는 정책 목표인 것 같았고, 그리고 그 후에 와서는 소위 「양극화」가 이 정부의 화두로 대두 되었다. 국민을 확실하게 편 갈라서 양극으로 대립시켜 놓고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것이 아닌지 모르게 했다. 수정주의(Neo-Marksism), 즉 신좌파주의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배운자와 못 배운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이런 식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이분법적으로 양단하여 갈등과 대립, 그리고 계급적 투쟁으로 역사의 전개를 시도하려 한다. 노 정부도 이와 크게 다를바가 없는 것 처럼 느껴지게 하는바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이명박 대통령 정부도 크게 다른 것은 없는 것 같다.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는 확고부동한 국정의 목표가 크게 부각되지않고 있으며 오히려 세종시, 4대강, 한미FTA 문제 등으로 국론분렬, 국민갈등이 깊어진 상태이다. 거기에 더하여 남북문제도 원만치 못하다.

어디에도 목표와 원칙있는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

60-70년대 국가재건기의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군사독재 시대라고 혹평하지만, 그러나 이 시대에는 확실하게 국가의 목표만은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조국근대화」였다. 조국근대화의 기치아래 지속적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달성, 중화학공업의 육성, 수출입국의 토대확립, 그리고 농촌자립의 새마을 운동 등이 전개되었고, 이러한 일련의 정책과 원칙들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큰 국가목표가 있었으니까 그에 따른 정책의 원칙들이 수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중국, 곧 오늘날 사회주의 중국에 있어서 공자(孔子)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공자는 1919년 5.4운동 때 이미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모택동의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더욱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특히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대에 있어서 공자는 제일의 타도대상 이었다. 산동성 곡부의 공묘(孔廟)를 비롯해서 그 넓은 중국 전역에서 유형적인 공자의 상징물들은 모조리 파괴됐다. 이유는 공자는 봉건군주제의 정신적 지주이고 노예제의 옹호자이며, 때려 부수어야할 구문화의 종사(宗師)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보다도 더 자본주의화하고 있다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공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되살아났다. 「공자기금회」와 「국제유학연합회」가 활발한 학술활동을 전개함은 물론 정부에서조차 정신문화의 새로운 건설차원에서 공자를 재조명하고 있다. 한 때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떠들고, 지금에 와서는 공자가 살아야 중국의 문화적 정체성이 살아 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중국은 오늘날 전세계 국가들에 5백여개가 넘는 공자아카데미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공자를 높이는 것이 중국을 높인다는 생각에서다. 왜 공자가 다시 살아날까. 그것은 인류역사가 살아있는 한 「공자의 정신문화」는 세계적으로 영원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이것은 현대중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살리는데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생전에 정치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러나 그는 오늘날 시대에 있어서도 높게 평가받을 수 있는 정치목표(국가목표)와 원칙의 확립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훌륭한 사상을 남겨주고 있다.

공자는 자기 인생의 이상을 「수기이안백성(修己而安百姓)」에 두었다. 나를 닦아서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이 말에서 보면 자신의 인격적 완성과 안백성(安百姓), 즉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설익은 인격을 가지고 국가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공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공자는 정치의 목표를 족식(足食), 족병(足兵), 민신지(民信之)에 두었다. 이 것은 논어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것으로 제자 자공(子貢)의 물음에 대하여 답한 말이다. 모두 아는 바이지만 족식이란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 곧 백성을 잘먹고 잘살게 하라는 것이다. 경세제민(經世濟民) 즉 경제(經濟)를 잘하라는 것이고, 족병은 나라를 지킬 군대와 군비를 부족함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지금의 개념으로는 안보를 굳건히 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다음 민신지(民信之)는 백성들이 신뢰케 하라는 얘기다. 봉건군주의 시대건,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건 정치에 있어서 지도자는 백성들의 신뢰를 사야한다. 공자의 말에 따르면 민무신(民無信)이면 무립(無立)이다. 백성이 신뢰하고 따르지 않으면 어떠한 정권도 설수가 없다는 것이다.

먹을 것을 풍부하게 경제를 잘하고, 나라를 잘 보위하며,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공자의 이런 정치적 목표는 오늘날 21세기에서도 변함없는 진리가 되고 있다. 어떠한 정부든지 이 세 가지만 정치에서 실행할 수 있다면 그 정부는 성공한 정부일 것이다.

다음 공자는 이러한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는데 있어 그 방법론적 원칙을 정(正, 바르게 하다)과 정명(正名)에 두었다. 정치학 원론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중의 하나가 “정자 정야(政者 正也, 논어 顔淵)”이다.

정치란 바르게 한다(잡는다)는 뜻이다. 구부러진 것을 바르게 펴고 옳지 못한 것을 옳게 바로 세우는 것이 정(正)이다. 그리고 정명은 직역하면 이름을 바로 세운다는 것인데 공자의 말을 따르면 군군(君君-임금은 임금답게), 신신(臣臣-신하는 신하답게), 부부(父父-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자(子子-아들은 아들답게) 하는 것이 정명이다. 명분(이름)과 실(實)을 일치시키고 권분(勸分)하라는 뜻이다.

공자의 정명론에 따르면 예를 들어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모든 언행을 해야 하고 동시에 권분, 즉 권한을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직분에 따라서 그 고유권한을 잘 분할(分轄)하는 것, 이것이 또한 정명(正名)의 원칙이다.

원칙 없는 정치는 국정의 목표가 확고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국정의 목표가 확고하지 못하면 나라는 발전할 수 없다. 공자의 정치적 목표와 방법적 원칙을 여기에 제시해 본 것은 오늘의 우리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해 보자는 의미이다.

2. 노동 없는 부(富) - 노동은 종교이고 철학이다.

노동 없는 부가 사회악이라고 말한 간디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부에는 대략 두 가지 종류가 있을 법 하다. 첫째는 재벌 2세나 3세처럼 운이 좋아서 많은 상속 재산으로 부를 누리는 류가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부를 창출하는데 기여를 많이 하여 부자가 된 유형일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의 경우는 여러 가지 케이스가 있을 수 있다. 심신이 고달프게 노력에 노력을 기울여 부를 만든 사람이 있는가하면 로또나 부동산투기, 또는 뇌물 수수와 같은 방법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자들도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누구나 속으로는 부를 희구하면서도 이것이 무의식적으로 집단의식화하면 강한 반부(反富)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부의식이나 현상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이다. 누구나 부자로 잘 산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가치있는 선(善)이다. 가난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바람직한 것도 결코 아니다.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주의자로서 영국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국민운동의 선봉자였다. 그는 손수 물레질을 해서 천을 만들 정도로 근검하고 청렴했다. 젊은 시절 변호사의 직업을 가졌지만 결코 부자가 될 그런 기회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부당한 이득으로 부를 축적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아마도 보고 들었을 것이다. 간디는 부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노력 없는 불로소득이나 또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일생을 빈둥거리는 사람들이나, 노동 그 자체를 아예 천시하여 일하지 않고 놀고 먹으려는 게으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노동 없는 부는 악이라고 했던 것이다. 문제는 노동관에 있다.

우리 사회에는 매우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오래 전부터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실업자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반하여 기업들은 구인난을 겪고 있는 곳도 있고 중국동포나 동남아등지에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취업해 돈을 벌고 있다. 한국 젊은이들의 대량 실업 속에서도 많은 외국 노동자들은 이 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례들을 우리는 수많이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들의 노동관에 문제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사회에는 노동기피 내지 노동경시의 문화가 있다.

이러한 노동기피 문화의 발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의식이 철두철미하고 문치주의의 전통에 강했던 전통적인 우리의 유교주의(儒敎主義)에서 비롯되고 있다할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유교, 특히 성리학이 개인의 사적이익을 경시하고 대 사회적 공적 이익에 봉사하는 것(滅私奉公)을 사대부들의 사명으로 가르치고, 또 그렇게 많이 실천해왔지만 힘이 드는 육체적인 노동은 기피해 온 게 사실이다. 이러한 전통적 의식이 오늘날까지 유전되고 있다는 것은 3D업종의 기피 현상에서 잘 드러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있어서 모든 부와 가치는 노동에서 비롯됨을 우리가 인식할 때, 이제 노동 그 자체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노동, 즉 우리가 일을 한다는 것은 생계를 단순히 꾸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속에서 인생을 실현해가는 또 다른 과정이 있다는 것을 하나의 노동철학으로 확립해야한다는 말이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서양의 자본주의는 기독교의 노동철학과 직업관에서 발전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서구 기독교의 칼뱅주의(Calvinism)는 노동은 신의 소명(召命)이고, 그리고 직업노동은 신의 구원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므로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고 근면하게 임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실하고 근면한 노동과 그에 따른 부의 발생과 축적에서 종교적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신의 구원을 확보하는 행위이다. 결국 성실하고 근면한 직업노동이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노동은 종교적으로 신성한 것이고 영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도 이미 당(唐)대에 백장선사(百丈禪師)라는 분이 선농(禪農)일치를 주장한다. 그는 모든 승(僧)들에게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라고 하여 노동과 수행이 둘이 아님을 강조하여 성불의 길을 선농일치에서 찾고자 하였다. 또한 일본에 있어서도(鈴木正三의 경우) 세간의 노동과 직업에서 성불하는, 종교적 완성의 길을 찾고 있다. 예컨대 농민은 성실하게 일하여 많은 수확을 올리는 것, 그리하여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만드는 일이 성불의 길이고, 상인은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일하여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이 많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길임과 동시에 스스로 성불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예에서 본다면 노동은 정신적․종교적 가치와 의미를 가진 성스럽고 귀중한 활동이다. 이러한 노동철학과 직업관을 가진 나라는 개인도 행복하고 나라의 경제도 크게 발전할 수 있다.

3. 도덕 없는 경제 - 투명성과 상생경영이 도덕경제다

경제라는 말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이다. 이 말은 박시제중(博施濟衆)과 더불어 이미 중국의 공자시대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세상을 잘 경영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는 것이 경제이다. 그러니까 경제란 말 속에는 「경영과 구세」라는 철학이 들어 있다. 기업은 궁극적으로 이윤의 추구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경제활동이란 측면에서 보면 경세와 제민의 도덕적 이상을 무언 중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업은 도덕성을 잃어서는 그 존재가치를 훼손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뜻에서 간디는 경제에서 도덕성을 매우 중시했던 것이다. 조선일보의 김영수(金泳秀)기자는 「왜 우리에겐 존경받는 기업인이 없을까」란 칼럼에서 교세라그룹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 회장의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본 젊은이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일본기업인이 누구냐’ 고 묻는다면 비슷한 답이 나온다. 마쓰시다 전기 그룹의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쓰케, 혼다 자동차의 창업자 혼다 쇼이치로, 그리고 교세라(세라믹 제조업체) 그룹의 명예회장 이나모리 가즈오 등 3명이다. 이 중에서도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은 일본식 표현으로 경영의 신(神)으로 불리는 인물이다.......이나모리 가즈오가 존경받는 이유는 ‘투명경영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27세에 단돈 3000만원으로 창업, 매출 40조원짜리 대기업을 키워낸 그의 경영철학은 ‘기업은 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며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얻은 이익만이 기업이 추구해야할 참된 가치’라는 것이다“.

국내서열 1, 2위인 삼성과 현대차 그룹이 막대한 비자금과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기업주가 사법적 처벌을 받았던 사실이나 다른 많은 대기업들도 이와 유사한 일들로 고민에 빠졌던 일, 그리고 과거 여러 대기업들이 분식회계를 통하여 부도덕한 경영행태를 일삼은 것 등 우리의 경제현실은 이나모리 가즈오 명예회장이 강조하고 있는 ‘기업의 도덕성과 투명경영’하고는 실로 큰 거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언제나 우리기업이 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투명경영의 맑은 풍토를 향기롭게 조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전통 속에는 이미 이러한 기풍의 경영철학이 무르익은 바 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12대(약 400년간) 만석꾼 경주 최부자 집의 정신(곧 家訓)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문반의 고상한 신분은 유지하되 부와 명예를 독점해서는 안된다)

재산은 만석이상 모으지 말라

(만석이 넘으면 그것은 소작인의 몫으로 돌렸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식객이 많을 때는 100여명, 년간수입 3천석 중 1천석은 접대에 썼다)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매입하지 말라

(흉년이 들면 가난한 농민들이 호구를 위해 전답을 헐값에 팔게

되므로 이를 사서는 안된다)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살림을 맡아하고 안의 경제권을 가진 부녀자들에게 절약,

근검을 익히기 위해)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남도 살리고 나도 사는 상생을 위해)

(

이상은 무려 4백여년동안 부와 명예를 지속해 온 최부자 집의 가훈으로써 이른바 수신제가라고 할때, 제가철학(齊家哲學)의 훌륭한 전범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와같은 제가철학은 크게는 유교의 인의(仁義) 정신을 대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서 오늘날 보면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경영학 원리」이기도 하다.

동양 전통의 유교적으로 보면 인(仁)의 무한한 실천이요, 불교적으로 보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이다. 또한 서구적 개념으로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고상한 신분, 거기다 남보다 더 가진 자가 베풀어야한다는 도덕적인 사회적 의무의 실천인 노블레스 오블레제는 로마제국을 1천년동안 지탱케한 정신철학이었다.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들이 먼저 솔선 수범하여 최전선에 나아가 피 흘리며 싸웠고, 공중(公衆)을 위해 있는 재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시켰던 것이다. 국가를 위해 사회적인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로마 귀족들의 사상이었고 이러한 것들이 그 제국을 1천년이나 건재하게 만들었다.

4. 인격 없는 교육 - 인격은 함양이다.

우리사회에서 인성교육의 중요성이 늘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인성교육 내지 인간교육이 학생들의 성숙한 인격 형성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숙한 인격을 가진 젊은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면 될 수록 그 나라의 국민적 도덕수준도 크게 향상될 수 있다. 선진국들을 보면 물론 경제력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이에 앞서는 것은 역시 국민적 도덕 수준임을 잘 알 수 있다.

인격이란 한 사람이 갖는 자질과 능력, 그리고 도덕성을 의미한다. 「전경련」자료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나라 기업들이 바라는 인재상(人材像)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전문지식과 폭넓은 교양으로 무장된 사람

국제감각과 외국어 구사능력을 가진 사람

진취적인 사람

도전과 성취의식이 있는 사람

유연한 사고와 창의력을 가진 사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

인간미 있는 사람

책임감 있는 사람

협력하는 사람

예의 바른 사람

이상 열가지중 꼼꼼히 살펴보면 첫째와 둘째를 제외하고 나머지 8가지는 인격개념에 드는 것들이다. 이 열 가지 요소는 비단 기업의 인재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이 오늘날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자질과 능력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보면 인격 없는 교육이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암기식, 주입식의 단순 지식교육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한술 더 떠서 모 대안학교에서는 선생님을 학생들이 「양아치」라 부르고 도덕은 「똥떡」이라 부르면서 교육을 한단다.

“무엇 때문에 도덕을 「똥떡」이라 하는가? 기존 도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서, 왜 선생님을 「양아치」라 부르는가? 선생님이라는 권위를 없애고 학생이나 선생이나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다”라는 대답은 그곳 선생의 말이다. 대안학교의 대안교육이 이 지경이니 교사가 교사를 성폭행하고, 학생이 선생님을 욕하거나 때리고, 밤새도록 감금하는 사례가 비일비재 할 수 박에 없다. 덕성교육, 인격교육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는 소이(所以)가 이런데 있다.

항공기술 공학자로서도 명성이 높은 압둘 칼람(Abdul Kalam) 인도 대통령은 몇해전 방한 중「대학교육과 국가 발전」이라는 연세대의 특강에서 현대는 지식과 기술이 이끌어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학생의 능력을 배양해야한다고 전제하고 도덕적인 리더십, 첨단기술 사용능력, 기업가 정신, 창의력, 탐구정신 등 다섯 가지 항목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압둘 칼람 대통령은 국가 발전의 핵심 동력은 이와 같은 교육이 우선시 되는데 있다면서 특히 도덕적인 리더십을 들어 인격 교육을 강조하였다.

현재 우리 교육계에서는 고교 평준화 정책을 비판하는 소리도 적지 않다. 한편에서는 현행 평준화 정책이나 대학 입시 존속을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학생의 학교 선택권과 학교의 학생 선택권이 자유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도 학생이나 학교가 다 같이 자유로운 경쟁체제를 갖추어야 각자 창의력을 발휘하고 교육 자체의 질을 향상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현행 평준화 정책을 고수하던 또는 자유경쟁 체제를 도입하던 우리가 바라는 것은 어떠한 제도 하에서든지 교육에 있어서 「인격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고 이것은 어느 정도 국가가 앞장서서 주도해야할 것이란 점이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성숙한 인격에 필수적인 것은 충분한 인성교육 내지 인간교육 이다. 그리고 이 교육은 인간의 품성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지식보다 몇 배나 어려운 교육이다.

기술과 지식은 전수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인격」이라는 것은 가르침도 중요하나 스스로 함양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전통 유교사회에서 우리 선조들은 자식의 인격 교육을 위해 임신중 태교(胎敎)로부터 시작해 자식을 낳아서는 아이들에게 쇄소응대(灑掃應對-쓸고 닦으며 묻고 대답하는 것), 진퇴지절(進退之節-나아가고 물러서는 예절), 애친경장(愛親敬長 -부모를 잘 모시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 융사친우지도(隆師親友之道-스승을 존대하고 벗에게 친하게 지내는 도)와 오륜(五倫)을 밝히는 소학(小學) 과정을 거치고, 다음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의 대학(大學) 과정을 꼭 밟도록 하였다. 이 소학과 대학의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아니고 몸으로 익히고 마음으로 체득하는 인격의 함양(涵養) 교육이다. 타고난 본 마음을 잘 보존하고 자신의 품성을 아름답고 선하게 기르는 그야말로 존심양성(存心養性)의 “닦는 교육”이다. 인격은 이처럼 마음을 닦는데서 함양되는 것으로 성의(誠意-뜻을 진실되게 하는 것)과 정심(正心-마음을 바르게 가짐)으로써 주를 삼고, 제가, 치국, 평천하의 도(道)를 갖추는데 있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자신의 저술 성합십도(聖學十圖)에서 소학과 대학의 교육과정을 일관하는 것은 경(敬) 이라고 말하였다. 경이란 「공경하는 마음」,「집중하는 마음」이다. 좀더 풀어 말하면 경이란 내적으로는 늘 공경하고 경건한 마음을 가지면서 일체를 수렴하고 집중하는 것, 그리고 나태함이 없이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한 티끌의 잡념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며, 외적으로는 단정한 용모와 엄숙하고 근엄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퇴계선생에 따르면 소학과 대학에는 많은 내용과 절목이 들어있지만 그 정신은 바로 「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경(敬)을 성학(聖學-유교)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말한다. 소학과 대학의 학문적 특성을 분석한다면 인격을 함양하고 인륜을 밝히며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하는데 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이다. 이점에서 경은 인격의 핵심 개념으로서, 이것은 함양의 요체가 된다. 그리고 함양 자체가 인격 교육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때, 오늘날 우리는 인격교육을 학교에만 전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인격교육은 어려서부터의 가정교육에 중요한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학교나 사회에 있어서의 교육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함양교육이기 때문에 가정교육이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는 것이지 역시 학교가 소중한 것은 지식교육 이상이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장차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갈 때 존중되어야할 인간적 가치, 예의, 도덕, 협동심 등 인간화의 기초교육에 결코 소홀할 수 없다. 자유 민주주의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품성과 소양, 사회적 예의 범절, 민주적 절차와 가치, 국제 사회 에티켓, 세계화 교육 등은 학교 교육의 중요한 몫이고, 이것은 또한 중대한 것이어서 국가적인 관심과 투자가 크게 늘어나야야 할 부분이다.

5. 인간성 없는 과학 - 생명은 조작할 수 없다.

여기서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성을 뜻한다. 그래서 이 주제는 과학과 윤리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라 하겠다. 역사상 인류사회는 인위적인 강제수단인 법(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개인, 사회, 국가는 물론 국제 사회의 질서까지도 통제하고 조절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게 되었지만, 과학 분야에 관한한 법의 통제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과학은 법을 앞서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에 있어서의 인류적 양심과 도덕성은 그 어느 분야 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 하겠다. 일본에의 원폭투하, 구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과 같은 일련의 「과학적 사태」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과학의 잘못된 운용이나, 이용, 혹은 인위적 실수 등은 돌이킬 수 없는 인류의 재앙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양심과 도덕은 과학에서 더욱 필요다. 특히 오늘날 급속히 발전하는 생명과학, 유전자공학 분야에서 윤리적 문제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생명과학의 발전으로 만일 생명조작이 자유롭게 가능해 진다면 우생학 운동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가 있다. 다윈의 사촌 동생인 골턴(E.Galton) 경이 처음으로 우생학을 제창한 이래 20세기 초두에 미국에서, 그리고 1930년에서 1940년까지 10년에 걸쳐서 나치 독일이 강력하게 우생학 정책을 썼던 일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것은 우생 유전자를 갖고 있는 남녀를 선발하여 국가 명령에 의하여 성교를 강요하고 거기에서 태어난 최우수 인종으로 하여금 국가의 전위 부대가 되게 하는 것과 같은 계획도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 분야 학자들에 따르면 유전자 공학의 연구 발전에 따라 장차는 상업적 차원의 우생학 운동이 대두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할 것이다. 금발의 머리에 푸른 눈, 아리아 인종의 유전자를 가진 천재적인 아이를 원하는 어머니들에게 그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DNA 조작의 시대가 올수도 있다는 예상이다. 황우석 교수가 연구하였던 줄기세포 배아복제도 종교계는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유는 생명의 창조 내지 조작은 아무리 「과학」이라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종교적 교의나 도덕적 신념 때문이다.

인류는 아직까지 어떠한 경우에도 생명과학이 존엄한 인간의 인격가치를 몰락시키거나 자연법을 이탈하는 차원에서 생명조작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이기적 목적만을 위해서 육체적, 정신적 성능을 개선하고 능률적인 일을 수행하고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숭고한 인간생명을 공학적으로 조작하는 생명과학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노자(老子)는 일찍이 도생일(道生一), 일생이(一生二 ), 이생삼(二生三), 삼생만물(三生萬物)이라 했다 (도덕경). 즉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 다는 것이다. 하나는 태극이고, 둘은 음양이며, 셋은 음양이기(二氣)에 충기(沖氣)를 더한 것이다. 음양이기와 충기가 모여서 만물, 곧 생명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道)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적 존재이다. 만물이 도에 근원해서 있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도법자연(道法自然)하는 이 도의 세계에서 생명에 대한 인간의 유위적(有爲的) 행위는 결국 순리적 자연법칙을 파괴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또한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에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했다. 인간이 생명을 받아 본성(이성)을 가지게 된 것은 천명이라는 말이다. 결국 인간생명은 천명에 의한 것으로 누구도 인위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성이 없는 과학이 아니라 인간성이 있는 과학은 천부적인 인간 생명을 인위로 해치치 않는다는데 있다 하겠다.

6.희생 없는 종교 - 살신(殺身)이 성인(成仁)이다.

간디가 말하는 희생 없는 종교는 「자기희생 없는 종교」를 의미한다. 종교를 개념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여러 종교가 교의와 신념을 각기 달리하고 또 살아온 역사도 서로 다르고 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디의 말이 자기희생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된다면 이것은 어느 종교에나 통용될 수 있는 종교의 한 본질이 된다 하겠다.

교의 상으로 보더라도 기독교는 사랑, 불교는 자비, 유교는 인(仁)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사랑, 자비, 인은 모두가 하나같이 적던 크던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희생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테레사 수녀가 전 인류를 통해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것은 그녀의 일생이「희생봉사」에 있었기 때문이며, 달라이 라마가 세계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는 것은 주권을 빼앗고 조국(티벳)을 탄압하는 거대 국가(중국)에 대하여 희생적으로 저항하고, 자기 종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불교라는 종교를 통하여 승화시키고 있는 까닭이다.

살신(殺身)하지 않으면 성인(成仁 - 사람이 되는 것)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이 우리 주변에는 살신성인하는, 그래서 그가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종교인 이상의 감동을 안겨주는 사람들이 있다.

몇해 전의 일(조선일보 2006. 3월 4일자)이지만, 자기의 생명을 바꾸어 다른 사람을 살린 정용필(41톤급 예인선 제6대성호 기관장. 64, 전남 목포시))씨의 사연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배가 침몰해 선장과 함께 바다에 빠진 기관장 정용필씨는 자기를 구하려던 다른 배의 선장에게 물속에서 표류 중이던 자기 배의 선장을 먼저 구하도록하고 자기 자신은 구명 뗏목을 탄 채 다섯 시간 넘게 바다를 표류하다 뒤늦게 구조되었으나 오랜 시간 동안의 저체온증으로 결국 숨지고 말았다. 망망대해 절체절명의 순간에 “저 사람을 먼저…” 하면서 생사를 바꾼 이 동료애, 인간애는 말이 그렇지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이다. 문자 그대로 살신성인 이다. 그가 무슨 종교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종교적 성인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저번 천안함 침몰사건에서 보여준 한주호 준위의 순직도 참으로 위대한 살신성인의 모범이라 하겠다.

기독교든 불교든 오늘날 기성 종교는 상업주의에 많이 물들어 있다. 교회와 사찰의 대형화, 물량화는 물론 상업적으로 하는 거래까지도 없지 않다는 점에서 물의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런 뜻에서 한국의 종교는 희생하는, 사랑하는, 자비하는, 인(仁)하는 종교로 거듭 다시 태어나야 하겠다.

7. 양심 없는 쾌락 - 진정한 쾌락은 마음의 쾌락

크게 보아 쾌락(快樂)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육체적, 관능적 쾌락이요, 또 하나는 정신적 쾌락이 그것이다.

간디에서 말해지고 있는 「양심 없는 쾌락」은 이 두 가지중 물론 전자인 육체적, 관능적 쾌락을 의미한다. 정신적 쾌락이란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법열(法悅)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굳이 양심을 거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희랍 윤리학사에서 보면 쾌락주의는 금욕주의와 함께 이미 4세기 경에 대두되고 있다. 아리스토포스를 위시한 퀴레너(Cyrene) 학도들, 그리고 특히 에피큐로스(Epikuros) 학파가 쾌락주의를 대표하고 있으며, 제논(Zenon)의 스토아(Stoa) 학파는 금욕주의의 대표가 된다. 금욕주의는 정념(情念)을 억제하여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이고, 쾌락주의는 “이기적, 관능적 순간의 쾌락”을 통해서 정감적 만족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이기적, 관능적 순간의 쾌락추구는 점점 그 내용을 변용해 간다. 그 이유는 무절제한 관능적(육체적) 쾌락의 추구가 도리어 막대한 고통을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있었다. 그래서 급기야 쾌락주의자들은 좀 소극적이긴 하지만, 보다 영속적인 쾌락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연구하고 그런 내용의 방향으로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은 곧 “고통도 불만도 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ataraxia)”를 얻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기적, 육체적 관능의 쾌락에서 결국엔 “평온한 마음의 상태“라는 새로운 쾌락으로 내용과 방향을 바꾼 것이다. 결국은 ”마음의 쾌락”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음의 쾌락의 추구란 점에서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와도 크게 다를 것이 없이 상통한다.

오늘날 양심 없는 쾌락의 극단적인 것을 예로 든다면 스와핑과 마약일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이 보다 더한 극단주의적 쾌락 추구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은 인륜을 망가트리고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어떻게 더 이상 표현할 수없을 만큼 황폐화 시키고 있다. 천년제국 로마가 망한 것은 부패와 도덕의 붕괴에 있었다. 스와핑이나 마약은 로마를 망하게 한 도덕의 부패보다 훨씬 더 나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쾌락은 “양심있는 쾌락“ 즉 에피큐로스학파처럼 청정한 마음의 쾌락일 것이다.

간디가 지적한 이상 7가지 사회악들은 「…없는」의 전제하에서 부정적으로 씌어진 말들이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까지의 논의들에서 이 「…없는」의 부정의 의미를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의 긍정의 측면에서 각 항의 결론들을 도출하려 노력하였다.

원칙 있는 정치

노동(노력) 있는 부

도덕 있는 경제(상거래)

인격 있는 교육(학문)

인간성 있는 과학

희생 있는 종교

양심 있는 쾌락

이런 것 들이 지금까지 한 말들의 결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각 항목마다「…없는」것을 「…있는」으로 질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은 「나라를 잘 되게 하는 7가지 요인」이 될 것이다. (끝)

 

송재운(동국대 명예교수 jws5989@naver.com)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