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세계 1위를 다투는 미국 애플이 같은 제도를 내놓았다 치자. 하버드대부터 지방 주립대까지 추천 인원을 삼성처럼 나누었다 치자. 미국에서도 반대가 이처럼 거셌을까. 아니다. 미국선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두 나라는 다르다. 미국엔 지방 소외나 지역 감정이 한국처럼 심각하지는 않다. 그러니 단순비교는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공통점도 크다. 두 나라 모두 대학 서열이 있고 두 기업 모두 자율성이 보장된 사기업이다. 그렇다면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해도 삼성에 쏟아진 비난은 합리적 정도를 넘은 게 아닐까.
이번 사건은 기업의 자율성에 대한 중요한 시험이다.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유·무형의 비중으로 보면 물론 삼성은 ‘완전히 자유로운 사기업’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사회의 보편적 가치나 질서에 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라면 삼성에도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민주당과 정의당, 진보단체, 호남에서는 이 ‘보편적 질서’를 문제 삼았다. 일개 기업이 공개적으로 대학을 서열화하고, 영남에 비해 호남을 차별했다는 것이다. 서열이라는 사실은 맞다.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순위로 삼성은 서열을 정했다. 그리고 호남에 비해 영남권의 추천 인원이 많은 것도 맞다. 하지만 이미 언론사 등 많은 기관에서 대학 서열을 매기고 있다. 고교생은 더 열심히 공부해 서열이 앞선 대학에 들어가려고 하고, 서열을 근거로 인생을 설계하며, 서열을 극복하려 노력도 한다.
총장 추천제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연간 20만 명이 몰리는 ‘삼성 입사고시’ 과열을 막고, 총장 등 교수진의 권위를 살려 면학 분위기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학교마다 제도를 잘 활용하면 ‘사회적 약자’에게 힘이 될 수도 있다.
이번 사태에서 승자는 없다. 우리 모두 패자다. 무엇보다 뼈아픈 대목은 우리 사회에 잠복해 있는 온갖 프레임들이 한꺼번에 난무한 점이다. 저마다의 입장에서 지역 감정 프레임, 남녀 평등 프레임, 대학 서열화 프레임을 갖다 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따로 없다. 침대보다 짧으면 사지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 죽이는 독단적 사고방식이 판쳤다. 이런 곳에서 변화와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는 이번 삼성 사건 같은 많은 실험이 필요하다. 국가 예산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면 기업이나 단체의 실험을 사회가 포용하는 것도 발전 아닐까. 한국 사회는 표면장력으로 팽팽한 갈등의 비눗방울 같다. 솔잎으로도 빵 터진다. 솔잎도 문제지만 비눗방울도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