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말
대한민국에서 좌파들이 가장 확실하게 헤게모니를 구축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사의 영역이다. 한 국사학자·교사·조직 등 모든 인적 자원, 제도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교과서 시장까지 완전 장악하고 있어서 재생산 기반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좌파들은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거부하거나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이미 시대착오적이라는 판명이 난 다음에도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들의 눈에는 국민은 단지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각종 캠페인에서 80%의 국민, 99%의 국민이라는 말이 서슴없이 쏟아져 나올 수 가 없다. 소수가 되었건 다수가 되었건 간에 국민의 일부를 적으로 돌리는 일은 결국은 폭력을 통한 지배 로 귀착된다.
이와 같은 민중론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한국사학 세력이다. 한국사학자들이, 그것도 다수가 민중사학을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민중이란 말은 ‘people’이라는 영어의 번역어다. 이 번역어는 1945년 해방의 시기에는 인민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인민위원회·인민공화국 같은 합성어들이 즐겨 사용되었다. 6·25전쟁을 통하여 인민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질색을 하게 된 대한민국 국민은 인민이라는 용어에 체질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극렬 좌파들의 인민이라는 말에 대한 애착은 사라지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인민혁명당이라는 조직도 다시 생겨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을 장악하는 것이 목표인 좌파들이 대중이 혐오감을 가지는 말을 사용할리는 없다. 그래서 등장한 말이 민중이다. 민중이란 말은 인민이란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여 내용적으로 아무런 의미의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한국사학자들은 이 민중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1987년 이후부터 공공연히 민중사학을 들고 나왔다. 민중사학이라는 말은 민중 즉 인민을 변혁 주체로 설정하고, 한국사학이 한국사회의 변혁이란 목적에 봉사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전형적인 정치 이론이다. 해방이후 북한이 걸었던 길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은 스탈린의 인민민주주의 노선을 통하여 사회주의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 사회주의는 다시금 공산-파시즘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 유례없이 완벽한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학자들은 민중사학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1989년 이후에도 아직까지 이 민중사학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사학은 세계의 역사학계에서 고립 된 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 고립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상황 2012∼2013
그렇다면 현재의 한국사교과서는 어떠한 이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어떠한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가? 한국사 교과서라는 것이 좌파 진영의 전략·전술적 목표에 어떻게 부합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답하기 위해서는 2012∼13년이라는 지형에서 좌파 진영이 처한 상황, 그리고 그들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2012∼2013의 상황은 대선을 통하여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하여 취임하면서 좌파 진영이 기존의 전략적 목표를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 변곡점이 만들어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2012년 연말 대선을 치르면서 좌파 진영은 대선의 승리를 낙관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있었다. 민주통합당, 안철수 지지 세력, 통합진보당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였고 여야 간에 팽팽한 긴장 국면이 조성되어 있었던 까닭에 높은 투표율까지 나와서 잃어버린 권력을 5년 만에 다시 찾을 수 있다고 기대했고 또한 자신하기까지 하였던 것 이다.
하지만 좌파의 광범위한 단결은 또한 보수파의 광범위한 단결을 조성하게끔 하는 동인으로도 작동 하였다. 이와 같이 양측의 세력 결집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좌파 진영이 사용한 무기 중의 하나가 ‘백년전쟁’ 이라는 동영상이었다.
‘백년전쟁’은 역사가 미디어를 통한 선거 수단으로 활용된 본격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 선거전에 역사학 자·영화감독·민족문제연구소·시민단체가 총체적으로 가담하였다. 좌파들이 내거는 사회참여 활동을 한 것이다. 이 영상물은 2백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함으로써 선거전에서는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범좌파연합은 결국 패배하였다. 그 이유는 본론에서 논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에 대비한 좌파의 전략적 목표들이 수정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대선에서의 패배는 좌파 연합전선의 붕괴를 가져왔다. 민주당-안철수 연대는 해체되었고, 통합진보당은 분열되었으며, 정의당은 ‘진보’라는 이름조차 당명에서 삭제하였다. 민주당은 그 내부에서 조차 통일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던 중 교학사 교과서가 제1차 검정에 통과되었다는 소식이 2013년 5월에 전해졌다. 그리고 이 소식은 흩어졌던 좌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좌파들은 10여년간 이념적으로는 깊은 공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민중을 중심으로 한 역사관이 이들을 하나로 묶는 역사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파벌을 불문하고 민중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 즉 스탈린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인민전선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은 좌파들의 공통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인민전선은 공산주의를 노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불리한 상황에서 광범위한 대중을 공산주의적 이념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디미트로프에 의하여 테제로 표현되었다. 1945년부터는 소련과 북한 그리고 남로당에 의하여 대한민국에 반대하여 인민공화국을 세우고자 할 때 사용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이후에도 인민혁명당·통혁 당·남민전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문제는 1989년 이후에도 이러한 시도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고, 앞서 언급하였던 민중사학을 표방하는 역사학 연구자들과 단체들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1989년 이전에 주창하였던 민중사학을 지금까지 신주 모시듯 받들고 있다는 점이다. 믿기 어려운 이 현실을 2013년 검정 과정 그리고 검정에 통과된 교과서의 내용을 통하여 밝혀 보기로 하자.
좌편향 한국사 교과서의 왜곡
대한민국의 역사는 인민공화국를 세우자는 세력과 대한민국을 세우자는 세력과의 투쟁의 역사이다. 인민 공화국을 세우자는 민중사관(인민사관)이 한국사 교과서를 장악하고 해방 전후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인민을 강조하는 자는 계급투쟁을 통해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지금 7종의 좌편향 교과서 모두가 해방 후 인민위원회 운동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는 유엔 감시하의 남한 자유선거를 서술하고 소련에 의한 북한 공산화를 언급하였다 반면 좌편향 교과서 5종은 미국은 직접통치, 소련은 간접통치를 했다고 하여 친소반미를 분명히 보이고 있다. 나머지 2종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결국은 인민공화국을 세우자는 인민위원회 운동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역시 명확하게 반미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같은 역사인식은 북한에서 간행된 선전물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1948년 11월 1일 북한 문화선전성에 나온 선전물에서는, 소련은 “해방된 조선의 주인은 반드시 조선인민 자체”라 언급했고, 미국은 “군정을 실시하여 일제총독통치기구를 그대로 답습했다.”고 하였다.(『북조선민주건설 사업에서 위대한 쏘련이 북조선 인민들에게 준 정치경제문화상 방조』, 1948)
좌편향 교과서들은 20세기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왜곡 내지는 오해하고 있다. 20세기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전체주의적 이념과 힘들게 투쟁하면서 성장하는 시기였다. 자유민주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간주되었으나 이에 도전하는 세력 역시 강하게 성장하였다. 한편에서는 파시즘이 다른 한편에서는 공산주의가 자유민주주의 체제 를 공격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좌편향 교과서들은 이러한 세계사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의 대립으로 국면을 구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공산주의 이론에 따라 역사발전 단계를 설정하고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의 단계적 발전이 있다는 전제하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가진 나라들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로 이행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논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이론적 도구는 사회구성체론이다.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는 모두 사회구성체론적 용어이다. 그런데 이런 사회구성체론적 틀을 가지고 세계를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사회주의)라는 대립구도를 설정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유인가 예속인가”가 핵심적인 전체주의에 대한 투쟁의 내용이었던 역사를 왜곡하여 그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이같은 서술은 청소년들을 반자본주의적으로 만들고 자유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를 이해할 수 없게 한다.
뿐만 아니라 좌편향 교과서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2종의 좌편향 교과서(천재교육·미래엔)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을 부정하고 남한에서만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한다. 이는 유엔의 결의안을 왜곡·부정하는 것인 동시에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좌편향 교과서는 북한군에 의한 학살은 그 사례를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미래엔은 오히려 국군에 의한 학살의 예라고 하여 “거창양민 학살사건”을 지목 하였다. 6·25에서 북한군의 만행은 감추어주고 국군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실으려 한다. 또한 베트콩의 비정규전에 의해 한국군이 많이 희생된 것은 감추고 한국군이 베트남 양민을 학살하거나 희생시킨 것으로 왜곡 서술하고 있다.
좌편향 교과서의 지키고 싶은 마지막 보루
좌파 역사교과서가 온갖 왜곡을 담은채로 학생들에게 다가가려다가 철퇴를 맞았다. 교육부가 10월 21일 8종 교과서 829건에 대하여 수정 권고를 내린 것 이다. 이에 대하여 교학사 교과서는 수정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7종 교과서는 일부는 수정하고 일부는 거부하였다(10월 31일). 그렇다면 그 교과서들이 수정을 거부한 것들 중 핵심적인 사항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인민민주주의 혁명 노선에 관련된 부분이라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제 토지개혁을 예로 들어 그 점을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7종 교과서 전체가 무상 몰수, 무상 분배라는 표현에 집착하고 있는데, 왜 이같은 일이 일어날까? 수정 요구를 거부하는 7종 교과서는 무엇에 근거하여 수정 요구를 거부하는 것일까? 어이없게도 이들이 거부 하는 근거는 “근로 농민적 토지 소유권”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을 누가 주장하였으며 누가 소개하였는가?
이는 북한의 김한주가 『토지개혁 후 조선 농촌의 토지소유 관계』(평양:조선로동당출판사, 1953)에서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김성보가 『남북한 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 - 북한 농업체제의 형성을 중심으로』(역사비평사, 2008)라는 제목하에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소개하였다. 결국 북한의 주장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근거로 하여 교육부의 수정 권고를 거부한 것이 다.
그렇다면 근로농민적 소유권이라는 말은 어떤 개념 인가? 김성보가 소개하듯 “북한의 토지관리정책이 좀 더 세밀한 수준에서 결정된 것은 1950년 1월 7일 내각 결정 제3호로 채택한 「토지행정에 관하여」를 통해서 이다.” 이에 따르면 토지는 분여경지·개간지·자작지· 경작권지 등 네 종류이다.
북한에서 토지개혁 당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자작지였다(전 경지면적의 44.5%). 그런데 농민의 자작지는 토지개혁의 대상이 아니었다. 단 토지개혁을 통하여 소유권이 제한을 받게 되었다. “매매·양도를 할 때 도(평양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또한 매수자나 양수자는 반드시 경작능력이 있는 자여야 한다는 규정을 두었다”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다음으로는 분여지·개간지 인데 이에 대해서는 매매·양도·저당이 금지되었다. 이 말은 소유권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한 가족이 가족의 힘으로 경작하지 못할 때는 인민위원회에 반환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속도 불가능하고, 이주나 전업시에도 매각이 불가능한 토지이다. 그런데 이 토지에 어떻게 소유권이 있다는 것인가?
북한의 용어로 경작권지(부동토지)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이는 “자작지나 분여지·개간지의 토지소유자가 직접 경작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도(평양시)인 민위원회에 반환한 토지 등 그 토지의 소유권자가 농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된 토지를 지칭 하는 것”을 말한다. 이 토지는 토지가 부족한 농민에게 다시 분여하거나, 인민위원회에 귀속되었다.
그렇다면 북한의 토지개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지주의 토지를 무상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지주가 부리던 소작인을 국가가 부리는 소작인으로 변경 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무상분배라는 것은 애당초 존재할 수 없었다. 소작농의 주인이 지주에서 국가(인 민위원회)로 바뀐 것 뿐이다. 북한의 토지개혁의 궁극적 목표도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경작권마저 박탈하여 집단농장의 농업노동자(노 예)로 만드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던 것이다.
맺 음 말
현재 대한민국 한국사 학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 국사학자들 다수가 민중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사학자들 모두가 민중사학의 추종자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학계의 분위기가 영향을 주어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드러내놓고 표명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대한민국 국사학계의 장래를 위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하여 민중사학을 과감하게 비판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한민국의 국사학계는 미래가 없다.
민중사학의 지속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국사학계는 편하고 쉽게 학문을 하고 교육을 했다. 안으로는 문을 걸어 잠그고, 마치 쇄국정책을 쓰듯 세계의 학술적인 조류에 눈과 귀를 닫아버렸다. 오로지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서 이익을 획득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특정 정치 이념에 봉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같은 행태야 말로 역사학이 죽는 길이다. 그리고 우리의 청소년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이다.
국사학계의 양심선언이 나와야 한다. 과감히 민중사학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자료 출처 : 월간 충호 2014년 1월호(통권 24호) / 코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