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논설실장
언제든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역량과 기반을 가진 강한 야당은 반드시 필요하다. 불행히도 현재의 민주당은
이와 거리가 멀다.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과 새누리당의 ‘무기력’을 고려하면 더욱 안타깝다. 민주당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총선·대선에서
연패한 직후인 지난해 1월 14일 출범한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문희상 위원장은 “60년 정통야당이라는 역사만 빼고 모든 것을 바꾸겠다”면서
“사즉생(死卽生)”을 외쳤다. 4개월 뒤 5·4전당대회에서 선출된 김한길 대표는 “영혼만 빼고 모든 것을 버려야 살 수 있다”고
했다.
과연 버리고 바꿨는가. 문 위원장은 책임을 뼈아프게 인정하고 제살을 깎아내는 혁신을 내걸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이라도
‘정치적 생명’을 내놨던가. 양대 선거 당시의 이해찬·한명숙 대표도,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의원도 국회의원으로 조용히
활동중이다. 손학규 전 대표만 엉뚱하게 ‘죄인’이라며 풍찬노숙하고 있다. 김 대표는 분열주의와 결별하고,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 ‘더 큰
민주당’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누구를 영입했는가. 내분은 되레 심해지고, 다른 당으로의 유출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 됐다.
길은
알지만 가지 못하는 것이 민주당의 슬픈 현실이다. 원인은 변화를 추동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상반된 성향·목적·세력이 뒤엉켜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패배 뒤의 활로 모색은 실패 요인 청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문책 대상들은 패배를 선거부정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희석시키더니, 다시 주도권 경쟁에 나서고 있다. 물론 이에 맞선 흐름도 있지만 치열함이 부족하다. ‘기울어진 운동장’론(論)과 ‘중도
없이 집권 없다’는 기류다. 6·4 지방선거 전략도 정권 ‘심판·퇴진’ 대신‘견제’정도로 국민 눈높이에 맞추려 한다.
두 세력의
충돌은 갈수록 악화될 것이다. 단순한 견해 차이를 넘어 권력투쟁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일부 486의원들은 별도 블록을 만들어 본격적인 이념·노선
투쟁에 나설 태세다. 당 지도부 사퇴 주장도 서서히 부상할 것이다. 지방선거 공천을 놓고 1차 격돌할 것이고, 2016년 총선에 가까워질수록
내분으로 날을 지새우게 된다. 강한 야당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한쪽에선 중도 보강론에 따른 우(右)클릭, 다른 쪽에선 진지
강화론을 내세워 좌(左)클릭을 요구한다. 전자는 집권, 후자는 당권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당내에서는 후자가 이기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집권할
수 없다는 것이 딜레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선 직후가 절호의 기회였다. 외적 위기를 내적 개혁의
동력으로 삼는 데 실패했다. ‘친노’의 저항보다 처절한 투쟁을 피했던 ‘비노’의 소심과 무력(無力) 탓이
크다.
민주당은 이제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 같다. 게다가 한 발은 이쪽, 다른 발은
저쪽으로 움직이려 한다. 병소(病巢)가 너무 깊어져 진통제보다 수술이 필요한 단계다.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또 ‘지방선거 후보단일화’
대증(對症)요법에 머무른다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당장은 야권 분열 비난을 받더라도 분당(分黨)이라는 ‘뼈와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 장기적 관점에서 유용할지 모른다. 마침 안철수신당이라는 번듯한 ‘빈 집’도 있다.
끝내 독일 통합을 이뤄낸 비스마르크는‘정치는 정확한 과학이 아니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했다.
민주당 의원 20명 이상이 안철수신당으로 가서 당을 ‘접수’하고, 교섭단체를 만드는 역발상은 가능할까. 과거 김대중 대통령은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소속 의원들을 빌려준 적도 있다. 1987년 양김은 신한민주당 내분 수습이 힘들자 집단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만들어 성공했었다. ‘절’을 바꿀 수 없으니 ‘중’이 떠난 것이다. 분열주의 여부는 진정성에
달렸다. 안철수신당에 전전긍긍하기보다 분명하게 나뉘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최종 판단을 국민 뜻에 맡기면 어떨까. 그도저도 안되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그래야 ‘사즉생’시늉이라도 해보려 할 것이다. 야당에 안주할 것인가, 집권을 목표로 죽음으로써 부활할 것인가. 대안 야당을 향해, 민주주의와
정치발전을 위해 멀리 보며 과감하게 행동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