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가 또 다시 ‘떼법’에 밀렸다. 오는 24일로 예정된 의사들의 ‘2차 집단 휴진’을 앞두고 17일 정부가 대한의사협회와의 협상 결과를 내놨으나 그 내용이 백기투항에 가깝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예외없이 직역 이기주의가 버티고 있는 공기업 개혁이나 규제혁파 등 어느것 하나 쉽지 않을 것이다. 박정부가 내건 ‘비(非)정상의 정상화’ 역시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원칙한 집단 민원에 공익(公益)이 밀리는 사례가 더 빈발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정부는 애초 지난 10일의 의사협회 집단 휴진을 ‘명분 없는 집단 행동’으로 규정하고 엄중 처벌 방침을 거듭 천명했다. 박 대통령은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대응하라면서 “비정상적 집단 이익추구나 명분없는 반대, 국민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홍원 국무총리도 “어떤 이유로도 불법 휴진은 용인될 수 없다”는 입장 표명과 함께 “주동자와 참여자를 조사해 행정처분과 형사고발 등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나같이 말은 그럴싸했지만 실제 태도는 180도 달랐다. 건강보험 제도 개편, 원격의료 시범사업 시행, 전공의 근무환경 개선 등 핵심 안건들 모두 의협의 요구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2차 파업 협박에 굴복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보건복지부 장관의 자질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건강보험 수가(酬價) 등을 결정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구성에 관해 복지부와 의협은 공급자와 가입자 대표가 절반씩 나눠맡도록 올해 말까지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의협 등 공급자 비율이 기존 40%에서 50%로 높아지면 수가 인상 등에서 의료계 의견이 적극 반영될 수 있다. 원격의료는 ‘시범사업 후 입법’이라는 의료계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그간의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린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
정부는 의협 회원 투표에서 이번 합의 내용이 부결될 경우 원격의료 입법화 등을 강행한다는 방침이나 이미 한참 물러선 마당에 얼마나 추진 동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만약 (진료 거부 의사들의 주장을) 인정하면, 목소리가 크면 이기고 힘 있는 집단은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비정상을 인정해주는 셈”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정부의 말 뒤집기와 우유부단 탓에 그대로 실현됐으니 딱한 일이다. 정부가 소통과 무원칙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