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민 변호사입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온 국민이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특히 40세 이상의 기성세대들은 우리 잘못으로 우리 아이들이 잘못되었기에 더욱 비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지에 관한 글입니다. 읽어 보시고 공감하신다면 삭발운동에 동참하시고 아울러 이 내용을 널리 공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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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세월호
강 정 민(변호사)
2048년 8월 15일 오후 8시.
“안녕하세요. 김명찬 변호사입니다. 개국 100주년 기념 특집 방송 <대한민국을 바꾼 5대 사건>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4회에 걸쳐 6·25, 4·19, IMF, 대한민국 통일까지 모두 4개의 사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마지막 제1위 사건을 살펴 보는 시간인데요. 과연 어떤 사건이 대망의 1위에 올랐을까요? 화면을 보겠습니다.”
청중들이 사회자의 멘트에 따라 연단 좌우로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바라본다. 대형 스크린에 길게 늘어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줄이 비춰지더니 합동 분향소 장면이 클로즈업 된다. 분향소에는 앳된 얼굴의 영정 사진들이 즐비하다.
“대한민국을 바꾼 사건 제1위는 바로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가 참변을 당했는데요. 벌써 34년전의 일입니다. 영상을 보니 당시 먹먹했던 심정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습니다. 아마 40대 이상 되신 분들은 모두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김명찬 변호사의 멘트가 끝나자 다시 스크린 영상이 클로즈업된다. 스크린에 당시 자료 화면과 나레이션이 흘러 나온다. 방청객들이 숨을 죽이고 스크린에 몰입한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방청객들이 화면에 클로즈업 되며 영상이 멈추고 김명찬 변호사의 멘트가 이어진다.
“지난 시간에 대한민국 통일이 대한민국을 바꾼 2위 사건으로 소개되었습니다. 통일이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뜻밖에 2위를 차지하면서 어느 사건이 1위에 오를지 정말 궁금했었는데요. 되돌아보면 세월호 사건을 전후하여 대한민국은 획기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국민 의식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지요. 당시 제가 40대 중반으로 기성세대에 편입된 상태였습니다. 오늘도 역시 역사 평론가 한서현 교수님 나와 계시는데요. 한 교수님께 세월호 사건을 전후하여 대한민국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세요. 한서현입니다. 세월호 사건이 대한민국을 바꾼 5대 사건의 제1위를 차지했는데요. 주로 크나큰 희생이 따른 사건들이 우리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 무척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호 사건은 대한민국이 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중대한 계기였습니다. 경제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뒤를 돌아보게 되었지요. 세월호 사건은 물질만능주의가 초래한 인재였습니다. 사실 세월호 사건 이전에도 이러한 인재는 많았습니다. 1993년 10월 10일 서해 페리호 사건,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사건,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사건,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사건 등이 모두 이러한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은 양상이 달랐습니다.”
다른 사건들 또한 사람의 생명보다 물질을 중시하는 풍조에서 비롯된 사건들이지만 희생자들이 주로 기성세대였다는 점에서 충격이 덜 했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은 우리 아이들이 주된 희생자였다. 이것은 기성세대 전체를 비통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이다.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잘 키워보려고 아등바등 사는 것인데, 뜻밖에도 우리네 행동이 금쪽같은 자식들을 죽음으로 내 몰고 만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들을 이딴 식으로 보내려고 그렇게 바둥거린 것인가?’
세월호 사건은 잘못을 보고도 침묵한 대한민국 기성세대 전체를 고개 숙이게 했다.
“한 교수님, 인간은 사실 망각의 동물이잖습니까? 예로 드신 다른 사건들도 사건 발생 당시에는 국민들을 깊은 충격에 빠뜨렸지만 결국 잊혀지고 말았고 대한민국은 사고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잖아요? 세월호 사건 이후 뭐가 달랐던 거죠?”
“당시 기성세대는 절박했습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고치지 않으면 대한민국에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당시 지방선거를 불과 한달 정도 앞둔 상황이었는데요. 세월호 참사를 선거용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은 없었습니까?”
“있었지요. 하지만 세월호 사건을 정쟁의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더 컷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되면 자칫 국민 의식 개혁이라는 보다 중차대한 과제가 희석되어버려 모처럼 주어진 소중한 기회가 무산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습니다. 이에 대한민국 오피니언 리더들이 정쟁의 자제를 촉구하고 국민의식개혁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세월호 사건을 전후하여 대한민국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요?”
“세월호 사건을 전후하여 기성세대들은 처절한 반성과 성찰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화면을 보시지요.”
1. 세월호 참사를 초래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도대체 무엇인가?
2.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불가피한 것이었는가?
3. 이 문제를 고칠 수 있는가?
4.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세월호 참사를 초래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물질만능주의였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의식주조차 장담할 수 없는 폐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생존이 삶의 목표가 되었고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당시 국민들을 지배한 가치관은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것이었다. 돈을 버는 수단과 방법은 문제되지 않았고 온갖 불법과 탈법이 조장되고 묵인되었다. 당장 사람을 죽이고 헤치는 것만 아니면 괜찮다는 식이었다. 성수대교도 삼풍백화점도 세월호도 이런 탈법과 불법에 의해 무너지고 침몰한 것이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조차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쩔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덕분에 대한민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어느새 대한민국은 후진국에서 경제개발도상국이 되었고 OECD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절대 빈곤 상태에서 재활용 쓰레기가 넘쳐나는 풍족한 국가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우리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풍족한 국가를 만들어준 당시 기성세대에 머리 숙여 감사해야만 합니다. 이에 수반된 구조적 문제들은 감수해야만 하는 부작용이었습니다.”
3년 동안 연이어 발생한 페리호 사건, 성수대교 사건, 삼풍백화점 사건 등이 바로 그런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국민의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사건이 발생했고 2014년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다.
세월호 사건은 두 달 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 사건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발생한 암담한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바로 다음 세대들이 기성세대들의 탐욕으로 연거푸 희생된 것이다.
대한민국 기성세대들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고칠 수 있는지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깟 의식개혁 하나 못 이뤄내겠느냐는 민족의 자존감이 꿈틀거렸고,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이 기성세대들을 추동했다.
“중산층의 기준이 새롭게 정립되었습니다. 연봉이나 아파트 평수, 자동차같은 물질이 아니라 책임감과 준법의식, 희생과 봉사정신 등 품성과 인격이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확산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하게 벌어 선하게 쓰라>는 모토였습니다. 전자는 생산, 후자는 분배와 관련되는 말로 경제민주화를 쉽게 풀어 쓴 격언이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가치관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돈벌이를 위해 원칙을 무시하는 관행이 사라졌고, 재벌들은 서민들의 밥그릇을 탐내지 않게 되었다. 많이 벌면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실시되었다.
“대한민국은 점점 건강해졌고 통일은 저절로 찾아왔습니다. 통일 당시 8천만에 불과하던 인구는 1억2천만으로 증가했습니다. 내수만으로도 경제가 선순환되는 이상적인 상태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죠.”
한 교수의 이야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김 변호사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질문한다.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지요?”
“네.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변화의 열망과 동기는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그 방법이 문제였습니다. 사고 직후 한동안 잠잠했던 정치권이 6월 4일로 예정된 지방선거 때문에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은 또 다시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정쟁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인지, 국가변혁의 계기가 될 것인지 판가름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스크린에 사고 이후의 정황을 보여주는 영상이 나타난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였고, 2014년 6월 4일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예정된 상황이었다. 사고 발생 열흘 째인 4월 2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였고, 5월 1일부터 5월 6일까지 이어지는 황금연휴가 있었지만 세월호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추모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대통령이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여야를 떠나 초당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지방선거를 통해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마련된 동력이 꺼져서는 안된다고 우려한 사람들은 사건 직후 처참했던 상황과 미숙한 구조조치 등을 문제삼으며 군불을 땠고 해경이 세 번째로 도마 위에 올라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검찰은 승무원과 해운사, 해경에 대한 수사를 광범위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해경과 검찰이 합동수사부를 꾸려 사고원인을 규명하는 데에 주력했지만 단 한명의 생존자도 구조하지 못하면서 구조미숙에 대한 수사로 초점이 옮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습니다.”
“결자해지요?”
“그렇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기성세대였습니다. 당시 4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세월호 사건의 원흉이었습니다. 40세 이상 기성세대 삭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노란 리본으로는 부족하다는 각성이었습니다.”
삭발운동은 각계각층에 확산되었다. 삭발운동이 시작된지 일주일만에 대한민국 40세 이상 남성 수백만 명이 삭발을 했고 이 소식이 전 세계에 대서특필되었다.
스크린에 당시 전 세계 언론의 보도자료가 오버랩되며 영국의 한 방송사 앵커의 뉴스가 흘러나온다.
대한민국에서 실로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변해야 한다는 열망을 가진 40세 이상 남성들이 삭발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인데요. 불과 일주일만에 수백만의 남성들이 삭발을 해 버렸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대한민국의 저력이 이런 것일까요? 2002년 월드컵 때에는 수백만의 붉은 악마가 거리를 가득 메웠었는데, 이번에는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고 개혁을 이뤄내자는 열망의 삭발운동으로 다시 폭발하였습니다. 참 무서운 국민입니다.
“40대 이상 남성들의 결연한 행동에 여성들과 학생들도 앞 다투어 머리를 깍았습니다. 각 지역에 마련된 분향소에 삭발한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모아졌는데 수백상자에 달했습니다. 삭발한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희생자들의 영전에 바친 것입니다. 이 머리카락은 이후 국보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삭발운동이 일어난 건가요?”
“삭발이라는 것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기성세대들에게 삭발은 징계와 각오라는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학창시절에 뭔가 잘못하면 삭발이라는 벌을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뭔가 결연한 의지를 세울때면 삭발을 하곤 했지요. 이런 이미지가 투영되면서 삭발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6월 4일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의 당선자들은 하나같이 까까머리였고 여야 국회의원들과 공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만큼 대한민국도 변해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