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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임동원과 김동신의 행적들은 반역인가?

이명박 정부는 이전 좌파정권의 이적행위를 조사해야

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는 자신의 홈페이지인 시스템클럽(http://www.systemclub.co.kr/)에 4월 4일 올린 글을 통하여, 북한의 공갈에 대한 남한의 경계태세를 주문하면서, 한국의 안보와 국방을 허문 親北反韓적 국정운영의 주역으로 김동신 전 국방장관과 임동원 전 통일원장관(전 국정원장)을 지목했다. 김대중 정권의 대북관계에 핵심적 역할을 한 이들에 대한 국가적 조사와 국민적 평가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과연 이들이 그 당시에 화해무드에 어쩔 수 없이 심한 친북적 행위를 했는지, 아니면 북한의 對南프락치가 되어서 고의적으로 남한을 해코지한 이적행위를 했는지, 반드시 이명박 정부는 한번 깊이 조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정상적인 이상과 양심을 가진 국민들의 판단에 그들의 행적은 대한민국의 장관들의 정상적 행위로 보기 어렵다.

지만원 대표가 아래에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김대중 정부 당시에 남한의 안보와 국방의 핵심요원인 김동신과 임동원의 행적은, 오늘날 일반인의 눈으로 봐서, 북한의 간첩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발언과 행적을 연출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좌파정권이 끝나고 김대중-노무현 좌파정권의 親北反韓的 속성이 국민들에게 서서히 드러나는 시기에, 김동신과 임동원에 대한 지만원 대표의 이러한 비난적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 있는지 국가적 차원에서 조사하고 판명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 같다. 지만원 대표의 주장이 평소에 다소 과격하기는 하지만, 이번 김동신과 임동원에 대한 지 대표의 주장은 반드시 국가적 차원에서 검증해야 할 사안으로 평가된다. 혹시라도 임동원과 김동신이 억울하게 오해당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이적행위 여부에 대한 조사는 철저히 진행되어야 한다.

국방부장관이 앞장서서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으로 호칭하라고 했다거나, 국정원장이 북한에 유리한 정보활동을 했다면, 그것은 이적행위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안보와 국방이 이렇게 해이해진 과정에 국방부, 국정원, 통일부, 여성부, 복지부, 환경부 등에서 어떻게 조직적으로 반역행위가 자행되었는지 이명박 정부가 조사하고 처벌하는 것은 순리일 것이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지난 좌파정권의 이적반역행위자들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국민들의 눈에 분명히 이적행위를 한 자들을 그냥 방치한다면, 이명박 정부도 지난 좌파정권의 죄악을 덮어쓰는 결과에 봉착할 것이다. 남한 내에서 親北反韓的 이적활동을 해온 정신분열적 범죄자들을 빨리 조사하여 처벌하지 않으면, 이명박 대통령은 내우외환의 협공을 당하여 국정운영에 곤란을 겪을 것이다.

통일이 아무리 중대한 목표이고 명분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근거로 하지 않은 무조건적 통일강행는 북한과 같이 남한도 공멸하자는 반민족적 주장이다. 자유와 민주를 한민족에게 누리도록 만들기 위한 통일의 명분을 빌미로 한민족을 착취한 공산세력에 이적행위를 한 반역자는 반드시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임동원과 김동신에 대한 이적행위 여부를 조사하는 일은 지금도 "국정바로세우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아래에 지만원 대표의 김동신과 임동원 관련 논설을 전제한다. 국민들도 김동신 전 국방장관과 임동원 전 통일원장관(국정원장)이 남한의 국민들을 위해서 일했는지 혹은 북한 김정일을 위해서 일했는지 판단해보길 바란다. [조영환 편집인: http://allinkorea.net]



다시 보는 김동신의 정체: 이 글은 2002년6월에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http://www.systemclub.co.kr/)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입니다. 북한이 남한을 위협하는 이 시점에 우리들에게 참고가 되는 글이라 생각되어 다시 올립니다.

"김동신 국방장관은 지난 8월 11일 국방부 국.실장 회의를 주재하면서, 앞으로 군에서 북 한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를 호칭하거나 표기할 경우 반드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통일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바로 김동신 장관이 "북괴"라는 용어를 군으로부터 완전히 폐기처 분한 주역인 것입니다"(한겨레 01.8.13). 이런 장관 밑에서 군의 그 누가 감히 "북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군의 총수가 김정일을 대통령 이상의 극진한 존칭으로 부르라 고 명령하는데 그 어느 군인이 김정일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5. 2001.6. 2일 11:43분에 14,000톤급의 초 맘모스급 청진2호가 울산 앞 바다에서 발견됐고 이어서 7,000톤급과 4,000톤급이 제주해협을 유린하고 있을때 김동신 장관은 4시30분부터 골 프를 쳤습니다(중앙일보 5면 2001.6.23). 해군에는 이미 무력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현장지휘관에게는 "UN사 자동교전규칙이 주어져 있습니다. 적이 나타나면 위에 보고하지 않고서도 선조치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군 현지 지휘관이 자 동교전규칙을 적용하지 않고 31시간동안 적함에 농락 당했습니다. 대응을 하지 말고 정중히 모시라는 명령이 없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 작전은 군이 독자적으로 수행한 게 아니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수행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2001.7.12일 군 2성 장군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이는 곧 군에게 50년간 부여해왔던 자동교전규칙(SOP; Standing Operation Procedure)을 박탈당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전쟁을 일일이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해서 한다면 그 전쟁은 초장에 집니다. 전쟁은 시간과 의 전쟁입니다. 작전 예규라는 것은 그런 개념에 따라 위에 보고하지도 말고 눈감고 따르라 는 자동교전 절차입니다. 이런 현장 작전권을 대통령이 빼앗아 갔다는 사실은 매우 중시해 야 할 위험한 "대통령의 월권"입니다. 다음은 2001.6.14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필자의 글입니다.

"북한 상선들과의 교신록 전문이 밝혀졌다. 두드러진 것은 6월 2일 오후 12시45분부터 6 월 3일 오전 9시30분까지 무려 21시간에 걸쳐 이뤄진 청진2호와 우리 해군 수원함과의 교신 내용이다. 이 교신 내용엔 현재 우리 군이 처해있는 처지와 심리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담함 그 자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해군함정은 상부에 보고 하기 전에 무조건 경고·정선·검색한 후 경우에 따라 나포해야 한다. 이는 연합사 자동 교 전규칙이자, 우리 해군의 권한이다. 그러나 교신록에서 나타난 한국 해군 장교들의 말은 너무나 위축돼 있었다. 북한 함정에 바짝 접근해야 할 해군함이 오히려 5회에 걸쳐 북 선박에 게 “우리 함정과 너무 가까이 붙어 항해하고 있으니 2km이상 떨어져 항해해 주십시오. 위험합니다”라는 부탁을 했다. “홍도해협은 우리 영해이니 제주남방으로 돌아가시오”를 무려 23회에 걸쳐 간구했다. 이에 대해 북 선박은 “김정일 장군이 지켜보고 계시다”, “6·15때 결정됐고, 공화국이 그어준 항로라서 변경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잘랐다. 물론 우리 해군도 상부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겠지만, 북 선박과 교신하는 어투에 주눅이 들어있다. “…하시길 권고합니다” “안전에 문제가 있습니다” “협조바랍니다” “…지켜주시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됩니다”, “귀선의 입장은 알겠습니다”는 등. 마치 주객이 전도된 느낌 이다. 심지어 북 선박이 우리 해군·해경함에 “도발하지 말라”고 나오는데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해경함이 북 대홍단호에 대해 “검색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것은 희극에 가깝다. “남측의 검색 의사를 (북측) 본사에 연락해 허락을 받아달라”고 두 번이나 사정하다, 거절당하자 “(북 선박) 선장님 권한으로 방문을 허락해달라”고 통사정하고 있다. NLL, 흑산도해협, 제주해협을 잇는 그 넓은 영해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 북한선박은 큰소리 떵떵치고, 우리 해군 함정들은 농락당하면서 저들을 안내했다. 이번에 우리 군이 보여준 사정하고 매달리는 모습은 1999년 6월 연평사태와는 너무도 딴판이어서 놀라울 정도다. 이번 교신록은 군이 본분을 잊고 눈치집단화 했다는 한 증거가 될 것 같다".

국민의 자존심을 꺾고 군을 적군 앞에 무릎 꿇게 한 용서할 수 없는 좌익행위입니다.

6. 영해를 떼어내 북한에 주자고 했습니다.

자기 부하들을 적군 앞에 무릎꿇게 한 것도 용서할 수 없는 좌익행위이지만 영해가 너무 넓어 주체할 수 없으니 일부를 떼어 북한에 내어주자는 연구를 시키다가 언론의 질타를 받 고 물러섰습니다. 이런 좌익이 우리의 국방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겨놓고도 국민은 태연합니다.

"국방부가 북방한계선(NLL)이 서해 42.5마일, 동해 218마일이나 돼서 NLL사수가 어렵기 때문에 NLL 수역을 "절대사수구역", "경비구역", "공해권"으로 3분하여 공해권 해역에 들어오는 상선에 대해서는 "침범"이 아닌 "통과"로 인정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하다"(조선일보 사설 2001.6.17).

7. 주적개념과 국방백서 발간을 포기했습니다.

주적개념을 국방백서에 넣을 수 없어서 해마다 발간해 오던 국방백서 발간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발표했습니다(2002.5.24 일간지). 북한이 주적인지 아닌지는 휴전선이 말해줍니다. 국방장관이 김정일이 무서워 북한을 주적이라고 백서에 조차 감히 표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북한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를 호칭하거나 표기할 경우 반드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 장"으로 통일하도록 지시할 만큼 김정일에 극진한 존칭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김동신 장관이 어찌 언감생심 북한을 주적이라고 표기를 하겠습니까?

8. "2000.8.22일 김동신 장관이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으로 갈 때에 임진각에까지 가서 꽃다발을 건넸습니다"(민원 회신에서도 본인 인정)

9. 국방일보가 2001.3.22일자 9면에 북한의 피바다를 크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북한의 피바다를 극찬한 국방일보에 대해 기무사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기초자료 조사에 착수하다가 군수뇌 분위기에 눌려 수사를 그만 두었습니다(주간조선 2001. 4.25). 김동신 장관의 분위기에 눌려 간첩 잡는 일이 중단된 것입니다. 앞서에서도 김동신은 군에는 에나 지금이나 간첩이 없다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여론이 빗발치자 국방홍보원장이 교체됐다. 김동신 장관은 국방위에서 "문제의 기사는 예술작품을 통해 김일성부자의 우상화에 치중하고 있는 북한의 실상을 알리자는 취지에서 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주간조선 2001. 4.25)

10. 조선일보는 "여순반란 사건에서 좌익 반란군을 정당화 및 미화시킨 영화 "애기섬" 제작에 군이 트럭, 헬기, 소총, 군복 등을 지원했다해서, 김동신 장관을 책임지고 물러나라" 했습니다(2조선일보 001.9.18)

11. "최근 김남국 예비역 대령이 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북풍사건"을 조작하는 데 김동신 전 총장이 관여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동신 전총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강력히 부인했습니다"(조선일보 2000.6. 16).

1996년 4월이면 김동신은 중장으로 비정규전과 평시작전을 총괄하는 합참작전 본부장이었습니다. 바로 몇 달 후인 9월에 김동신은 강릉 작전에서 무조건 포위망을 풀라해서 간첩 3 을 풀어준 바 있습니다. 김남국 대령의 주장은 실로 엄청난 명예훼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김남국 대령에겐 소송을 하지 못하고 앉아서 당했습니다.

12. "한총련이 긴급수배전단 일제히 살포했습니다. 수배자 명단은 김영삼, 이회창, 조성태, 김용갑이었습니다. 조성태 전장관은 "주적개념을 유지하는 주한미군의 졸병"으로 표현됐습니다"(월간조선 2001. 2.21). 주적개념이 확실한 조성태 장관이 뚜렷한 이유 없이 갈렸습니다. 그리고 임기 말 막바지에 김동신이 들어와 친북 작전을 노골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13. "주적개념을 확실히 밝힌 조성태 장관은 재임기간 내내 북으로부터 반통일 세력이라는 흑색선전을 당했지만, 김동신 장관에 대해서는 흑색선전이 별로 없습니다"(월간조선 8월호 심층취재 특종)

14. 지난 6월1일 철원에서 새로운 땅굴을 발굴하여 제보했지만 그는 조사해보지도 않고 땅굴이 아니라고 일축했습니다(강원일보/강원도민일보. 2001. 6. 1)

한 두 개의 사건은 많은 것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많이 모여야 추세가 형성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모두 연결해 보면 김동신 국방장관은 좌익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방부 정책보좌관 차영구 중장이 2002.5.7일 자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에 난 광고문 "좌익정권 몰아내야 국가가 산다"의 제8항(국방장관의 명령: 북한을 도와라?)만을 가지고도 "국방장관을 빨갱이로 몰 수 있느냐"며 제게 소송을 걸겠다 했습니다. 그때에는 지면 때문에 6개항만 아주 간단히 나열했었습니다. 위의 내용은 지난 광고문안보다 더 기가 막힌 내용들이 추가되었습니다. 간단하게 표현된 6개항만을 가지고도 국방부 고위간부가 "빨갱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국방장관 김동신을 "좌익"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음을 공포합니다. 2002. 6. 24



다시 보는 임동원의 정체: 아래 글은 2002년7월에 지만원의 시스템클럽(http://www.systemclub.co.kr/) 홈페이지에 올렸던 임동원 전 통일원장관(국정원장)에 관한 글입니다. 임동원에 의해서 남한의 안보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임동원은 북한에 많은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인민군 병사로 남침 대열에 참전하였다가 낙동강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육사출신들의 중론입니다. 그 동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자세치 않지만 그는 최덕신 장군의 신원보증으로 육사 13기로 입교하였다는 것이 육사출신들의 중론입니다. 최덕신은 육사교장을 거쳐 외무장관까지 한 후, 수사망이 좁혀지자 1975년 북으로 넘어간 간첩입니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많은 미스테리가 있습니다만 이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현정부에 들어 김대중 옆을 단 하루도 떠나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그 동안 대북정책을 주도적으로 요리해오면서 남긴 족적이 하나같이 빨갛다는 사실입니다.

(임동원의 보직)

98.2.25-99.5.23 외교안보수석
99.5.24 - 99.12.23 제1차 통일원 장관
99.12.24 - 2001.3 국정원장
2001.3.30 - 2001.9.3 제2차 통일원 장관
2001. 9.11-현재 외교안보통일특보


(김정일 감싸기)

임동원은 북한이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북한을 감쌌습니다. 1998. 7.12일 북괴 잠수정이 속초 앞 바다 꽁치망에 걸렸을 때, 임동원은 두 가지 두드러진 일을 했습니다. 잠수정 안에 서 남한산 빈 페트병이 발견됐습니다. 누가 봐도 남한에 내렸다가 다시 탔다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기자들은 공작원들이 이미 공작임무를 끝마치고 돌아가다가 걸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임동원은 그 페트병에 대해 상상을 초월하는 설명을 했습니다. 북한이 그 페트병을 "연변 등에서 구해 가지고 왔을 것"이라 했습니다. 북한에서 자금을 받는 북한 대변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꽁치망에 걸릴 정도의 작은 잠수정 속에 든 공작원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였습니다. 공작원을 생포하면 공작내용이 모두 드러납니다. 그의 지시에 따라 해군 함정은 그 잠수정을 밧줄에 매달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습니다. 그래도 모자라 "줄이 끊어졌다"며 수중에 빠추어 죽게 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정보가 모두 수장된 것입니다.

1999. 3. 11일 민화협(좌익) 초청 강연에서 "미국은 먼저 경제지원, 관계개선, 북한의 안전보장 등으로 대국의 아량을 보여야 한다. 북한이 먼저 해주기를 요구하면 해결이 어렵다 "(1999.3.12 한겨레)고 말했습니다.

1999.6.8-6.15 사이에 발생한 서해해전 때였습니다. 임동원은 북한이 달러가 부족해 꽃게로 수입을 올리려는 가련한 행동이니 잘사는 형님이 봐주자는 요지로 여론을 유도했습니다. "영해 침범" 대신 "월선"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했습니다. 서해안 사태는 그 동안 해마다 25회 남짓 발생했으나 역대 정부는 한번도 이것을 꽃게잡이로 봐주지 않고 명백한 주권수역 침범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렇게 눈에 쌍불을 켜고 북한을 변호하는 사람은 임동원이 처음입니다.

연평해전 마지막 날에 북한 경비정을 들이받는 것은 순전히 현장 지휘관의 배짱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해군은 북괴 해군함정 10척중 어뢰정 1척을 격침하고 중·소형 경비정 5척을 대파함으로써 북방한계선을 확고히 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휘관은 곧 예편 당했습니다.

1999. 1.4일, 금강산 관광객 한모(38·여)씨가 관광 도중 김정일 체제에 자극적인 발언을 했다며 환경감시원에 적발돼 장전항 북측 사무소로 끌려가 10일간 억류됐습니다(1999.1.6 조선일보). 이어서 1999. 6.20-6.28일간, 북한이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씨를 억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동원은 북한을 비난하지 않고 한국관광객들을 비난했습니다. "북한이 싫어하는 짓거리들"을 했다는 것입니다.

2000년11월, 국정원장으로서 그는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북한이 110만 대군을 가진 것은 남침용이 아니다. 내보내려 해도 나가면 일자리가 없어 불한당이 된다. 이는 체제유지에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110만을 묶어두고 잇는 것이다", "옛날에 지뢰와 방벽을 설치한 것은 장군들의 머리가 나빠서 엉터리 같은 짓을 한 것이다". "김정일은 합리적인 것이면 즉시 시행하는 명 지휘관이다".

2002.6.29일 서해 도발에 대해서도 임동원은 북한 당국보다 더 열렬하게 나서서 북한을 옹호했습니다. 그는 사건 발생 7시간 후에야 안보회의를 열었습니다. 국군 장병들이 5명씩이나 죽었는데 김대중은 빨간 넥타이들 맸습니다. 임동원은 안보회의에서 "이번 사태는 우발적인 것"이라고 예단 했습니다. "김정일은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지시를 내릴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대북지원과 금강산 사업은 계속돼야 한다"라는 쪽으로 분위기를 잡았습니다.

이에 대해 황장엽 비서는“대포 한 발이 아니라 총 한 방을 쏘는 데도 김정일의 재가가 필요한 북한 군부 내에서 김정일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포 사격을 명령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북한 군부내 강경 세력의 돌출행동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이는 북한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조선일보 2002. 7.10)라며 임동원의 수작을 일축했습니다.

2002. 6.17일 18시30분, 강남 쎈터 빌딩에서 육사교수모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임동원 이 말했습니다.

1) 공산주의와의 협상은 유익한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것도 협상을 통해서다. 따라서 남북한문제도 협상에 의존해야 한다. 상호신뢰에 의해 남북협상이 잘 되어가고 있는데 미국이 방해를 놓고 있다.

2) 김정일은 평시의 언행이나 나와의 5시간 단독 면담을 통해 느낀 바로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데 일부 한국사람이 이를 부정하고 특히 미국이 전쟁협박을 하기때문에 오히려 김위원장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미국이야말로 남북협상에 방해가 되고 있다. 내가 부시를 설득하여 요사이는 미국이 조금은 북미 협상에 응하려 한다.

3) 대북지원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무조건적이어야 한다. 이를 반대하는 자들은 비인도적인 자들이다.

4)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김 위원장은 미국이 북침할까 보아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불식시켜 주어야 한다. 우리 군은 북한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을 갖고 있으니 염려할 것 없다.

5) 연방제란 국방과 외교권만을 통합해서 갖고 체제는 각기 유지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 없다.

(김정일에 충성하기)

임동원은 국정원장 시절에 황장엽을 박해했습니다. "정치인과 언론인들을 만나지 말 것, 외부 강연에 나가지 말 것, 책을 출판하지 말 것, 탈북자동지회 소식지인 "민족통일"을 내보지 말 것, 민간 차원의 대북 민주화 사업에 참가하지 말 것" 등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2000. 11.16일, 황장엽과 김덕홍은 임동원 국정원장이 부당하게 자신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다고 폭로하는 문서를 언론에 돌렸습니다.

이에 발끈한 임동원이 황장엽, 김덕홍씨를 연금상태로 가뒀습니다. 기고행위, 외부 접촉행위, 강연 등 모든 언론의 자유를 구속했습니다. 드디어 임동원은 이들을 국정원 안전가옥에서 나가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나가라는 것은 곧 이한영 처럼 피살되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신중한 황씨는 햇볕정책과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김정일 수령지배 체제를 공격했습니다. 임동원은 김정일을 공격한 황비서를 적대시했습니다. 황비서의 유일한 언론 수단인 "민족통일"지 발간까지 중단시켜 김정일에 대한 공격을 차단시켰습니다. 이에 대해 황씨가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서자 임동원은 모 주간지에다가 "황장엽씨와 어떤 여자 사이에 딸이 있다"는 정보까지 흘렸습니다(2002.3.6 월간조선). 공산당이 잘 쓰는 모략전이요 흑색전이었습니다.

황씨는 김대중을 공개적으로는 비판하지 않았으나 비공개 분석 문서에서는 "김정일과 깊이 결탁한 관계"로 묘사했습니다. 황씨는 오직 임동원한테서만 이런 핍박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황씨는 국정원을 "적"이라고 표현하며 죽고싶다는 말도 했습니다. 망명을 기획한 적도 있습니다.

2001.7월, 황장엽씨에 대한 방미 초청장을 가지고 온 척 다운스씨는 황씨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우방인 한국 정부가 황씨 면담조차 허용하지 않은 것은 현 정부의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것"이란 말을 남겼습니다.

2000년 12월, 남한 적십자 총재 장축식이 월간조선 10월호에 할 말을 했습니다. 북한 적십자 총재 장재언이 이를 억지로 트집잡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임동원의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잘못이 없는 장충식을 연금-일본추방- 사임케 했습니다.

북측이 문제삼은 장충식 총재의 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이 왜 문제가 됩니까?

▲『평양은 10년 동안 달라진 것이 없더군요. 한 마디로 발전이 아니라 정 체된 기간이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숙소인 고려호텔 앞에 가게나 음식점이 있어 저녁때도 불이 켜져 있곤 했는데 지금은 전에 비해 활기가 없더군요』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 양쪽의 이질성과 체제에 대한 우열을 비교할 수 있는 거울입니다. 때문에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 볼 때 이산가족 상봉은 그들의 실생활이 외부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한 사업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체제유지가 급선무인 북한 입장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보다는 점진적 단계를 밟는 쪽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이런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생각대로 인원확대, 상호 고향방문 등을 요구하면 북측에 서 여러 가지 이유를 달아 문을 닫아 걸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유심히 본 분들은 아셨겠지만 북한 이산가족 상봉단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전국 각지에 흩어진 사람들에게 옷감을 줘서 급히 해 입힌 겁니다. 남한에서 올라간 가족들은 양복에 티셔츠, 개량 한 복 등 매일같이 옷을 갈아입었습니다만, 북측 가족들은 3박4일간 같은 양복 만 계속 입고있더군요.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이 얼굴입니다. 북한의 가족과 남한에서 올라온 부모형제들이 만났을 때, 고생을 많이 한 북한의 얼굴과 남한의 여유로운 얼굴이 대조되니 북한 관계자들이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습니까』

▲『저는 순안비행장에 우리 비행기 착륙을 허가할 때부터 北은 변화를 모 색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양으로 출발하는 과정에서 북한 고려민항 비행기에 짐 싣는 장치가 없어 출발이 한 시간이나 지연됐어요. 공항에 환영 나온 평양 시민, 그 비행기를 타고 남북을 오간 이산가족들은 그들의 초라한 고려민항 비행기와 태극마크, 색동마크가 새겨진 우리 비행기의 웅장함을 비교할 수 있었을 겁니다. 어떤 형태로든 남북교류가 진행되면 밑지는 것은 북한이지 남한이 아닙니다』(2000.11.21 월간조선)

북측 적십자사 총재 장재언이 이렇게 당연한 말을 문제 삼았습니다. 임동원은 즉시 장충식씨를 연금시켰습니다. 이어서 2000.11.30일 일본으로 출국시켰습니다. 그리고 12.21일 해임시켰습니다(2000,12.25 중앙일보).

상전의 자식 장재언은 안하무인격으로 기세가 등등했고, 하인의 자식 장충식은 아무런 잘못 없이 단지 상전의 자식이 화를 낸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수모를 다 받은 것입니다. 장충식은 꼬리를 처박고 도망가는 투견같이 보였습니다. 그런 장충식의 뒷통수에 대고 북적 장재언은 "몰골이 가련하다"는 등 갖은 굴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습니다. 유혈이 낭자하게 물어뜯고도 분을 삭이지 못하겠다며 검푸른 입으로 사납게 짖어대는 도사견 같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만든 임동원이 과연 남한의 스파이 대장입니까 아니면 김정일에 충성하는 스파이 대
장입니까?

(무조건 퍼주기)

98.6.16일, 1,004마리의 소 떼를 북한에 보냈습니다.

98.11.18일, 금강산관광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선전하며 금강산 관광 사업을 만들어 현대를 통해 2조원 규모의 현금 달러를 보내 김정일로 하여금 군자금으로 사용케 했습니다. 관광객이 있던 없던 매년 연간 1억 5천만 달러를 군자금으로 바치도록 계약시켰습니다. 2004년까지 9억4,200만 달러를 "존재하지도 않는 독점사업권"이라는 명목으로 무조건 주기로 하는 계약서를 쓰게 했습니다. 현대가 망하자 삼성 등 다른 대기업에도 대북 투자를 강요했습니다.

그는 "대북정책은 선공후득이어야 한다"(1999.3.12. 조선일보)고 말했습니다. 먼저 무조건 퍼주고 나중에 차차 받아야 한다는 희한한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의해 북한에 간 돈이 5조입니다. 갈 돈이 아직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2000년 10월4일. 정부는 판문점에서 남북 양측의 지정 은행간에 대북 식량차관 계약을 체결하고 즉시 북에 60만톤의 식량을 보낼 계획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절차는 모두 생략됐습니다. 그건 계획이 아니라 북한의 긴급명령이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5일에 중국산 옥수수 2만t이 다롄항에서 선적돼 남포항에 도착됐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이해나 여론이 조성될 여유조차 없이 전관석화처럼 도둑질하듯 처리했습니다.

국정원이 이용호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정현준 게이트, 윤태식 게이트 모두를 주도해온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2000. 10, ‘정현준 게이트’의 핵심 관계자로 지목됐던 장래찬 금감원 국장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폭력조직에 의한 타살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국회 행자위 이원창(한나라당) 의원이 26일 주장했습니다((2001.09.26 조선일보).

이원창의원의 말입니다. "장래찬 국장이 지난해 10월 31일 도피생활 8일만에 변사체로 발견된 후 자.타살 논란이 일자 경찰과 검찰은 부검도 해보지 않고 자살판정을 내려 사건을 조기 종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증권가에서는 장 국장의 죽음에 폭력조직이 연루돼 있고 폭력조직의 배후에는 검찰조직의 실세가 버티고 있다는 풍문이 파다하다. 당시 동방금고 사건을 정현준씨와 이경자씨 사이의 사기극으로 결론내리기 위해 정.관계 등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장국장을 살해했고 장 국장이 살해되기까지 경찰과 검찰은 장국장 살해범을 비호했
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정현준 게이트에는 1,000여 억원의 행방을 쫒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정현준 게이트를 국정원에서 주도한 것이 확실시되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국정원이 몸통을 가리기 위해 장래찬을 타살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듭니다. 국정원은 돈을 버는 이런 더러운 게이트를 직접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임동원 시대에 자행됐습니다(2000.12.02 중앙일보). 이렇게 만든 비자금으로 말 꽤나 하는 우익인사들을 매수했고, 남한 사회의 적화를 위해 사용했을 것입니다. 김홍업에게도 때때로 2,500만원씩의 격려금을 상납했습니다(2002.7.11 조선, 중앙). 공적자금과 게이트로 번 자금은 이런 식으로 사용됐을 것입니다.

임동원은 현대가 요구하는 장전항 해상 호텔 카지노와 면세점을 허용하려다 여론의 벽에 부딪혀 보류했습니다(조선일보 2001.4.2).

임동원은 2002.4.3일부터 4일간 북한에가서 김정일과 5시간 마라톤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내려와 다음과 같이 북한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1) 5월 중순부터 비무장지대(DMZ) 내 경의선 공사를 시작해 10월 이전에 연결을 완료하고, 5월 중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임시도로 연결 공사에 착수한다 합니다. 군사분계선-개성 12㎞ 구간 공사에 필요한 레일, 침목 등 기자재를 북측에 지원하겠다 합니다(2002,4.23 한국일보).

2) 군사분계선에서 강릉을 잇는 동해북부선 남쪽 구간(127km) 공사를 올해 안에 시작해 2009 년께 완공한다 합니다(한겨레, 문화일보 2002. 4. 22).

3) 4월말에 비료 20만 톤을 보낸다 합니다(한겨레 2002.04.12)

4) 6월부터 3개월에 걸쳐 북에 쌀 50만톤을 수송한다 합니다(세계일보 2002.4.24).

(북한과의 내통행위)

임동원은 국회에서의 아무런 합의 없이 "현정부 통일정책은 "남북연합"이라고 밝혔습니다 (1999.03.11 조선일보). 그의 이론은 적화통일을 위한 위장 이론입니다. 이론의 핵은 다음과 같습니다. "법적인 통일은 일단 집어치우고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이룩할 것이다. 사실상의 통일이란 무엇인가? 김정일을 적으로 보지 말고 그를 의심하지도 말며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면서 그의 환심을 사야 화해상태를 지속할 수 있다. 화해-교류가 통일의 키워드이다. 받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우선 퍼주어야 한다. 김정일에 대한 국민의 저항감을 없애야만 "고려민주연합국"이라는 연합국가가 탄생될 수 있다. 김정일에 대한 국민적 저항감을 없애고 그를 훌륭한 지도자라고 생각해야 어느 날 갑자기 남북연합이 선포되더라도 국민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임동원은 민화협, 한총련, 범민련 등 좌익 단체와 한 통속이며 그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내통을 했습니다. 한총련과 범민련은 법원에서 판결 난 좌익들입니다. 민화협은 2001. "평양 8·15 민족통일대축전 행사"를 주도한 단체로 만경대(김일성 생가) 참관 시 방명록에 “만 경대정신 이어 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 “노동자계급 앞장서 조국의 자주적 통일 앞당기자” 등의 글을 남겨 사상적으로 의심받는 집단입니다. 과거 시국사범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함운경(85년 미문화사건), 김성만-양동화(85년 구미유학생사건), 황인욱(92년 중부지역당
사건) 씨 등도 들어있습니다. 민화협 위원장인김영대씨는 사회민주당 위원장이기도 하다.

1999.4.6일, 임동원의 "주한미군 지위변경’ 발언을 했습니다. 그는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상임위까지 열어 "주한미군 지위변경 문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는 곧 실수라고 정정됐지만 그 여파는 상당했습니다. 북한은 99년 4월 20일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4자회담에서는 미군 철수 문제가 기본 의제로 돼야 하며 이것을 떠난 4자회담은 필요 없다"고 논평했고, 그후의 4자 회담에서도 "쭈빗쭈빗해 하던 종전의 태도"와는 달리 기세 좋게 주한미군 철수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들의 실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 의도된 실수"였습니다(1999. 4.10 영남일보). 이 두 사람은 잔머리 굴리며 거짓말 잘 하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임동원은 희한한 말로 북한을 옹호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식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대내용일 뿐이다. 본심은 주한미군의 주둔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이 말을 거짓으로 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자신이 김정일과 내통하는 사이라는 것을 노출시킨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과 귓속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주었습니다2001.12.02 월간조선).

9199.5.25-28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이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임동원은 페리조정관을 통해 그 의 햇볕정책을 미국정책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력하게 설득했습니다. 결국 페리조정관의 대북정책은 울부라이트 미국무장관의 방북과 클린턴의 임기직전 방북 의지까지 이끌어냈습니다. 이 때 일본에서는 김대중이 돈을 필요로 하는 클린턴에게 거금을 주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1999.12월 임동원은 연하장에 "국정원은 통일의 횃불이 될 것을 굳게 다짐한다"(99.12.27 중앙일보)는 글을 썼습니다. 국정원이 통일부가 하는 일을 빼앗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비밀접선을 공식행사로 전환시켰습니다. 2000. 3. 9일 베를린 선언을 기획했습니다. "도로, 항만 철도, 전력, 통신 등 북한의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등 더 많은 것을 북한에 주기 위해서는 민간차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많은 것을 주려면 정부가 나서서 드러내놓고 주어야만 한다. 그러려면 김대중을 만나주어야 한다"는 제스처였습니다,. 이는 김정일과 짜고 치는 게임이었습니다. 2000.6.13일부터 3일간의 방문은 김정일과의 접선을 위한 공식행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차안에서 김대중과 김정일은 단둘이 90분
간을 보냈습니다. 나머지 행사들은 들러리였습니다.

이를 모의하기 위해 2000,4.8일, 임동원은 베이징에 가서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뉴스는 4월 총선 3일 전에 나왔습니다. 표를 의식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물을 김대중에 주는 대가로 김정일은 30억 달러를 받았다는 설이 언론가에 파다했습니다.

원래 방문은 6.12일로 결정했었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하루가 지연됐습니다. 김정일에게 입금시켜 줄 돈이 계좌착오로 제 날짜에 입금되지 않아서라 합니다.

2000. 8.5-13일간, 46개 언론사 사장단을 방북시켜 김정일 팬으로 만들고 대부분의 언론을 친북 세력화 했습니다.

2,000. 9. 2일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아무런 대가 없이 영웅으로 만들어 북송했습니다.

2000.9.11-14간 일국의 스파이 기관장이 북한 김용순 비서를 밀착 수행하면서 밀담을 나누었습니다. 김용순으로부터 이끌어냈다는 장관급 회담, 이산가족 상봉은 그 후 실현되지 못했습니다(2000.10.28 동아일보). 결국 3박4일간의 밀착 동행과 신라호텔에서 이루어진 5시간 동안의 비밀회담은 통일전략에 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는 다음 사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이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다음날인 2001. 02. 11일 임동원이 몰래 그리고 아주 급하게 미국에 날아갔습니다(2001.2.14 세계일보). 2001.3월 김정일 답방을 잡아놓고 미국에 일방적으로 통고하러 갔던 것입니다. 미국이 이에 대로하였습니다. 그래서 임동원은 국정원장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결국 9.12일 신라호텔에서 김용순과 5시간 동안 만났던 것은 바로 김정일의 서울답방으로 적화통일을 이룩해 보려는 수작이었습니다. 이는 2000.9.14일자 대한매일에 의해 확인됐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내년 봄 서울 답방이 추진된다. 김용순과 임동원이 9.12일 신라호텔에서 만찬회동을 갖고 이같이 합의했다".

2000. 10. 9일-14일 사이에 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임동원은 여기에 좌익 인사들을 대거 보냈으며 한완상은 축사까지 했습니다.

(영토까지 내주려 했다)

2001. 6.2-6.7, 북한의 대형 선박들이 제주영해 및 NLL을 유린했을 때, 임동원은 3가지 특혜를 북한에 주려했습니다. (1) 이번 통과에 대해서는 6.15정신으로 수용한다. (2) 제주해협 통항권을 북한에게도 개방한다 (3) 앞으로 북한이 사전 통보만 해주면 NLL을 언제든 통과할 수 있게 한다. 이와는 달리 UNC사령관은 북한에게 "귀측은 한국영토를 침범했다. 강력히 경고한다"는 메시지를 6.2일 밤 2시30분에 보냈습니다. 임동원은 영해를 북한에 내주자 했고, 8군사령관은 북한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 우리 영토를 지켜주었습니다.

(이적 단체와 한 통속)

2001. 8. 15-21간 이적단체인 범민련을 창구로 사용하여 평양과 거래했습니다. 평양에서 열린 적화통일 행사에 337명을 날치기식으로 보냈습니다. 안보회의(NSC)가 북한의 악용을 우려해 방북 불허방침을 정했고, 통일부도 그 방침을 따르기로 했는데 임동원 혼자서 날치기로 보낸 것입니다. 이 중 100여명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습니다.

이들은 연방제 통일 운동에 눈물을 흘리고 찬양했습니다. 만경대(김일성 생가) 참관 시 방명록에 “만경대정신 이어 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노동자계급 앞장서 조국의 자주적 통일 앞당기자” 등의 글을 남겼습니다. 백두산 밀영’을 방문했을 때, 한 여성은 방명록에 “백두산 정기를 타고나신 장군님이시라 훌륭한 장군님이 되신 것 같습니다”라는 글을 남겼으며, 일부 인사들은 김일성 주석을 찬양하는 내용의 ‘한별을 우러러’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2001.9.3일 국회해임건의안에 의해 쫓겨났지만 1주일만인 9.11일에 장관급 특보에 기용됐습니다. 김정일의 지시일 것입니다. 임동원은 북한에 이산가족이 많습니다. 이산가족을 인질로 김정일이 어떤 협박을 할 것인지 안 봐도 누구나 압니다.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나라를 충분히 내줄 수 있습니다.

(안보 허물기)

임동원은 2000년 12월말까지 휴전선 지뢰를 무조건 제거하라 했습니다. 열흘 묶던 나그네 하루가 급한 식으로 시간을 닥달했습니다. 군은 105억원 어치의 지뢰제거 장비를 공수해왔지만 별로 사용되지 못하고 고철로 방치했습니다. 그리고 지뢰는 병사들의 손으로 제거됐습니다.

임동원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의심하지 말자. 의심하면 될 일도 안 된다"(2002. 4. 8일 기자회견)고 말했습니다. 임동원은 적을 의심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적을 의심할 위치에 있으면서 의심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사람은 수상한 사람입니다.

그는 김정일과 5시간 면담한 후 돌아와 국방부에 압력을 넣어 주적개념을 땅에 묻게 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2002. 5. 24, 국방백서 발간 무기한 연기했습니다(2002.5.25 조선, 중앙, 문화). 분명한 주적을 앞에 두고 있으면서 그 주적의 반응이 두려워 주적이라고 표기 조차 못하게 하는 그가 과연 이 나라 사람입니까?

2002.7.1 [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http://www.systemclub.co.kr/]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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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